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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창세기 강해 / 노아의 홍수 이야기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창 6:9-22, 7:1-24 | 설교자: 김정우

    본문

    창세기 강해

     

    노아의 홍수 이야기


     

    김정우




    1. 하나님의 홍수 심판 예고와 노아의 방주 건설(6:9-22)

    2.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7:1-24)

    1959년 9월 17일 사라호 태풍이 우리 나라를 덮쳤을 때 나는 경남 남해의 한 마을에서 나의 여동생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 때 나는 10살이었고, 나의 여동생은 7살이었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고 천둥이 쳐 나의 동생은 겁에 질렸고, 울면서 큰 집에 가신 할머니를 찾았기 때문에 나는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집을 나왔다. 그러나 평소 물장난이나 하던 조그만 개울은 물이 크게 넘쳐 길을 볼 수가 없었고, 나는 한 손으로는 내 동생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주위 집들의 벽을 더듬으며 큰 집을 찾아갔다. 그 때…. 만약 조금의 실수라도 있었다면 나는 나의 동생을 잃을 수 있었고, 나 역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만약 내 동생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면 나는 평생토록 정신적인 고통 가운데 지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보살핌 속에서 나는 그 때의 물난리에서 건짐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사라호는 내 인생 최고의 공포로 남아있다.

    <합동연감>에 따르면, 사라호의 피해 상황은 사망 528명, 실종자 304명, 부상 2,218명, 이재민 39만 명, 건물피해 121,537호, 선박전파 291척으로 집계되며, 전체 피해액은 129억 원으로서 이 당시 경제 규모로 볼 때 GNP(국민 총생산)의 5%에 이르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사라호는 우리 나라에 홍수 피해가 있을 때마다 길이 기억될 것이다.

    나는 창세기에 있는 노아 홍수 이야기를 읽을 때 마다, 내가 겪은 사라호 충격을 늘 기억하게 된다. 물론 피해 상황을 보면, 사라호는 노아의 홍수에 비교될 수 없이 너무나 작은 것이었다. 노아의 홍수 때 비는 40일 간 내렸으며, 물이 온 세상을 1년 정도 덮고 있었다. 그렇지만, 피해 규모와 상관없이 <타이타닉>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의 절망과 공포를 이 홍수 기사를 읽을 때 늘 실존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보면, 여기에는 일반적인 홍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주제들이 제시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홍수는 하나의 천재지변이지만, 노아의 홍수에는 더 깊은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우리는 가끔 노아를 주인공으로 생각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세상의 악과 죄인을 심판하기 위하여 홍수를 보내기로 결심하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하시고, 방주에 들어가라 명하시고, 방주에 있는 노아를 기억하시며, 노아로 하여금 방주에서 나가라 명하시고, 노아에게 다시는 홍수 심판 같은 것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즉 노아 보다 하나님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시다. 노아는 단지 조연에 불과하다. 물론 하나님의 조연이지만….

    이 이야기는 세계 최고의 홍수를 통해 하나님의 속마음과 같은 생각과 뜻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인류 역사에 특별한 의미를 전해 주는 홍수 이야기이다. 옛날 옛적에 있었던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홍수 심판 예고와 노아의 방주 건설(6:9-22)


    1) 노아의 의(6:9-12)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라는 말씀으로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는 이야기가 일단 마무리되며(5:1-6:8), 창세기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됨을 알려준다. 노아는 새 시대의 주인공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장차 방주를 타고 홍수의 혼돈과 공허를 건너 하나님이 새롭게 만드실 세계를 열어갈 자이다. 이리하여 나래이터는 노아를 그 시대의 사람들과 비교하며, 노아의 \의\(9-10절)와 \모든 육체의 폭력\을 강하게 대조하고 있다(11-12절).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9절)는 노아가 당시대의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 세 가지 관점에서 그려준다. 노아는 세례 요한(막 6:20)과 시므온(눅 2:25)처럼 \의인\이었으며, 아브라함(창 17:1)과 욥(욥 1:1)처럼, \흠이 없이 완전하였고\, 에녹처럼(창 5:22,24)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다. 이 세 가지 성격은 구약성서가 바라본 한 신자의 이상적 모습이었다. 우리들은 자식들에게 \공부 잘 하라\고 날마다 타령하고 빌고 위협하지만, 구약의 신앙은 입신 출세를 지향하고 있지 않다.

