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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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눅 10:29)\
저는 여러분과 선한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사람의 모범적인 삶은 항상 꾸벅 꾸벅 졸고 있는 사람의 양심을 괴롭히는 번쩍이는 섬광입니다. 이 사람의 선함은 특별한 지침을 만드는 수동적 언어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구하는 것과 같은 행동의 참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목적지에 이르는 도덕적 순례 여행에서 이 사람의 선함을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고속도로를 여행하면서 실천하는 사랑의 윤리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선한 이웃’이기 때문에 선하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사람의 윤리적 관심은 심오한 의미를 지닌 짧은 이야기로 표현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영생에 대한 신학적 논쟁으로 시작되어 위험천만한 길 위에 누워 있는 사람에게 베푸는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결론 맺습니다. 예수는 유대법에 아주 능통한 훈련을 받은 사람에게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 대답이 즉시 나왔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잠시 후 율법사가 율법을 정확하게 인용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 대답이 떨어지자 예수가 의미심장한 말을 했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이 율법사는 분노했습니다. “왜 율법에 초보인 사람이 대답할 수 있을 정도의 쉬운 질문을 율법에 능숙한 전문가가 제기했을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사의 입장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한다면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답변은 율법사가 제기한 질문,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과 결론적으로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지금 추상적 신학 논쟁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는 논쟁에 몽둥이를 들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분석의 마비”에 빠져 들지 않기로 작정을 하고 하늘에 떠 있는 질문을 예루살렘과 여리고 라는 위험천만한 곡선 안에 내려다 놓습니다.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 쓰러져 있는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람은 강도에게 강도질을 당하고 두들겨 맞았습니다. 강도는 이 사람을 버리고 떠났고 이 사람은 거의 반 죽은 상태로 남았습니다. 이 때 한 제사장이 나타났지만 이 사람은 길 저편으로 지나갔습니다.
조금 후 나타난 레위인도 그냥 지나갔습니다.
마침내 어떤 사마리아인, 유대인으로부터 혼혈인으로 취급받고 사람 대우를 못 받던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상처받은 사람을 보자 연민으로 그 마음이 움직였고 지나가던 사람들 중 처음으로 도움을 주리라 작정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자기 짐승 위에 이 사람을 태우고 “이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 치료해야 해.” 라고 합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나는 그의 이름을 모른다.” 예수는 정곡을 찌르며 말합니다.
“너에게 친절한 그 누구나 너의 이웃이다. 이웃은 인생의 길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이다. 그는 유대인도 아니요 이방인도 아니다. 그는 러시아인이나 미국인도 아니다. 그는 흑인이나 백인도 아니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 , 인생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 위에 있는 수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웃의 의미를 신학적 정의 속에서 내린 것이 아니라 삶의 정황 속에서 내렸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선함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왜 항상 이웃에게 덕을 나타내는 모범으로 이 사람을 찬양하는 것입니까? 내가 보기에는 이 사람의 선함은 한 단어, “이타주의”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인종평등주의를 가진 이타주의자입니다. 이타주의는 무엇입니까? 사전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헌신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 이라고 이타주의를 설명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그 삶의 첫 계명인 타인에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선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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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인은 보편적 이타주의를 베풀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인종과 종교와 국민성과 같은 영원한 화두를 초월하여 이것들을 통찰할 수 있는 눈을 가졌습니다. 역사의 고속도로를 따라가는 사람의 긴 여행 중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는 이웃에 대한 관심이 종족과 민족과 계급과 국가 부분까지 미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초기 구약 성경 시대의 하나님은 종족에 국한된 하나님이셨고 윤리도 종족에 국한된 것입니다. “살인하지 마라” 는 말씀은 “하나님을 위해서 이스라엘 동료는 죽이지 말고 팔레스틴 사람을 죽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헬라의 민주주의는 귀족계급을 위한 것이었지 그 도시를 건설한 헬라의 노동자들을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끄럽지만 다수를 소수로 대체하는 미국인들의 지독한 성향 때문에 독립선언문의 중심 개념이었던 보편주의가 무시되고 있습니다. 북부와 남부의 수 많은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이 “모든 백인들이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라는 뜻이라고 절대적으로 믿고 있습니다. 독점 자본주의에 대한 확고부동한 우리의 헌신은 산업이 제 기능을 다하도록 땀과 기술로 헌신하는 노동자들을 위하기 보다 산업 전선에서 우리가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게 합니다.
