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란 무엇인가? 성화의 과정 속에 있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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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앞에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이냐?\ 할 때 가장 크게 인격성임을 들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사실에 관한 확신이 아니고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으로 찾아오시는가, 그리고 말씀으로 찾아오시는 것은 우리의 지성과 감정과 이런 인격의 중요한 요소들에 발언하시는 것이며 그 일에 하나님이 어떻게 의지를 동원하시며 또 우리의 의지를 촉구하시는가 하는 것들을 봤습니다. 이제 우리는 지, 정, 의라고 나눌 것 없이 한 인격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찾아옴에 대한 성경의 보편적인 예들을 얼마든지 찾아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에서 믿음에 관한 본질을 엿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그것을 \영성\으로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영성이 없습니다. 동물은 그저 본능대로 살고 지성이 없지는 않지만 영성은 전혀 없습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생물들에게 \종교\가 없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한편 \다스리는 통치권\으로 이해를 삼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 만들어졌음은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알고 그것이 영성이며 도덕성이며 인격성이며 고급한 지위라는 것을 어쨌든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고 볼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하게 우리가 살펴야 되는 것 중의 하나로 \인격성\을 들 수 있습니다. 인격성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조종하시지 않는 것\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우리가 그 명령을 수행하거나 또는 거절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자유의지라는 것은 독립된 인격이 갖는 결정권입니다. 이것이 아마 하나님의 형상 중에 중요한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 이하,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5-17)에서 하나님께서 두 가지 명령을 주시는데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책임과 해서는 안 되는 금령을 주십니다. 그런데 이것을 전부 우리에게 명령으로 하시지 마치 전기 스위치에 동력을 공급하듯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갖는 신앙의 큰 오해는 다른 생각이 나지 않고 선한 생각만 나고,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기계가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일 많이 틀리는 부분입니다.
TV 드라마를 보면 대부분 불륜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집사람이 옆에 있다가 꼭 시비를 겁니다. \당신도 저런 예쁜 여자를 보면 생각이 나?\ 목사도 눈이 있고 머리가 있는데 왜 생각이 안 나겠습니까? 척 보면 우리 집사람보다 예쁘고 다 나은데, 생각이 없기를 바라면 이미 인격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안 난다면 그건 자신을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생각이 나지만 결정을 합니다. \에비!\ 결정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큰 것\ 입니다. 스스로에게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왜 이런 쓸데없는 꿈을 꾸지?\ 하는 것은 인간의 인간된 가치를 놓고 묻는 것이고, \난 생각이 안 나! 난 예쁜 여자를 보면 눈이 감겨\ 하는 것은 무슨 알레르기 병에 걸린 환자입니다. 병원에 가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할 때는 가는 길이 평탄케 해주시고 죄를 지으려고 하면 길이 무너지게 해주십시오.\ 이런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되는 것은 그런 일과 감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결정을 해야 되고 책임을 져야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에 대해서도 우리는 전부 뭐라고 불평을 하였습니까? \왜 만들었습니까? 하나님 도대체 그런 건 왜 만드셨어요? 꼭 만들어야만 했으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갖다 놓으셔야죠.\ 그런데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조종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보고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스려야 되는가를 생각하고 노력해야 되고, 결정하고 책임져야 됩니다. 저 선악과를 왜 먹으면 안 되는가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선악과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하나님이 만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지만 자기가 최고 권위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금령이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수하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금령\입니다. 그것을 지켜내는 것이 \분별\이요 그것이 \책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유혹에 빠져서 졌습니다. 선악과를 하나님이 만들어서 넘어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책임져야 할 시험과 싸움에 져서 넘어간 것입니다. 실력이 없어서 선악과를 하나 따먹고 나머지 다 잃은 것입니다. 본인이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까지 하십니다. 우리에게 금령을 주었을 뿐 그리로 가면 동력이 끊어지게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옛날 전차를 기억하십니까? 