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信者)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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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信者)의 기쁨 / 전진규(全珍珪) <감리교 목사>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4)
기쁨은 사랑의 정신 생활에 큰 활력을 주고, 육체를 위해서도 가장 훌륭한 건강제다. 고통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있어서 이것은 누구든지 얻고자 하는 간절한 요구이다. 이 기쁨은 누구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실제로 얻는 사람은 대단히 드물다. 문호 괴테는 말하기를, 자기의 일생에 있어서 기쁨으로 지낸 시간은 겨우 7일 밖에 되지 못하였다 하였고, 바이런경은 말하기를 자기 일생에 기쁘게 지낸 시간은 겨우 1일쯤이라 하였다. 이 얼마나 기쁨이 귀하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말인가?
그러나 예수님의 대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하였다. 과연 획기적인 대 교훈이요, 현대인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대 복음이다. 진실로 이러한 지경에 들어갈 수 있을까? 정성껏 검토하고 추구하여 보자. 대체로 기쁨이라는 것이 보통으로 어떻게 생기는 것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인가?
Ⅰ 사람이 자기의 욕망을 성취한 때에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문전 걸식하는 사람이 먹을 것을 많이 얻었을 때에, 지식을 요구하는 청년이 학업을 성취하여 최고 학위를 얻어가지고 금의환향(錦衣還鄕)하였을 때에, 혹은 빈한 사람이 대금을 얻어 부자가 되었을 때 기쁨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기쁨이 항상 즐거워할 수 있는 항구적 기쁨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의문이다. 아침을 많이 얻은 걸인은 저녁밥의 염려가 다시 오게 되고, 금의환향한 청년도 몇 달이 지나면 현사회의 쓰라림을 맛보게 되며, 혹은 비관 낙망자의 길을 밟는 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빈자가 부자가 된 때에도 기쁨이 있었으나, 재물로 말미암아 도리어 고통을 당하는 자를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Ⅱ 사람은 향락 생활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 당시, 저열한 쾌락주의자들은 말하기를, “먹고 마시자 내일 죽으리라” 하였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도 철없는 향락주의자들이 ‘젊어 놀자’ 라는 노래를 부른다. 그들은 낮 12시경에 일어나서 오후에는 경마장이나 달리고, 저녁이면 극장이나 술집에서 젊은 여인들과 어울려 밤 가는 줄 알지 못하고 흥겨워 노는 것이 기쁘고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귀한 인생을 낭비하며 허송하는 최악의 일이요, 마치 등화(燈火)에 취한 아군(蛾群)이 다음 시간의 비애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경주 여행 중에서, 고적 포석정을 볼 수 있다. 이곳은 신라 말년에 경애왕이 조정의 신하들과 더불어 술마시고 놀던 곳이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망국의 비애를 맛보지 아니하였던가? 탕자는 부친에게 재산을 얻어가지고, 멀리 가서 이러한 향락 생활의 말로에 팔껍질을 먹지 아니하였는가? 그런즉 이러한 기쁨은 잠시적 즐거움이 될지언정 항상 기뻐하는 영구적 즐거움은 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먼저 이 서신의 기자인 바울 사도와 수신인인 빌립보 신자들의 형편을 상고하여 보자.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생(新生)을 얻은 후에 자기의 문벌․지위․학식을 분토(糞土)와 같이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로서 제1의 자랑을 삼았으며, 복음 선전을 유일한 사명으로 자각하여, 소아시아와 구라파 천지를 기독교화하는 복음 선전 운동에 노력하였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는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아 피체되었다. 이 서신은 로마 옥에 갇혔을 때 기록한 것이다.
빌립보는 마게도냐 첫 성(城)으로, 바울이 구라파에 건너와서 제일 먼저 전도하여 교회를 세운 곳인데, 이 성은 기원 42년에 로마 옥타비아누스 황제가 반란군을 빌립보 평원에서 대파하고, 이곳을 군용 식민성(軍用殖民城)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서신 중에서 ‘즐거워하라’ 는 어구를 많이 사용한 것을 보면, 이 즐거움은 외부적 조건이나 경우가 좌우할 수 없는 기쁨인 것이 분명하다. 즉 역경․실패․참사․시련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불멸의 기쁨이다. 치부나 향락 같은 외부적 조건이 아니요, 생수가 치솟는 샘과 같은 기쁨이다. 그러면 이러한 기쁨은 어떠한 것인가?
1. 신생의 즐거움이다. 바울은 자기의 문벌과 학식으로 인하여 자부심과 교만한 생각으로 예수교를 핍박하였다. 무죄한 남녀 신자를 잡아 옥중에 던지고, 성자 스데반을 죽였다. 그의 교만․시기․잔인한 행동은 그로 하여금 죄인의 괴수(魁首)를 만들었다. 다행히 다메섹 성문에서 예수를 만난 후, 자기의 대죄악(大罪惡)을 참회하고, 3일 밤을 금식하며 애통한 후에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곧 교만은 겸손으로, 잔인은 사랑으로, 죄인의 괴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마치 산양이 변하여 면양(緬羊)이 된 것 같이 대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대 구원이다. 그는 이러한 매우 귀중한 은혜에 너무도 감격하여, 죽든지 살든지 주를 위하고, 자기의 제일 자랑은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다. 그가 만년 투옥된 죄인의 처지에 있다 할지라도, 이 새 사람의 즐거움은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성도들이 다 이러한 귀중한 체험이 있다고 하면, 분명코 즐거움은 항구한 기쁨이 될 것이다.
