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강해 / 불타는 업적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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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강해
나라들에 대한 심판 선고
(암 1:3-2:16)
| 김태훈 |
1. 서론
성경은 설교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구절은 설교되지 않는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 적용하기가 쉽지 않아서, 내용이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무관한 것으로 보여서 그렇다. 성경은 읽혀져야 한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읽기가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은혜롭고 위로가 되는 구절에는 익숙해져 있고, 개인적 영성에 도움이 되는 구절에는 관심을 가지지만, 역사적 사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구절, 사랑한다는 말이 아닌 온통 심판의 이야기만 있는 구절, 오늘의 일상적인 삶과는 무관하게 보이는 구절, 혹은 성경은 오직 종교에 대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구절들에 대해서는 읽을 때 괜히 부담을 느낀다. 어떤 분이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를 분석한 일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오바댜서는 한 번도 설교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모스서 역시 비슷한 경우가 아니겠는가? 아모스서의 어떤 부분이 익숙하고 어떤 부분이 익숙하지 않는가? 사실 아모스서의 어떤 부분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우리에게 익숙한 혹은 유익하게 생각되는 부분만 연구되거나 읽혀져야 하는가?
성경 읽기는 읽는 사람들의 관심도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 지가 성경 읽기와 해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성경이 소설이 아니고 하나의 문학 작품을 넘어가는 하나님의 말씀인 한 이색적이더라도, 소화하기 쉽지 않더라도 한 구절 한 구절 연구하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본문을 해석하기 앞서 이런 식의 서론을 붙이는 이유는 이 글을 쓰는 사람을 갈등을 반영한다.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본문은 아모스서에서도 가장 읽기 어려운 부분이다. 내용이 거칠어서,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받아들이기에 부담스런 면이 있어서, 또 흥미를 가지고 읽으려 해도 생소한 지명과 인명이 반복되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다. 요즈음 성경 다독이 권장되는데 이런 본문은 아무리 여러 번 읽어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본문에 속한다. 큐티 본문으로 선택되기도 부담스러울 것 같다. 그러니 이 부분은 그냥 넘어가야 하는가? 아니다. 이 본문 역시 아모스와 그 시대사람에게는 심각한 부분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다음에는 어떨지 몰라도 이번에는 한번 자세히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읽는 이 심판의 본문들이,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기 때문에 우리와는 별 관계가 없는, 언제나 잠을 자고 있는 말씀 중에 속했으면 한다.
2. 본문 주해
구약의 예언서 중 오직 아모스서만이 \나라들에 대한 신탁\으로 예언을 시작한다.1) 그 내용은 국가 권력,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 그리고 스스로 성공한 자리에 앉아 있다고 세상적 관점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내리는 불이다. 처음의 일곱 신탁은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에 대한 것이며 나머지 하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선고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 신탁들이 공통적인 문학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1) 시작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2) \~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3) 범죄 내용
4) 범죄에 대한 심판 선고
5) 종결어 \여호와의 말씀\(두로, 암몬, 유다의 경우에는 생략)
아모스의 선포는 \메신저 스피치\(messenger speech) 형식을 취한다. \메신저 스피치\ 란 왕에 의해 파송된 대사가 자기 권위가 아닌 보낸 왕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어법을 말한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자가 되어, 말은 예언자가 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시는 형식을 취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코 아마르 야훼), 여호와의 말씀(아마르 야훼, 혹은 느움 야훼)
이 두 표현은 괄호 역할을 하며 그 안에서는 여호와가 일인칭으로 직접 말씀한다. 그 기능은 대개 1) 예언자가 누구의 말을 하는 것인가를 알려주는 것, 2) 선포되는 말에 신적 권위를 주는 것, 그리고 3) 누구의 말인가를 밝혀 듣는 사람들을 주목케 하는 것이다.2)
서너 가지
\서너 가지\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셋 혹은 넷을 가르키기 보다는 다중적, 반복적, 혹은 만성적인 죄에 대한 숙어적 표현이다.3) 그러므로 성경을 읽으며 과연 몇 개의 죄를 범했는지 헤아려 볼 필요가 없고 범죄의 수가 맞지 않는다고 의아해 할 필요도 없다.