이 협소한 그룹 중심적인 태도의 황폐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자신의 그룹 바깥의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국 사람이 오로지 자신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아시아, 아프리카, 북 아메리카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왜 여러 나라들이 조금의 참회도 없이 미친 전쟁에 뛰어들면 안됩니까? 왜 같은 민족, 나와 같은 시민을 죽인 살인자는 죄를 지은 것이고 왜 전쟁터에서 다른 민족끼리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영웅적 행위로 치부받아야 합니까?
제조업자들이 그들의 이익만 추구한다면 이들은 다른 면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동화의 결과 이들은 수 천만 노동자의 직업을 빼앗고 여리고로 가는 길 위에 쓰러진 사람을 버려두고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부의 더 나은 분배와 노동자가 더 나은 삶을 살게 하기 위한 모든 사회제도적 움직임들을 심판하려고 할 것입니다. 백인이 오직 자신의 종족의 이익에 관심을 둔다면 흑인이 강도를 당하고 존귀한 인격이 발가벗겨 지는 모습을 본다고 해도 어느 길 가 위 먼지 속에 흑인을 버려 두고 떠날 것입니다.
몇 년 전, 자동차가 몇 명의 대학 농구 흑인 팀을 운송하고 있었을 때 남부의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젊은이들 중 세 명은 아주 심각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엠블란스를 요청했는데 엠블란스는 사고 현장에 도작하자마자 자신은 백인이기 때문에 흑인에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다고 말하고 차를 몰고 가버렸습니다. 사고 현장을 지나가던 운전자가 이 청년들을 불쌍하게 생각해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당직 의사는 적개심을 품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병원에서 흑인을 치료할 수 없습니다.”
이 젊은이들이 사고 현장에서 50마일 떨어진 어떤 시골의 “유색”병원에 마침내 도착했을 때 한 명이 죽었고 30분과 50분 간격으로 다른 젊은이들이 죽었습니다. 이 젊은이들이 즉시 치료를 받았다면 어쩌면 모두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일은 남부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수 천 가지 비인간적인 사건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원초적인 종족 중심, 민족 중심, 인종 중심 윤리가 낳은 믿을 수 없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편파적 지역주의의 실제적인 비극은 우리가 사람을 물건이나 단순한 사물로 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좀처럼 사람을 그 사람의 진실한 인격체로 보지 않습니다. 영적인 근시안은 우리가 사건의 외부만 보도록 제한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유대인이나 이방인, 카톨릭 신자나 개신교인, 중국인이나 미국인, 흑인이나 백인으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들이 우리와 같은 재료로 지음을 받은, 꼭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같은 동료이자 인류라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들 스스로 몸에 흐르는 피로 구분했을 뿐, 그들과 같은 인류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항상 우리의 영의 눈에서 지역주의라는 백내장을 제거하여 사람을 사람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깨우침을 줍니다. 사마리아인이 상처투성이 사람을 처음에 유대인으로 인식했다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교분이 없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멈춰서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상처받은 사람을 처음에 한 인간으로 보았습니다. 이 인간은 단지 사고를 당한 어떤 유대인이었을 뿐입니다. 선한 이웃은 사건의 표면을 초월하고 모든 사람과 인류가 가지고 있는 내면의 질에 관심을 둡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형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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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인은 아주 무시무시한 이타주의를 행할 능력을 소유했습니다. 그는 형제를 구하기 위해 그의 목숨을 내 놓았습니다. 우리가 제사장과 레위인은 왜 형제를 구하기 위해서 멈춰서지 않았는가? 질문을 할 때 수 많은 가설들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어쩌면 이들은 중요한 모임에 도착하는 시간을 연기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제사법이 성전의 중요한 일을 앞두고 어떤 사람과도 접촉하지 말라고 규정해 놓았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들은 여리고 도로 개선 위원회의 조직 모임에 가던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것이 실제적인 요구였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리고로 가는 길은 상처받은 사람을 도와주기에 충분하지 않은 환경이었기 때문입니다. 강도짓을 할 수 있게 한 그 환경을 개선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박애주의자는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자선 사업을 필요로 하는 경제적 불의의 현장을 간과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불의의 근본 원인을 근절시키는 것이 홀로 있는 한 사람을 돕기 위해 꼼짝 못하게 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믿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이 이들이 멈추지 못한 이유들일 수도 있지만 자주 간과되는 또 한 가지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들이 무서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은 무시무시한 길이었습니다. 내가 부인과 함께 성지를 방문했을 때 우리는 차를 빌려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드라이브를 했습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천천히 여행하면서 나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예수님 비유의 배경을 이 길을 선택했는지 지금 이해할 것 같아.”
