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 쓰러진 악의 시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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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출 14:30 | 설교자: 마틴 루터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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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시체를 보았더라(출 14:30)\
이 세상에서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것이 있습니까? 악은 사람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눈에 보이는 촉수를 인간 실존의 모든 과정에 불쑥 밀어 넣습니다. 우리는 악의 기원에 대해서 논쟁을 벌일 수 있지만 피상적인 낙관주의로 낭패를 본 사람만 악의 실체를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악은 을씨년스럽고 냉혹하며 어마어마한 현실입니다.
성서는 악의 실체를 정확하게 확언하면서, 정원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인생의 선율을 불협화음으로 만드는 악을 상징적으로 그리며, 이미 굳어진 불의와 추악한 위선을 예언적 관점에서 비난하며, 강도로 오해되어 두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악에 대한 성경의 정의는 수정처럼 분명합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처럼 악의 실체를 정확하게 인식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는 악의 기원에 대해서 어떤 신학적 설명도 하지 않았고 애써 악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라지 비유에서 예수는 가라지는 가라지 대로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시적 착각이나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가라지와 함께 뿌려진 좋은 씨앗은 잘 자라 곡식이 됩니다. 사단이 뿌린 씨앗으로 자란 가라지든 사람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뿌린 씨앗으로 자란 가라지든, 이들은 언제나 해로운 존재이며 화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는 아주 나쁜 씨앗에 대해서 실제로 \나는 아주 나쁜 씨앗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악이 하는 일을 나타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악의 힘이 선의 힘만큼 실제적이지 않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매일의 삶 중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악의 추악한 전모를 목도합니다. 우리는 악이 비극적 본성과 절제되지 않는 이기심으로 드러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기심의 제단 위에 진리를 희생 제물로 바치려고 사람들이 서 있는 거룩한 곳에서도 악을 봅니다. 우리는 사회적 불의의 파괴적 무기로 다른 민족을 파멸시키는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존재하는 악을 봅니다. 우리는 악이 사람들과 여러 국가들에 도덕적, 육체적 파산만 남기는 재앙을 부르는 전쟁의 옷으로 덮여있는 것을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는 선과 악 사이의 투쟁입니다. 대표적 종교들은 거의 모두 세상의 핵심인 이러한 긴장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힌두교는 이 긴장을 환영과 실제 사이의 갈등이라고 했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빛의 신과 어둠의 신과의 갈등이라고 했고 전통 유대교와 기독교는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갈등이라고 했습니다. 이 종교들은 선이 앞으로 힘차게 도약을 하면 악이 뒤에서 선을 끌어 당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결국 선과 악의 투쟁에서 결국 선이 영원히 승리자가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단언합니다. 결국 악은 힘이 있으나 영원한 선 때문에 비운에 처할 것입니다.
부활절 승리의 찬가에 성 금요일(수난일)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곡식을 헤치는 가라지는 싹이 트고 있는 곡식의 목을 질식시키지만 추수 때가 되면 나쁜 가라지는 곡식과 구분되어 거두어질 것입니다. 시저는 궁전을 차지하고 예수는 십자가를 차지했습니다. 후에 시저의 시대는 그의 이름으로 기억되었고 십자가를 차지했던 그리스도는 역사를 A.D.와 B.C.로 나누었습니다.
브라이언트(William Cullen Bryant)가 \이 땅에서 무너진 진리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칼라일(Thomas Carlyle)이 \당신은 진리가 오지 않을 것처럼 당신이 거짓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다, 실제로 발행한 어음이 단기 순환이나 장기 순환을 거쳐 반드시 돌아와 \현금 지불\을 요구하는 것처럼 진리는 우리의 대답에 상관 없이 반드시 돌아온다\고 말한 것처럼 진리를 오래 전 성서적 종교는 인식했습니다,
◆
이 진리의 문자적 증언은 히브리 민족의 초기 역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노예로 굴종의 삶을 살고 있었을 때 이집트는 굴욕적 압박과 지독한 착취와 폭압적 지배의 옷을 입은 악을 상징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의 옷을 입은 선을 상징했습니다. 이집트는 억압적 착취를 지속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바로는 연속된 재앙이 이어져 자신의 국가가 위협을 당해도 고집스럽게 모세의 요구에 거절로 답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악에 대해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즉, 악은 감당하기 어려우며 견고하고 약한 저항이나 치명적인 저항에도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꼭 확인해야 할 지점이 있는데 악은 결코 영원히 그 스스로 설 수 없다는 점입니다. 길고 긴 투쟁의 시간 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로 홍해를 갈랐습니다.