     

    (1) \노아는 의인\이라고 할 때 이것은 노아가 어떤 추상적인 도덕 규범이나, 윤리 규범을 완전히 지키고 있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닮은 자\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웃과 건강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시 1, 15편). 노아는 바리새인처럼, 형식적 규범을 치밀하게 따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닮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의인은 이 세상에서 고고하게 독선적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 속에서 살며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공동체를 세우는 자이다.

    (2) \노아는 완전한 자\라고 할 때, 이것은 노아가 세상의 도덕과 윤리적인 잣대에서 어떤 절대적인 완전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도 아니며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동물이 무흠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흠이 없다\는 뜻이다(출 12:5; 레 1:3, 10; 3:1 등).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질 수 있는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노아는 \온전하며, 건전하고, 솔직한 모습\을 지녔음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실 때 노아는 사랑스럽고 친근감이 가며 자신의 비밀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3)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는 말은 노아가 왜 \의인\이며 \완전한 자\인지를 설명해 준다. 노아가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은 그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며, 다른 사람보다 성품이 천성적으로 어질고 착하였기 때문도 아니다. 그도 보통사람이었지만, 늘 하나님의 친구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즐겼으며, 하나님과 교통했기 때문에 노아는 점점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갔을 것이다. \의인\이요,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서의 노아는 역사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된다. 하나님께서 옛 세상을 버리시고 새로운 세상을 구상하실 때, 노아는 새 출발을 만드는 자가 될 것이다(고후 5:17).


    노아의 \의\는 그가 살고 있던 세상이 어두웠기 때문에 더욱 빛났다. 그 당시 세상은 \부패하였고\ 또한 \폭력이 만연하였다.\ 여기에서 \부패함\(개역, \패괴함\)이란 단어는 다섯 번이나 나타나 철저하게 썩은 세상의 모습을 그려준다. 특히 이 단어는 옷이 더러운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된다. 마치 모든 사람이 누더기와 걸레를 걸친 것처럼 방탕하고 더러워졌다. 귀부인들은 아름답고 비싼 옷을 걸치고 다니지만, 그 속은 부정부패로 물들어 마음이 더러워졌으며 진실이라고 강변하지만 화려한 거짓말 잔치만 벌이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그 당시의 세상은 \폭력\이 가득 찼다. 여기에서 \폭력\(hamas)은 강한 단어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완력 뿐 아니라 제도나 법이나 권력으로 한 사람이나 한 그룹을 침범하며 해를 가하고, 희롱하며, 약탈하는 것을 뜻한다(창 49:5; 신 19:16; 잠 16:29). 강자가 약자를 약탈하고 짓밟으며, 공동체가 붕괴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힘이 있는 자들은 공의와 정의를 사랑으로 세워가야 했지만, 모두 물질과 권력에 눈이 어두워져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만을 이루기 위해 혈안이 되고 공동체를 질식시켜 가고 있었다.

    이리하여 원래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던 세상(창 1:31)은 이제 전적으로 \썩었으며\ 이 세상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들과 그가 손수 만드신 짐승들로 가득 차길 원했지만(창 1:26-28) 오히려 \폭력배\와 \모리배\로 가득 차게 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높은 기대를 가졌던 인간들이 그의 의도를 철저하게 배신하였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바램을 무산시켰다. 이것은 후대 이스라엘의 비극이기도 하였다(렘 3:19, 20). 이리하여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금이 갔고, 둘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하나님이 보시니 정말 썩었더라\(12절)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이 묘사된다. 하나님의 파토스가 깊다. 그는 분노하는 독재자가 아니라, 아픈 마음을 가진 부모와 같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소외되었음을 아파하신다. 그는 비분강개하기 보다 슬퍼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묘사하는 참 하나님의 모습이시다. 그는 오래 참으시며, 인자하시며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찬 분이시다(출 34:6).


