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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행함으로 사랑하라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눅23:4 | 설교자: 마틴 루터 킹

    본문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눅23:2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본문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한 말을 보다 숭고하게, 예수의 영의 위대함을 보다 정확하게, 보다 엄숙하게 신약에서 표현한 곳은 없습니다. 이것은 최선의 사랑입니다.

    \그 때\라는 본문의 표현에 집중하지 않으면 예수가 드리는 기도의 그 위대한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구절 앞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그 때 예수가 말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 때는 예수가 몸을 괴롭히는 고통으로 지옥의 나락에 떨어져 있던 때였습니다. 그 때는 사람들이 예수를 가장 나쁜 사람으로 몰아붙이던 때였습니다. 그 때는 예수가 죽어 가고 있던 때였으며 가장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던 때였습니다. 그 때는 창조된 자의 사악한 손이 창조주의 단 한 분 뿐인 아들을 감히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하던 때였습니다. 그 때 예수가 말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그 때\라는 상황을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과 함께 취하소서\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여, 의로움의 진노의 전능한 번개를 내리시고 저들을 파괴하소서\, \공의의 홍수의 문을 여시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비틀거리는 사태를 저들에게 부으소서.\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살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고통에 순응하면서 무시당하고 거절당하는 것에 순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외쳤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소서.\

    이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두 가지의 기본적인 교훈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합시다.




    첫째로, 이것은 말과 행위를 일치시키는 예수의 능력에 대한 놀라운 표현입니다. 인생의 큰 비극 중 하나는 사람들은 앎과 실천 사이의 골, 말과 행함의 깊은 골을 좀처럼 잇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안에 끈질기게 존재하는 정신분열적 기질은 우리들 중 많은 이에게 존재하여 비극적으로 우리를 분열시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어떤 숭결하고 고결한 원리들을 자랑스럽게 공언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슬프게도 이 원리들의 반대로 행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의 삶은 행동강령의 고혈압과 행동의 빈혈로 특징지워집니까? 우리는 기독교 신앙 원리에 부여된 우리의 헌신에 대해서 유창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우리의 삶은 이교도의 관습에 젖어 있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에 헌신하겠노라고 선언하지만 우리의 실제 삶은 민주주의 강령의 그 정반대 편에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정열적으로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부지런히 전쟁을 준비합니다. 우리는 정의의 고상한 도로를 열심히 요청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 우리는 불의의 저속한 길을 앞장서서 걷습니다. 이 이상한 이분법, 해야만 하는 것과 하고 있는 것 사이에 놓여진 괴로운 골은 세상의 긴 여행의 비극적 주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의 삶에서 이 골이 이어진 것을 봅니다. 말과 행동의 일치를 보여주는 고결한 본보기는 역사 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햇빛 찬란한 골짜기인 갈릴리에서 예수가 사역을 하고 있는 동안 예수는 용서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했습니다. 이 낯선 말씀은 베드로의 마음에 있는 의문을 깨웠습니다. \몇 번이나…\ 베드로가 물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베드로는 합법적이고 통계적인 수치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면서 대답을 했습니다.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찌니라.\ 다시 말하면 용서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인 것입니다. 용서가 그 삶의 습관적 구조가 되지 않는 사람은 사백 번은 고사하고 아흔 번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용서는 우발적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인 태도입니다. 또한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 거만하게 대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은 예수의 말을 듣는 많은 청중들의 귀에 다른 나라에서 온 낯선 음악처럼 들렸습니다. 그들의 귀는 그런 놀라운 사랑의 경지, 이들이 익숙하지 않은 수준에는 순응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이들의 친구를 사랑하고 이들의 원수를 미워하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삶은 보복의 오랜 전통에 의거하여 배상으로 자신을 회복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에게 원수에 대한 창조적 사랑만으로 하늘에 계신 천부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사랑과 용서는 영적 성숙을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시험의 순간이 왔습니다. 하나님의 죄 없는 아들인 예수는 살이 패이는 고통으로 못박혔고 십자가에 올리워졌습니다. 사랑과 용서의 다른 장소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가 어떻게 반응을 보일 것입니까? 예수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장엄한 광경으로 불쑥 튀어 오릅니다. 예수는 그의 머리에 씌워진 가시 면류관을 쓰고 우주를 품은 말들로 외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때는 예수의 최후의 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운명인 땅에서의 만남에 대한 예수의 천상의 반응이었습니다. 우리의 본능은 용서 안 한다는 비인격적인 상태로 고착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 기도가 우리의 본능과 반대되는 기도이기 때문에 이 기도가 위대하다는 것을 압니다. 맹렬하게 돌진해 오는 폭풍의 길에 갇혀서 고통스럽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 비계에서 추락한 인부의 고통스러운 외침이 있어도 우리의 본성은 춥고 고요하다든가 하면서 냉담한 무관심을 드러낼 뿐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영원히 고착된, 변치 않는 법을 영원히 기려야 합니다. 이 법들이 위반될 때 이 하나의 길을 변함 없이 걸어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용서하지 않고 용서할 수도 없습니다.