죄로 인하여
\죄로 인하여\에서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페샤\(פשע)다. 기본적인 뜻은 종교적인 의미 보다는 정치적 의미의 \반역\ 혹은 \반란\이다.4) 이 단어는 시리아-팔레스틴 지역의 소규모 나라들에게 익숙한 단어다. 그들은 앗시리아의 무거운 조공이나 내정 간섭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조공을 중단하거나 군사적 동맹을 맺곤 했다. 그들의 행위가 앗시리아의 입장에서 \반역\이 되는 것이다. 결과는 대규모 군사침공, 철저한 파괴, 왕의 제거, 백성들의 이주 등이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세계적 계약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군소 국가들에게, 종주국 앗시리아에게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의 한계선이 있는 것처럼, 주권자이신 여호와에 대하여도 반역 행위로 여겨지는 행위가 있다는 것이다.
왕들이 주권이 군주에게 있다고 자기들 좋은 대로 행하지만 군주의 군주이신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여호와의 권위에 대한 도전, 여호와가 정해 놓은 한계를 넘어가는 것으로 본다. 나라들이 여호와의 권위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들에게 정해진 한계는 있고 책임은 반드시 물게 된다. 세계의 주권은 여호와께 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국가는, 역사는 없다. 이 세계에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으며, 그 분은 세계의 주인이며 심판자이다.
그러므로 이 여덟 개의 신탁은 몇 가지 오해를 풀어준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과만 관계를 한다는 오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사람에게는 종교적 책임만 물을 뿐 일반적 윤리 책임은 중요하지 않다는 오해, 하나님은 나라들의 정책이나 행위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다는 오해, 하나님은 교회 종교 문제만 관여하신다는 오해를 풀어준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권위도, 그것이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종교적이든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반역자라는 말을 굉장히 싫어한다. \배교자\라는 말도 싫어한다. 교회는, 교인들은, 무엇보다도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지금하고 있는 일들을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자기 눈에는 옳게 보여도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 행위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은 돌이키는 하나님이다. 그 분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않으신다(시 103:8-10). 여호와의 진노는 자주 무효화되고 연기된다. 요나의 심판 선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욘 4:2) 아합의 죄는 그가 회개할 때 연기되었고(왕상 21:28) 유다의 죄악에 대한 심판도 요시아의 겸손과 통곡으로 다음 세대로 미루어졌다(왕하 22:19-20).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오용해서도, 오해해서도 안된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으로서 은혜로운 분이시며 은혜로운 그 하나님은 의로운 하나님이시다. 죄악을 범할 뿐 아니라 돌이킬 마음조차 없는 세대와 사람들에 대하여 여호와 역시 그에 대한 벌을 결코 돌이키지 아니하신다. 이제 한 절 한 절 읽어가며 설명하고 생각해 볼 차례다.
1) 아람의 반역(1: 3-5)
다메섹
다메섹은 동부 시리아에 위치한 아람 나라의 수도다. 아람은 역사적으로 다윗에 의해 정복되었으나(삼하 8:6) 솔로몬 때 독립하였으며(왕상 11:23-25), 주전 9세기와 8세기에 걸쳐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경쟁국가로서 전쟁을 하던 나라이다. 히브리어 성경에서의 아람은 초대 교회의 구약 성경이었던 헬라어 번역판 칠십인역 성경에서는 시리아로 번역된다. 한글 신약 성경의 수리아가 바로 구약 성경의 아람이다. 길르앗은 나무가 많은 산악 지대로서 레바논의 갈멜산과 함께 호화로운 삶을 상징할 때 쓰인다(렘 22:6; 50:19). 길르앗은 요단 동편, 아래로는 사해 바다, 위로는 바산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요단강을 접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러나 보다 넓게 이스라엘 전체를 지칭하기도 한다(왕하 10;33). 다메섹의 여호와에 대한 반역은 그들이 끝에 철이 붙은 타작기로 밀을 타작하듯 길르앗을 억압하였다는 것이다. 아마 이 구절은 길르앗의 사람들을 땅에 눕힌 후 소가 끄는 철 타작기가 지나가게 했다는 뜻으로, 혹은 보다 가능성있는 것으로서 아람군대가 마치 밀을 털 듯 길르앗에서 극악무도한 행위 혹은 착취를 감행했음을 뜻한다(참고. 왕하 10:32-33).