    2) 방주 건조 명령과 노아의 순종(6:13-22)


    이 세상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부패와 폭력이 하늘에 닿았을 때, 하나님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상의 악을 제거하시기로 결심하신다. 13절의 \멸하다\(mashitam)는 12절의 \부패하였다\(hishit)와 언어의 유희를 이룬다. 인류는 땅에서 부패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 썩은 부분을 도려내신다. 그 수술은 철저하다(창 13:10). 세상의 폭력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육체의 종말을 선언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지 않는다. 그는 노아에게 구원의 계획을 알리시며 노아를 통한 새 출발을 준비하신다.


    (1) 홍수의 이유(13절)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다. 홍수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연설(혹은 말씀)이 네 번 나타난다(6:13-21; 7:1-4; 8:15-17; 9:1-17).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노아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노아가 한 첫 마디는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지어다\이다(9:25). 노아는 방주를 만들면서도 아브라함이 모리야로 갈 때처럼 침묵 중이다. 홍수 기사에는 하나님과 노아 사이의 대화도 없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노아는 시행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부 정보를 주신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에 대해 말씀을 주시는 것 같다. 그러나 아브라함과는 달리 노아는 항의하지 않는다.


    (2) 방주의 규격(14-16절)

    \방주\(teba)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노아의 배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며, 단 두 번 모세를 담은 \광주리\를 가리킬 때 다시 사용된다(출 2:3, 5). 여기에 예표적인 의미가 있다. 즉,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물에서 건짐 받은 것 같이, 모세도 같은 운명에서 건짐 받았다. 모세의 구원체험과 노아의 구원체험이 유사하다. 우리도 이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음의 물에서 건짐 받을 것이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방주\는 노아와 모세가 구원받기에 충분한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노아의 방주를 짓는 나무(gopher wood)로 사용된 목재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단지 여기에만 한 번 나타나기 때문에, 확인하기 힘들지만 학자들은 \잣나무\(cypress)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배를 만들라고 명하신 것은 그가 배를 만드는 전문 조선사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의 후손들은 농사, 음악, 동철 기술자였지만, 노아는 전문적인 조선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배짓는 규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방주의 크기는 약 450피트 길이와 75피트 넓이와 45피트 높이로 만들어진다(15절). 방주는 3층으로 만들어지며 여러 개의 방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16절에 따르면, 작은 문들이 여러 개 있었다. 이 창문으로 빛과 공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붕을 전체로 덮어 비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노아 방주의 모양은 현대의 배와 같지 않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에 나오는 우트 나피쉬팀의 배처럼 정사각형도 아니다(정방형 120규빗). 벤 우리(M. Ben-Uri)는 방주가 길고 납작한 상자로서 그 두 끝은 마름모꼴이라고 한다. 약 6,000톤의 무게로서 약 15,000톤을 실을 수 있는 배로 본다. 어떤 이는 노아의 방주가 퀸 엘리자베스 2호(Queen Elizabeth II) 보다는 작지만, 콜롬버스의 배들(Nina, Pinta, Santa Maria) 보다는 더 큰 것으로 본다.


    (3) 홍수 선언(17절)

    배의 모양이 어떠했든지 간에, 이 배는 8명의 사람과 수천 마리의 짐승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생물이 다 죽을 때, 그 안에 있는 사람들과 짐승들은 목숨을 건진다.


