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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지도자와 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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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마 12:23-42 | 설교자: 김역창

    본문

    3년 간이라는 그리 길지 아니한 그리스도의 전도생활에 있어서 복음서에 나타난대로 언제나 예수께서는 바리새 교인이나 사두개 교인이나 서기관들의 힐란을 아니 받으신 때가 별로 없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종국에는 그들의 계교로써 그리스도는 십자가상에서 최후를 마치셨습니다.

    유대 사회에 있어서 사회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일반 민중의 대표적이요 일보더 나아가 지도자로 자처하였던 그들이 하나님의 독생자로 성육하신 그리스도도 배척하고 그의 교훈을 멸시한 것은 금일 우리들의 심리로 하여금 비분강개함을금치 못하는 바이고 우리들의 이지로 판단할 때에 그 요악당돌 함을 측량하기 한없이 인식케 하는 것입니다.

    명목인즉 바리새당이나 서기관배들이 하나님을 남보다 먼저 알고 하나님 공경하는 그 일에 주체가 된 그들이, 왜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죄의 길로 자신이 들어갔을까? 마침내는 예수께로부터의 저주를 면치 못했을까? 그들에게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마음이 있었을 것이고 성령의 감화가 때때로 그들의 흐려가는 샘령고막을 두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끝내 하나님께 불의와 진노를 거듭 쌓게 된 데는 그들 자신의 정신 생활에 일대 결함이 있었으니 그것은 자성함이 부족한 까닭이었습니다. 냉정한 입장에서 자기를 비판하는 거기서 비로소 자아완성을 기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태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가경애로 점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자기 의를 내세우고 독선주의와 자만심으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평생을 두고 한 번도 자기를 검토해 보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이던 바리새당을 비판할 때 한심지회를 감치 못하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우리 신앙 자체를 검토하고 나 자신의 심령상태를 정판하여 바리새교도들의 낡은 껍질을 벗어야 할 것입니다. 20세기 전인류들의 침체성을 20세기 후 인류들이 개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백주에라도 얼굴을 들지 못할 부끄러운 인간밖에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사실은 그들이 예수께 이적을 구한 것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이이적을 몹시도 추구한 것은 사실이나(고전 1장) 이때에 서기관배와 바리새당들이 이적을 구한 것은 그들이 진정한 적구사상에서 출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2장 9-13절에는 손마른 자를 완전케 하시고, 12장 22절에는 사귀들린 자를 완전케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전자의 것은 안식일이라는 조건을 전제로 해서 예수님을 책하고자 하였고, 후자의 것은 예수님을 바알세불 의뢰자로 빙자하여 예수님의 이적 능력을 부인코자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이 예수께 이적을 보고자 한다 함은 진실로 예수님을 난경에 들어가게 해 보려고 한 수단방법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불의 지심에서 발노되는 말인 것을 아시는 예수께서는 그들의 심령에다 큰 화살을 던지셨습니다.

    이미 각양 희한한 이적을 골고루 다 행하였음에도(마 11:5) 믿지 아니한 그들에게 다시 다른 이적으로 보여주실 필요 없음을 언명하시고 구약시대의 요나 사건을 예를 들어서 앞으로 자기 자신이 대부활의 이적을 행하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의 현세 말로와 영원계의 종말을 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유대인이 과거에 하나님의 저주하는 아래 신음하던 이방인!곧 니느웨 사람에게 정죄함을 받을 것을 말씀하시고, 뿐만 아니라 남방여왕에게까지 정죄함을 받을 것을 언명하셨습니다. 니느웨의 우민들이 아무리 미련하여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었더라도 하나님의 보내신 선지자의 경고를 듣고 회개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저주는 흑운을 벗을 수 있으나 선민인 이스라엘이하나님의 그 지존막대하신 사랑의 본체로 나타난 성자의 교훈을 멸시하고 회개치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살해를 도모하였으니 이 어찌 느니웨 사람의정죄선고를 안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기뻐하심은 오직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대로 불순한자식이라도 일단 회개하고 돌아올 때는 집에 있는 자식보다도 더 애정을 기울이게 되는 것이고,두 아들의 비유대로 외면으로 선답하고 행치 아니하는자식보다는 처음에 불순한 대답을 하였더라도 후에 깊이 회개하고 가서 명령대로 행한 자식이 하나님에게는 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대하신 사랑으로 남보다 먼저 하나님을 알게 되고 구원의 도리를 깨달아서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일하도록 성직을 주셔서 그 임무에 당면하고 있는 현대교회 지도자 된 우리가 과연 저 바리새당보다 우월한 것이 그무엇이었든가? 그들보다 초월한 신앙을 가진 자 그 몇이나 됣니까? 우리가 과연 니느웨의 어리석은 백성들로 더불어 심판대에 설 때 무엇으로 자신의죄과를 가릴 수 있겠습니까?

    인간 세계의 생 지옥인 암흑가의 천한 계집이라도 그가 일단 자기의 과거를 회고할때 견딜 수 없는 참회의 마음이 끓어 올라서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그의 모든 지난 죄와 허물이 가리워지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자녀가 될 것입니다.