하사엘의 집 벤하닷의 궁궐
다마스커스의 하사엘은 벤하닷(II?)을 살해함으로써 아람을 통치하게 된다. 후에 하사엘의 아들도 그가 왕위에 나아가는데 그 이름이 벤하닷(III?)이다. 뜻은 바알 종교의 폭풍신 하닷의 아들이다. 아마 애굽 왕이 \바로\라는 칭호를 쓰듯 아람의 왕위도 \벤하닷\이었던 것 같다. 열왕기하 8장 7-15절은 하사엘의 즉위와 행위에 관해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이스라엘 성들에 불을 놓고 젊은이들은 칼로 죽이고 어린 아이를 메쳐 죽이고 아이 밴 여인들의 배를 갈랐다. 궁궐은 히브리어 아르므노트(ארמנוח)로서 거대한 집을 뜻하는 헤칼(성전, 궁전)과는 달리 요새화된 왕의 성채를 뜻한다. 일반적으로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하고,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도 한 국가의 중심부이며, 수많은 석조물, 연이은 호화로운 건물들로서 왕들에게 자부심을 일으키는 문화의 대명사이기도 하다.5) 군사적으로는 나라 최후의 보루이며 가장 강한 성이며 적의 군대로부터 보호된 역사들을 가지고 있는 산성이다. 그러나 여호와로 말미암아 그들은 불에 타는 지푸라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어떤 성채도 여호와의 공격을 견뎌낼 성채는 없다. 하사엘 가문이 앗시리아의 공격을 막아내었다고 자긍할 수 있으나 여호와는 앗시리아가 아니다. 그분은 능히 당할 수 없는 화공이며 충각(衝角)이다.
빗장을 꺽으며
빗장은 방어를 위해 성곽의 입구에 설치된 거대한 목재 대문이나 금속 대문이다. 오랜 포위와 계속되는 공격은 결국 이 대문을 돌파하기 위한 것이다. 결국 성채의 빗장은 깨어지고 적군들이 성 안으로 들이닥치며 보복과 살인이 자행된다. 주기적인 공물의 헌납을 약속하는 것으로도, 수많은 선물로도 막을 수 없이, 오직 완전한 굴복을 받아내기 위해 성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앗시리아인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 같다. 아모스는 단순한 전쟁의 패배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파멸을 말한다. 야전에서의 패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마을의 점령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핵심부, 성곽의 파괴를 말한다. 지도자는 죽임을 당하고 백성은 딴 곳으로 이송된다. 그리고 한 국가의 운명은 끝을 고한다. 한 국가의 가장 고상하고 높은 곳 아르므노트(요새화 된 궁궐)는 가장 높으신 분 앞에서 가장 비천한 운명에 처한다. 누가 하나님 앞에서 강함을 자랑할 수 있는가?
아웬 골짜기, 벧에덴, 길
다마스커스와 아람 외에 세 개의 이름이 더 나온다. 아웬 골짜기는 어느 곳인지 알 수 없으나 아람의 중요한 지형임에는 틀림없고 \벧에덴\은 앗수르 문서의 \비트 아디니\로서 아람 북쪽에 위치한다(왕하 19:12; 겔 27:23). 이들 도시에는 더 이상 사람들이 살지 않게 되며 지도자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길( :키르)은 아람이 기원한 곳으로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것과 같다(암 9:7). 그러므로 도시 명 \길\은 옛날의 부끄러운 날, 미미하던 날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6)
2) 블레셋의 반역(1:6-8)
블레셋은 다섯 개의 도시 국가, 아스돗, 아스글론, 가자, 에크론, 갓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자가 제일 먼저 나오는 이유는 이 도시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가자는 아모스 당시에 상업적으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갓\은 블레셋 다섯 도시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본문에 언급되지 않다. 아마 아람왕 하사엘의 정복 때에 상당히 약화되었고(왕하 12:18) 이 당시는 아스돗 혹은 유다의 지배 하에 있었을 것이다(대하 11:8). 다른 예언서에서도 갓이란 이름이 생략된 경우가 있는데(렘 25:20; 습 2:4; 슥 9:5-7) 이것은 주전 9세기 이후 갓이 독립적 위치를 누리지 못하고 있었음을 반영한다. 심판의 이유는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붙인 것이다. 즉, 사람들을 붙들어 노예화하고 인신매매한 것이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이런 행위들은 사형에 해당한다(출 21:16).
