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에 나아가는 자여-졸업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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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12사도를 선도하러 보내실 때에 일러 주신 말씀 가운데『오늘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마는 오늘날 여러분을 대할 적에 내 머리 속에 어스름하게 떠오르는 것은 광막무제하고 험악한 가시나무가 무성한길 없는 들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활동사진 필름처럼 전개됩니다.
여러분은 가정 형편과 경제 상태와 수업 과정에 많은 곤란을 맛보셨겠지요. 그러하여도 가정이나 학교는 결코 사회와 같이 풍파가 많고 곤란이 쌓인 곳은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까지는 고생만 보다가 이제부터야 안락을 누리실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이라도 과거보다는 이제부터가 한층더 어려우리라고 생각하여 두는 것이 해가 없을 것이요, 도리어 복리가 될 것입니다. 모태로부터 이 세상에 처음 나오는어린아기는 반드시 우는 것입니다 그 고고의 울음소리는 철학적으로 설명할 것도 아니요, 너무 종교적으로 해석할 것도 아닙니다. 생리적으로 심리적으로생각한다면, 따뜻하고 연한 낡은 주소를 떠나서 헥헥하고 걸걸한 새 셰계에 들어오는데 대하여, 막연한 자연적인 감각이 첫 호흡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것 뿐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 학교에서 졸업을 하고 다른 상급학교로 갈 이도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학교보다도 더 안온화한 본집으로 돌아갈 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사회에 발을 들여 놓는 이도 있을 것은 거의 분명한 일입니다.
우리 사회는 참으로 냉랭하고 너무 황막합니다. 사회에서 활동을 하여 보려는 이에게는 광막무제하여 길을 잃는 일도 생길 것이며, 충암절벽이어서 발붙일 곳이 없는 일도 생길 것이며, 삼림 형극이 무성해서 뜷고 나아갈 수가 없는 일도 생길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사회를 아주 떠나고 말 수는 사정상 의리상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도리어 거기다가 애착심을 붙여 보고 흥미를 내어보며 노력을 하여 보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이지 「사람은 저 잘난 맛에 살아 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지마는 명승고적은 못되더라도 제 고향이 그리운 법이고, 문화천지는 못되더라도 제 사회가 반가운 것입니다. 여러분은 들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들에 나아가서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희가 무엇을 하려고 들에 나아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려고 나아갔더냐, 화려한 의복을 입은 귀인들을 보려고 나아갔더냐, 선지자를 보려고 나아갔더냐. 세 가지로 말씀하신 후에, 선지자를 보려하였거든 세례 요한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예수께서 여러분을 들에 나아가는 이로 알으시고 말씀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떠한 신념을 가지고 예수 앞에 대답을 하여 봅시다.
「저는 바람에 움직이는 갈대가 아니올시다. 화려한 의복을 입을 귀인도 안되겠습니다. 오직 선각자 노릇을 하겠습니다」할 것입니다.
1. 갈대를 보려느냐
동풍이 불면 서편으로, 남풍이 불면 북편으로 바람부는 대로 흔들흔들하는 것 갈대입니다. 바람이 크고 사나우면, 크고 사나울수록 점점 더 흔들리는 것이 갈대입니다. 어느 때에 바람이 도무지 무엇이겠습니까. 소위 무풍대가 있고 조용한 기후가 있기는 하지마는 공기 진동이 도무지 안 되는 곳은 없겠습니다.
그러나 인류 사회의 물질적 교통으로 보든지, 정신적 운동으로 보든지, 역사동요하고 빨리도 변천되는 시대야 언제 있었겠습니까. 그리하여도 『 항산이 있으면 항심이 있다 』고 한 맹자의 말과 같이, 경제가 유족하고 수양이완전한 개인이나 사회서야 현대라고 할지라도 불안과 불평이 그다지 많겠습니까마는 우리들과 같이 아무것도 소요하지 못한 사람들은 더 심할 수 밖에없습니다. 참말 우리 사회에서는 갈대같이 되기가 쉬울 것이요, 또 갈대같아 가지고야 도리어 적은 성공이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공은 참된 성공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실패하고라도 이상으로 성공하는 수도 있는 것이며, 현재로서는 성공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다시 회복하지 못할 실패의 깊은 구덩이에 빠지고 마는 수도 없지 않습니다.
