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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우 교수 칼럼·설교

    “오호라 용사들이 쓰러졌도다”: 길보아 산의 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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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Date 24-08-30 00:52

    본문

    “오호라 용사들이 쓰러졌도다”: 길보아 산의 조가 


          나는 사울 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며 조가(弔歌, qina)를 지었다(삼하 1:18-27). 그 이름은 “활 노래”(qeshet)로 짓고 “야살의 책”에 기록하여 “온 유다”에 가르치도록 명하였다(18절). 물론 이 노래는 장차 “온 이스라엘”이 불러야 할 것이다(24절). 나라는 온 국민들이 영광과 비극을 함께 나누면서 세워지기 때문이다. “활 노래”는 곡조 자체가 너무나 슬퍼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시렸다. 물론 나는 백발백중하던 “요나단의 활”을 상기시킬 뜻도 있었다(22절). 활노래의 주제는 “용사들이 쓰러진 슬픔”이었다. 그래서 “오호라 용사들이 쓰러졌도다”를 반복하였다(19, 25, 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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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보아산 자락의 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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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보아산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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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보아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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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보아 산에서 수많은 용사들이 죽음의 행진”(Dead March)을 하며 쓰러졌지만, 참으로 애통스러운 것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이었다. 그 둘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진정한 “용사들”(gibborim)이었기 때문이다(19b, 25a). 그들은 “높은 산”(bamot) 위에서 쓰러졌다(19a, 23b, 25b). 그곳은 “너희들의 높은 곳”이었다. 마치 “너희들의 높은 곳이 쓰러진 것”과 같았다. 사울과 요나단은 “치명상을 입은 자”(pierced, fatally wounded), 즉, “죽임을 당한 자”(slain), 그리고 “더럽혀진 자”(defiled one)가 되었다(히브리어 halal은 ‘더럽혀지다’, ‘상처 입다’, ‘죽임을 당하다’는 세 가지 뜻을 갖고 있다). 그들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영광”(tzebi)이 “더럽혀지고”(halal, 19a), “무너진 것”(napal)이었다(19b; 삼상 4:21, ‘이가봇’). 조가(弔歌)의 첫 단어인 “영광”(tzebi)은 또한 “들노루”(tzebi)를 뜻할 수 있다. 따라서 “높은 언덕” 위에 사울과 요나단이 죽어 있는 모습은 마치 “높은 산” 위에서 “들노루”(tzebi)가 쓰러져 “시체”(halal)가 된 모습이었다. 사울과 요나단은 전쟁터에서 “들노루”처럼 발빠른 용사들이었다(삼하 2:18; 대상 12:8 [MT, 9절]). 또한 그들은 “노루나 사슴” 같은 정결한 제물이었다(신 12:15, 22; 14:5; 15:22). 그러나 그들은 “높은 언덕” 위에서 “죽은 노루”처럼 처참하게 쓰러져 “더럽혀졌다”(Polzin, David,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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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벧산성에서 본 길보아 산


          이 비극적인 소식은 블레셋의 “가드”와 “아스글론”에 알려져서는 안 된다(20절). 블레셋의 딸들이 승리의 소식을 듣고 길거리로 뛰어 나와 아기스 왕에게 “천천과 만만을 돌리며” 춤추며 기뻐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옛적에 내가 골리앗을 죽인 후 이스라엘의 딸들이 길거리로 나아와 사울 왕의 승리를 환호하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던 역사를 뒤집기 때문이다(삼상 18:7; 출 15:20-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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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드에서 발굴한 블레셋의 제단                                   아스글론의 고대 가나안 성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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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스글론의 고대 가나안 성터