    (4) 하나님과 노아의 언약(18-21절)

    홍수가 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내가 내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너무나 돌발적이다. 우리는 이 앞에서 \언약\이란 단어를 본 적이 없다. 물론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는 분명히 \언약\이 있었을 것이다. 아담은 제사장으로서 에덴 동산을 지키고 가꾸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리고 언약은 파기되며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과 땅에 임했다. 이제 하나님은 노아와 \내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 하나님의 헌신은 홍수 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맺은 것(창 9:8-17)이 결코 우발적이 아님을 보여준다. 노아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홍수가 끝나자 비로소 이 언약의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9:8-17). 그렇지만, \내가 내 언약을 세우겠다\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 분명할 것이다.

    노아의 방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짐승들도 포함한다(19절). 대표적인 암수 짐승들이 완전한 구원을 얻는다. 노아는 모든 짐승을 각기 한 쌍씩 방주로 들인다. 여기의 한 쌍은 최소수를 가리킨다. 그러나 모든 짐승들은 자발적으로 노아에게 나아온다. 그가 짐승들을 잡으러 다니지 않는다. 그들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왔든지 혹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였을 수 있다.


    (5) 노아의 순종(22절)

    방주를 만드는 데 하나님은 아주 세밀한 지시를 하며, 노아는 빈틈없이 순종하고 있다. 이것은 성막을 만드는 기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출 25-39장). 즉 노아나 모세는 \모든 뜻\을 다해 순종하였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6:22).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모습에 대한 틸리케의 관찰이 흥미롭다. \날씨가 그렇게 청명했을 때,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예언자들과 정치가들은 태평성대를 예언하였다. 이때 노아는 마른 땅 위에 방주를 만든다. 밤이 되면 청춘 아베크들이 이 이상한 배를 보려고 산책 나왔다. 별난 늙은 성자를 조롱하였다.\

    노아도 방주를 지으면서 고민하였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합리성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노아는 \마른 땅의 선박의 제독\으로 놀림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였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상식 선에서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순종한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루어야 할 이상이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즉각적인 순종을 하는 백성이어야 했다.

    사람들은 하늘의 구름이나, 폭풍이 오는 것을 보고 배를 지으려고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일찍부터 순종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아의 믿음은 자라는 믿음이었다. 우리는 임종의 순간에 즉각적으로 믿어 구원받는 것을 생각하지만, \어떻게 씨앗을 뿌리고 동시에 거기에서 열매를 거둘 수 있겠는가?\ 노아는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는 믿음의 비밀을 아는 자였다.


    2.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7:1-24)


    1) 방주로 들어가라는 명령(7:1-5)


    (1) 노아의 의(1절)

    저자가 앞에서는 노아의 온전함을 소개했는데(6:8, 9, 22), 이제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노아를 소개하신다(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음이니라-1절). 이 구절은 6장 5절, 6장 12절과 강한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이 두 곳에서 뭔가를 \보신다\ 앞에서는 세상의 악과 부패를 보시고, 여기에서는 땅에 있는 한 명의 의인을 보신다. 두 번째로 노아는 \의인\으로 소개된다. 그는 당대의 모든 사람들과 대조된다. 이 반복을 통해 저자는 \악인의 심판과 의인의 구원\이라는 기본적인 신학적 모티프를 강화해 간다.


    (2) 정결한 짐승 보존 명령(2-3절)

    이제 노아는 수많은 조롱 속에서 방주를 완성하였다. 그가 방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최종적이며 보다 세부적인 가르침을 주신다. 앞에서는 짐승의 한 쌍을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암수 일곱 쌍을 데리고 가라고 명하신다. 우리는 이런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문서가 다르다고 하지만, 앞에서의 한 쌍은 최소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또한 여기의 \일곱\이 문자 그대로 \일곱 쌍\인지 혹은 \여럿\인지도 분명치 않다(삼하 2:5; 왕하 4:35; 뒤에 나오는 7:13-14 주석을 보라). 여기에서 정한 짐승이 더 많이 필요한 이유는 홍수 이후에 그들이 스스로 번성해야 할 뿐 아니라, 번제로 사용되어야 되었기 때문이다(창 8:20).


