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 \구속사적 관점에서 본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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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강해
: 그 근원과 타락과 회복\
| 김정우 |
구약은 가정의 창조로 시작하여(창 2:18-25) 잇따른 첫 가정의 붕괴(창 3:8-20)와 화해한 가정에 대한 희망찬 환상으로 마친다(말 4:6). 죄로 말미암아 역기능으로 변한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은 천적처럼 변했는데, 하나님이 보내실 마지막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서로의 마음이 합해지고 가정 안에서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구약은 끝나고 있다. 복음서의 기사는 말라기가 예언한 엘리야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다윗의 후손 요셉의 집에 태어난다. 그러나 요셉의 집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무너질 뻔 하였다. 예수께서는 가정에 대해 이율배반적인 말씀을 하셨다.
\나는 가정을 나누기 위해 왔다\(마 10:34-35). 그러나 그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시며 종말론적 언약공동체로서 더 큰 가정을 세우고 있다(막 3:31-3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지막 부탁은 자신의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맡긴 것이었다(요 19:26-27).
신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사는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노아의 가정은 새 인류의 시작을 이루고, 아브라함의 가정은 믿음의 집을 시작하고, 야곱의 가정은 이스라엘 12 지파의 근간을 형성한다. 신약에서는 가정을 중심으로 초대교회가 이루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서 가정은 전략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곳이다. 우리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가정의 시작과 타락과 회복을 보며 주님께서 세우시는 가정의 질서와 가정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 듣고자 한다.
1.창조에 나타난 가정 질서(창2:18-25)
본문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을 만드신 후 아담과 하와가 만나는 장면을 아름답게 그려주고 있다. 온 세상이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된 후, 하나님의 첫 작품은 가정의 창조였다. 교회도 학교도 없고, 사회도 국가도 만들어지기 전에 주님은 가정을 만드신다.
1) \사람이 독처하는 것은 선하지 않다\(2:18상)
아담을 위한 하와의 창조는 아담이 여러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배경에서 나타난다(20-22절). 그가 동물의 이름을 짓는 것은 자신의 적절한 배필을 찾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수많은 동물 속에서 자신의 참된 배필을 찾을 수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른 동물과는 다른 존재였다. 그는 동물과는 다른 배필을 원했고, 그 배필을 찾을 때까지 참된 만족이 없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는 창세기 1장이 배경에서 볼 때, 아주 역설적이다. 주님은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창 1:31). 그러나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보시고 \좋지 못하다\고 평가하신다. 마치 자신의 창조에 결함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이리하여 주님은 남자를 위해 여자를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신다. 남녀가 어우러져 더불어 살며,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주님은 결혼 제도를 세우시기로 결심하신다.
2)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2:18 하)
\돕는 배필\(\ezer kenegdo)이라는 말은 현대어 번역에서 \도우는 자\(a helper; RSV), \배필\(a helpmate; JB), \적절한 도움\(a fitting helper; New Jewish V), \그에게 적합한 도움\(an aid fit for him; AB), \돕는 사람, 곧 그의 짝\(표준새번역) 등으로 번역된다. 우리말 번역의 \돕는 배필\은 독자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마치 여자가 남자의 \조수\ 혹은 \시녀\ 같은 느낌을 시사할 수 있다. 사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돕는 배필\이라는 번역에 근거하여 남성우월론과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성의 여성 지배론을 정당화 시켰다(이우정 1985:150; Calvin, Genesis 129). 따라서 우리는 \도우는 자\(\ezer)와 \그 맞은 편에 있는\(kenegdo)이란 두 용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먼저 \도우는 자\(\ezer)는 우리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종속적인 개념을 내포한 듯이 보이나,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돕는 자\는 \도움을 받는 자\ 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나타나므로, 종속과 열등의 개념을 찾아 볼 수 없다. 이 용어는 구약성경에서 약 21번 나타나는데 주로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며(출 18:4; 신 33:29; 시 20:2; 121:1, 2; 124:8; 89:19 등), 세 번에 걸쳐 사람을 가리키는데 이것도 강자가 약자에게 군사적인 도움을 주는데 사용되고 있다.1) 따라서 이 단어는 \구원자\란 뜻으로 사용될 수 있다.2)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근원적인 고독을 풀어줄 존재를 만들려고 하지, 그의 구원자를 만들려고 하지 않으므로 \구원자\라는 번역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도우다\(히, \azar)는 동사는 \건지다\( to rescue), \구원하다\(to save)는 뜻 뿐 아니라, \강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페니키아어 가자르, gzr, \강한\). 그러므로 이 단어는 \돕는 자\ 뿐 아니라, \힘센 자\, 혹은 \강한 자\로도 번역할 수 있다.3) 만약 이런 뜻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아담의 배필로서 동물과는 다른 \강한 자\를 만들려고 하신다. 사실 하와는 강한 자이며, 강한 여자는 아름답다(잠 31:10-21).
