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케 하시는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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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케 하시는 은혜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 내었거늘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 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저희가 애굽 땅으로 다시 가지 못하겠거늘 내게 돌아오기를 싫어하니 앗수르 사람이 그 임금이 될 것이라 칼이 저희의 성읍들을 치며 빗장을 깨뜨려 없이 하리니 이는 저희의 계책을 인함이니라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라히라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 저희가 애굽에서부터 새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같이 떨며 오리니 내가 저희로 각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호11:1-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15:11-24)\
호세아는 그의 선지적 설교를 통해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를 준열히 나무랐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실제적 삶을 통해서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이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한 최선의 방법임을 아셨고, 그것이야말로 성육신의 본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이스라엘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로 하여금 사랑이 배신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그러한 체험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에게 배반당한 하나님의 심정을 뜨겁게 선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전 창기와 결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음란을 행함으로 여호와로부터 멀어졌고, 그리하여 이제는 우상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우상을 섬김으로써 이스라엘은 말 그대로 다른 연인들과 동침하며 행음하는 부정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단 하나뿐인 진실한 연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은 분열되었고,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시리아와 맺은 동맹은 이스라엘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으며 이스라엘의 새 연인들인 우상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런 식으로 계속 나간다면 그녀에게는 새롭게 될 그 어떤 길도 또한 미래에 대한 그 어떤 소망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마리아와 온 땅이 멸망당할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일은 주전 722년에 일어났습니다.
만약 그것이 이 메시지의 끝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소망 없는 어두움의 선포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의 예언은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남왕국 유다에서 활약한 동시대의 선지자인 아모스와 비교해 볼 때, 우리는 아모스와는 다른 어조와 열정을 곧 깨달을 수 있습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공의와 분노의 메시지를 준엄하고 단호한 어조로 전합니다. 호세아의 메시지 역시 아모스 못지 않게 그 어휘와 경고에 있어서 준엄하며 하나님의 공의와 의로우심에 대해 예언하지만, 아모스와는 다른 느낌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반면에, 호세아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영상에 압도당하고 있다.\고 존 페터슨(John Paterson)은 말합니다.
호세아는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배반당한 사랑의 쓰라린 고통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너무도 진실하고 깊어서, 배반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정하고 음란한 아내를 그대로 떠나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행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놓아보낼 수 없었던 연인 곧 하나님에 대해 호세아가 그려내는 그림입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자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더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노라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희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이라 나는 네 가운데 거하는 거룩한 자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우리의 이 해가 서로 다르다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여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도 매우 달라집니다. 물론, 그 두 가지는 함께 합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의 신이 우상이라면, 그것이 나무로 새긴 우상이든 아니면 우리의 충성과 우리의 헌신을 요구하는 많은 우상들 중의 하나이건간에, 우리의 관계는 그 우상의 성격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언제나 예외없이 그 관계는 인간을 희생 제물로 요구할 정도까지 우리 모두의 인간성을 앗아가 버리는 결말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것은 결혼 생활에서도 역시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결혼 생활에서의 관계는 배우자의 성격에 따라 좌우됩니다. 만약 한쪽이 너무 지나치게 요구하고 위압적이며 관대하지 못하다면, 그 관계는 비인간적인 것이 되어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설교는 이와 강한 대조를 이룹니다. 호세아서의 하나님의 성격은 은혜, 곧 그의 피조물을 껴안고, 인류를 껴안고, 이스라엘을 껴안고, 심지어 음행한 이스라엘을 껴안기까지에 이르는, 분에 넘치는 사랑으로 가장 잘 상징됩니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그분의 자비와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희생 제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원하시며, 사람들이 그 분 앞에 나와 굽실대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신실함으로 응답하기를 원하십니다. 호세아의 메시지는 사실 예수님의 탕자 비유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친숙한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는 하나님의 성격을 잘 드러내 주기 때문에 되풀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음란한 아내인 이스라엘과 같이, 그 허랑방탕한 아들은 먼 나라로 갔습니다. 즉 그는 아버지의 귀중함을 버리고 멀리 떠난 것입니다. 그는 다른 신을 좇아갔고, \허랑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낭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점점 인간으로서의 위엄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우상들은 그가 가진 돈뿐만 아니라 그의 자존심까지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돼지 우리에 사는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렇게 되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하인마저도 인간답게 살펴주고 대접해 주는 아버지에게 생각이 미칩니다. 그리하여 그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때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놀라운 영상이 펼쳐집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눅 15:20)
그것이 바로 호세아가 그려내는 여호와입니다.