    소위 남을 지도한다는 우리가 신앙의 근거를 그리스도의외의 것에 두고 하나님의뜻을 본위로 하지 아니하고 자기 의를 중심 삼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를 드리지 못하게 되면, 아! 슬프다 영영토록 진노의 멍에를 벗지 못하고말 것입니다.

    솔로몬 당시에 남방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서 찾아왔던 것입니다.그러나 유대인은, 아니 유대사회 지도자들은 솔로몬보다는 그 깊이와 넓이를 헤아릴 수 없을 지혜의 실체이신 그리스도와에 오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지혜의 교훈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자기 지혜를 최고로 하는 자만심과 완미함뿐이었습니다. 그런고로 남방 여호아의 정죄 선고를 피할 길이 없는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대하신 큰 기대는 인간들이 자기 지혜에 만족치 말고 하나님께의탁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의뢰하여 하나님께로부터 하사하시는 지혜로 행함입니다.

    솔로몬이 세상에 다른 무엇보다도 지혜를 구하므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 되었고르호보암은 자기 지혜에만 족하여 완미함을 부리므로 미워하는 바 되었습니다. 금일 현대교회는 인간 지혜를 정점을 오인하는 과태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령적으로 바라시는 하나님의지혜를 물리치는 일이 하나 둘로 헤일 수 있었던가요? 무엇이 우리에게 이렇다 할 지혜가 있었던가요? 무엇을 믿고 하나님께 의탁하지 아니할 수 있계습니까?자기 지혜에 만족한 자 그 누구인지 두렵습니다.

    우리는 바리새당의 그 완미함과 자만심을 보리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합시다. 그곳에서 내리시는 지혜로 만사를 행합시다. 니느웨는 유대 북방이었고 스바는 남방이었으니 유대인에게는 남으로 가도 자기 죄를 가릴 길이 없고 북으로 가도자기네들의 허물을 숨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니느웨 사람은 유대인에게 천대를 받았고 스바 여왕은 솔로몬께 후대 귀대를 받은 것입니다.

    이제 유대인에게는 천인이나 귀인을 불문하고 다 자기네들의 죄과를 증명하는 증인이될 것입니다. 현하 한국교회 지도자된 우리는 심심자성하여 말일의 비애를 만들지 말고 완미와 자만심을 버리고 진정한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할 것입니다.남인, 북인, 천인, 귀인이 다 우리 죄를 증명할 날이 불원한 것입니다.

    일곱 귀신 비유와 같이 이스라엘은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게로 돌아왔다고는 하였으나 이제는 도리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율법과 제사에만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고로 그 집은 정결하게소제하고 훌륭하게 장식되어 있으나 주인이 없는 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맞이하여야 할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야말로진실로 율법의 완성자이었기 때문입니다(마 5:17).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집에서 떠나간 악귀는 자기들의본 거주를 찾아 사막을 두루 방황하였으나 안식처를 찾지 못하여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보니 정결하게 수리되고 장식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니주인은 없었습니다. 이때야 말로 악귀는 곧 가서 자기보다 더 악한 일곱 귀신을 데로고 들어와 살게 되니 이스라엘의 말로가 어느 지경이 되었겠습니까?예수를 난경에 몰아 넣으려고 하는 서기관들이나 바리새당들이야말로 참으로 그러한 악귀의 거주처가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까지 섭섭하심은 참으로 그들에게 최후적 저주를 발하심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조그마한 희망도 없음을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장31-32절에는 바리생당들의 영원힌 사죄함을 얻지 못할 것을 언명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그들도 사귀 들린 자를 완전케 하심을 볼 때에는 그것이인간의 힘이 아닌 것을 인식했을 것이고 군중이 이구동성으로 예수를 다윗의 자손 메시야로 증거할 때 그들에게도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감화가없었겠는가마는 굳이 그것을, 양심을, 성령의 감화를 억제하고 바알 세불의뢰자로 되니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감화력도 무용함을 각오하고 최후적 선언을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남을 지도한다는 중대 사명을 띠고서도 우리의 심령을 감화시키는 성령의 지시를 묵살하고 자기 의사를 행사하며 양심을 속여 가면서까지 하나님의 뜻을 부인하는 일이 없는가?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직접으로 인간계에 나타나셨고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예수께서 직접으로 인간들과 동거동식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예수님으로 더불어 직접으로는 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대신 예수께서는 보혜사를 보내주셔서 그가 그리스도 대리격으로 계셔서 우리를 지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다시 말하면 직접 그리스도 자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위 중 일위시니 우리는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감화를 멸시하고 배척해서 죄를 얻으면 그때에는 누구로 하여금 다시 회개케 하겠습니까? 그런고로 사죄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금일 한국 교회가 너무도 복잡다단해지고 뒤숭숭한 문제가 첨출하게 된 것은 그 원인이 여러 가지 있겠지마는 폐일언하고 성령의 지도를 순종치 아니함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1천 5백 여 되는 현 교회 지도자 된 우리는 이 가장 무서운 성령 거역죄에 걸리지 않도록 항상 자성에 자성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