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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아모스 강해 / 불타는 업적들 2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암 1:3-2:16 | 설교자: 김태훈

    본문

    아모스 강해

     

    불타는 업적들 2

    나라들에 대한 심판 선고

    (암 1:3-2:16)


     

    김태훈




    1. 서론



    우리는 지난 호에서 이스라엘 주변국가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행한 반역들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고(1:3-2:5)를 읽었다. 주변국가의 왕들은 호화롭고 견고한 성에서 고상하게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짐승처럼 잔인했고, 사람들을 물건처럼 취급했으며 잔혹한 살인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청중들은 아모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이방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특히 경쟁국 유다에 대한 심판 선고에 우월감을 가졌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유구한 신앙의 조상들을 가지고 있고, 지금도 여호와 하나님을 국가 신으로(명목상이긴 하지만) 믿고 있고, 심지어는 나라 이름까지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이다. 그러나 아모스가 대신 읽은 고소장과 판결문은 주변 국가들의 것보다 오히려 더 중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악한 짓을 하는 것에 더하여 하나님의 이름까지 더럽혔기 때문이다.

    불타는 광경, 타는 냄새, 시체 등의 이야기로 비록 자신들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참혹성에 이미 몸서리쳐 하던 이스라엘은 마치 마지막 심판 날 양과 염소가 나누어지듯 이제 심판의 중심에 서서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말을 듣는다. \너도 염소들이 서는 줄에 서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선고(2:6-16)는 앞에서 언급된 다른 어떤 나라에 대한 선고보다 더 길고 구체적이다. 다른 나라에 대한 심판 선고는 보통 2-3절에 걸쳐서 나오지만 이스라엘에 대하여는 10절이 넘는다. 구조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나서 다른 나라에 대한 신탁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문학 구조1)와 잘 맞지 않는다. 범죄 내용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다른 나라들의 경우에 비교적 짧고 포괄적으로 기술되는데 반하여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상당히 구체적이다(6-16절). 또한 범죄와 징벌 사이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구원의 역사를 상기시키는 구절들(9절 이하)이 들어 있다. 한 나라에 대한 신탁을 종결할 때 사용하는 \여호와의 말씀\(느움 야훼)이 이스라엘에 대한 신탁에서는 두 번 나온다(11, 16절).

    아모스가 어떤 계층의 사람들을 비난하고 있는지 미리 안다면 성경을 읽어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 경제, 종교적으로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이 심판 받을 짓을 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농경 사회라고 하는 특수한 사회-경제 구조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힘없는 백성들을 철저히 억압하고 수탈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도자들의 탐욕은 많은 희생자를 남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 자신은 빼버리고 너무도 쉽게, 오늘날의 상류층에 속한 모든 사람들과 우리 본문의 악한 지도층들을 동일시하려는 유혹은 피하는 것이 좋다. 비록 오늘날의 상황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본문에 나오는 지도자들은 아모스 시대라고 하는 특정한 시대에, 하나님의 계약 백성으로서 살기를 거부한 특정한 무리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차적으로는 성경을 아모스 시대의 상황에서 읽고, 그 다음에 우리 자신에게 적용시켜, 우리 자신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본문의 악인이 아닌지 살펴보거나, 우리가 작은 아모스 혹은 현대의 아모스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악인들에게 선포하면 좋을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지면상 6-8절을 해석하고 메시지를 찾아보려고 한다.



    2.. 본문 주해



    1) 단어 연구



    가난과 관련된 단어들 혹은 가난한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알마나(אלמנה, 과부) 게르(גר, 나그네, 혹은 더부살이) 야톰(יתום, 고아), 아슈킴(עשקים, 학대받는 자)등이 있다.2) 농경 사회 혹은 유목 사회에서 과부, 홀로 된 여자는 여간 살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이웃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율법서와 예언서 도처에, 과부를 돕는 것이 정의로운 일 뿐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고 강조된다. 나그네로 번역되는 \게르\는 고향을 떠나 떠돌아 다니는 사람으로 연고 없는 곳에 가서 더부살이 생활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뿌리가 뽑힌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보호할 혈연도 없고 또 친근한 이웃도 없기 때문에 돌봄과 보호가 필요했다. 히브리인들 역시 게르였던 적이 있다. 모세는 자신이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에서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지었다(출 2:22).

