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한국신학정보연구원
로그인 회원가입
  • 색인초록 DB
  • 역사속의 명설교
  • 색인초록 DB

    역사속의 명설교

    목사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롬 8:9 | 설교자: 오문근

    본문

    이제 이 문제에 대하여 기록코자하매, 필자의 입장에서 스스로 감당치 못할 일인 동시에 번민이 앞서는도다. 여광여취자와 같이 가히 붓을 잡고 기록하는 일이 욕이라도 필자도 함께 받고, 책망이라도 함께 받고, 칭찬이라도 우리가역시 함께 받는 것을 생각할 때에 안심하면서 누가 이 글을 보면, 교만하다 만홀한 자라는 시비와 평론을 무릅쓰기로 생각하는 바이로다.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이 중하고도 더욱 중한 것은 누구나 없이 신자나 교역자가다 아는 바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깊이 생각하면, 우리 동족의 일선생명이 목사의 책임 여하에 따라서 그 존망이 달려 있다. 만일우리 주 예수께서 사람처럼 수문수답하신다면 아마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내가 조선 생명을 너희에게 맡겼다』할 것이다. 만일에 그렇다 하면 조선 생명을 망하게 할 자도 목사요, 흥케 할 자도 목사다. 어떤 목사가 우리 동족을 구원하고, 어떤 목사가 우리 동포를 망케 할는지. 이 일을 각오하며 참고 아니할 수 없는 일이기에 이제 네 가지 목사를 들어 말하는 바이다.

    1. 율법목사이다

    이는 옛날 유대교 교법사적 목사로, 이 교법사들이 하나님을 공경한다고는 하나사실상으로는 하나님의 원수이고, 성경은 손에 들고 잘 외우나 실상은 지상 공문에 불과하고, 다만 자기에게 유익하고 명예 있는 허식 기도와 십일조와 제물과 예물에 대한 일은 꼭 준행하고, 장로의 유전과 법칙이 성경보다 더욱 중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보라, 20세기 현시대에 율법목사를 흔히볼 수 있다. 그 중심에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뜻이 없어진지 오래고, 정신  세계에는 생명 없는 법칙과 신조와 규칙과 헌법을 주장하고, 목사되는 방법이 이것인 줄 알고, 심사행동은 율법과 규칙에 매여서 자기 영혼이 죽어가는지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교우들의 생명이 바람 앞에 등불같이 꺼져가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이 마치 소경과 귀먹은 자와 같고, 진리에 대한 운동을 말하면 꿈도 꾸지 아니한다.

    그리하여 무슨 회의가 모일 때에 회장이나 불러 동의나 재청이나 잘 가리며 조직의 법칙이나 말하면 똑똑한 목사로 자신하며 유쾌히 생각한다. 그러면 혹자가 묻기를 규칙과 신조는 소용이 없는가 할 것이다. 아니다, 대중을 인도하려면 규칙과 신조가 있어야 할 것이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없고 구원의 진리가 없다. 그것은 다만 인도자가 가질 한 참고거리다. 우리가 이제유대교의 교법사가 유대국을 망하게 하고 지옥에 갔다면 누구든지 시인할 것이다.

    이제 우리 중에 율법목사가 있다면 그가 구원을 얻을지는 의문이 아닐까. 어찌 두렵지 않으며 어찌 삼가지 아니하랴. 지금도 유대교에서 장로의 유전을 지키므로 성경을 폐하는 죄를 범하는 것과 같은 현대 설교자의 형편을 보면, 저 서양 나라와 동양 문명국의 선생들의 이름이나 별스러이 여러 번 부르며 증거한즉, 유식한 설교라 칭하고, 어려운 방언이나 아는 것을 자랑하고 사람의 일을 증거한 즉 그 목사는 은혜받은 자로 안다. 이것이 어찌 유대교 장로들의 유전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랴. 강설은 성경을 강론하는 것이다. 세상 이야기와 과학상 유전은 세상에서는 좋아하고 칭찬하나, 성신께서는 강대의 악취와 같이 여기신다. 또는 사람의 영혼의 양신이 아니되고 도리어 해독을 주고, 이렇게 설교는 일시 듣기는 좋은 듯하나 사람의 영혼을 부패케 된다. 비유컨대 누에에게 배추잎 먹이는 것과 같아서 필경에는 그 누에게 죽고 만다. 오늘날 율법목사가 있는 교회에서 신자들이 기근을 당하여 죽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2. 사무목사