예루살렘은 약 이천 피트 되는 높이로 여리고 보다 높은 곳에 있는 도시였고 여리고는 천 피트 되는 높이로 수면보다 낮은 곳에 있었습니다. 그 거리는 20 마일에 채 미치지 못합니다. 곳곳에서 나타나는 굴곡들은 매복하기 좋은 장소였고 여행객들은 보이지 않는 공격에 노출되었습니다. 얼마 후 그 길은 “피의 길”로 알려졌습니다.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신이 걸음을 멈춘다면 이들 또한 공격받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어쩌면 강도들이 근처에 여전히 있을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상처 투성이인 채로 길 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가짜인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은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자기 쪽으로 유인하여 재빨리 이들을 붙잡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던졌던 첫 번째 질문이 이것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내가 이 사람을 도우려고 멈춘다면 무슨 일이 나에게 벌어질 것인가?”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가 가진 관심의 성격 상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도우려고 멈추지 않는다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무시무시한 이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자주 이렇게 묻습니다.
“만약 내가 이 일에 관련이 되면 나의 일, 나의 특권, 나의 지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우리 집이 폭파되고 내 아내가 위협을 당하고 나는 감옥에 수감될 것인가?”
선한 사람은 항상 이와 반대되는 질문을 던집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내가 아프리카 사람을 위해서 일한다면 대학 교수로서의 나의 특권과 안녕과 바흐 올겐니스트인 나의 지위는 어떻게 될 것인가?” 라고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위해서 가지 않는다면 불의 때문에 상처받고 있는 이 수 많은 사람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아브라함 링컨은 이렇게 묻지 않았습니다. “내가 노예해방 선언문을 발표하고 노예는 재산이 아니라고 하면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대신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실패한다면 이 합중국과 수 백만의 흑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흑인 교수는 “내가 인종차별철폐 운동에 뛰어든다면 나의 안전한 신분과 중산층 지위와 개인적 안전은 어떻게 되는 걸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 “내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면, 용기 있게 참여하지 않는다면 경제적 윤택의 따뜻함을 맛보지 못한 수 많은 흑인들과 정의 구현에는 어떤 일이 생길까?”라고 묻습니다.
어떤 사람을 측정하는 궁극적인 잣대는 이 사람이 편안하고 안락한 위치에 서 있을 때가 아니라 도전과 반대의 시간에 서 있을 때입니다. 진정한 이웃은 그의 지위, 특권, 심지어 그의 생명 조차 다른 사람들의 번영을 위해서 내어 놓을 것입니다. 아주 위험한 골짜기와 무시무시한 오솔길에서 사마리아인은 상처받고 두들겨 맞은 형제를 더 높고 더 고결한 삶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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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인은 또한 넘치는 이타주의를 가졌습니다. 그의 손으로 이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었고 그의 짐승에 태웠습니다. 엠블란스를 불러서 비용을 지불하고 이 불행한 사람을 병원에 이송하도록 조치하는 것이 말끔하게 손질된 니트에 핏자국을 묻혀가며 위험에 처하는 것보다 훨씬 쉬웠을 지 모릅니다.