    (3) 하나님의 홍수 예언: 홍수 7일 전(4절)

    노아는 한 주 전에 경고를 받는다. 여기에서 \비를 내리다\는 계절 비를 가리키며, 맹렬한 소나기가 아니다. 이 폭우가 무서운 이유는 40일 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의 숫자는 문자적일 수 있고 또 비유적일 수 있다. 문자적으로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을 지내며(출 24:18), 예수께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것처럼 비가 40일 내렸다(마 4:2). 비유적으로 본다면, 노아가 \사십 주야\ 동안 폭우 속에서 산 것 같이(7:4), 후에 이스라엘은 40년 간을 광야에 산다. 이렇게 보면, 여기의 40주야는 이전에 한 번도 없었던, 가장 파괴적인 기간으로 제시된다. 폭우와 광야는 같은 이미지를 지닌다(창 1:2).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고 주님은 심판 말씀을 반복하신다(6:7). \쓸어 버리리라\(mahah)는 단어는 강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신 최후의 말씀이다. 그는 약 1년 후 홍수가 끝나자 다시 \방주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4) 노아의 순종(5절)

    다시 한번 더 노아의 순종이 강조된다(5절). 저자는 지치지 않고 노아의 순종을 부각시키고 있다. 노아의 삶은 \침묵\과 \순종\으로 특징지어진다. 박윤선 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신 \침묵정진\이 노아의 삶이었을 것이다.


    2) 홍수(7:6-24)


    저자는 방주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노아의 나이, 비가 오던 달과 날, 물이 어디서 나오는지, 동물의 종류와 수를 말한다. 그는 노아의 구원에 중심 관심을 갖고 있다. 이 기사의 마지막 부분으로 와서야 비로소 방주로 피하지 않았던 자들의 운명을 언급한다. \그들은 다 죽었더라\(7:22).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7:23).


    (1) 홍수 시작과 40일 주야 동안 비가 땅에 쏟아짐(6-12절)

    이제 하나님께서 파국적인 심판을 집행하신다. 모든 죄인의 세대를 다 죽게 하여, 다음 세대로 장차 올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경고를 받게 한다. 방주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닫아 넣으셨고, 방주 밖에 있는 자는 모두 죽었다. 노아는 새 시대를 향하여 심판의 물결을 가르고 항해한다. 홍수의 파국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가지신 뜻은 노아를 통해 이어질 것이다.


    (2) 주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심(13-16절)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16절)고 말한다. 그 동안은 \하나님\이 계속 주어로 나타났는데(6:12, 13; 7:9; 8:1 등), 왜 갑자기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가 여기에 나타나는가? 저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바꿈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은 노아에게 명하시지만, 구속주 여호와는 노아 방주의 문을 닫아주시고 그를 보호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정통적인 문서설에 따르면,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간 것을 묘사하는 두 개의 중복된 기사는 다른 문서에서 나왔다고 한다(7:7-9[P]; 16-16[J]; 조화선, 이용걸 편 <성서와 함께> 128-9쪽을 보라). 그러나 케슬러(Kessler)는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을 잘 제시한다.

    ① 두 기사 모두 동물들을 네 개의 범주로 나눈다.

    ② \정과 부정\은 두 곳에서 모두 반복되며, 제사문서의 전형적인 표현인 \암수\ 역시 두 기사에 다 사용되고 있다.

    ③ 두 기사는 동물들이 \노아에게로 오다, 방주로\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순종 형식으로 마 무리 된다.

    ④ 두 번째 기사는 첫 번째 기사 보다 더 상세하게 발전되며, 정확하게 헤아리고 있음을 보 여준다.

    ⑤ 두 기사는 모두 소위 \제사 문서\(P)로 여겨지는 창세기 1장의 어휘들, 즉 \땅\(1:25), \ 짐승\(24절), \암수\(27절), \종류\(12절), \기는 것\(24절)들을 문자 그대로 빌려온다.