    이 사무목사는 다시 말하면 교회의 사무원이다. 유치원이 있으면 유치원도 돌아보고 학교가 있으면 학교일이나 돌아보고 형제집에 병이 있으면 문병이나 가고 교회의 문부나 잘 돌아보고 예배당 형편이나 보살피며, 자기가 교회의 일을 잘하는 줄 자신한다. 사무목사여, 우리 주님께서 성직목사로 부를 때에 이런 사무만 위하여 부른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오기는 이를 위하여 오셨다』고 하시면서 촌촌이 다니시며, 고을고을에 다니시며 복음을 전하시고, 승천하실 때 복음을 만방에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어찌하여 이즈음의 사무목사는 전도는 아니하는가. 혹이 그 이유를 물으면 세상에서 모자라지 않는 핑계로써 하는 말이 「시대가 그렇지 않다. 문서전도와 행위전도가 제일이다. 설교전도한다」별별 핑계가 많지만 하나님이 가증하게 여길 것이다. 심령의 눈을 뜨고 볼진대 그 사람을 마귀가 그 입에 자갈을 물리고 그 입을 함봉한 것이다. 마귀에게 금지령을 받는 것이다. 이런 사무목사는 기도도 없고 회개도 없다. 목사더러 기도가 없다함은 과격한 말이라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까닭은 하나님과 직접 교통하는 감응을 얻지 못한 기도는 이름은 기도나 실상은 기도될 것이 없다. 어찌하여 그런고 하니, 옛적 성도들의 기도는 감응기도였다. 이 혼돈 교회에서 감응기도라 하면 이단이라고 한다. 성경의 허락은 그렇지 않다. 요한복음 14장 12절에 이적으로 응답하신다 했고, 또 21절에는 예수께서 친히 나타나시겠다고 하셨고, 마가복음 16장 17-18절 까지 여러 가지로 응답을 허락하셨다. 사무 목사여, 이 성경을 믿지 않으면 회개가 없을 것이다.

    회개가 없으면 예수께부터 받은 생명도 없을 것이고, 그 생명을 받지 못하였으면 그 눈에는 눈물도 없을 것이다. 성도의 눈물과 회개는 참 귀하고 중한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로 계실 때에 누구든지 회개하여라. 무슨 죄든지 용서함을 받는다. 후일에 아버지의 명분이 취소되고 자녀의 명분도 취소되는 날이 이른다. 그날은 예수님이 재판장으로 나타나는 날이니 회개도 쓸 데가 없다. 생각해 보라. 지금 눈에 눈물이 있느냐, 없느냐. 만일에 눈물이 있으면 주 앞에 은혜문이 열렸고, 눈물이 없으면 은혜문이 막힌 증거다. 옛날 유대국제사장들이 예수 당시에 그들에게 사무 잘못 보았단 말은 별로 많이 아니하지마는, 하나님께로 난 의가 생명 있는 신앙과 이사야로 말미암은 피에 관계가 없으므로 구원이 없는 것을 신념한다. 그런즉 저희 사무원 목사로서, 자기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교인으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지 더 깊이 생각할 것이다.


    3. 직업목사이다

    이 직업목사는 그 하는 일이 직업적, 다시 말하면 밥만 위함이다. 바울 선생이 그러한 교역자를 가리켜 빌립보서 3장 2절에, 『개무리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일군을 삼가라』고 하셨고, 또 3장 18절, 19절에 십자가에 원수가 많다고 하셨고, 또 저희는 배로 하나님을 삼고, 부끄러운 일로 영광을 삼는다. 하였다. 옛적 2천 년 전에 이러한 일이 많았다고 하였으니 지금세상에서는 적은지 더 많을는지 생각하여 볼 만한 것이다. 직업목사가 많고 적은 것보다도 대개 이러한 직업목사가 교회에서 과연 시무할 수 있을까.