에돔은 블레셋으로부터 사람을 사와서 탄광이나 배 건조, 농사일 등에 쓰고 또 사람을 물건처럼 되팔아 넘기기도 했다.7) 그러나 이 노예들은 그 당시 사회가 어떻게 규정한 것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다(cf. 출 23:9).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힘 있는 사람의 이익을 위해 힘 없는 사람을 짐승이나 도구처럼 오용하거나 남용하는 것이다. 이 주제는 여덟 개의 신탁 모두에 어떠한 형식으로든지 들어 있고, 아모스 전체를 통틀어 나타나는 중요한 주제다. 사람은 물건이 아니고 사람은 물건처럼 사고 파는 대상이 아니며 짐승처럼 다루어져서는 안된다. 블레셋 도시들에게 임한 판결은 위의 다른 도시들과 같은 형식을 따르는 바 도시들은 파괴되고, 권력의 핵심인 궁궐들은 불타고 지도자들은 죽임을 당하고, 주민들은 멸망한다.
3) 두로의 반역(1:9-10)
두로는 지중해와 바벨론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무역도시국가였다. 주전 8세기 이후 경제적 중심지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들은 지중해를 통하여 유럽 아프리카와 무역했고 앗시리아에 중요 자원들을 공급하는 중개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들의 범죄 행위는 형제 계약을 잊었다는 것이다. 아마 이스라엘과 두로 사이에 존재해 왔던 오랜 관계(다윗, 솔로몬, 아합)를 말하는 것 같다. 다른 범죄 행위는 그들이 노예들을 노예 무역의 중개업자인 에돔에 팔아 넘겼다는 것이다(참고 욜 3:6; 겔 27:13). 반역의 대가는 행정의 중심부인 궁궐이 불로 파괴되는 것이다.
4) 에돔의 반역(1:11-12)
에돔은 요단 동편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모압과 국경을 접하며 남으로는 아카바만에 연결된다. 에돔은 이스라엘과 좋지 않은 관계를 맺어 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 시대에 평화로운 통과를 요청했으나 오히려 칼을 받아야 했다(민 20:14-21; 특히 18, 20절). 사울(삼상 14:47), 다윗(삼하 8:12-14), 솔로몬(왕상 11:14-25), 여호람(왕하 8:20-21), 아마샤(왕하 14:7-10), 아모스와 동시대인 우시아(왕하 14:22)는 에돔과 적대 관계를 맺었다.
그후에도 에돔과 이스라엘은 여호람의 즉위 이후 바벨론 포로기까지 지속적인 원수관계로 남아 있었다(사 34:5-17; 욜 3:19; 렘 49:7-22; 시 137:7; 오; 애 4:21-22; 말 1:2-5). 데만은 남단의 주요도시 보스라는 북단의 주요 도시다. 두 도시 모두 다마스커스에서 아카바 만에 이르는 왕의 고속도로 상에 위치한다. 그들의 반역죄는 세 가지인데 칼로 형제를 쫓아간 것, 긍휼을 버린 것, 그리고 노가 항상 맹렬하며 분을 끝없이 품은 것이다. 에돔은 실로 이스라엘의 형제였다(창 25:24-26). 그러나 그들은 원수 관계로 살았다. 댓가는 앞의 경우에서처럼 불의 심판이다.
5) 암몬의 반역(1:13-15)
암몬은 요단 동편 얍복강 남부의 왕국으로 길르앗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왕의 고속도로가 이 왕국을 관통하여 지나간다. 그들은 길르앗 쪽으로 영토를 넓히고자 이스라엘과 종종 전쟁을 했다(삿 3:12-14; 10:7-9, 17; 11:4-33; 삼상 11:1-11; 14:47; 삼하 8:12; 10:1-11; 대하 20:1-30; 24:26). 사사 시대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원수 관계를 지속하였으나 아모스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지배 하에 있었다(왕하 14:25). 주전 7세기 내내 앗수르의 봉신나라였고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다. 주요 도시는 랍바로서 오늘의 암만이다.