두번째로, \그 맞은 편에 있는\(kenegedo)이라는 용어를 직역하면 \그를 마주 보는\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꼭 같은 자\는 아니지만, \동등하고, 어울리는 자\(BDB 617)로서 \그에게 적합한 자\ 혹은 \그에게 적절한 자\를 뜻한다. 특히 미쉬나 히브리어에서 \앞에 있는 것 같은\(keneged)은 \동등한\이란 뜻을 가진다.
\토라 연구는 다른 모든 계명에 동등하다(keneged)\.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여자는 \남자 앞에 있는 동등한 강자\로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혼자 있지 않고, \그와 동등한 강자\와 함께 살도록 하셨다. 여자는 남자에게 어울리는 동역자(partner)이다. 그들은 서로가 동등한 인격과 힘을 가진자로서 서로에게 힘이 되도록 지음받는다. 남녀는 땅을 다스리는 사역을 함께 하는 동료이며 동역자이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에 비해 존재론적으로 열등하다는 개념은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남녀 간의 상호 의존성이 명백히 나타난다. 그들은 다른 인격이나 동등하며, 다르지만 상호 보충적인 삶을 살도록 만들어진다.
\남녀는 서로를 동등하게 받아야 하며, 그들의 차이는 모든 삶의 영역과 일에서 상호 보충적이어야 한다\(Jewett). 비록 남녀는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나, 달리 만들어졌으므로 서로를 보충하고 완성해야 한다.
3)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
하나님께서 중매자로서 그 앞으로 인도하시는 하와를 보는 순간 아담은 탄성을 지른다. 그는 성경의 첫 시로서 자신의 흥분과 감격을 드러내고 있다. \드디어 이 자는 나의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와는 문자적으로 아담의 뼈와 살로 창조된다. 그러나 숙어로서 \뼈와 살\은 친인척 관계를 표시하는 구절로서 \아주 가까운 친척\을 뜻한다. 라반은 그의 조카 야곱에게 \너는 참으로 나의 뼈요 나의 살\(개역, \골육\)이라고 말한다(창29:14). 우리는 가족관계에서 \핏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구약의 히브리인들은 \뼈와 살\을 중요시 한다.
창세기 2:23의 문맥을 살펴 보면, 인간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인간과 골육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며, 오직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골육관계가 이루어진다. 이런 사상적 배경 때문에 후에 레위기에서는 짐승과의 교합을 가장 가증하게 여긴다. 창세기 2:23은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란 최상급을 사용하여 부부관계는 인간관계 중 가장 가깝고 친밀하고 지속적임을 강조해 준다.
또한 \뼈와 살\은 언약체결을 통해 이루어진 상호 연대성을 말할 때 사용된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삼하 5:1). 이스라엘 다른 지파와 다윗 사이에는 친인척의 관계가 없었지만, 언약체결을 통해 그들은 다윗에게 항구적인 충성을 맹세하며 \골육관계\를 형성한다.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 임을 생각하라\고 말한다(삿 9:1-2). 그 때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말하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고 응답하였다. 여기에서는 실제적인 혈연을 말하는 것 같지만, 문맥은 정치적, 공동체적 연대성을 통해 권력을 나누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은 언약을 통해 서로에게 \골육지친\이 된다. 이 세상의 여러 언약 중에서 결혼은 가장 근원적인 언약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살\과 \뼈\는 한 쌍의 단어로서, 인간의 \약함\과 \강함\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Bruggemann 532쪽). 욥기 2:5에서 사단은 하나님을 충동질하여 욥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뼈\와 \살\은 욥의 가장 강한 부분과 약한 부분을 총체적으로 말해주는 합성어이다. 바로 앞 절에서는 \사람이 가죽으로 가죽을 바꾼다\고 말한다. \가죽\ 혹은 \살갗\은 역사적 신체적 실존으로서 가장 민감하고 어려운 상황을 가리킨다. 이리하여 살의 약함과 뼈의 강함이 대조를 이룬다. \이 두 단어가 한 쌍으로 나타날 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뜻을 시사한다. 모든 심리적-신체적인 차원을 다 포함한다\(Bruggemann 532쪽).4) 따라서 결혼식에서 우리는 \부할 때에나 가난할 때에나, 건강할 때에나 병들 때나\서로 사랑하기로 서약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사랑할 것\을 서약한다.