         이스라엘의 두 용사가 쓰러진 길보아 산은 저주를 받아야 한다(21절). “길보아 산악들아, 너희 위에는 이슬도 비도 내리지 말지어다”(1행). 비와 이슬이 평소 많이 내렸던 길보아 산악은 메말라야 한다. 결과적으로 길보아 산 아래에 펼쳐진 하롯 평원의 “넓고 비옥한 밭들”(sadot)도 다 망가져야 한다(2행). 그 밭에서는 하나님께 “높이 들어 바칠 곡식 제물들”(terumot)을 많이 내었지만, 이제 거제 제물도 내지 못해야 한다(ESV, NET). 혹은 “계단식 경작지들”이 모두 망가져야 한다(terraced fields, NIV). 왜냐하면 “길보아”(gilbo‘a) 산에서 두 용사의 “방패”가 “더럽혀졌기”(nig‘al, HALOT) 때문이다(3행).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된 것이다”(4행). 사울 왕은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 왕이었지만, 사울의 방패, 즉 사울 왕 자신은 “기름 부음을 받지 못한 자처럼” 죽임을 당했다. 지도자로 기름 부음 받는 것은 단회적인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충만으로 이어져야 한다. 안타깝게도 사울 왕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는 메시아 왕이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해된 자의 피에서”(22절, 1행), “용사들의 기름에서”(2행), “요나단의 활은 뒤로 물러가지 않았고”(3행), “사울의 칼은 헛되이 돌아오지 않았다”(4행). 원래 “피”와 “기름”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었다(레 7:33). 요나단의 활과 사울의 칼은 마지막까지 블레셋 용사들의 피와 기름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22절; 사 34:6-7 참조). 그들은 죽을 때까지 용감하게 싸웠을 뿐 아니라, 적들을 제물로 하나님께 바친 영웅들이었다. 따라서 사울과 요나단은 그들의 첫 승리를 마지막까지 이어간 용사들이 되었다(삼상 11, 13-15장). 사울과 요나단은 패자로 인생을 끝낸 것이 아니라 승자로 인생을 마무리한 셈이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은 슬픈 것이지만, 그들에 대한 기억은 아름다운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조가”(弔歌, elegy, 19-22절)는 “찬가”(讚歌, eulogy, 23-26절)로 전환되어야 한다. 돌아보면 사울과 요나단은 살아 있었을 때 “사랑스럽고”(beloved) 또한 “아름다웠다”(lovely, 23a). 그들은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않았다(23b). 그들은 하늘의 독수리보다 빨랐고 땅의 사자보다 강하였다(23c, d). 그들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탁월한 용사들이었다. 


         두 용사의 죽음으로 블레셋의 딸들은 기뻐하며 노래해서는 안 되며(20절), 이스라엘의 딸들은 “슬퍼하며 울어야 한다”(24절 1행). 왜냐하면 사울 왕은 “붉은 옷으로 그들을 화려하게 입혀주었고”(2행) 또한 “금노리개로 장식해 주었기” 때문이다(3행). 사울 왕은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승리로 나라를 부강하게 해주었다. 백성들은 사울 왕에 대해 아름다운 기억을 간직해야 한다. 


         온 나라는 요나단의 죽음에 대해 애통하며 한 소절의 조가를 읊조려야 한다(25-26절). 나에게 있어서 요나단을 잃은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없었다.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는 가슴이 미어지오”(공동, 26절 1행). 사울과 요나단은 살아 있을 때 “사랑스럽고”(’ahab, 23절), “아름다웠다”(na‘im, 23절). 특히 요나단은 나에게 “심히 아름다웠다”(na‘im me’od, 26b). 그가 나를 “사랑함”(’ahab)은 여인들이 연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기이하였다”(26c). 요나단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믿음으로 순종하는 이상적인 이스라엘 사람이었다(삼상 14:1-46). 우리가 처음 서로 만났을 때 요나단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했던 “왕자의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삼상 18:4). 그는 목숨을 걸고 여러 번 나를 변호하여 주었다(19:1-7; 20:24-34). 요나단은 “내 형제”였다(26절). 내 인생에서 그를 잃은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없을 것이다. 
            “오호라, 용사는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는 부수어졌도다”(27절). 


    2018.06.20 輕舟 김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