    또 예수의 기도는 용서에 있어서 더딘 사람과 대조가 됩니다. 우리는 삶은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며 명성을 쌓아가는 것이라는 철학에 따라 삽니다. 우리는 복수의 제단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가자에서 눈을 잃은 삼손은 그의 원수를 위해 열렬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삼손은 원수의 철저한 파멸을 구했을 뿐입니다. 사람의 삶의 잠재적 아름다움은 사람이 되풀이하여 부르는 복수의 노래 때문에 계속 추해집니다.

    또한 이 기도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회와도 대조됩니다. 사회는 사회의 기준, 법규 등등을 유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회는 법률의 통제와 사법적 구속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과 이 법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은 종종 범법의 어두운 나락 속으로 떨어지게 되고 두 번째 선택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순간의 감정에 휩싸여 사생아의 어머니가 된 천진난만한 젊은 부인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녀는 당신에게 사회가 용서에 너무 더디다고 말할 것입니다. 잠깐의 부주의로 공적 신뢰심을 배신한 공무원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는 당신에게 사회가 용서에 너무 더디다고 말할 것입니다. 어떤 감옥에 가서 감옥 안에 있는, 이들의 삶의 페이지에 부끄러운 줄을 긋고 있는 재소자에게 물어 보십시오. 창살 뒤에서 이들은 당신에게 사회가 용서에 너무 더디다고 말할 것입니다. 사형수 감방을 지나가면서 이들의 범죄로 비극적으로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보십시오. 이들은 전기 의자로 측은하게 걸어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이들의 희망 없는 외침은 \사회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는 것입니다. 사형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의 최종적 단언입니다.

    그러한 것은 유한한 인생에서 계속되는 이야기입니다. 역사의 바다는 끝없이 계속 일어나는 복수의 물결로 요동치고 있습니다. 사람은 동해배상(lex talionis)법(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의 금지명령을 결코 극복할 수 없습니다. 복수의 법이 어떤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파멸을 초래하는 이 법의 지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역사는 이 자기 파괴의 길을 걸어갔던 나라들과 사람들의 파멸로 얼룩져 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로부터 더 고귀한 법을 유창하게 선포했습니다. 예수는 \눈에는 눈으로\의 규정이 모든 이들의 눈을 멀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는 악을 악으로 갚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악을 선으로 갚았습니다. 저주로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예수는 적극적인 사랑으로 반응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교훈입니까! 사람들은 흥했다가 스러질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수의 신을 경배하는 것을 계속할 것이고 복수의 제단 앞에 머리를 숙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귀중한 교훈, 갈보리의 교훈이 오직 선이 악을 물리칠 수 있고 사랑만 미움을 정복할 수 있다는 점을 귀잖게 따라다니며 상기시킬 것입니다.