정리하면, \뼈와 살\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에서 나왔으나, 결혼으로 아담의 \뼈\와 \살\이 된다. 즉 그들은 결혼으로 언약을 맺고, 같은 관심을 가지며 충성과 책임을 함께 나누어질 것이다. 부부는 언약의 파트너(당사자)로서 자발적인 헌신을 통해 책임을 함께 지는 사랑과 우애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루어가야 한다. 이 한 쌍은 삶의 모든 상황에서 반려자가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신랑과 신부와 같은 연대성과 충성심과 책임을 서로에게 진다고 말한다(엡 5:21-33).
4)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24절)
여기에서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결혼을 떠나 이제 결혼이 모든 인류를 위한 창조질서로 제도화된다. 결혼관계는 \떠남\과 \연합\으로 이루어진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에서 \떠나다\는 원래 \버린다\는 뜻이다. 고대 근동아시아의 사회에서 남자가 결혼으로 부모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부모 집을 떠나 남편 집안으로 들어왔으므로, \버리다\는 단어가 충격적이다. 먼저 문법적으로 보면, 여기에서 \버리다\는 당위성을 말하지 않는다.5) 이 표현은 보다 중립적이다. 히브리어의 미완료는 허용적으로 사용되므로, \자기 부모를 떠나야만 한다\라기 보다, \떠나서\로 보아야 한다. 또한 여기에서 \버리다\는 말은 상대적인 의미로서(호 6:6; 눅 16:26), 결혼으로 신랑과 신부는 삶과 헌신에 있어서 우선권에 변화가 생김을 말해준다. 결혼 전에는 부모에게, 결혼 후에는 부부 상호에게 우선권이 있어야 한다.
\떠나다\는 \연합하다\(dabaq)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연합은 상호간의 사랑을 전제한다. 이 연합은 정략적이거나 이기적인 동기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자신을 주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부부 사이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밀착성이 \연합\을 통해 표현된다. 이들의 연합은 거룩하고 완전했기 때문에, 바울은 후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설명하는 데 가장 적절한 모델로 사용하였다. 아담과 하와의 연합은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바로 \나\와 \당신\의 인격적인 관계였다.
이 둘은 \한 몸\을 이룬다. \한 몸\은 남자와 여자가 한 \뼈와 살\ 임을 보충하고 해석한다. \둘이 한 몸이 됨\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육체적인 결합을 뜻한다\(김중기 108)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한 몸\은 \성적 관계의 아름다움과 일상생활에서 나눌 수 있는 모든 육체적 관계\를 뜻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몸\은 단지 신체적 연합이 아니라, 결혼 관계의 모든 풍부한 친밀성을 말한다. \한 몸\은 신체적이며, 정서적이고 영적인 차원을 다 포함하는 전인적인 연대성을 말한다. 나아가 \버리다\와 \연합하다\는 언약개념이므로 \한 몸\ 역시 언약의 완성을 시사해준다. 사람들이 언약을 맺을 때, 이전 관계를 버리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며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듯이(레 18:20; 신 24:1-4), 결혼으로 새 공동체를 이룬다.
또한 \한 몸\은 결혼이란 사회적 기관임을 시사한다. 복음서도 이런 관점에서 결혼을 해석한다(마 19:1-6; 고전 6:15-20; 엡 5:31). 따라서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것은 단지 협소한 의미에서 \부부의 관계\로 끝난다는 뜻이 아니다.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자녀를 낳아 집안을 이루며, 더 큰 가족을 형성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한 몸\은 단지 신체적 연합 뿐 아니라 정신적 연합을 말하며, 부부의 연합 뿐 아니라 그들이 생산하는 후손까지 다 포함하는 더 넓은 사회적 연대성을 포함한다.