바닥에 레일이 있고 지붕 위에 있는 전기 도르래가 전선을 따라가게 되어 있어서 이탈하면 전차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춥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누이 설명하고 누누이 경고하고 생각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제일 재미있게도, 성도들이 늘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의 경계선은 어디냐 하는 것\에 대해서 묻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은, 우리의 선조 아담과 하와처럼 \선악과\를 따먹을 자유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벌 받는 결과를 초래하는 선택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 의지라는 것은 우리가 누구의 조종 대상이 아니고 자기 문제에 대하여 자기가 책임지고 결정할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 그것이 최종 권위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 의지는 격이 다른 것입니다. 최종 결정권, 운명을 결정하는 그 힘은 하나님만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자식을 키워보면 압니다. 부모가 자식을 훌륭하게 키우겠다고 작정을 하면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는 고사에서 보듯이 삼십 번이라도 이사를 갑니다. 그것이 부모의 뜻이고 의지이고 부모가 갖는 권위입니다. 자식은 수없이 이사가야 할만큼 부모의 뜻을 거스리는 자기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기의 결정은 자기에 관한 것이지 운명을 결정할 힘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자 된 인생을 보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면서도 순종한 적이 몇 번 없습니다. 우리가 고집부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인 줄 뻔히 알면서 간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놔두십니다. 그러나 아주 가지는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결정하는 운명의 선을 넘어가지는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돌아오게 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항복시켜서 돌아오게 합니다. 창세기 28장입니다.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에 이르러서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창 28:10-15)
그 유명한 벧엘 사건입니다. 이때 야곱은 복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형의 보복이 무서워서 외삼촌에게 도망가는 중입니다. 그가 여기, 벧엘이라 일컫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세상에서 비전이나 꿈과 같은 단어들이 인간이 갖는 어떤 의욕적인 야망으로 오해되어 있는데, 이 꿈은 요셉이 꾼 꿈과 같이 자기가 꿈을 꿨지만 자기가 각본을 짠 것이 아닙니다. 꿈을 꾸는 사람 맘대로 꾸면 영화관은 망합니다. \오늘은 벤허 보자\ 하면 벤허가 쫙~ 나온다면 영화를 누가 만들고 보겠습니까? 그렇게는 안 됩니다. 꿈이라는 것은 언제나 수동적입니다. 꾸어지는 것입니다. 본인이 무슨 뜻인지 보통은 모릅니다. 생각지 않았던 것이 꿈에 나타납니다. 이 꿈을 야곱이 꿨지만, 이 꿈속에서 나타난 사다리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이 꿈을 꾼 것이 아닙니다. 이 꿈속에서 사다리는 올라가는 데에만 쓰인 것이 아니라 내려오는 데에도 쓰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아무런 복을 받을만한 조건이 없고 준비가 안 되어 있는 야곱에게 \이 땅을 네게 주고 네 자손을 땅의 티끌같이 주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모든 족속이 네 자손으로 인하여 복을 얻는 복을 주시며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십니다.
그런데 이 땅으로 돌아오는 데 이십 년이 걸립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 하나님 앞에 자기가 서원한 것이나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한 것을 기억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외삼촌 식구들한테 미움을 사서 거기서 더 머물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워서, 오갈 데가 없어서 할 수 없이 형에게로 옵니다. 그 때 야곱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사실 부득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창세기 32장 \얍복 나루터 사건\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22절부터 봅니다.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 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쌔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야곱의 환도뼈를 치매 야곱의 환도뼈가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위골되었더라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가로되 야곱이니이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창 32:22-30)
이 얍복 나루터 씨름은 자주 야곱의 기도로 또 하나님 앞에 매어 달려서 영적인 축복을 받아내는 씨름으로 오해됩니다. 하지만 이 싸움은 야곱이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건 싸움입니다. 24절을 보면 그 씨름의 주동자가 \어떤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을 합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야곱과 씨름을 합니다. 그래서 승패에 관해서도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렇게 판정이 납니다. 야곱은 이 시점에 와서도 하나님이 그에게 가진 계획과 뜻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야 하는 일에 대하여 어떤 감각이 없습니다. 이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에 배운 것이 무엇인줄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 세월 동안에 그에게 가르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인생이 헛되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세상에다 보물을 쌓지 말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마지막으로 그에게 확인시키려고 찾아 오셔서 그의 영혼을 흔드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이 항복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환도뼈를 치고 그제야 그가 정신을 차리고 복을 빌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습니다.