진정한 이타주의는 동정보다 더 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공감하는 능력입니다. 동정심은 즉시 우편물을 보내는 것 같은 비인격적인 관심에 그치지만 진솔한 동감은 한 사람의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는 인격적인 관심입니다. 동정은 “휴머니티”라 불리는 추상적 관심에서 비롯되지만 “공감”은 인생의 길가에 쓰러진 인류에게 베푸는 아주 특별한 필요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됩니다. 공감은 사람의 고통, 질고, 무거운 짐들을 해결해야 할 필요에 대해서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교적 노력은 진정한 공감에 뿌리를 두지 않고 동정에 뿌리를 둘 때 실패합니다. 아프리카인과 아시아인과 함께 할 무엇인가를 찾는 것 대신에 우리는 너무 자주 이들을 위해 해 줄 것이 무엇인가를 찾았을 뿐입니다. 진정한 공감이 없는 동정은 자존감 있는 사람이 받아들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동정주의를 양산할 수 있습니다. 달러는 인생의 여리고에 누워 있는 상처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도울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지만 공감하는 손길들이 이 돈을 배분하지 않는다면 기부자나 수혜자 모두를 풍요롭게 못할 것입니다. 백인 회중이 드리는 예배에 한 흑인을 끼워 주지 않았던, 수 백만 사람을 죽게 했던 하나님의 백성의 손에서 수 많은 선교비가 나와 아프리카에 전달되었습니다. 미국 대사가 이들의 민주 모임과 그들의 특별한 이웃에 주거권을 설립하는 것을 하지 못하도록 무자비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가진 투표권 때문에 수백만의 평화 협회 기금이 아프리카에 투자되었습니다. 평화 협회는 저개발국가의 국민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를 찾는다면 실패할 것입니다. 이들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찾는다면 평화협회는 성공할 것입니다. 공산주의를 타도하기 위해 부정적 행동을 한다면 실패할 것이며 지구 상의 빈곤과 무지와 질병을 없애기 위해서 긍정적인 노력을 한다면 성공할 것입니다. 사랑이 결여된 돈은 맛 없는 소금과 같으며 그 어떤 것에도 무익할 뿐이며 사람의 발 아래 짓밟힐 뿐입니다. 진정한 이웃성은 인격적인 관심을 필요로 합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 맞은 사람의 몸의 상처를 싸매기 위해서 그의 손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또한 사마리아인의 상한 심령을 치유하기 위해서 흘러 넘치는 사랑을 방출하고 있습니다.
넘치는 이타주의의 또 다른 모습은 사마리아인이 기꺼이 의무를 넘어선 지점에 서 있는 것에서 발견됩니다. 그 사람의 상처를 치료한 후 사마리아인은 그를 짐승에 태워서 여관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상처 치료를 위한 경비를 지불하고 더 돈이 필요하면 즐겁게 그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이 사람을 돌봐 주십시오. 돈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 갚겠습니다.” 이 순간 잠시 멈춰 서서 사마리아인은 상처 입은 낯선 사람에게 베풀어야 할 의무에 대해 정한 규정 그 이상을 베풀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두 번째 차원을 너머 갔습니다. 그의 사랑은 완전했습니다.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 박사는 강압적 의무와 자발적 의무를 인상 깊게 구분합니다. 강압적 의무는 사회법과 법률 강화국의 강력한 기구에 의해 통제됩니다. 법률 서적들의 수 천 페이지에 기록된 이 법들을 어기면 수 없이 많은 교도소가 꽉 찰 것입니다. 그러나 자발적인 의무는 사회법 너머 존재합니다. 이들은 내면적 태도, 진실한 사람 대 사람 관계, 법률서적이 규정할 수 없고 교도소가 교화할 수 없는 연민의 표현과 같은 내면적 성향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한 의무들은 마음에 쓰여 있는 내부의 법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법은 정의를 확신하지만 더 고귀한 법은 사랑을 생산합니다. 행동의 어떤 법칙도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도록, 남편이 아내에게 사랑을 보여주도록 설득할 수는 없습니다. 법정은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양식을 제공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릴 수 있지만 사랑의 양식을 공급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좋은 아버지는 자발적인 의무에 복종하는 사람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인류의 양심을 대표합니다. 강제적인 의무가 될 수 없는 일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어떤 법도 그렇게 순수한 연민과 그런 사랑과 그런 이타주의를 생산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에서는 대단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종차별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쌍둥이라고 부르는 차별대우라고 불리는 사단의 통치를 정복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이 괴물은 이 땅 도처에서 백년 동안 돌아다니면서 수 많은 흑인들을 수치심으로 발가벗겼고 흑인들에게서 자유의 생득권을 갈취했습니다. 