그들의 반역죄는 지경을 넓히고자 길르앗의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가른 것이다. 그들의 잔인성이 심판받게 되는 원인이다. 그에 대한 벌은 전쟁의 파괴와 불이다. 그들의 왕과 지도자들은 사로잡혀 가게 된다.
6) 모압의 반역(2:1-3)
모압은 사해 동부, 아르논 강과 제렛 강 사이에 위치하며 남으로는 에돔을 북으로는 암몬을 접하고 있다. 성경에 암몬과 형제 나라로 나와 있다(창 19:36-38). 에돔과 모압의 경계를 따라 요새들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두 나라가 오랫동안 적대관계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서로 간의 적대감은 모압왕이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로 만든 사실에서도 잘 나타난다. 뼈를 불살라 가루로 만드는 것은 부활을 막기 위한 행위로서, 모든 사람은 남은 뼈로부터 다시 부활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그 당시 팔레스틴 나라들에 널리 퍼져있던 교리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뼈를 가루로 만드는 것은 부활을 막는 것, 즉 영원한 죽음을 죽게 하는 것이다.8) 그리욧의 궁궐들이 언급된 이유는 메사 비문에 나오는 것처럼 이 도시가 그모스 신을 섬기는 제의 중심지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9) 모압의 지도자들이 받는 벌은 전쟁으로 말미암는 죽음이다.
7) 유다의 반역(2:4-5)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주변나라들이 받을 심판을 차례로 선포한 뒤에 선포의 대상을 중심부로 옮긴다. 유다의 범죄는 다른 나라에 대한 심판 선고와는 달리 그 죄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지적되어 있지 않다. 유다는 자신들의 특권에 의해 심판받고 있다. 율법을 맡고 있으나 율법을 귀하게 여기지도 지키지도 않는 그 일로 심판을 받는다. 유다는 훌륭한 조상들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대부분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르는 삶을 택했다. 입에 담기 어렵게도 심판은 예루살렘의 멸망, 즉 시온 신학, 시온 이념의 멸망을 뜻한다. 하나님은 은혜로 예루살렘에 계셔주시는 분이시지, 예루살렘이 어떤 모습을 가져도 여전히 의무적으로 거기 묶여있어야 하는, 특정한 장소나 종교에 포로가 된 분이 아니다. 은혜가 특권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아모스의 설교를 듣고 있는 북쪽 사람들은 유다가 심판 선고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실에 즐거워했을 것이다. 유다는 자신들만이 하나님이 선택한 나라라고 생각하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법을 떠난 나라라고 비난해 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유다를 비난하는 아모스의 설교에 고무되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 중 어느 쪽이 하나님이 택한 나라인가? 어느 쪽이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가? 야곱의 전승을 가지고 있으며 나라의 이름도 전통적인 이스라엘인가? 아니면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인가?\
남쪽에서 올라온 예언자 아모스는 이스라엘 청중들 앞에서 유다의 자랑인 율법으로 \여호와의 1) 율법을 경시하며 2) 그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3) 조상 적부터 거짓 것(우상)에 미혹되어 하나님을 반역한 나라\라고 유다를 비난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청중들은 유다에 대한 심판 선언에 통쾌함을 느꼈을 것이며 이스라엘 국가의 정통성에 자만했을 것이다. 유다에 대한 선포가 아모스 심판 선고의 절정이며 마지막 선고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칼 끝은 이스라엘로 향하고 있음을 그들은 곧 알게 된다.
2장 6-8절에서 하나님은 아모스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의 반역이 무엇인지 지적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신탁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가장 자세하다.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들 보다 하나님 보시기에 더 반역한 것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가장 많은 사랑을 베푼 나라다. 이름부터 그렇지 아니한가? 이스라엘은 스스로 중심국가라고 택한 백성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들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심판의 중심국가이며 멸망의 본보기가 되는 택한 국가가 되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멸시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택한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된다. 불은 사방에서 붙어오고 이스라엘은 중심국가로서 독 안에 든 쥐 꼴이 된다. 2장 6-8절은 다음 호에서 이스라엘의 사회상과 더불어 주해될 것이다.