    상황이 바뀌어 히브리인들에 의해 정복되어 뿌리를 잃게 된 팔레스틴 본토민도 \게르\였다(출 20:1-17; 22-23:33).3) 보통 고아로 번역되는 \야톰\은 아버지 없는 아이를 말한다. 어머니가 살아 있어도 그들은 고아로 간주된다(욥 24:9). 아버지가 없는 가정은 생계를 잇기가 어려웠다. 자연히 아버지 없는 아이들은 쉽게 떠돌이 거지 신세가 되었다(시 109:9, 10). 그러므로 이들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할 대상이었다. 언약의 책(출 22:22)과 신명기(신 16:11)는 아버지 없는 어린이들을 특별히 배려할 것을 명한다.

    우리는 아모스는 정의의 예언자요 억압받고 궁핍한 자의 대변자이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그의 책에 자주 나올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아모스는 이러한 형편의 사람들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아모스가 무엇을 문제로 삼고 있는가 하는 것을 짐작케 한다. 아모스가 주제로 삼는 것은 어느 사회에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궁핍하고 소외된 사람들, 즉 과부, 고아, 떠돌이에 대한 관심이 아니다. 과부나, 고아나, 나그네는 자연발생적이다. 그들은 억울하게 당해서 하층으로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다. 정의로운 사회 속에서도 이들은 존재하고 그 사회가 이들을 돌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모스는 부자들이 왜 이들을 돌보아야 하는지 부자들, 권세자들, 종교인들에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양산해 내는 그 사회 구조와 그 구조의 유지자들 그리고 그 구조에서 혜택을 받는 자들을 비난하고 죽음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2장 6-7절에는 가난과 관련된 세 단어들, 엡욘(אביון), 달림(דלים) , 아나윔(ענוים)이 나온다. 이들은 각각 한글개역 성경에서 궁핍한 자(6절), 가난한 자(7절), 겸손한 자(7절)로 번역되어 있다. 과부, 고아, 나그네가 어떤 사회에나 존재하는 불쌍한 사람들임에 반하여 엡욘(2:6b; 4:1; 5:12; 8:4,6), 달(2:7: 4:1; 5:11; 8:6), 아나윔(2:7; 8:4)은 특정한 사회 현상으로 말미암아 땅 바닥으로 떨어진 사람들, 길 바닥으로 쫓겨난 사람들을 말한다. 궁핍한 자(엡욘)는 엄연한 현실적인 상태, 현실적인 여건을 말하는 단어이다. \엡욘\이라 불리우는 사람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 그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오늘을 넘길까 걱정하며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다. \결핍(deficiency)\과 \절박한 필요(demand)\라는 단어가 \엡욘\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4)

    이 단어는 원래 외래어로서 궁핍과 그에 따른 구걸이 만연하게 되었을 때인 주전 9세기 이후 고대 이스라엘에 도입되었다고 한다면5) \엡욘\은 왕국 출현 이후 사회의 계층 분화의 결과로서 생기게 된 극빈자 혹은 거지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난한 자(달)는 원래는 재산이 있었으나 외부적 억압, 환경, 착취를 견뎌내지 못하고 망하게 된 사람이다. 즉, 가난하긴 해도 재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구 조사를 받을 때 계수 중에 드는 부자가 반 세겔을 내어야 하는 것 처럼 \달\ 역시 반 세겔을 내어야 한다(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출 30:15). 나병에 걸린 사람이 빈한 사람(달)일 경우 어떤 제물을 드려야 하는가를 규정하는 법에서 볼 수 있듯이, 달은 다른 사람들 보다 적긴 해도 어린 수양,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과 일정량의 기름을 드릴 수 있는 형편의 사람이다(Lev. 14:21).