    예수가 십자가 상에서 드린 기도에서 우리는 두 번째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지적, 영적 무지를 예수가 알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예수는 말했습니다. 눈먼 것은 이들의 어려움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계몽작업이 필요했습니다. 우리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단순히 죄 뿐만 아니라 무지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를 못박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라기 보다 무지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외쳤습니다. 갈보리로 가는 길 위에 늘어선 조롱하는 군중들은 악한 사람들이라기 보다 무지한 사람들로 이루어 졌습니다. 이들은 이들이 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역사는 이 수치스러운 비극의 증거들로 울려 퍼집니다. 수 세기 전에 소크라테스라 불렸던 한 현자가 독 미나리 액을 마시도록 명을 받았습니다. 그의 죽음을 부른 사람들은 정맥에 마귀의 피가 흘렀던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이들은 신실하고 존경할만한 그리스의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리스의 시민들은 소크라테스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전통적 개념을 초월한 것으로 판단되는 철학적 사고를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말로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악함이 아닌 무지가 소크라테스를 죽였습니다.

    사울이 기독교인을 핍박할 때 악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은 신실하고 양심적인 이스라엘 신앙의 헌신자였습니다. 사울은 그가 올바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울은 기독교인을 박해했습니다. 사울의 정직이 함량 미달이라서가 아니라 사울의 지식이 함량미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명한 박해와 수치스러운 종교 재판에 연루된 기독교인들은 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잘못 인도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칙령을 위임받았다고 생각하여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나 다윈의 자연 도태와 같은 과학의 발전을 막았던 교회의 성직자들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표현할 수 없을만큼 큰 역사의 몇 가지 비극 맞은 편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남긴 말들이 각인되어 기록됩니다.

    이 비극적 무지가 우리 자신의 일상에 많은 비극적 전조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쟁이 세계 문제의 대답이라고 여전히 생각합니다.

    반대로 이들은 선하고 존경할만한 시민들입니다. 이들의 생각은 애국주의의 예복을 입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태를 유리하게 하기 위해 위험한 수위까지 끌고 가는 정책과 테러의 균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들은 정말로 무기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것이 나쁜 결과보다 훨씬 더 유익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적극적으로 더 강력한 폭탄들과 더 위력이 있는 핵무기 비축과 더 빠른 탄도 미사일을 요구합니다.

    경험에서 나온 지혜는 전쟁은 이제 쓸모 없는 퇴물에 불과하다고 우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전쟁이 악의 세력이 커가고 퍼지는 것을 막는 부정적 선의 역할을 할 때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전쟁무기들의 파괴적 힘은 전쟁이 부정적 선의 역할을 할 그 가능성 마저 제거합니다. 우리가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고 사람에게는 생존권이 있다고 인정한다면 그 다음에 우리는 전쟁에 대해서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하루 내에 비행물체가 우주를 통과하여 날아다니고 탄도 미사일이 성층권을 뚫고 날아와 죽음의 고속도로를 새길 것이며 어떤 나라도 전쟁의 승리를 외칠 수 없을 것입니다. 소위 국지전은 인류의 고통, 정치적 혼돈과 영혼의 고갈과 같은 비참한 유산에 불과한 것을 남길 것입니다. 세계 전쟁(하나님이 금지한!)은 전인류가 틀림없이 때 이른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무언의 증언과 같은 이글거리는 재만을 남길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군비 축소가 악이며 국제적 협상은 아주 불쾌한 시간낭비에 불과하다고 정말로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세상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원자폭탄으로 인한 소멸이라는 무시무시한 예측으로 위협받고 있습니다.

    주의하십시오. 이 본문의 진리가 민족들 사이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미국에서 노예제도는 사람들의 악함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무지 때문에 존속되었습니다. 정말로, 노예제도의 우연한 기초는 아주 광범위하게 경제적 요인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람들은 노예제도가 경제적으로 유익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할 것이라고 스스로 확신했습니다. 이들은 인종적 우월성 이론을 정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합리성은 아름다운 의로움의 망토로 치장되었지만 속이 들여다 보이는 결점들로 옷을 입었습니다. 이 노예제도가 경제적으로 유익하다면서 도덕적 용인을 하려는 이러한 비극적 시도는 백인우월주의에서 나왔습니다. 종교와 성서는 현상을 구체화하기 위해 인용됩니다. 과학은 흑인의 생물학적 열등성을 증명하기 위해 징집당했습니다. 철학적 논리조차 노예제도의 지적 신뢰도를 주기 위해 조작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의 틀에 따라서 흑인의 열등성을 논박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다.