3. 설교를 위한 제언
1) 우리의 요새화 된 궁궐(아르므노트)
우리가 읽은 본문들에 나오는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궁궐(히: 아르므노트)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그 나라들의 자랑이었다. 궁궐은 정치적 경제적 핵심부, 문화의 집결체 그리고 인간 성공의 최상부이다. 그러나 그 자랑이 어디에 있는가? 그들이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남들이 그들이 이룬 것을 부러워해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교만을 멸시하신다. 그들이 이룬 것은 실로 바람에 나는 \겨\요 심판에 견디지 못하는 \지푸라기\이다.
우리들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 안전하고 강하고 높은 것 즉, 아르므노트를 지향하곤 한다. 얼마나 올라서고 얼마나 높은 곳에서 누리려고 하는가? 또한 우리가 비교 우위로 누리는 교육, 경제력, 신분 등을 자랑하고 나의 안위처로 삼지 않는가? 그러나 그것이 반역적 행위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 마치 아담과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과 아르므노트의 택일에서 하나님을 버린 결과로서 얻어진 것이라면 심판의 대상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영광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로되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우리의 안전한 성곽, 우리가 이루어야 할 목표로 삼아야 한다. 얻은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얻은 것인지 살필 것이요, 얻지 못한 자들은 세상을 부러워하여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다윗은 군인의 생활을 했다. 수 많은 전쟁에서 성이 깨어져 나가는 것을 보았고 함락되지 않는 견고한 성들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 성들의 강함을 알고 있음에도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성으로 삼았다. \여호와는 나는 요새시라\고 간증하였던 다윗은 가장 강한 요새를 가진 사람이다. 여호와는 지금도 믿고 의지하는 자의 요새시며 모든 화공을 막는 방패시다. 그러나 그 분은 그를 배반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들이 의지하는 물질적, 권력적, 문화적, 정치적 요새를 파괴하는 파괴자시며 불이시다.
바울은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랜 선교사 생활에서 온갖 위험을 겪고 비참한 자신의 삶과 투쟁해야 했고 심지어는 믿는 사람들에게 조차 인정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단 한 분의 위로자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는 부분에서 바울은 자신의 비참한 삶의 투쟁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 본문은 먼저 이렇게 읽혀진다.
\비록 내가 이런 형편에 있으나 나에게는 그리스도만은 있으니 누가 그리고 무엇이 나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나는 지금 환난, 곤고, 핍박 기근 그리고 적신 위험 칼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니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참고 롬 8:35-39).
힘없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이여! 선의 승리를 믿어야 한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높은 것은 낮추시고 굽은 것을 펴시는 분이다. 이것이 우리의 위로이다. 나라들이 추구했던 성공을 성공으로 보고 지금도 추구하는 이들이여! 행위를 살피고 삶의 푯대와 달려갈 길을 수정하라. 그 길이 살길이다.
2)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 약자의 하나님
나라들의 이름이 생소해서 그리고 역사에 익숙하지 않아서 우리의 본문들이 읽히기 어렵지만 가만히 검토하면 나라들의 범죄는 사람에 대한 태도와 관계 있음을 알게 된다. 국가 지도자들의 삶의 방식은, 인간의 잔악성이다. 다메섹은 길르앗 사람들을 밀이나 보리를 털어내는 것처럼 다루었다. 잔악한 살해 혹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살인적인 착취 행위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람들을 노예로 팔아 넘겼다. 어머니의 울음소리, 아이들의 절망소리에 귀를 닫았다. 이것은 옛 이야기가 아니다. 기독교 국가라는 나라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의 경제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을 노예로 잡아와서 매매에 나선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두로는 형제의 계약을 지키지 않은 나라, 노예 매매로 이익을 본 나라였다. 에돔은 형제에 대한 증오(칼), 긍휼을 버린 것, 노를 품고 사는 것으로 정죄되었다.
형제에 대한 긍휼을 잃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암몬은 땅을 넓히고자 아이 밴 여인의 배를 갈랐다. 힘없는 여인들 마저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런 힘도 없는 뱃 속의 아이들 마저 살해한다. 오늘의 전쟁이 땅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가? 강국들은 그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모압은 목적을 위해서 인간의 생명을 진멸해 버렸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다. 하나님이 그 높은 위치를 주셨다. 아모스는 국가 권력 앞에서 그들의 잔악성을 고발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아는 마음과 눈을 가져야 한다. 인간은 상품이 아니다. 인간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착취의 도구도 대상도 아니다. 하나님은 또한 약한 자들의 삶을 살피시는 하나님이다.