기원 전 4세기에 마게도냐에서 알렉산더 대왕이라는 위대한 영웅이 일어나서 동정서벌과 남승북극, 소향무적이었습니다. 바로 그 남방에 위치를 둔 희랍은 맨 먼저 압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왕은 희랍 인심을 안돈시키기 위하여 그 장관들과 명사들을 회유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희랍인에게 선량이라고 별명까지 얻었던 포숀씨를 청하여 놓고『나의 가장 경애하는 포숀씨여, 당신은 소아시아의 사대도시 중에 마음대로 한 대도회를 택하여 가지고 거기서 희랍인의 낙원을 세우라』고 하였습니다. 포숀씨는 대왕에게 대답하기를, 『대왕이 만일 참말로 나를 경애하실 것이면 나로 하여금 정직을 지키게 하여 주기를 바랄 뿐이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와 반면에 웅변가로 세계만고에 위대한 이름을 날린 데모스테네스는 대왕의 부장되는 하파루스씨에게서 금잔 한 개와 은 20달란트를 받고서는 양심에 가책을 받아 끝내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칸트씨의 도덕적 격률에는 『인격은 남의 것이든지 자기의 것이든지 도무지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목적으로만 취급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명예나 금전이나 권력이 나를 위하여 인격을 훼손하여서는 안 됩니다. 절조를 지키는 곳에 인격이 건설되는 것입니다. 절조라는 것은 인격 건설에 필요불가결의 조건입니다.
나는 어느 상점에서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속된이야기지만 그 가운데는 잠깐 말씀하려 합니다. 소년 점원 하나를 채용하였는데 인물도 얌전하고 심법도 무던하였습니다. 아주 중요한 자리를 맡길 생각이나서 준비적으로 시험을 한 번하였습니다. 애석하기 다시 없지마는 그 소년 점원은 그만 낙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시험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하면,점주가 다른 상점으로 금액 50원을 보낼 것이 있었는데, 어느 날 점주가 이 소년을 불러서 돈 뭉치를 주면서 이 돈 50원을 가지고 아무 상점에가서 입채시키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이 소년은 노중에서 불행하게도 그 금액을 계산하여 보았습니다. 그 금액은 50원이 아니고 분명히 55원이었습니다. 이 소년은 그때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하면서 마음속에서 분쟁이 생겼습니다. 그 남은 돈 5원을 가질까 말까 주인에게 도로 가져다가 그냥 그대로 갖다 주고 말까.
이리할까 저리할까 머뭇거리고 망설이기를 적지 않게 하였답니다. 그러다가서 마지막에 그 5원을 훔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아보고 그 점주는 섭섭하나마 이 소년을 아주 내어 보내고 스스로 말았습니다. 돈 5원 때문에 입신양명의 아름다운 길을 스스로 막고 말았습니다. 아, 여러분 절조라는 것이 얼마나 요긴합니까. 어디를 가든지 무슨 일을 당하든지 절조는 요긴합니다. 사람이면 절조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끼리도 그러하고 하나님께도 그러합니다. 여러분이 마음속에 스스로 결심하였던 것이든지, 공중 앞에 현연하게 고백한 것이든지, 신께 비밀하게 서원하였던 것이든지, 모두 다 성실하게 약속을 지키어야 합니다. 절조가 없는 곳에 인격이 없다는 것을 깊이깊이 명심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제 세례 요한을 생각합시다. 세례 요한은 절조가 있는 사람입니다. 절조가 있다는 것보다도 절조가 견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 교인과 사두개 교인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고, 헤롯왕과 로마 관리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고, 다수의 민중에게도 겁내지 않았습니다. 오직 정의와 신에게 순종할 따름이었습니다. 부귀가 불능음하고 위무가 부능굴한 선각자이었습니다. 들에 나가는 여러분들이여, 갈대를 보려 하십니까. 갈대를 보지 말고 선각자 요한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다 선각자가 되십시요. 우리 사회에는 갈대가 많이 있습니다. 선각자가 너무 적습니다. 여러분 기어이 선각자가 되십시오.