그러나 결코 굴복을 인정할 수 없는 나폴레옹 1세의 친위대처럼, 이집트인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도망치는 것을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썼고 이들의 군대는 이스라엘을 뒤쫓아 홍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집트인들이 물이 마른 바다에 들어가는 순간 물기둥이었던 물이 이들에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습니다. 소용돌이치는 바다의 여세에 곧 그들은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들이 볼 수 있었던 전부는 곳곳에 쓰러져 있는 익사한 비참한 시체들이었습니다.
이 순간은 이스라엘에게 위대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의 역사에 놀라운 시대의 종결점이었습니다. 이들의 포로생활의 긴 밤 끝에 찾아온 기쁨에 찬 새벽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이집트 군사들이 익사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사람의 죽음이나 실패를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악과 비인도적인 억압과 불공평한 착취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바닷가에 쓰러져 있는 이집트인들의 죽음은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들이 선이 악과 벌이는 영원한 투쟁을 지원해 준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이 신약성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정확하게 선언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을 착취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그로 말미암아 부활했습니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사자 우리에 던져졌고 두꺼운 도마 위에 뉘여졌지만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평강을 얻었습니다. 세익스피어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은 정의롭습니다.
우리의 존재를 만드시는 하나님이 계시네.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얼기 설기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로얼(Lowell)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악의 원인이 기승을 부리지만
그러나 오직 진리만 힘이 있네
테니슨(Tennyson)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선이 추락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네
결국, 마침내, 모든 것들이…, 모든 겨울은 봄으로 바뀐다네.
◆
자유와 정의의 옷을 입은 선과 억압과 식민주의의 옷을 입은 악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는 지금의 상황에서 본문의 진리가 드러납니다. 최대 30억에 이르는 사람들, 최소 19억에 이르는 사람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 살고 있습니다. 두 세기 전만 해도 대부분의 아시아, 아프리카인들은 식민지 국민이었고 정치적으로 지배받았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했으며 외세에 의해 차별받고 멸시당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들은 무덤과 같은 불의에 저항해서 싸웠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용기 있는 모세와 같은 사람들은 그 백성의 자유를 열정적으로 갈구하였습니다. 20년 전에 마하트마 간디는 영국 국왕과 행정부와 대법원과 왕들에게 그의 백성에게 해방을 달라고 끊임없이 간청했습니다. 옛날의 바로와 같이 영국 지도자들은 이 고뇌에 찬 호소를 듣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위대한 수상인 처칠 마저 독립을 달라는 외침에 \나는 대영 제국의 몰락을 관장하는 왕의 첫 번째 성직자가 될 수 없다.\고 응했습니다. 두 힘의 대결, 식민통치권력과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민들과의 대결은 20세기에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으며 가장 첨예한 갈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식민통치권력의 저항과 불굴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인류의 운명의 승리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5년 전, 아프리카 대륙에는 오직 세 국가만 독립국가였으나 오늘날 서른 두 국가가 독립국가입니다. 15년 전 영국 제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65억이 넘는 사람을 정치적으로 지배했지만 오늘날 그 수는 6천만 명 이하입니다.
홍해가 열렸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억압받았던 민중들은 이집트의 식민주의로부터 자유를 얻었고 지금 경제와 문화의 안정이 주어진 약속의 땅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악이 홍해 바닷가에 시체로 누워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와 정의를 얻기 위한 미국인들의 투쟁에서 우리는 악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1619년에 흑인들은 아프리카 땅에서 미국으로 강제로 이주당했습니다. 200년도 더 전에 아프리카는 강탈당했고 침탈당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왕국들은 해체되었고 국민들과 통치자들은 의기소침해졌습니다. 미국에서 흑인노예들은 사람이 아닌 부속품, 거대한 농장 기계들 중 일부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사람들, 모든 사람들은 동일하게 창조되었다는 원리에 기초하여 설립된 국가이념과 상반되는 불의의 제도인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기 6년 전, 1820년에 토마스 제퍼슨은 암울한 글을 썼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인 노예제도는 밤의 유성처럼 나를 공포로 깨우고 공포로 채운다. 나는 노예제도가 미국의 불길한 전조가 될 것임을 느꼈다…나는 지금 믿음 속에서 죽어 가고 있고 자치 행정부를 수립하고 국가의 행복을 얻기 위한 1776년 세대의 쓸모 없는 희생을 후회한다. 이것들은 무너질 것이다.…그리고 나의 유일한 마음의 위안은 노예제도 때문에 통곡하기 전에 죽는 것이다.