의를 이룬다는 명목으로 여인과 태아를 살해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시다. 우리들의 작은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듯 그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다. 보다 적극적인 의미로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생활이란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고아와 과부의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백성들에 대한 태도에 있었다. 사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백성을 희생시킨다(삼상 15:15, 21).
그러나 다윗은 고난받는 자들의 보호자였다(삼상 22:2). 사람을 착취하며 아무리 고상하고 풍족한 생활을 한들 어찌 그것이 성공인가? 사람을 팔고 착취하며 하나님을 부른들 어찌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가? 소위 사회복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참 신앙은 하나님이 특은(特恩)을 주어 만드신 인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또한 하나님이 관심 갖는 사람들에 대해서 관심 갖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 형제, 약자, 이 들은 아모스서에서 자주 반복되는 주제다. 아모스의 설교는 오늘날도 여전히 적용되어야 되고 심각히 받아들여져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3) 심판의 하나님이신 사랑의 하나님
아모스에게 있어서 야훼는 사랑으로 나라들을 불러내시는 분이며 동시에 나라들을 원 위치로 보내는 분이시다. 세우기도 하시고 부수기도 하시며 구원하시기도 파괴하시기도 하는 분이다. 종교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야훼를 섬기는가, 바알을 섬기는가? 하는 것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고 그들의 행위를 문제 삼고 있다. 야훼는 모든 나라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위에 관하여 책임을 묻는 분이다. 철저한 사랑은 죄악에 대한 철저한 미움을 내포하고, 반대로 악에 대한 철저한 미움만이 철저한 신앙 생활을 가능케 한다. 우리는 구원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한다. 그러나 창조주이시자 우리의 심판자이신 하나님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며 신약의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아모스서에서 보듯이 지도자들에 대한 심판은 고난받는 약자들에 대한 사랑을 내포하고 있다. \돌이키라\는 심판 선언은 악한 지도자들마저 기회가 있다는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다. 신약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온갖 고초를 겪어내는 고난받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사랑의 이야기며 온갖 권력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에 대한 심판의 이야기다.
오늘날 하나님은 신앙인의 삶 속에서도 인정받지 못하신다. 신앙인의 불의한 삶은 조금만 신경 쓰면 금방 볼 수 있다. 신문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자신이 처한 공동체에서, 무엇보다 나의 삶 속에서….
거짓과 교만과 자기 성취, 남을 희생시키는 경쟁, 사기, 탐욕, 음란. 수많은 선택의 현장에서 아담은, 가인은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원대로\를 택했다. 이제는 우리에게 회복이 필요한 때다.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그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의 불의를 징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바울은 디모데의 \거짓 없는 믿음\을 칭찬했다. \이는 네 속에 거짓 없는 [필자역, 위선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내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바울 선생은 \경계 [THK, 교훈]의 목적은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딤전 1:5)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신앙인들은 더욱 죄악을 버림이 마땅할 것이다. 하나님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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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위 \나라들에 대한 신탁\(Oracles against Nations) 에 대하여 문학 비평, 양식 비평, 전승사 비평, 신학 비평, 윤리적 비평 등 수 많은 논의들이 있어왔다. Gerhard F. Hasel, Understanding the Book of Amos, 57-69는 이 논제들을 잘 소개해 준다. \나라들에 대한 신탁\을 선포하는 예언서들로는 이사야 13-23, 예레미야 46-51, 스바냐 2, 오바댜 1-6, 나훔 2:14-3:4, 하박국 2:6-17, 3:7-15이다. 그러나 아모스서만이 이 신탁으로 책을 시작한다.
2) Douglas Stuart, Hosea-Jonah, WBC 31(Waco, Texas: Word Books, 1987), 308.
3) 참고 Douglas Stuart, 310.
4) Von Rad, Theology of the Old Testament I, 1962, 263; James L. Mays, Amos(London: SCM Press, 1969), 28.
5) BDB 00851; Douglas Stuart, 311.
6) Douglas Stuart, 311.
7) See N. K. Gottwald, All the Kingdoms of the Earth(New York: Harper and Row, 1964), 94-114.
8) Douglas Stuart, 314-15.
9) 참고 ANET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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