이스라엘아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드리리이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을 얻음이니이다 내가 저희의 패역함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 14:1-4)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성경적 이해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시며, 하나님은 창조와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도 먼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즉 그분은 사랑으로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자비가 모든 것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창조하고 구속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며, 아버지나 어머니와의 관계처럼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사랑이고, 불순종과 죄악 속에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도 사랑이며,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고 계시된 사랑입니다.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구원을 얻었나니(엡 2:4-8)
은혜는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 곧 우리를 하나님께로 되돌아가게 하는 선물입니다. 그 분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 우리를 찾고 구원하시고 그 자신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은혜는 고백과 맹세를 통해 우리 영혼에 부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인간성을 잃게 하는 우상들의 요구와 하나님의 은혜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은혜는 우리를 자유케 하는 반면에 우상의 요구는 우리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인간성과 개인적 특질을 파괴한다는 점입니다. 우상들은 우리를 얽어매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하게 하십니다. 우상들은 우리의 성장을 방해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하십니다. 우상들은 우리를 죽이지만, 하나님은 생명을 주십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시킨 것은 바로 은혜였습니다. 광야의 고난을 거쳐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것도 은혜였습니다. 계속된 불안정한 세월 속에서 그들을 보살피신 것도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우상에게로 향함으로써 은혜를 저버렸습니다.
호세아의 메시지에는 은혜의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좁은 견지의 영적인 생활과 관계되는 것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와 같은 찬양을 노래할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생각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내어 안전하게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호세아서에서 은혜란 단지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영적인 관계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생활 전체 곧 이스라엘의 예배와 정치 모두에 관계된 일입니다. 사회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부인하는 것은 곧 은혜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지어 우리가 \놀라운 은혜\라는 말을 생각할 때조차 그 말은 이 세상에서의 여행이나 순례자로서의 생활과도 관계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매일 겪는 삶과의 투쟁 안에서이기 때문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시자인 존 뉴튼(John Newton)은 노예선의 선장이었습니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노예 무역으로 보냈으나 마침내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삶이 바뀌었고, 노예 해방의 기수가 되었습니다.
모든 위험과 시련과 유혹을 뚫고 나 어느새 다 달았네 은혜로 나 지금껏 안전하게 왔으니 은혜로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하시리
은혜는 죄로부터, 두려움으로부터, 또한 다른 모든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은혜로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에 기초하여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케 하시며 역사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사회에서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은혜와 사랑의 산물임을 이제 우리는 압니다. 은혜는 그것이 개인적이건 집단적이건 간에 사람들을 비인간화시키고 망쳐 버리는 모든 것들로부터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로운 사랑의 사역입니다. 은혜는 포로들에게 자유를 가져오며, 눈먼 자를 보게 하며, 저는 자를 치유합니다. 은혜는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자에서 눌린 자를 해방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자로 바뀐 존 뉴튼처럼, 삶을 바꿀 수 있습니다. 자유케 하는 은혜는 사랑에 배반당한 호세아의 체험 속에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구원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더욱 더 잘 나타나 있습니다. 행동하는 이 사랑, 이 은혜는 언제나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입니다.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은 하나님의 요구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일을 상기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해방은 그들을 자유하게 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게 합니다. 법은 은혜 뒤에 옵니다. 그 반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순서를 거꾸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법을 먼저 지키고, 하나님의 요구를 먼저 만족시키고, 명령을 이행하고, 그런 다음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좋은 소식은 은혜가 먼저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그분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이고, 순종과 섬김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해방하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섬기는 일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의 응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유케 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즉 자유케 하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에서 바울은 이런 말로 편지의 절정을 이룹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율법주의이건 새 우상에게 사로잡히는 일이건간에, 자유케 하는 은혜에 기초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입니다(갈 5:6).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는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하게 함 곧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을 발견케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호세아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으로부터 돌아서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분명합니다. 허랑방탕한 아들이 돼지우리를 떠나 아버지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회개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개인이건 교회건 국가이건 간에, 회개함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돼지 우리 속에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돌아오게 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돌이킬 때까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호세아가 이스라엘에게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뒤를 돌아보라. 그리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너를 애굽에서 해방시키셨는지를 보라. 그것은 네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그리고 그 동일하신 하나님이 너와 우리의 백성이 자유케 하시는 그분의 은혜를 발견하기를 원하시며 오늘도 함께 하신다. \돌아오라 오 이스라엘,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그리고 너에게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키시기를 원하시는 너의 참된 연인 그분의 긍휼을 발견하라. 하나님은 결코 자비를 잊지 않으시나,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신지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분께 감사드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호세아의 메시지는 분명히 개인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적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국가적으로도 적절합니다. 왜냐하면 호세아의 메시지는 국가를 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민족의 우상 숭배와 역사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해방과 치유의 원천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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