2, 아름답게 차린 자를 보려느냐
위대존대라는 속담이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는 의관과 외모를 지나치게 중히 보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을 신령한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는 구숭숭한 머리털을 그대로 늘어치고 약대털옷을 몸에 두르고 가죽띠를 허리에 띠고 집도 없고 가구도 없이 강변과 벼랑 밑에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세례 요한뿐 아니라 우리 주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고 산중에 뛰는 여우도 누울 굴이 있지마는 인자는 머리를 둘만한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고 할일 없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신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 신랑에게 시제하지 못하는 것이 예수께 공궤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는 예수께서 직접으로 제자들에게 훈유하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아니하고 하늘에 계신아버지의 뜻을 따르매 우리 앞서 나아가신 예수의 발자취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
속사람 곧 인격도 잘 되고, 겉사람 곧 신체와 의복, 음식도 잘 되면 안 좋겠습니까. 그렇지마는 세상 일이란 것은 흔히 그렇게 되지를 못하고 한 다리가 길면 다른 한 다리는 짧아지고, 낮이 밝으면 밤은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문장으로 예를 든다 하면 누구를 평론할 적에 첫머리에 칭찬을 한다 하면 복판에 가서는 비난을 하기 쉬운 것입니다. 「빛 좋은 개살구」가 되는 것보다는 보옥을 싼 박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표리가 똑같이 미려하고 신심이 한결같이 건전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마는 아까도 말한 것과 같이 한편이 올라가면한편은 내려와서 저울대와 같이 되어 가는 이 세상에서 쌍전겸비하기는 참말 쉽지 못합니다. 베드로의 서신 가운데 있는 말과 마찬가지로 금은 주옥으로 겉사람을 장식하지 말고, 온유와 단정함으로 마음속에 숨어 있는 참 사람을 장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프랑스 도시에서 향료를 파는 어떤 한 향구사가 노방에서 많은 사람에게 향료를 파느라고 교통방해의 혐의를 받아 재판소에 서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판사가 향구사에게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폰누푸시가와 같은 사람이 많이 통행하는 노상에서 군중을 모아 가지고 실익이 없는 변변치 않는 향료를 팔아서 많은 사람의 주머니에서 금전을 탈취하였느냐. 더욱이 교통에 방해를 주었느냐』물은즉, 향구사는 판사에게 반문하기를 『각하의 추측에는 폰누푸시가에 왕래하는 사람이 매일 몇 명이나 될 줄로 생각하십니까』하였습니다. 판사는 모른다고 간단히 대답하였습니다. 향구사는 판사에게 말하기를 『제가 대강 예산한 대로 말씀을 드린다면 만 명 가량이 매일 통행을 합니다. 그러한데 그 만명 중에 현인이 몇 사람이나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하였습니다. 판사가 대답히기를 아마 한 백 명이나 있을 듯하지 하였습니다. 향구사는 다시 말하기를『범인 만 명 중에 현인 백 명이 있다 하고서 그 나머지 9천 9백 명은 모두 다 제 고객이올시다』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광녀 외모와 의복만치장을 하고 정신과 인격은 생각지도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세계 인류의 문명 정도로든지 경제 상태로 보든지 선각자가 되어야하겠다는 자가편으로 보든지 검소질실을 위주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은 허영심과 형식주의를 내버려야 하겠습니다. 나는 물산을 장려하는 의미로 말한다는 것보다 도덕적 향상을 위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외국물산 중에서라도 가장 고가되는 것과 매우 빨리 헤어져버리는 것인 의복재료와 일용잡화를 사들이는 것은 참말 야단난 현실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서울이나 평양이나 그 밖에 도회지에서 시가지에 나와 다니는 남녀대중을 볼 것이면 경제상태가 곤란 막심하다는 사정과는 정반대되는 현실을 나타냅니다. 남자들은 분수에 넘어가는 사치한 양복을 입은 이가 많고, 여자들은 참말 눈을 부시게 하는 주단 의복을 입었습니다.
명절날을 당하면 아이들에게 조밥 토장을 먹일지언정 의복을 반드시 주단을 사용합니다. 나는 함경북도에 오래 있은 까닭으로 두만강변에서 자주 듣고 많이 본 일이 하나 있습니다. 도선장에서는 경찰관리들이 원강하는 행객들의 행리를 검사하며 소지 금액을 기록합니다. 중국인들은 헌털방이 옷을 입고 누더기 보퉁이를 메고 가는 자라도 수 백 원의 금전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의복을 무던히 차리고 다니는 사람 치고서도 공랑이 많다고 합니다. 내가 의복을 깨끗이 하는 것이 나쁘다는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헌의복을 기워 입을 지라도 잘 빨아서 깨끗하게 하여 입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실력이 없는 의행만을 수식하는 좋지 못한 풍속만은 고려하여야 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실질이 있고 내용이 있는 참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서아침 일찍이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다가 시장하셔서 길가에 있는 무화가 나무를 향하여 가셨습니다. 그 나무는 지엽이 퍽 무성하여서 과실이 열렸으면 무던히 많이 열을 듯 하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가까이 가서 본즉 따간 자취도 없이 과실은 한 개도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셔서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제사이니 십일조니 절기니 안식일이니 모두 다 형식적으로 의례적으로만 잘하는 체하고 인과 의와 긍휼과 정직은 다 잊어버리고 지나갔습니다. 약대는 통으로 삼키고 하루살이는 걸러 먹었습니다. 그것이 유대사람이 그러한 참혹한 취후를 이룬 원인 중의 하나이올시다.
우리는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도덕상으로나, 신앙 상으로나, 형식주의를 버리고 실질주의를 취하여야 하겠습니다. 외모를 미려하게 하는 것보다 내용을 충실히 하여야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에게 배울 것이 많지마는 이 방면에서도 우리는 잘 배워야 하겠습니다.