    필자가 교역생활 25년에 여러 번 목사 인선하는 일을 참견하여 보았다. 그 회석에서 인선 중에 하는 말이 흔히 그 목사가 교제를 잘하느냐 말하고 또는 학식이 있느냐 하고 묻는다. 또는 설교를 잘 하느냐고 말한다. 이 말이 표면으로 들으면 좋은 말이나, 그 말을 더 궁구하고 각오하면 섭섭한 일이다. 그 목사가 교제를 잘하느냐 하는 말은 우리에게 교언영색으로 아첨 잘 해줄 수 있느냐 하는 말이다. 학식이 있느냐 하는 말은 성경을 잘 아느냐 하는 말이 아니고, 세상 학문으로서 우리에게 뜨물을 많이 먹여  줄 수 있느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양은 뜨물을 먹이면 병이 난다. 저 높고 높은 보좌에서 흐르는 수정 같은 생명수를 먹여야 병들지 않는다. 또 목사가 설교를 잘하느냐고 하는 말은 좋기는 좋으나, 그 사실인즉 연설을 잘 할 수 있느냐고 하는 말이다. 이제 조선교회는 연설을 좋아하나 대부분이 원치 않는다.

    이제 직업목사, 즉 밥목사여 성경을 참고하자. 가룟 유다가 열 두 사도의 반열에 있었으나 빵사도의 자리에서 떠나지 아니한 대문에 가련한 사람이 되었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빵제사장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결국은 나라와가정과 자신까지 가련한 처지를 당하였다. 이제 우리는 이 일에 정신 차리고 생각하면서 자기를 시험하여 볼 것이다. 목사로서 생활비가 없을 때에도 여전히 전도하며 기도하며 설교하며 교회를 사랑할 것인가 생각할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줄 알았으면 우리는 거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은 우리 속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으므로 아니 사랑할 수 없어 사랑하신 것이다. 우리 시조를 지을 때에 코에기운을 불어 넣었다 하신 말씀은 당신의 생명을 주셨다 하심이다. 이 일을 생각할 때에 누가 눈물이 나지 아니하며 회개치 아니하며 주를 위하여 희생치 아니하리요. 저 만국과 고금을 통하여 만만 성도들이 빵자리에서 떠나 산을 넘고 대해를 건너 만국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일로 나타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과 효험이 있으리요.

    4. 선지목사이다

    이 선지목사는 어떠한 목사인가. 참 귀한 목사이다. 이 귀하다 하는 것은 간판이 좋은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요, 웅변가이니 하는 그런 것도 아니요, 인격자이니 하는 그런 것도 아니다. 학식이 고명하니 그런 것도 아니요, 총명과지식이 많아 그런 것도 아니다. 성신을 받은 사람이 선지목사이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종이요, 선지목사이다. 하나님의 은혜중의 큰 은혜는 성신 받는 일이다. 그러하나 그 은혜를 충심으로 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 현금 목사 중에는 성신받은 목사가 너무 적은 것 같다. 성신받지 못한 목사는 사람 앞에선 목사지만 주님 앞에선 목사가 아니다. 어찌하여 그런고 하면 로마서 8장 9절 말씀과 같이 성신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연고이다. 필자가 알기에는 목사가 성신받기를, 참으로 기근 만난 사람이 식물 구하는 모양 같은 자가 많지 않을뿐 아니라, 스스로 속여 자기가 간혹 묵시와 계시가 있으면 이것으로 성신받았는가 생각하는 이도 있고, 더 심한 이는 자기가 오랫동안 교역한 경험으로 자기가 성신받았다고 자신하는 이도 있다.