2. 타락 후의 왜곡된 가정질서(창 3:16)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남녀의 존재론적인 동등성(창 1:26-31)과 사회적 존재로서 남녀의 상호 의존성과 보충성(창 2:18-25)은 상호분리와 주도권 다툼으로 얼룩지며 순기능적인 가정은 역기능적인 가정으로 전도된다. 원래의 창조질서에 나타난 부부간의 친밀감과 연대감과 책임감과 사랑은 불화와 책임전가와 불신으로 왜곡된다. 하와는 원래 여자는 자녀 생산의 축복을 받았고(1:28), 행복한 결혼 생활의 축복을 받았다(2:18). 이 양면적 축복이 이제 저주로 얼룩진다. 하와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언도는 먼저 그녀의 자식에 대한 것이고, 이어 남편과의 관계가 나온다. 자식의 출산에 있어서는 더욱 아픈 고통 가운데 해산을 해야한다. 남편과의 관계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말씀을 주신다. 이 말씀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한 규범인가? 혹은 타락 후 부부 생활의 장애에 대한 사실적인 설명인가?
1) \너는 남편을 사모할 것이라\(3:16 상)
수잔 포(Susan Foh)는 \사모하다\라는 동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다음과 같이 잘 열거하고 있다.6) (1)이것은 \성적인 욕망\이다. 여인이 남편을 열망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아이를 갖는 모든 고통과 슬픔을 받아들인다\(D. R. Mace). 여인은 결혼의 성관계를 원하여 아이를 갖고 낳는다. (2) \자발적으로 남자의 종이 되려고 하는 욕망\(J. Skinner), 혹은 \강열하고, 달라 붙는 마음으로 남자를 의지하는 마음이다\(A. Andrews). 카일은 \병적인 열망\으로 본다. (3) 칼빈은 \여인이 그녀의 남편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며, 자신에 대한 주권을 잃는다\고 본다. 그렇지만, 여자가 남자보다 성적인 욕망이 강하다거나, 여자가 남자를 의지하는 것을 여자가 좋아하며 사모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사모하다\는 동사는 꼭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이 동사(테슈카; 어근, 샤카/ 슈크)는 구약성경에서 오직 세 번(창 3:16; 4:7; 아가 7:11) 나타나기 때문에 그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동사의 어근은 기본적으로 \간절히 원하다, 열망하다\로서 꼭 성적인 욕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동사는 아랍어에서 (1) 샤카(shaqa), \몹시 바라다, 욕망을 불러 일으키다\와 (2) 사카(saqa), \충동하다, 몰다, 재촉하다\는 뜻을 가지므로 꼭 성적인 욕망이 아니다. 또한 창세기 4:7에서 이 단어는 가인의 아벨에 대한 미움이 너무나 격렬하여 동생을 죽이고 싶어하는 격정이 지속적으로 솟아나는 것을 보여주며, 아가서 7:11에서는 사랑하는 애인 사이에 있는 견딜 수 없는 갈망을 묘사해 준다. 따라서 이 단어를 성적인 욕망으로 보는 것은 포괄적이기 보다 제한적이다. 그렇다면, 여인은 무엇을 사모하는 것인가? 수잔 포는 창세기 4:7에 근거하여 \여인은 죄가 가인을 열망하듯 자기 남편을 열망한다. 즉, 소유하려거나 지배하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은 남편의 머리됨에 대한 논쟁을 야기한다\(382쪽)고 해석한다.
포는 계속하여, \이것은 성의 전쟁의 시작이다. 타락의 결과로 남자는 더 이상 쉽게 여자를 다스리지 못한다. 그는 자기 머리됨을 위해 싸워야만 한다. 죄는 아내의 자발적 복종심을 부패시켰고, 남편의 자애로운 다스림도 부패시켰다. 여인은 남편을 다스리길 사모한다. 따라서 낙원에 세워진 사랑의 통치가 갈등과 폭력과 지배로 대치된다. 그녀는 부부 관계에서 지도력을 위한 싸움을 그와 하기를 사모한다. 따라서 남자는 자기 아내를 능동적으로 다스리길 구해야만 한다\(382쪽).