    ⑥ 이 두 기사는 열거형식의 문체를 따른다.



    따라서 두 기사는 서로 상충적인 것이 아니며, 저자가 \의도적인 변화\를 시도한 것으로 본다. 그는 유사한 기사를 번갈아 가며, 중복하여 씀으로써 마치 히브리 시의 특징인 평행법을 따라 진술해 가는 것 같다(Kessler, \Rhetorical Criticism\ 8-9).


    (3) 40일 간의 홍수와 산들이 다 잠김(17-20절)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가자 말자, 무서운 홍수가 터진다.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방주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방주 밖의 상황만 묘사되고 있다. 저자는 폭풍과 폭우가 쏟아지지만, 방주는 침몰하지 않았음을 관찰하고 있다(18절). 노아는 바벨론의 홍수 기사에서처럼 항해사를 태우고 있지 않다. 그는 식구들만 태웠고, 항해를 위한 장비도 없었다. 노아가 살아날 수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을 것이다. 물은 높은 산을 모두 덮었고, 또 물이 더 불어나서 15규빗, 즉, 45피트 더 높아졌다(19-20절).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다.


    (4) 모든 생물들이 다 죽음(21-23절 상)

    저자는 모든 짐승들이 다 \망하고, 죽고, 쓸어버림을 당하였다\고 한다. 홍수는 너무나 방대하고, 너무나 오래 지속되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모든 짐승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창2:7). 이제 세상은 원죄로 저주를 받았고, 자범죄로 모두 심판을 받는다. 사람들의 죄의 무서운 영향으로 모든 짐승들이 다 죽는다.


    (5) 오직 노아 식구들만 생존함(23절 하)

    반복을 통해 저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명료하게 한다. 홍수에서 살아남은 자는 \주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자들이었다(6:22; 7:5, 9, 16).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여기에서 노아는 순종과 구원의 모범이 된다. 후에 아브라함(창 21:4)과 이스라엘 사람들(출 12:28)도 같은 교훈을 따르라고 말한다.


    (6) 물이 150일 동안 땅에 넘침(24절)

    어디를 보아도 물 밖에 보이지 않는다. 노아는 다섯 달 동안이나 방주를 타고 다닌다. 이 기간동안 그와 그의 가족들은 마른 땅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방주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옛 친구들을 그리워하였을까? 그들은 홍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고 믿었을까? 그들은 어떤 구원의 희망을 가졌을까? 이 세상은 정말 끝장인가? 아니면 새로운 출발이 있을 수 있을까? 새 출발의 기회가 온다면, 정말 새롭게 살 수 있을까?


    3. 명상


    우리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읽으면서 뭔가 새로운 것들을 찾으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마지막까지 다 읽고 보면 이 이야기도 성경의 다른 이야기들과 별로 다를 바 없이 같은 패턴 속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타락하고 하나님은 후회하시고 세상을 심판하려고 결심하시며 노아를 선택하시고 그와 그의 식구들과 여러 짐승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하신다. 이런 긴 과정은 성경의 어느 이야기에나 나타나는 패턴처럼 느껴진다. 방주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도 저자는 길고도 상세하게 그 규격을 지루하게 묘사하며 노아가 600세 되던 해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그치지도 않고 150일 동안이나 온 세상을 덮어 가는 과정을 지루하게 묘사해 가고 있다.

    \왜 저자는 이렇게 도 지리멸렬하게 홍수 심판의 과정을 묘사했을까?\ 현대의 성급한 독자들은 온 세계가 철저하게 망하고 소수의 사람들과 다수의 짐승들이 1년 동안이나 방주 속에 갇혀 사는 이야기조차 단숨에 읽어 버리려고 하는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저자는 이 깊은 지루함과 적막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믿음을 우리에게 키워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