    현세에나 중고에나 상고에나 성신의 일은 너무 희미한 적도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성신받은 사람은 그 마음 안에 성신께서 계셔서 역사와 운동하심이 있을 것이다. 성신은 마귀처럼 사람 몰래 들고 날고 하는 것이 아니다. 비유컨대 화로에 불이 있으면 화기가 화로에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과 같이, 성신이 그 사람에게 계시면 성신의 능력이 나타나서, 그 사람에게 묵시와 계시와 감응과 기사와 이적이 따라 올 것을 예수께서 승천하실 때에 분명히 허락하셨고, 그대로 이룬 것은 사도들과 모든 성신받은 성도들에게 허락키로 된 것이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 말씀에 응하였고, 모든 선지자와 사도들과 성신받은 사람의 행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엘리사가 성신받을 때 일을 보고 또 사도들이 성신을 받을 대의 일을 참고하여 생각하니, 매우 어렵게 근고가 많은 줄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만일 주 앞에서 목사일을 하고자 하면 성신을 받아야 할 것인데, 주 앞에서 사생적 경심의 기도가 없고는 결단코 아니될 것이다. 그런고로 엘리사가 성신 구할 때에 그 선생 엘리야가 네가 어려운 것을 구한다 하여 어려운 시험을 많이 받은 것이다. 성신받은 효험은 부족한 지면에 다 말할 수 없거니와, 성신으로 난 기쁨은 이 세상 많은 재물을 얻은 것으로 비교할 수없고, 좋은 음식과 좋은 의복을 입은 기쁨과도 비교할 수 없고, 높은 지위와 권세얻은 자의 기쁨과 도 비교할 수 없다. 그런고로 고금에 선지자와 성도들이 남루한 옷을 입고도 기뻐하고, 주려도 기뻐하고, 매를 맞아도 기뻐하고, 또 쇠사슬과 착고를 차도 찬송하고, 사형장에서도 기뻐한 것이다. 이 기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교회 부흥도 여기서 된다. 그 증거는 성신받은 사람의 전도는 불을 토하고, 성신받은 사람들의 설교는 물을 뿜는다. 성신받은 사람의 말은 참 날센 검이다. 그런 고로 베드로가 성신받은 후에 한낮에 3천 명이 회개한 것은 부과 칼에 맞아서 모두 가슴을 붙잡고 통곡과 눈물로 회개하였고, 바울 선생도 성신받기 전에는 유명한 인물이요, 특별한 학식가이었지만 별로 한 일을 찾아볼 수 없고, 성신받은 후에야 많은 생명을 구원하는 사자가 되었다.

    성신께서 사람에게 들어와 계시기 원하는 것은, 우리사람보다 더 하시건만 받지못하는 것은 사람이 부족한 연고다. 그는 옛날에 노아가 방주에서 처음에 비둘기를 내어놓으니 들어오지 다시 도로 방주에 온 것이다. 또 까마귀를 내어 놓으니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이는 우리 중심에 까마귀는 마귀, 비둘기는 성신의 일을 생각할 것이다. 방주에서 까마귀는 날아가 앉을 곳이 있으나 비둘기는 앉지 못하는 것은 지면에 악취와 사체가 많은 연고이다. 우리의 심중에도 역시 악취와 사체가 많으므로 성신이 거주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이 분명히 있으니 성신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2장 17절, 18절에 『말세에 남종과 여종에게 성신을 주신다』고 허락하셨다.

    우리 목사된 사람은, 이 세상에서 별 자격이 다 구비되었어도 목사는 아니다. 성신 받고야 목사의 일을 볼 것이다. 만일에 율법적 목사이면 무슨 면목으로 주 앞에서 생명을 인도하며, 구령에 사명을 실행치 못할 것이고, 또는 사무목사가 비록 합리적으로 사무를 잘 볼지라도 그가 능히 뭇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자격이 되지 못할 것이고, 또 직업목사로 말하면 자기의 구원이 없는데 어찌 남을 구원할 여지가 있을까 보냐. 오호라 어찌할꼬. 율법목사와 사무목사, 직업목사가 무시로 교회를 결단내고 뭇 생명을 마귀에게 포로케하고 동포의 생명을 망케 하는도다.

    『오 주여, 이일같이 큰 일이 어디 있아오리까. 주여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선지목사를 세워 주옵고, 주님 허락하신 대로 주님의 남종과 여종에게 성신을 부어 주옵소서. 이 종이 눈물을 머금고 구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