법률과 판례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주 작은 역할을 한다고 믿게 하는 시험에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도덕은 규정될 수 없지만 행동은 규정될 수 있습니다. 판례는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지만 재판관들은 의기소침한 사람을 억압할 수 있습니다. 법은 고용주가 고용자를 사랑하도록 만들 수 없지만 법은 나의 피부색 때문에 고용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아닌 습관들은 법률과 판례와 시행령 때문에 날마다 변합니다. 인종차별이 법의 힘으로 종결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이끌려 다니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나 이것을 안다면 우리는 인종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이 자발적인 의무에 복종하려는 사람의 의지에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법원의 명령과 연방 정부의 시행령은 인종차별철폐를 이루는 측정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종차별철폐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철폐는 우리가 이루어야 할 진정한 집단간 상호 인격적인 삶을 실현하는 최종 목표들 중 한 부분일 뿐입니다. 인종차별철폐는 법률의 벽을 부술 것이며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함께 어울릴 수 있도록 해 줄 것이지만 어떤 요소가 그 마음과 사람들의 영혼을 건드려서 이들이 영적으로 하나가 되도록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연스럽고 바르기 때문입니다.
시민법에 대한 강력한 시행은 인종차별국으로 끝날 것이며 인종차별국은 진정한 인종평등사회의 장애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종평등사회는 두려움과 편견, 자부심, 비이성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것들은 진정으로 하나된 사회를 이루는 장벽입니다. 이 어두운 악마적인 반응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법이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 내면의 법은 모든 사람은 형제라는 확신으로, 사랑은 개인적, 사회적 변화를 이뤄낼 수 있는 인류가 가진 가장 잠재력이 큰 무기라는 확신으로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이어줍니다. 비강제적인 의무에 기꺼이 순종하고자 하는 진정한 이웃들이 진정한 하나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전 보다 훨씬 많은 내 친구들, 모든 민족과 국가들이 이웃됨에 대해서 도전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범위에서 좋은 이웃이 되는 정책의 요청은 일시적 십볼렛 보다 더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긴박한 세계적 비극을 창의적 이행의 시편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삶의 방식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종이 저편으로 건너가게 허락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어리석음은 전에 도덕적 실패로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이 어리석음은 전 인류의 자살을 초래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리적으로 하나인 이 세상에서 오랫동안 영적으로 분리된 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 본문에 대한 마지막 분석을 한다면 나는 여리고로 가는 길 위에 쓰러져 있는 상처입은 사람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그의 일부이고 그가 나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통은 나를 작게 만들고 그의 구원은 나를 크게 만듭니다.
이웃의 사랑을 현실 속에서 만들려고 하는 우리의 탐구의 여정에서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영성 깊은 모델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 그리스도의 고결한 삶이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이타주의는 전세계적인 범주를 가졌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모든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세리와 죄인들을 형제로 생각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이타주의는 위험했습니다. 사마리아인이 바른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이유로 기꺼이 위험천만한 여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타주의는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역사 상 가장 고결한 비강제적인 복종의 모습인 갈보리에서 죽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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