이 본문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므로 \너는 남편을 사모하리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무조건적이며 순수한 사랑으로 볼 수 없다. 히브리어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다른 용어(아하브, 헷세드)로 표현되며, 여기에서는 \열망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로 제시되므로 수잔 포의 해석은 원문의 의미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2)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다스리다\(mashal)는 동사는 양면적인 의미를 가진다. 먼저 이 단어는 창세기 1:18에서 태양과 달이 \주야를 주관하게 하다\(mashal)로 나타난다. 즉, 해와 달이 자연 질서를 따라 낮과 밤의 순환을 \주관하며\ 이루어 가는 것이다.
특히 이 단어(mashal)는 창세기 1:26, 29에서 인간이 동물을 다스리는 지배권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다른 단어(radah)가 나타난다. 후자는, \짓밟다, 지배하다, 주권을 행사하다\(to tread down, have dominion over)는 뜻이다(BDB 921-22). 따라서 \다스리다\(mashal)는 지배와 복종을 시사할 수 있지만, 꼭 \독재적인 권력을 사용하다는 뜻은 아니다\(J. Skinner). 비록 타락 후이지만, 사람이 짐승을 지배하는 것과 남편이 자기 아내를 다스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렇게 보면, 남편이 아내를 \주관하며\ 나아가 \위로하다, 보호하다, 돌보다, 사랑하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스리다\(mashal) 동사는 구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주인이 하인을, 임금이 신하를 다스릴 때의 지배와 종속을 말할 때 사용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타락 후 남편과 아내 사이에 중대한 관계의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남편과 아내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변질된다. 타락 전에 남자의 \다스림\(mashal)은 죄로 오염되지 않은 통치였으나, 타락 후에는 폭군적이 되었다(수잔 포 28). 이런 관점에서 보스는 창세기 3:16에서 \다스리다\는 \억압하다, 지배하려 하다\를 시사한다고 본다(Vos 25). 이것은 원래 이상적인 부분의 관계는 아니었는데, 이제 타락으로 말미암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보면,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선언 속에는 거칠게 착취당하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나타난다.7) 정리하자면,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이상적이고 행복한 부부 관계의 규범이 아니며, 타락 후 변화된 부부 관계의 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히브리어 구문 구조와 히브리 시의 평행법을 따라 본문을 새롭게 볼 수 있다. 본문의 구조는 창세기 4:7과 동일하다.
\죄의 소원(teshuqa)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mashal).\
즉, 가인 속에는 \죄를 사모하는 것\(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과 \죄를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저자가 생략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죄가 가인을 [다스리기를] 사모하나(teshuqa),
가인이 죄를 다스리도록(mashal) [사모할찌니라].\
이런 히브리 시의 생략법을 본문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너는 남편을 [지배하기를] 사모하고(teshuqa),
남편은 너를 지배하기를(mashal)[사모하리라].\
우리의 결론을 문맥도 지지해 준다. 창세기 3:16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 중 먼저 여자에게 심판을 선언하고 있으므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부부관계의 규범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기 힘들다. 오히려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남편과 아내가 가정에서 서로를 지배하기 위한 치열한 주도권 싸움을 펼칠 것임을 사실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원래는 아내와 남편이 완전한 반려자였으나, 이제는 두 관계가 왜곡되어 서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3.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가정질서(엡 5:21-33)
본 장은 고대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에 널리 사용된 \가정 운영\(oikonomia)에 대한 규범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당시 모든 7사회의 가정 규칙들은 부부와 부자와 주종 사이의 질서를 다룬다. 이 규범들은 한 쌍을 이루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자를 먼저 언급하며 이어 권위 있는 자에 대한 권면이 뒤따른다.