    이런 정황에서 볼 때 달은 적은 재산이라도 가지고 있는 \자유민\(a free townsman)6)으로 보인다. 아모스 본문에서도 이들에게 재산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차출될 곡식(5:11)과 포도주(4:1; cf. Job 20:10)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생계를 잇기 위해 매일 매일 중노동해야 하며 결국은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가 가지고 있던 작은 것까지 빼앗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법정조차 오직 권세 있고 부유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하므로, 자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라 믿고 호소하는 법정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한다. 아모스 본문에서처럼 그들은 모질게 다루어지고(2:7) 억압받고(4:1) 아주 싼 값에 팔려가도(8:6) 호소할 곳도 없는 사람들이다. \달\은 자신들의 문제, 즉 게으름이나(잠 12:11,24; 13:4; 24:33f.), 나태(잠 18:9; 19:15 등), 혹은 낭비(잠 13:18a)가 심해서 극빈자가 된 것이 아니다.

    과도한 세금으로 착취당하고(5:11), 재판정에서도 권력자의 뇌물공여로 말미암은 억울한 일에 대한 호소를 묵살 당하고 결국은 물수건 짜듯이 짜져서 물려받은 밭뙈기 조차 빼앗기고 결국은 거지가 되거나 노예가 되는 사람들이다(8:4). 겸손한 자(아나윔)는 교만하지 않은 자라는 윤리적인 의미에서가 아니고 사회, 경제, 종교적인 의미로서 낮은 자, 고난 받는 자, 경건한 빈자를 뜻한다.



    2) 주해



    (1) 2장 6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차딬)을 팔며

    \팔며\는 몇 가지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사람을 파는 것\ 즉, 인신매매로 볼 수 있다. 전쟁에서 패한 나라의 백성들은 노예 신세가 되어 사고 파는 대상이 되었고 또 빚을 갚지 못한 사람도 자신을 팔거나 자식이라도 팔아야 했다(왕하 4:1). 둘째, \팔며\는 법정의 부패를 고발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그 정도의 돈\을 받고7) 의인, 즉 죄 없는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 버리는 부정한 재판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의인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차딬은 다양한 삶의 자리에서 쓰이는데, 그 중 한 용법은 법정적 용법이다. 재판관이 증거와 정황을 참고한 후 죄 없는 쪽의 사람을 차딬이라 하고 유죄 쪽을 라샤(악인)라고 한다(신 25:1).

    우리의 본문이 부패한 법정을 문제삼고 있다면 은을 받고 의인(차딬)을 팔며는 재판관이 뇌물(은)을 받고 의로운 쪽을 죄인이라고 억울하게 만드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다. 셋째 차딬은 억울하게 고난받고 힘에 밀려 궁핍하게 된 사람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내가 알거니와 여호와는 고난 당하는 자를 신원하시며 궁핍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리로다 진실로 의인이 주의 이름에 감사하며 정직한 자가 주의 앞에 거하리이다\(시 140:13). 그러므로 일차적으로는 윤리적인 뜻을 가진 차딬은, 경제적 형편을 나타내는 단어들인 엡욘, 아니(혹 아니윔), 달 등과 함께 쓰인다.

    아모스서의 많은 공헌 중 하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상류층 사람들의 탐욕과 부패로 말미암아 가난하게 된 사람을 \의인\으로 부르는 것이다.8) 아무리 부가 좋고 편안한 것이라 하더라도 부정한 방법으로 취한 부라면 \악\이나 \범죄\ 외에 무엇이겠는가? 그러한 부는 악이요, 그러한 부자는 악인이다. 논리적으로 \범죄\의 반대는 \의\이기 때문에 악한 부의 반대는 의로운 가난이라고 말할 수 있다.9)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엡욘)를 팔며