    모든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흑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흑인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리하게 종교와 과학과 철학의 시각을 비틀어서 백인 우월주의를 합법화시킵니다. 곧 이 생각이 모든 교과서에 실렸고 실제적으로 모든 성직자 사이에 설교되어졌습니다. 이것은 문화구조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때 이 철학을 거짓의 합리화가 아닌 최종적 진리의 표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은 정말로 흑인은 태생적으로 열등했으며 노예제도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857년에 노예제도는 미국 대법원의 심사숙고 끝에 내려진 드레드 스코트(Dread Scott) 판결1)에서 가장 큰 법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법정은 흑인은 백인처럼 존경받아야 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단언했습니다. 이 판결을 내린 법관은 사악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이들은 친절하고 헌신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영적, 지적 무지의 희생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전 노예제도는 신실하지만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에 의해 지속되어 왔습니다.

    이 비극적 무지는 또한 노예제도와 별로 거리가 멀지 않은 사촌인 인종차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종차별을 매우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은 신앙심이 매우 깊고 그들의 운동에 열심인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 편의와 경제적 이익 때문에 인종차별주의자이지만 인종차별철폐를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전문적인 광신자 집단의 후위대인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유지하려는 이들의 시도가 그들 자신과 아이들과 국가를 위해서 가장 최선이라고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은 좋은 교회의 성도들이며 이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깊은 신앙을 이어 받았습니다. 이들의 확신에 대해서 종교적 변증을 하라는 요구를 받는다면 이들은 하나님이 최초의 인종차별주의자였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빨간 새와 파란 새는 함께 날지 않습니다.\ 이들은 논박합니다.

    이들이 주장하는 인종차별에 대한 견해는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고 도덕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흑인의 열등성에 대한 이들의 믿음의 정당성을 입증하라고 하면 이들은 허위의 과학적 가설을 만들어 흑인의 뇌는 백인의 뇌보다 작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열등하거나 뛰어난 민족이 있다는 생각이 인류학 상 가장 분명한 증거에 의해 반박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알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인류학자인 베네딕(Ruth Benedict), 미드(Margaret Mead), 헐스코빗(Melville J. Herskovits)은 모든 종족 내에 개인들 간에 열등하거나 뛰어난 사람은 있어도 우월 민족이나 열등 민족은 없다는 데 동의합니다.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은 네 종류의 혈액형이 있고 이 네 가지 혈액형은 모든 인종 집단에서 발견된다는 과학이 입증한 사실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맹목적으로 인종차별이라 불리는 악의 영원한 타당성을 믿고 있으며 미신이라 불리는 백인 우월주의의 영원한 진리를 맹신합니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수많은 흑인들은 양심적인 무지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왔습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우리는 우리를 압제하는 사람들을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말해야만 합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내가 말하려고 했던 모든 것에서 이 점을 지금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들 안에 있는 양심과 신실함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역사는 이 고귀한 덕이 비극적 악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증명합니다. 신앙 깊은 무지와 양심적인 우둔함보다 더 위험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세익스피어는 이렇게 썼습니다.



    가장 달콤했던 것들은 이들의 행동으로 가장 신 것이 되네

    썩은 냄새를 멀리 풍기는 백합들은 잡초보다 못하네



    공동체의 주요한 도덕적 안내자로서 교회는 사람이 좋게, 선의의 의도로 되도록 청원해야 하며 친절한 것과 양심적인 것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나 길을 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교회는 지식이 결여된 선함과 양심은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못박히는 결과를 초래하는 야만적인 권력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지시켜야 합니다. 교회는 지적능력을 갖추어야 할 도덕적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는 데 지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자주 이 계몽에 대한 도덕적 필요성을 간과했다는 점을 우리가 인정해서는 안됩니까? 때때로 교회는 무지가 덕이며 지식이 죄인 것처럼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의 반계몽주의와 닫힌 마음과 새로운 진리에 대한 완고함으로 교회는 자주 무의식적으로 예배하는 사람들이 지식을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게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스스로 기독교인으로 부른다면 우리는 지적, 도덕적 무지를 피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신약을 통해 우리는 계몽의 필요성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 뿐 아니라 우리의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대적자 중 많은 이들이 무지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다\(롬 10:2)