이런 가정 운영 규칙은 동양사회에서도 같은 패턴을 가진다.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인 대가족 제도는 가부장 중심으로, 여필종부와 부부유별, 부자유친, 장유유서라는 철두철미한 위계질서와 종적 인간관계 생활을 사회의 기본생활로 짜고 있다. 여기에서 성차별과 자녀에게 맹종을 요구하는 것이 부작용으로 나타나며, 부부 사이에는 부부 일체감 대신에 괴리감과 소외감을 심화시켜왔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평등의 대전제 하에서 가정 안에서 가족 상호간의 질서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신약시대의 넓은 사회적 배경 속에서 기독교적인 가정질서를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지킬 인간 관계의 새질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
우리말 성경(개역)은 가정질서에 대한 권면을 22절부터 시작하지만(//KJV), <그리이스어 신약>(Nestle-Aland, NTG 1979, 26판)은 21절부터 새단락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22절에는 가장 신빙성 있는 헬라어 사본들에 동사가 없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번역자들은 22절의 \복종하라\는 동사를 21절에 있는 \복종하는\에서 가져왔다. 또한 21절은 뒤따르는 세가지 인간 관계, 부부, 부자, 상전과 종에 대해 바울이 적용하는 일반적 원리로 나타난다. 신약성경은 상호 복종의 원리를 인간 관계의 일반적 원리로 제시한다(빌 2:3; 롬 12:10; 빌 2:7; 마 20:28 등). 따라서 이 절은 \빛의 자녀의 생활\(5:6-20)의 결론이라기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야 하는 인간 관계, 특히 가족 관계의 서론으로 제시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아내(5:22)와 자녀(6:1)와 종(6:5)에게 준 \순종\과 \복종\의 권면은 결코 일방적이 아니며, 이들에 대응하는 남편과 부모와 주인에게 함께 주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서로\는 상호성을 띠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된 모든 인간관계는 결코 일방적인 예속이나 강제나 폭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이루어지는 상호 순종이다. 여기에 인간관계의 새로운 \기독론적\ 기초가 제시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 서로를 향한 순종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런 새로운 인간관계는 고대 세계의 가부장적인 가정 구조의 배경에서 볼 때 혁명적이다. \신약성서 외에 고대 어느 윤리에서 부부, 부자, 주종에게 동등하게 \서로 서로\ 순종하라는 교훈이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21절은 가정 덕목록의 윤리 전체를 이해하는 길잡이이다. 바울이 단지 고대 사회의 철저한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기독론적 기반 위에서 \기독교화\ 하였다는 주장은 21절을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조경철 138).
2) 그리스도 안에서 부부관계의 새 질서(엡 5:22-33)
(1) 아내들에게(22-24절)
바울은 고대 세계의 일반적 형식을 따라 먼저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2절)고 권면한다. 원문에는 \아내들은 주께 하듯 자기 남편에게\로만 나타난다. \복종하다\는 단어는 앞 절에서 가져와 완전한 문장을 만든 것이다.
\복종하다\는 번역은 새번역에서 \순종하다\로 제시된다. \순종하라\(휘포타셋스세)는 자녀들로 부모에게 \복종하라\(휘파쿠에테)는 명령과는 다르다. 물론 \순종하라\는 말은 \어쩔 수 없이 당시의 가부장적인 사고\에 대한 여운을 담고 있지만(조경철 138), 주 안에서의 순종은 굴욕적이며 굴종적이거나 여성 비하적인 순종이 아니다. 아내의 자기 남편에 대한 순종은 자발적인 협력과 양보를 의미한다.
또한 순종의 범위는 어디까지나 \자기 남편\에 제한된다. 이 권면은 한 가정 안에서의 부부관계를 다루고 있으므로,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라\는 일반적인 권면이 아니다. 이어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남편이 아내의 머리되기 때문\으로 제시한다(23절). 나아가 아내는 \범사에\ 순종해야 하며,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 순종해야 한다(24절).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란 사상은 원래 창조 기사에서 암시적으로 나타났으나, 이제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구약성경에서 남편의 대표성은 항상 전제되어 나타났다. \아내의 머리 됨\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여기에 단 한번 나타나지만,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비슷한 표현이 한 번 더 나타난다(고전 11:3).
\남편의 머리 됨\은 고대 세계의 일반적인 가치관으로서 \남성 우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남녀 차별을 신학화하는 것도 아니다. 남녀의 평등과 동등성은 이미 창조 질서에 나타났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는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갈 3:28).