    신 한 켤레는 첫째, 얼마 되지도 않은 \뇌물\을 뜻할 수 있다. 재판관들은 자기들과 같이 부패한 힘있는 사람과 가진 자 편에 서서, 자신들에게는 얼마 되지도 않는 뇌물, 신 한 켤레 값이나 될까 말까한 돈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한 사람의 인생을, 오직 가난하다는 이유로 망가뜨려 버렸다는 뜻일 수 있다. 둘째, 가난한 사람이 얻어간 얼마 되지도 않는 \빚\을 갚지 못한다고, 그 몸을 팔아 빚을 갚으라고 강요하며, 결국은 법으로 묶어 싼 값에 그 사람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을 고발한 것일 수 있다. 셋째, 신 한 켤레란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궁핍한 사람이 주인의 \신발\을 잃어 버렸거나 혹은 신발을 훔친 일이 있는데 그 알량한 신발 값을 찾겠다고, 도덕, 종교, 윤리, 법을 다 들이대며 가엾은 사람을 팔아 넘기는 잔인한 사회상을 고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넷째, 이 구절이 신발을 벗어 주거나 혹은 신발을 던짐으로써 법적 거래가 이루어졌음을10) 암시한다고 본다면, 합법의 이름으로, 합법적 상호거래의 이름으로, 궁핍한 사람을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황에 옭아매는 것을 비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 단어는 \신 한 짝\, 즉 신발 두 개이기 때문에, 하나를 던지곤 했던 법적 거래의 성사를 뜻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어째든, 신 한 켤레 값밖에 되지 않는 뇌물에 정의를 포기한다거나, 사람의 가치를 신 한 켤레로 밖에 보지 않는 사회는 싸구려 사회에 불과하며 싸구려 사회가 추구하는 정의도 정치도 윤리도 다 싸구려에 지나지 않는다.



    (2) 2장 7절




    가난한 자(달림)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하여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가난한 자의 머리에 티끌이 있는가? 그리고 가난한 자의 머리에 티끌을 탐낸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첫째, 가난한 사람이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절망하는 모습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는 자기 인생을 탓하고 자기 아내, 자식들의 장래를 생각하며, 이제는 우리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울부짖으며 몸에 재를 뿌리고 있다. 그런데 가해자는 죄책감이나 동정심을 갖거나,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머리에 뿌려진 재까지, 혹 자신에게 이익이 될까하여 뜯어 가려고 하는 현미경적인 탐욕을 비난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어쩌면 그 탐욕에 눈 먼 사람들에게는 티끌마저 밭뙈기로 보였을 것이다. 둘째, 땅을 뺏으려면 무엇인가 약점을 찾아내고 흠과 티를 잡아야 한다. 그 가난한 사람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내고, 혹 가난한 사람을 무엇으로 걸면 모든 재산을 뺏어 버릴 수 있는지, 무슨 사탕발림이나, 사랑같은 것으로 속여서 옭아맬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취약점이 무엇인지 머리에 붙은 티끌까지라도 살피고 찾아낸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11) 셋째,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 교만해져서 자신들은 특별한 존재라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들과의 경제적 신분적 차이를 더욱 넓히며, 그들의 머리마저 흙바닥에 닿도록 더욱 비참해지고 낮아지는 것을 바라고 당연시한다. 오늘날 발행되는 많은 주석들과 영어 번역들은 머리에 있는 티끌을 밟으며(샤핌)로 읽는다.12) 이렇게 읽으면 이 본문은 힘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된 사람들을, 천한 것들이라고 사회와 종교의 이름으로 규정하며 실지 육체적으로까지 머리를 밟아 버리거나, 또는 실제로 발로 밟는 것은 아니지만 흙을 밟듯이 밟으면서도 아무런 가책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어느 해석이 아모스가 원래 의도한 바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어쩌면 아모스는 이런 모든 가능성을 마음에 두고 심사숙고하여 단어들을 택하고 문장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본문은 얼마나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연약한 백성들을 비참하게 만들었는지, 반대로 가엾은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가 가진 것들을 다 빼앗기고 더하여 비인간적 취급을 받으며 살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겸손한 자(아나윔)의 길을 굽게 하며