    계속해서 성경은 지식 없는 열심과 분별 없는 신실함의 위험성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다스리고 또한 무지를 다스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현대인은 지금 인류의 악함과 인류의 우둔함 때문에 혼란에 봉착해 있습니다. 서구 문명이 지식을 계속 평가절하한다면 like twenty-four of its predecessor 아무런 희망 없이 밑바닥 없는 공허에 빠질 것이며 그 원인은 부인할 수 없는 죄성과 끔찍한 무지 때문입니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점차 붕괴된다면 그것은 지각의 부족과 더불어 권리 위임의 부족 때문일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별 주저없이 전쟁을 집적거려 보고 그의 주거지를 단테가 전혀 상상하지도 않았던 지옥으로 계속 바꾼다면 이것은 완벽한 악함과 완벽한 우둔함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저들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는 말했습니다. 무지는 이들을 포위하고 있는 어려움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눈이 멀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적 눈멂은 대개 이들의 통제를 벗어나는 자연적 힘의 결과에 의해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지적, 도덕적 눈멂은 자유의 비극적 오용과 그의 지적 능력을 최대한 이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스스로 고통을 당하는 딜레마입니다. 어느 날 우리는 머리가 전부 그르다면 우리의 마음도 결코 올바르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성과 착함, 머리와 가슴이 공존할 때 사람의 진정한 본성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게 됩니다. 그가 훌륭한 삶에 이르기 전에 집중적 아카데믹 과정의 철학자가 되거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놀라운 지성과 통찰력을 소유하고서 제한된 공식적 훈련과정을 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지성에 대한 요구는 열린 마음과 합리적 판단, 진리를 사랑하는 것의 요구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속임의 마비와 닫힌 마음의 침체 위로 일어서라는 요청입니다.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는 심오한 경지의 학자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꾸준히 진리를 구해야 하는 것에 종사하는 날카로운 학술회원들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빛이 세상 속으로 오고 있습니다. 빈곤지구봉사활동의 시간을 통해 외치는 소리가 사람들이 빛 속으로 걸어가게 합니다. 이 요구를 주의 깊게 듣지 않는다면 땅에서의 사람의 삶은 비극적인 우주적 애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불치선고입니다.\ 요한이 말합니다. \빛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합니다.\

    예수는 그를 못박은 사람들에 대해서 옳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끔찍한 무지로 고통당했습니다. 매시간 저는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의 위대함을 떠올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능력을 떠올립니다. 나는 희생하는 사랑의 아름다움과 흔들림 없이 진리에 헌신하는 위대함을 떠올립니다. 이것은 내가 존 보우링(John Bowring)과 이야기 합니다.



    주가 지신 십자가를 내가 자랑하노라

    성경 중의 모든 말씀 거기 중심 되었네(찬송가 148장)



    내가 순종의 반응으로만 십자가와 그 의미를 바라본다면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십자가가 부조화의 조화, 위대함과 초라함, 선과 악의 조화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고서 웬일인지 십자가에서 눈을 돌리지 못할 것입니다. 들어올려진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한한 힘과 추악한 사람의 연약함을 나에게 상기시켜줍니다. 나는 하나님의 찬란함과 사람의 악취를 떠올립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선과 사람의 최악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미움을 정복한 사랑의 위대한 상징, 어둠을 극복한 빛의 위대한 상징으로 십자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분명한 확신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주되신 주가 사람의 무지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를 못박은 사람들은 이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1)역주: 드레드 스코트(Dred Scott)는 어떤 노예의 이름이다. 스코트는 그의 주인이었던 육군 장교를 따라 노예법이 적용되었던 미주리 주에서 노예법이 적용되지 않았던 일리노이 주와 위스콘신 주에 가서 살게 된다. 여기서 오랫동안 자유인으로 살던 스코트는 다시 미주리 주로 주인과 함께 돌아온다. 주인이 죽은 후 1846년에 스코트는 노예법 폐지를 주장하는 변호사의 도움으로 그의 자유권에 대한 소송을 제기한다. 1857년 봄, 연방 대법원은 \노예의 후손이거나 전에 노예였던 사람들은 시민권을 취득할 수 없으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고 여전히 노예로 살아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