\남편의 머리 됨\에 있어서 \머리\는 크게 \근원\(source)과 \권위\(authority over)를 의미한다. 웨인 그루뎀은 그리스어 \머리\(kephale)가 단지 \근원\ 혹은 \시작\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 여러 학자들(B. & A. Mickelsen; M. Howe; L. Scanzoni & N. Hardesty)의 입장을 주전 8세기부터 주후 4세기 사이에 36명의 저자들이 2336회에 걸쳐 언급하는 본문들을 다루면서, \머리\가 \권위를 행사하다\는 뜻을 의미하지 않는 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논증하였다.8)
바울은 \남편의 머리 됨\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다\(23절)고 말한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의 관계는 분명히 \권위와 복종을 말한다\(골 2:10). 따라서 바울은 가정 안에서의 대표성과 최종적인 책임을 남편에게 두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질서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바울은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전 11:3). 여기에서 \머리 됨\은 또 다른 차원을 가진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본질의 동등성과 기능과 경륜에 있어서의 차이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된 부부 생활의 올바른 관계를 \머리\와 \몸\이란 비유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 관계는 기독론과 교회론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인간론적인 구조\는 철저히 그리스도가 어떻게 교회의 머리인가라?라는 \신학적 구조\에 의존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라고 말함으로써, \머리 됨\의 의미를 한층 분명히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대신 주셨다. 여기에 \머리 됨\은 결코 일방적이거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며, 정복과 착취를 일삼는 통치가 아니다. 그것은 \희생적인 헌신\과 \자발적인 섬김\과 \올바른 다스림\이다. 그리스도는 제왕으로서가 아니라, 참된 종으로서 어떻게 우리를 지도하며 다스리는지 모범을 보여주셨다(막 10:45).9)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은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신\ 사랑과 헌신으로 나타난다(25절). 따라서 바울은 이미 가정으로 주어진 개인적, 사회적 존재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환시키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종말론적인 성령의 오심으로 개인적 정체성, 사회적 책임, 힘과 권위에 근본적인 전환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의 빛 속에서 모든 것이 결코 옛날과 같을 수 없었다.
따라서 가정질서는 구속사적인 전환을 따라 본질적인 변화를 만들 수 밖에 없다. 부부는 기본적으로 \주 안에서\의 신자로서의 관계를 이룬다(골 3:18).
아내는 \복종\하나 그들의 불신 남편을 그리스도 앞으로 \얻기\위해 더 높은 목적으로 복종한다(벧전 3:1-2).
그러나 가정 안에서 본질적인 권위의 원리가 있다.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서 궁극적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과 혼돈이 생긴다. 바울은 한 가정 안에서 최종적 권위를 남편에게 둔다. 가장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지속적인 결심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가장은 계속 자신의 결심에 영향받는 자들과 의논해야 한다. 그는 아내와 자녀의 조언을 들어야 하며 가족 구성원의 기술과 능력을 최선을 다해 이용해야 한다.
(2) 남편들에게(5:25-33절)
25절부터 남편의 책임을 다룬다. 남편에게 주는 아내 사랑의 의무(25-33절)는 아내의 남편에 대한 순종 의무(22-24절) 보다는 세배나 더 길며, 오히려 바울의 중심 관심이 여기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바울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25절)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사랑의 최고의 표현으로 설명한다. 남편의 사랑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것\과 같이 희생적이고, 비이기적이어야 한다. 그 사랑은 신약의 독특한 용어인 아가페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은 최고 형태의 사랑이며, 자기를 주는 희생적 사랑이다. 이 사랑에는 자기 절제와 부인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도우며 돌보는 사랑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구원론적인 목적을 제시한다(26-27절).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를 향해 구체적인 목표와 목적을 가진다. 주님은 교회를 정결케 하여 구원하실 뿐 아니라(26절), 나아가 완성하시려고 하신다(27절).
이런 기독론적이며 교회론적인 기초 위에 바울은 최종적으로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하라\(28절)고 말한다. 여기에서 부부 사랑이 한 몸으로 표현되며, 바울은 창세기 2:24을 인용한다. 부부 사랑의 심오한 연합으로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된다. 마치 \바이올린에 활과 같다. 서로 협조하지 않으면, 결코 황홀경(extasy)이 없다\(Maston).
따라서 결혼의 목표는 부부의 행복이 아니며, 오히려 둘이 하나됨에 있다. 이제 부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 두 인격체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과 헌신에 근거하여 하나로 엮어진다. 그러나 하나됨은 밋밋해짐이 아니다. 항상 더 큰 다양성의 풍성함이 있다. 행복은 하나 됨의 산물이다. 끝으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부 사랑과 상호 순종을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라고 말한다. 그는 단순한 창조의 순서에 의한 위계질서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기독론)과 교회의 순종(교회론)에 근거하여 가정의 질서를 새롭게 만들어가기를 권한다.
4.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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