    힘있는 자들의 죄악은 또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데도 불구하고 힘있는 자의 탐욕 때문에 길마다 막히고 왜곡되고 소망마저 끊어진 사람들을, 열어주고 펴주고 도와주기는커녕 가해자와 결탁한다, 재판관들 자신이 탐욕의 장본인이다.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계층의 지인들과 연대하고, 가족 친척이 상층부에 널리 펴져 있고, 자신들의 출세나 안위를 위하여 다른 상층부 사람들과 관련된 일에 정직한 판결을 하지 못하며 그들의 이익을 철저하게 대변한다. 이들은 오히려 더 구부러뜨려 더욱 억울하게 만들어 버린다. 죄악의 뿌리는 깊고 죄악의 뿌리는 옆으로 넓게 퍼져 있다. 경제인은 법조인과, 법조인은 정치가와, 정치가는 경제인과, 경제인은 관리와, 관리는 지배 계층과, 심지어 종교인도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더 깊이 그리고 넓게 사회의 상류층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한 관계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는 하지만, 어느 한쪽이라도 부패해 있는 사회라면, 온 부분에 죄악의 누룩이 퍼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에게 소금이 있다면, 누군가 빛이 된다면 어느 한 구석부터라도 고칠 수 있을 터인데….



    부자(父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여자와 부적합한 성 관계를 가지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13) 첫째, 결혼법을 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율법은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과부를 취하여 결혼하지 못하도록 하고 아들 역시 자기 아버지의 과부를 아내로 삼지 못하도록 규정한다(레 18: 8, 15). 그러나 아 구절이 결혼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둘째, 한 젊은 여자는 여종일 수도 있다. 어떤 집의 딸이 아버지가 빚을 갚지 못하므로 남의 집 종살이를 하게 되는데, 주인 집 사람들은 그 여자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을 넘어, 그들이 그 여자의 아버지를 경제적으로 괴롭힌 것처럼, 율법에 명백히 금지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다 그 여종을 자신들의 성적 노리개로 삼는 죄악을 고발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참고. 출 21:8).

    셋째, 아모스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몸을 팔 수밖에 없는 가난한 여인의 운명을 고발하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의 딸들은 창기로 만들어 버렸으니 그 사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사회가 아닌가? 우리는 북한의 난민들이 중국으로 탈출하여 몸을 팔아가며 생존하는 것을 알고 있다. 넷째, 상당히 가능성이 있는 해석으로서, 아버지와 아들이 자신들의 육체적 쾌락을 위하여, 몸을 파는 거리의 여인에게로 가는 것을 고발한 것일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옛 이야기만은 아니다. 오늘날도 우리의 사회는 아버지 아들 형제 친척이 다 한 여인에게 갈 가능성이 열려있는 사회다. 얼마 전 어떤 한 여자 분의 사적인 관계를, 많은 사람들이 그 여자 분의 허락 없이 들여다 보았다고 하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 오늘날의 문명의 이기는 부자(父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니는 것을 충분히 가능케 한다. 아모스 시대에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권력과 부를 잡는 것을 성공으로 보던 사회는 당연히 쾌락을 추구하는 사회가 된다. 탐욕과 쾌락은 늘 같이 다닌다. 짐승에게 부모 형제 자매 개념이 있는가?