제퍼슨 같은 수 많은 노예폐지론자들은 노예제도 때문에 마음에 많은 번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노예제도의 비도덕성이 백인 주인과 흑인 노예까지 파멸시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제도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날이 왔습니다. 링컨의 고뇌와 마음의 동요는 잘 알려졌고 노예제도에 대한 링컨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노예에게 자유를 주는 것으로, 우리는 자유가 자유케 한다는 것을 단언한다, 우리가 주는 것과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것은 둘 다 꼭 같이 올바른 것이다.
이 도덕적 기초 위에 링컨은 노예해방문의 기초를 고안했고 아주 뛰어난 강령, 노예제도에 종지부를 찍는 강령을 만들었습니다. 노예해방선언의 중요성은 위대한 미국인 더글라스가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설명했습니다.
\이 선언은 투쟁의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고 선언한 것이며 정의와 문화의 도시가 북부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 분명히 1863년 1월 1일은 가장 기념할 만한 날입니다. 7월 4일도 대단한 날이었지만 1월 1일과 모든 면에서 비교해 볼 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1월 1일은 대단한 날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국가의 정치적 시작이라는 점만 높이 사지만 대 다수의 사람들은 국민성이 삶과 질을 고상하고 고결한 덕으로 찬란하게 빛나게 할 것인지, 영원히 지독한 악명을 얻는 것인 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재건시대1)동안 흑인들이 제한된 정치적, 사회적 기회를 즐기고 있었다 해도 노예해방선언이 흑인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지 못했습니다. 흑인들은 곧 남부의 바로가 그들을 노예로 묶어두려 한다는 것을 알아챌 것입니다. 분명히 노예해방선언은 흑인이 홍해에 더 가까이 가게 했지만 물기둥 속으로 흑인이 걸어 가는 것을 보증하지 않았습니다. 1896년 대법원의 결정에 의해 회귀한 인종차별은 복잡하게 위장한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도였습니다. 인종차별과 불의의 제도를 유지하려고 하는 세력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 온 지난 반세기 동안의 위대한 투쟁에서 바로는 법률적 모략과 경제적 보복과, 심지어 인종차별의 애굽을 탈출하려는 흑인들을 막기 위해 무력행사를 했습니다. 모세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찬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흑인 민족이 가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변화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놀란 미국대법원의 9개의 판결은 홍해를 열었고 정의의 군대가 홍해 저편으로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법정은 결국 1896년의 오래 전 플레시판결을2) 선언했고 차별받는 교통시설의 이용은 본질적으로 불공평한 것이며 인종 때문에 어린이들이 차별받는 것도 부당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이 판결은 권리를 빼앗긴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비춰주는 거대한 등대입니다. 뒤돌아 보면 인종차별의 군대가 서서히 바닷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고 저항의 거대한 산이 머리 맡에 누워 있지만 결국 우리는 애굽을 떠날 것이며 결국 고통은 우리가 약속의 땅에 도착했다는 확신이 될 것입니다. 불의와 착취의 옷을 입은 악은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역사 속에 기록된 홍해기사는 선의 세력이 궁극적인 승리를 쟁취할 것이며, 선에게 승리를 안겨준 바로 그 바닷물이 닫힘으로 악의 군대는 죽음과 파멸을 맞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악이 이미 그 속에 파멸의 기운을 배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결국 패배한 선은 승리한 악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역사에서 어떤 큰 교훈을 얻느냐?\는 질문에 역사가 빌드(Charles A. Beard)는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첫째로, 신들이 권력에 미친 사람들을 파멸시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제분기는 천천히 갑니다. 그리고 갈아서 아주 작게 만듭니다. 셋째로 꽃을 윤기 있게 한 꿀벌은 꽃을 강탈합니다. 넷째로, 날씨가 어두워질 때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설교자의 말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한 역사학자의 말이며, 이 학자는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역사연구에 바친 끝에 \악은 자기 파괴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악은 오래 버틸 수 있지만 곧 그 한계에 부딪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네메시스 신과 같은 존재가 많습니다.
◆
우리는 섣부른 낙관주의로 악이 부분적으로 바닷가에 쓰러져 죽은 것을 모든 악이 바닷가에 쓰러져 죽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과정은 불안정하며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사람의 존재의 전 차원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제 군주가 죽으면 그 후 또 다른 전제 군주가 등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섣부른 낙관주의를 피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또한 절망적인 비관주의도 피해야 합니다. 모든 과정이 불안정하더라도 현실적 테두리 속에서 사회제도가 만들어 져야 합니다.