3. 선각자를 보려느냐
들로 향하여 나아가시는 여러 졸업생들, 선각자를 보시렵니까 보실 뿐만 아니라 선각자가 되어야 합니다. 온 조선 안에 중등 이상의 학교를 졸업한 이가 얼마나 되는 줄로 생각하십니까. 남녀를 통틀어 놓고 4만 명 내외가 된다고 합시다. 2천만 중에 4만명은 5백분의 1이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책임은 중대하고 여러분의 지위는 높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여러분은 우리 민중의 지도자입니다. 이 의미에서 지도 원리를 여러분은 항상 생각하고 최선을 다하여 준수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이 지도 원리에 관하여 학술적으로 이론적으로 상세히 말씀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 시간도 없거니와 그럴 필요도 없겠습니다. 다만 여러분이 성경에서 예수를 잘 배우면 그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몇 마디 하겠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는 『대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무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려 속죄하여 주려 함이니라』하였고, 누가복음 12장 42절에는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을 맡아 거느려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고 외치셨으며, 요한 음 10장에서 목자가 양을 먹이는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 『나는 선한 목자로 양보다 앞서 가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아 여러분!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만 하시고 실행하시지는 않았습니까? 아니올시다. 예수는 참말 꼭 그대로 행하셨니다. 여러분은 남들의 봉사를 받으려 하십니까. 예수를 따라 가시려거든, 여러분이 먼저 남들에게 봉사하셔야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청지기가 되어 대중에게 생명 양식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의 뒤를 계승하여 지도자가 되어 가지고 지도를 받는 대중보다 앞서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희생적 정신을 발휘하여야 합니다. 이에서 더한 지도 원리는 어디든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유치원 보모 일을 잘 아실 것입니다. 보모된 이는 아이들보다 먼저아이가 되지 아니하면 아니 됩니다. 보모가 손뼉을 쳐야 아이들도 손뼉을 칠 것이요, 보모가 노래를 불러야 아이들도 노래를 부를 것이요, 보모가 춤을 추어야 아이들도 춤을 출 것입니다. 대중의 지도자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옛적부터 성공을 한 군대 장관은 신선사졸이 그 필요조건입니다. 일노전쟁에 여순함락은 한 가지 큰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듯이 내목대장은 여순전쟁에서 그 아들들을 선봉으로 내보내어서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자기 희생이 아니면 금성철벽의 난공불발인 여순구를 그렇게 빨리 함락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이야기지만 나폴레옹 대제의 일화 가운데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적군과 대진을 하고 있을 적에 번을 보던 보초병 하나가 너무 피곤하여 거꾸러져서 그만 잠이 들었습니다. 손에 들었던 무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침 나폴레옹이 미행을 하여 순시를 하던 중에 이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웬만하면 목을 베이거나 중형을 할 것이겠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다른 방침을 취했습니다. 그 무기를 잡아들고 적지 않게 오랫동안 대신 번을 보았습니다.
잠이 들었던 보초병이 어떻게 된 일인지 놀다서 일어나더니 자기 손에 잡고 있던 무기가 없어진 것을 보고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다가 나폴레옹 대제가 눈에 띄었습니다. 보초병은 사색이 되어 망지소조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은근히 이르는 말이 『네 무기는 여기 있다. 나는 너를 대신하여 지금까지 번을 보고 있었다. 이제부터 다시는 잠을 들지 말고 경성하여 원수를 지키어라』하는 말로 부탁을 하고 떠나갔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나폴레옹 대제를 도덕적으로 칭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그만한 사업을 한 것은 이런 점에서 그 이유를 알 수가 있다고 합니다. 피곤한 중에 단잠 자는 것을 깨우지 아니하고, 대신 번을 보아주며 친절히 후사를 부탁하고, 그 중죄를 용서하여 준 것은 그 병정으로 하여금 결초보은을 할 마음을 일어나게 한 원인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나폴레옹에게 대중을 인도하는 미력이 있던 것을 증거하는 일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제는 결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세례 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이 절조가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왕궁에 있는 귀인들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교만스럽게 구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참 선지자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선지자가운데에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이 낳은 모든 사람 주에 가장 탁월한 사람이라고까지 칭찬을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권력 있는 사람에게 아부하지 아니하고, 금은과 의복에게 잡히우지 아니하고, 자기의 사명을 봉행하기에 최선을 다한 위대한 선각자이었습니다. 조선 광야로 나아가시는 여러분은 무엇을 보시려 하십니까. 다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시오. 『갈대를 보러 나아가느냐. 화려한 의복을 입은 귀인들을 보러 나아가느냐. 선지자를 보러 나아가느냐.』여러분은 꼭 선지자가 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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