    짐승이 성장하면 오직 수컷과 암컷이 있을 뿐이다. 탐욕으로 스스로 비인간이 되어 인간을 짐승 보다 못하게 다루는 사회는 이제 자신이 짐승의 나락으로 떨어져 성적 타락을 성적, 종교적 해방이라 부르고, 사람됨에서 자신을 해방시켜 짐승의 범위 안에 둔다. 다섯째, 아버지와 아들이 이방신의 예배와 관련된 성창에게로 가는 것을 고발한 것일 수 있다. 바알 예배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남여 신들의 결합을 본받아 성소에 있는 여자 사제와 성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그러나 율법은 성창 제도를 엄격히 금지한다(신 23:17). 우리는 젊은 여자가 성창인지, 그냥 창녀인지,14) 아니면 가난한 집의 딸인지 확정할 수는 없지만, 성적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고는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율법을 더럽히고 하나님 백성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들을 함으로써, 결국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다는 뜻일 것이다.15)



    (3) 2장 8절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이 구절 역시 \합법\을 구실로 힘없고 가엾은 사람들을 착취하는, 힘있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단들과 저희 신전이 바알을 위한 것인지 여호와를 위한 것인지 구별할 필요는 없다. 어느 쪽이든지 종교도 썩었고 예배드리러 오는 사람들도 썩었다. 단과 신의 전은 가장 거룩하고 가장 순결하고 가장 고상한 곳으로 인정받는 장소가 아닌가? 그러나 그곳에는 탐욕과 향락과 권력이 있을 뿐이었다. 기본적으로, 이곳에 있거나 찾아온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혹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기 배를 채우는 사람에 불과했다. 제단은 무엇 하는 곳인가? 죄를 범한 사람들에게 자비가 허락된 곳이 아닌가?

    그러나 그곳에는 돈을 벌겠다고, 가난한 형제들을 추위 속에 밤을 새우게 만드는 무자비가 있었다. 용서받은 죄인들의 낮아짐과 기쁨이 있어야 할 그 곳에는, 착취한 부로 착취한 제물로 주연을 베푸는 자기 만족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것은 예배라기 보다는 연회다. 예배 장소는 자신을 고발하는 장소가 아닌가?

    감추어진 마음을 열고 엎드리며, 포도주를 마실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물을 마시는 곳이 아닌가? 그러나 예배마저 부패하여 자신을 오히려 잊어버리고, 가난한 자가 잘 옷 위에 누워 자신의 죄를 가리운다. 부패한 예배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감춘다.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종교는 백해무익한 종교다. 반쪽 진리는 더욱 위험하다. 즉, 자신의 죄를 가리며, 눈물 대신 포도주로 즐기면서도 신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종교는 위험한 종교라는 말이다. 뇌물과 권력으로 부하게 된 사람들이, 그것을 신의 복이라고 말하며, 알량한 재물로 신마저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하는가?

    겉옷은 빚을 줄 때 담보로 잡은 것이다.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 그러나 엄격한 제한이 있다. 전당잡은 옷은 해가 지기 전에 원 소유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출 22:26 이하). 그러나 이 본문은 밤이 되도록 겉옷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것을 비난할 뿐 아니라 그 빼앗은 것으로 단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을 고발한다.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는 백성들에게서 취한 부당한 세금으로 산 포도주이거나 세금을 내지 못한다고 대신 빼앗은 포도주일 것이다. 단 옆과 신전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첫째, 열성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부자들이다. 그들은 온갖 절기와 제사에 모습을 나타내고 열심과 정성으로 제사에 참여하고 기부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게서 빼앗은 옷으로 부를 누리며 궁핍한 농민들을 착취하여 얻은 포도주로 낙을 누리는 자들이다.

    어쨌든 이런 예배자들의 삶의 모습은 참 부조화스럽다. 경제 활동은 가혹하기만 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법의 이름으로, 힘의 논리로 약한 자를 쥐어짠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얻은 이익으로 풍성한 예배를 드리고 예배 장소에서 평안을 누린다. 둘째, 종교인들이다. 종교인들은 짐승 제물을 드릴 형편이 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 외상으로 제사를 대신 드려주고 나중에 가난한 사람들이 제사 빚을 갚지 못할 때 옷마저 빼앗고 농산물을 착취한 것이 아닌가?16) 가장 깊숙한 곳까지 썩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빈궁한 사람들의 최소한의 소유까지 빼앗아 간다. 이들이 예배를 드린다고?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반역이다. 앞의 다른 나라들은 제 국민을 죽이고 팔아 먹지는 않았다. 그들이 여호와를 공경한다고 말한 적도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 백성을 착취하고 쥐어짜서 죽인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종교인도, 경건하다고 하는 예배자도,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하는 재판관도, 공평을 베풀어야 하는 권력자도 오직 한가지로 입을 것 없고 먹을 것 없는 약한 자기 백성을 착취한다. 하나님은 악한 부자의 흥얼거림을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도울 이 없어 탄식하는 백성의 신음 소리를 듣는 분이다. 한 시인의 탄식을 들어보자.