이 사건에서 하나님이 한 인격에게 어떤 사실을 그 내용으로 갖게 하는데 주입을 하지 않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깨우치도록 시간과 기회와 경험의 장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려는 것은 내가 하나님께 순종하여 무엇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목표이고 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을 알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전인격적인 항복을 하는, 그 깨우침, 그 선택, 그 결정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을 빨리 순종해서 뭘 해드리려고 하는데 바쁩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다 \만세 삼창\ 하고 빨리 나가서 뭘 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목표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목표로 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한 인격이 하나님에 대하여 갖는 신뢰와 애정과 열심과 진심을 요구하고 있어서 그것은 긴 시간과 과정을 통하여 항복시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격이란 그런 것입니다. 한 번 보고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생전 처음 봤는데 \형제여!\ 이러면 안 됩니다. \사랑해요\라는 말은 최소한의 관계를 갖고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얼마만큼 서로 간의 인격적인 교류가 깊이 있어야 쓰는 말입니다. \너 참 괜찮다!\ 이 말하는 데도 몇 년 걸리는 것이 아닙니까?
기독교 신앙을 가진다는 것으로, 나는 늘 열린 마음을 갖고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있다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주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하면 \저 사람 미쳤구나!\ 하는 것이 정상적인 평가입니다. 아무 때나 \할렐루야!\ 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본인은 기도원에서 은혜 받고 와서 무엇을 봐도 흔히 하는 말로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지는 해를 보고 날아가는 비둘기를 보아도 \할렐루야\가 되지만, 그것은 자기가 가진 하나님 안에서의 깨우침이요, 감격입니다. 앞에 있는 사람 모두에게 \할렐루야\를 외치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한 인격이 상대방이 하는 말의 깊이와 진심을 용납하기 위해서는 둘의 사이가 그 단어와 표현을 쓸 수 있는 관계에까지 맞닿아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는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인격과 인격이 나눠야 되는 대화들을 서로가 서로간의 깊이를 다듬고 나눈 후에 써야 하는데 늘 잊어버리고 이 말을 합니다. 마치 \열려라, 참깨!\ 하고 주문을 외우듯이 말입니다. 상대가 인격이 아니니까, 주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다스리지 않는데 우리는 그렇게 나섭니다.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아는 이 야곱 하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은 얼마나 긴 세월을 보내어 기다리시고 한순간도 놔두지 않고 간섭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는 야곱이 됩니다. 그 야곱을 항복시키는 것입니다. 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이 자기 자식들에게 마지막으로 축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주 재미있습니다.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창 49:22-26) 이 축복하는 장면에서 하나 기막힌 것이 야곱이 자기 축복이 자기 선조의 축복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26절 \네 아비의 축복이 네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여기에서 너는 요셉이고 네 아비는 야곱이고 네 부여조는 이삭과 아브라함입니다. 즉 야곱의 선조는 아브라함과 이삭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놓고 비교하면 야곱이 제일 못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의 정도나 수준으로 그렇게 보입니다.
축복이란 자기가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을 비는 것입니다. 결국 야곱이 무엇을 자신 있어 하느냐면 \하나님이 누구인지는 자기가 더 잘 안다\ 이겁니다. 왜 잘 압니까? 속을 더 많이 썩였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보다 야곱이 훨씬 더 말을 듣지 않았고 훨씬 긴 세월을 버텼기 때문에 하나님이 야곱에게는 더 많이 간섭하셨습니다. 더 많이 복을 주셨다가 아니라 더 많이 손을 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어떤 의미에서는, 꼭 그렇다는 단정은 아닙니다만 성경에 나타난 기록만으로 비교하자면, 야곱이 아브라함이나 이삭보다 더 많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고 충분히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순종했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데는 그가 더 많이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신지, 얼마나 신실하신지, 얼마나 큰 능력을 가지셨는지를 야곱이 자기 선조들보다 더 잘 알았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입시키러 오거나 조정하신 적이 없으며 우리를 목적으로 놓고 인격적인 내용으로써 우리 안에 채울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 편에 서는 결정을 또는 책임을, 항복을, 우리에게 받아내시고 결과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모든 생애에 간섭하시는 분이심을, 그리고 우리가 납득할 때까지 설명하고 경험케 하고 시간을 주시는 분이심을 야곱이 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요구하는 신앙의 내용들을 보면 이런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을 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26-30)
이 일련의 표현들을 쭉 읽노라면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에 \믿음\을 바꾸어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이 밥통들아\라고 얘기하여도 하나도 그 뉘앙스에 틀릴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밥통들아!\ 라고 하는 것은 \생각 좀 해봐라!\는 뜻입니다. \너 왜 잘 못하고 있냐? 이리 와라! 왜 거기 섰냐? 여기 와서 서 있어야지\ 하는 이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생각을 해봐라. 이 밥통들아!\ 이런 것입니다. 우리보고 생각해서 결정을 하라고 합니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복이고 무엇이 너한테 유익한가를 생각을 해봐라, 이 밥통들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것은 전부, \하나님만이 의와 선과 생명과 진리와 영원에 유일한 주권자요, 만드시는 분이요 그 모든 것의 근원이고, 하나님 안에 있어야 이 복을 누리고 하나님을 떠나서는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사실 복과 생명은 어떤 물건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붙어 있어야 우리에게 전달되고 뭐가 되는데 하나님이 이를 우리에게 확인시키기 위하여 \복이니...\ 하며 또 신명기에서 본 바대로 우리가 선택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살기 위하여 나를 선택하라, 살기 위하여 순종하라.\ 이렇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훨씬 더 본질적으로 \나를 사랑하라, 내 편에 서라, 내가 너희의 구원의 뿔이고 너희의 산성이고 너희의 보상이고 너희의 기쁨이고 모든 것이다\ 하고 설명을 하십니다.