2. 신뢰와 위안의 즐거움이다. 오늘날은 고해(苦海)와 같아서 풍파가 많다. 가볍게 불어오던 맑은 바람도 풍우를 일으키고, 평온하던 해면도 노도가 일어나서 선박을 파손시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절대 신뢰하는 자는, 마치 따뜻한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와 같이 두려움이나 걱정이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빈궁과 기갈을 맛보시고 경험하셨지마는, 너희가 의식(衣食)를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치셨고, 갈릴리 바다 풍랑 속에서도 편안히 쉬셨으며, 십자가에 달리시던 전날 밤에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환난 중에도 안심하라” 는 큰 선물을 끼쳐 주셨다. 야고보서는 말하기를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라” 하였고, 바울은 말하기를 “모든 시험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다” 고 하였다. 베드로는 옥중에서도 모든 염려를 주께 맡겨 버리고 비단 요에 누운 것같이 잠들었고, 바울은 지중해 위험한 풍파 중에서 절대 안심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이러한 즐거움은 하나님 아버지를 절대로 신뢰하는 자의 심중에만 있는 위안이요 기쁨이다.
3. 인격 향상의 기쁨이다. 그리스도인의 향상의 표준은 주께서 가르치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는 목표까지 향상하는 것이다. 해면에 떠 있는 작은 배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표류하는 것 같은 생활이 아니요, 나는 새가 깃을 쳐서 하늘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과 같은 생활이다.
우리의 선량한 품성을 함양하여 인격을 향상시키는 도덕 생활의 기쁨 몇 가지를 들어보자.
(1) 온유와 겸손 -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하시고, 성경에 “모세는 마음이 온유하다” 하였다. 온유한 이의 심중에는 대담력이 숨어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최후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에 앞어 행하신 것과, 모세가 대중을 거느리고 홍해를 건너간 것이 얼마나 대담한 일인가? 겸손한 품성을 가진 이에게는 자연히 경의가 생기는 것이다. 교만한 자의 심중에는 불만과 불평이 차 있지만, 겸손한 이의 심중에는 항상 평안과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2) 용서 - 용서는 인내보다 한 발자국 더 나간 도덕이다. 참다가 만일 폭발함녀 큰 풍파가 일어나기 쉬우나 용서하여 버리면 이러한 걱정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지니라”(마 18:22) 하신 것이다. 주님의 심중에는 언제든지 원수와 시기가 없으신 것과 같이 용서하는 이의 심중에는 적이 없을 것이다. 분노를 품은 그 사람의 심중에는 평화와 안심이 있을 수가 없지만, 용서하는 이의 마음은 언제든지 높고 맑은 하늘과 같이 명랑하고 항상 낙원에서 살 수가 있을 것이다.
(3) 사랑 - 사랑은 절대의 고독이다. 이 세상에 천국을 건설하는 유일한 무기요, 원수를 변하여 친구를 만드는 유일한 정도(正道)다. 십자가 위에서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신 그리스도의 커다란 사랑에 30일이 지나지 못하여 예수를 못박은 자들이 가슴을 치면서, 눈물을 흘리고 저의 사랑하는 제자가 되지 아니하였는가. 사랑은 생명의 별어(別語)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 삶이 있고, 삶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큰 활력인 사랑의 소유자의 인격은 위대하여질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심중에는 참 평화와 기쁨이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신자의 도덕 생활의 즐거움은 허다한 것이다. 특별한 것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팔복(八福) 같은 것이다. 이상의 도덕 생활 중에서 좋은 품성이 자라나고, 고상한 인격이 키워져가는 것을 생각할 때에, 이것은 과연 다른 사람이 알기 어려운 큰 기쁨이 되는 것이다.
4. 봉사와 기쁨 -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5리를 가자고 할 때에 10리를 가는 생활이다. 곧 의무의 5리 외에 봉사의 5리를 더 가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하셨다(마 20:23).
우리 신자가 어떤 학교의 교원이 되었다면, 나의 말은 학교 선생의 책임 외에 그 이상 학생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 신자들이 교회 사업을 위하여 진력하는 것은 봉사하는 일이다. 내가 주일학교 교사가 되어 나의 맡은 바의 학생을 최선을 다하여 가르치고 지도한 결과에, 그 학생들이 그리스도적 인격을 키워나가는 것을 볼 때 나의 마음 속에 기쁨은 클 것이다. 우리가 전도하여 사람을 주 앞으로 인도함으로써 새 사람이 되었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바울의 기쁨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기가 지도한 신자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빌 4:1) 한 것이다. 이러한 봉사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사업, 불후의 탑이 한 층 두 층 올라가는 것을 볼 때에, 우리의 심중에서 일어나는 즐거움은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5. 희망의 기쁨.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는 자에게는 낙망이 없는 것이다. 루터가 개혁 사업에 너무도 피로하여 낙심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돌아가셨다는 그의 부인의 탄식하는 말을 듣고 다시 정신을 차려, 살아계신 하나님이 함께 하는데 못할 일이 무엇이냐고 분기(奮起) 하였다고 한다. 나는 수십년 교역 생활 중에서 신자의 가정과 불신자의 가정을 심방하는 중에, 확실히 다른 것 하나를 발견하였다. 곧 신자의 가정은 불신자의 가정보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율복을 믿고 바라는 희망의 기쁨이 넘치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이상에 말한 모든 기쁨은 일시적 즐거움이 아니요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영구적인 즐거움이다. 이외에도 주 안에서 얻는 기쁨이 풍부하지만, 이것으로서 말을 마치려 한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여, 이 고해와 같은 세상에서 주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한 낙원의 생활을 끊임없이 계속할 뿐 아니라, 이 기쁨이 넘쳐 흘러서 우리의 주위를 천국화하기를 결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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