    (1) 어찌하여 전능자가 시기를 정하지 아니하셨는고

    어찌하여 그를 아는 자들이 그의 날을 보지 못하는고

    (2) 어떤 사람은 지계표를 옮기며

    양떼를 빼앗아 기르며

    (3) 고아의 나귀를 몰아 가며

    과부의 소를 볼모 잡으며

    (4) 빈궁한 자를 길에서 몰아 내나니

    세상에 가난한 자가 다 스스로 숨는구나

    (5) 그들은 거친 땅의 들나귀 같아서

    나가서 일하며 먹을 것을 부지런히 구하니

    광야가 그 자식을 위하여 그에게 식물을 내는구나

    (6) 밭에서 남의 곡식을 베며

    악인의 남겨 둔 포도를 따며

    (7) 의복이 없어 벗은 몸으로 밤을 지내며

    추위에 덮을 것이 없으며

    (8) 산 중 소나기에 젖으며

    가리울 것이 없어 바위를 안고 있느니라

    (9) 어떤 사람은 고아를 어미 품에서 빼앗으며

    가난한 자의 옷을 볼모 잡으므로

    (10) 그들이 옷이 없어 벌거벗고 다니며

    주리면서 곡식 단을 메며

    (11) 그 사람의 담 안에서 기름을 짜며

    목말라하면서 술 틀을 밟느니라

    (12)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욥 24: 1-12)



    시인은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비참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빚쟁이에게 억압받고, 무자비한 주인에게서 노동을 착취당하며, 탐욕적인 권세자들에게서 땅을 잃고, 어린 자식 마저 빼앗기고, 사람도 아닌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을 그린다. 그들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채, 소낙비를 맨몸으로 맞고 추운 밤을 벗은 몸으로 지새우며, 굶주린 가운데 곡식 단을 매고, 중노동에 목말라하며 포도즙 틀을 밟는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나귀처럼 들에 나가며, 짐승처럼 들에서 풀을 뜯는다. 심지어 가진 사람들은 고아와 과부가 가진 것들 마저 탐을 낸다. 힘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악한 권력자들, 종교인들, 재판관들, 경제인들에 의해 굶주리고 헐벗은 짐승이 되었다. 시인은 왜 하나님이 이러한 비참한 상황에 반응하지 않으시느냐고 항변한다. 하나님마저 이 사정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 불쌍한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은 악인들의 잔인성을 반드시 갚으신다(욥 24:18-24).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만일 우리의 사랑하는 자식이 악한 권력에 눌려 굶주리고, 헐벗고, 억압받고, 그 자식들의 아이들마저 다 흩어져 거지로 산다면, 그리고 비에 젖어도 들에 누워야 하며 먹을 것 없어 풀뿌리로 연명한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이 들 것인가? 심히 분하지 않겠는가?

    사랑은 분노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의 눈물을 보시는 분이며 신음을 들으시는 분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원수를 파멸시키는 분이다. 아모스는 이러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회 현상을 하나님에 대한 반란 행위이며 반역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반역자들을 징계하신다. \나는 심히 분하여 너희를 칼로 죽여버리겠다\(출 22:24). 빼앗긴 자들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은 무심한 분이 아니다. 뺏은 것으로 자랑하고 누리는 자들이여 기억하라. 그것은 반역이다. 그리고 반역은 반드시 응징된다.