부모가 자식한테 하는 얘기 아닙니까? \너 공부만 잘 해라. 나머진 내가 다 책임진다. 너 부모 말만 잘 들어라. 그럼 너 훌륭해진다.\ 이것 아닙니까? 납득을 시켜야 되는 일입니다. 전부 그런 얘기입니다. 로마서 6장도 그렇습니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롬 6:15-21)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곧 우리가 자녀한테 \너 술 먹고 담배 피고 해서 도대체 남는 게 뭐냐?\고 묻는 말입니다. \생각을 해봐라. 이 밥통아!\ 하는 말입니다. 우리 자식이 말 듣지 않는다고 병원 데리고 가서 머리 좋게 만들어 공부 잘하게는 못하는 것 아닙니까? 밤낮 잔소리를 하고 설명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자식이 본인 스스로 알아듣고 분별하고 결정을 해야 될 때까지 말입니다. 믿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믿음의 인격성을 자꾸 논하는 것은 믿음이란 결국 어떤 수단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은 그것 자체가 내용입니다. 그 믿음이라는 것을 하나의 관념으로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대상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는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있으며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하나님을 닮는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하고 그렇게 완성되어 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개념들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편든 사람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하는 기준으로 무엇을 제시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대적하리요\ 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의 근거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을 만한 조건이나 자격이 있느냐를 떠나서 하나님이 우리를 편드셨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어느 누가 와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겠습니까? 구원도 하나님을 빼놓으면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제일 큰 문제는 믿음이 혼자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자신에게 열중하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내가 이만큼 열심을 가졌으니, 내가 이만큼 확신을 가졌으니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뭐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다 수단이고 자기 열심입니다. 믿음이 좋으면 애가 좋은 학교 가고 믿음이 좋으면 병이 낫고 믿음이 좋으면 장사가 잘 되고 하는 줄 압니다. 그건 믿음을 모르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눈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보고 어렵게 살라고 하시면 기쁨으로 어렵게 살아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없고 자기 열심과 자기 도취만이 있어서 기도를 악을 쓰며 하고 아우성을 치고, 믿음도 침을 튀기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없고 믿는 자만 있습니다. 기도도 듣는 대상, 하나님은 없고 소리 지르는 기도자만 있습니다. 그의 간절함을 무시하자고 이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목적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들도 하나님이 우리를 복되게 하기 위하여 그 길을 걷게 하신다는 사실과 앞의 \공중 나는 새를 보라\ 하신 말씀을 생각하십시오.
\우리를 위하여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은사를 은혜로 주시지 않겠느뇨!\ 로마서 8장에 나온 사도 바울의 절규입니다. 신자가 됐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에게 우리는 소중하고 가장 귀한 목적과 대상입니다. 우리를 자녀로 불러서, 무엇으로 부려먹으려는 의도가 하나님께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랑입니다. 여러분들도 성경이 요구하는 율법의 대강령, 곧 \죄짓지 말라\에서 머물지 아니하고 훨씬 더 적극적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을 굳게 지키어 믿음 생활이 갖는 기쁨과 승리를 늘 누리시기 바랍니다.
본원 이사, 남포 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