    3. 설교를 위한 제언



    우리는 지금까지 본문을 설명해 보려고 노력했다. 이제 이 말씀을 가지고 청중들에게 선포해야 할 터인데, 어떻게 비난과 정죄로 가득한, 혹은 파괴적인 본문을 가지고 건설적인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첫째, 우리 자신이 악을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면 아모스 본문은 큰 유익이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신랄하게 비난하는 것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그래서 먼저 우리 자신이 탐욕스럽고 악한 지도자들이 아닌지 생각하며 설교해 보았다.

    둘째, 사회의 구조나, 정치가의 잘못으로, 혹은 자신이 못나서 소망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을 것인데,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소망이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들의 대변자가 되어주고,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셋째, 우리 자신이 아모스가 되어 우리 사회의 비리를 고발하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앞의 두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해 보았다.



    1) 하나님이 인정하는 신앙 생활



    아모스 시대는 가장 풍요롭고 안정된 삶을 사는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그 평안과 풍요는, 힘없는 사람의 희생 위에서, 그리고 힘이 없다고 억지로 희생 시켜서 얻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경시되고, 예배는 자기 속임수에 불과했고, 불법이 삶의 전 영역에서 일어나며 부의 축적이 삶의 목표가 되는 때였습니다. 힘없는 사람들은 잔혹한 삶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밀려나서 결국은 종이 되고, 헐벗고, 굶주려야 했습니다. 힘있는 사람들은 뇌물과 권력과 법을 이용하여 호화롭고 풍요로운 삶을 누렸습니다.

    그들의 사회는 성적으로도 타락했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을 지고의 가치로 삼는 사회는 말초적 쾌락도 가장 소중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과 종교인들은 죄를 씻어야 할 곳,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할 곳, 자신을 벌거숭이로 드러내어야 할 곳에서도, 자신의 탐욕과 부패로 얻은 것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내 놓기 보다는 뺏은 겉옷 혹은 무슨 코트로 자신을 가렸습니다. 자신의 부를 자랑하고, 훔친 물건을 서로 나누면서도, 신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고 고발하기는 커녕 자신을 철저히 감추고, 자신이 흘려야 할 눈물과 쓰라린 형제 자매들의 눈물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예배를 잔치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연회처럼 호화로웠으나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예배 행위는 동류들의 모임에 불과했습니다. 행위 없는 예배는 미신이요 순종 없는 예배는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무관한 것일까요? 우리는 뇌물을 주고 받고, 부패하고, 성적으로도 부패했으면서도 그 마음 그 생활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목표부터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와 거룩 자비한 마음을 이루는 것을 기도의 제목, 이루어야 할 목표, 그리고 자랑거리로 삼아야 합니다. 호화로운 예배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동의어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장과 화려함에 세뇌되고 있습니다. 성장이 나쁜 것이겠습니까? 화려함이 나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그 기초에는 순결과, 순종과, 절제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양적 성공 사례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책과 잡지들도 사람들의 관심을 알아채고, \몇 년 내에 몇 백 몇 천명을 만든 아무개 혹은 특수 비결\을 발굴해 냅니다. 양이 많아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고 기쁜 일이지만, 양보다 더 중요한 것도 많이 있습니다. 주제를 바꾸면 경영상 어려움이 생길지는 모르겠으나, 이젠 거룩, 사랑, 절제에 초점을 맞추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자라나는 예비 목회자들에게도 중요한 일입니다.

    단 기간에 크게 된 사례도 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기업들에게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데 우리들은 아직도 단 기간에 성공한 분들을 모범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한 백년 걸려서 서서히 바꾸어지는 것은 잡지에 날 일은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일이 아닙니까? 성경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인품, 내면, 신앙인격이 훌륭한 분들의 이야기를 들추어내고 그런 것을 모범으로 삼게 하면 우리의 교회들은 더욱 건강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지도자들부터 생활 방식과 삶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썩었다고 하면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썩었는데 무슨 썩은 세상에 들어가서 역할을 하자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심하다구요? 우리가(종교인, 교회, 교인) 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