사람의 유한함이 이 땅에서 행하는 순례여행의 목적지에 이를 수 없게 한다 해도 쉬지 않는 투쟁들이 정의의 도시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이 그가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냉혹한 무관심으로 바깥에서 이 세상을 방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길에서 우리가 애쓰고 있을 때 하나님도 애쓰고 계십니다. 영원한 사랑을 품은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구속사를 통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악의 군대를 이기려고 고군분투할 때 이 세상 주인인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싸웁니다.
악은 바닷가에서 죽습니다. 사람이 끈질기게 악에 대항하여 싸웠기 때문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악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은 악의 군대를 정복하는 데 왜 그렇게 느릴까요? 왜 하나님은 히틀러가 6백만 명의 유태인들을 죽이게 허락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244년 동안 지속되도록 허락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피에 목마른 강도들이 충동적으로 흑인 남성과 여성을 벽에 묶어 놓고 흑인 소년과 소녀를 빠져 죽도록 허락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악을 파멸하지 않고 악한 사람들의 완악한 계획을 무너뜨리지 않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모든 방법이나 악을 거머쥐는 하나님의 특별한 시간 계획을 다 이해하는 체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하나님이 거만하게 악을 처리하신다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루시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책임감을 가진 사람입니다. 눈먼 기계나 사람, 꼭두각시 인형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부여함으로 하나님은 그 자신이 가진 통치 수단을 양보하셨고 그 자신에 어떤 한계를 부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유롭다면 이들은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그의 의지를 강요하는 동시에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유지시킬 수는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이행하지 못하신다면 능력의 하나님보다 유약한 하나님으로 표현될 것입니다.
권능은 목적을 수행하는 능력입니다. 목적을 패배시키는 행동은 유약함입니다. 하나님이 악을 즉결처단하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유한한 인류이지만 우리는 정의의 승리를 위한 여행에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닌, 아주 끈질긴 힘이 정의를 만든다\라고 한 아놀드(Mattew Arnold)가 있습니다. 우리는 악의 세력에 희생당했던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잊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삶의 무거운 짐과 시련과 같은 내적 자원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압제하는 이집트와 같은 암울한 상황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가는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시련을 견디는 데 필요한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기와 앞으로 계속 할 여행을 감당할 힘도 주십니다. 희망의 등불이 꺼져가고 믿음의 촛불이 잦아들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생기를 운반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승리의 대낮 뿐 아니라 절망의 한 밤 중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저와 아내는 인도의 최남단인 카라라시에서 매우 아름다운 주말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케이프 코모린에 있는 아름다운 해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실제로 인도 국경의 땅끝이었기 때문에 \땅끝\으로 불려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앞에 파도가 부서지는 광활한 바다만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곳은 세 개의 해류, 인도양, 아라비아 해, 뱅갈해가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바다에 약간 잠긴 큰 바위에 앉아 우리는 해양의 광활함과 무서울 만치 넓다는 사실에 황홀했습니다. 파도가 칠 때 거의 운율을 타고 움직였으며 우리가 앉아있는 바위 밑둥에 부딪쳤을 때 바다의 음악소리가 달콤하게 들렸습니다. 우리는 서쪽에서 거대한 해가 솟는 것과 거대한 불꽃들이 이글거리는 것을 보았고 다시 그 바다 속으로 해가 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해가 눈에서 거의 다 사라질 때 까지 저의 아내는 저를 치면서 \저봐요! 마틴,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반짝이는 아름다운 또 다른 원형의 물체인 달을 보았습니다. 해가 바다 속으로 저물어 가고 있을 때, 달이 바다에서 떠 오르고 있었습니다. 해가 마침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땅은 어둠으로 가득 찼지만 동쪽에서 반짝이며 떠오르는 달이 어둠을 이기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이 모습은 우리 인생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건의 비유야!\
우리는 낮의 빛이 사라져 우리가 어둠과 황망한 밤에 남겨졌을 때, 우리가 비극적인 불의와 끔찍한 착취의 희생자일 때, 우리가 품은 고귀한 소망이 패배의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시간들을 겪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순간 우리의 영혼은 침울과 절망에 잠식당하고 어디에도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또 다시 동쪽을 바라보고 어둠 가운데 빛을 밝히며 떠오르는 또 다른 빛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패배의 창살\이 \한 줄기 빛\으로 바뀌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오직 하나의 빛을 가지고 계셨다면 이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두 개의 빛을 가지고 계시다는 점에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의 빛은 소망이 이루어지고 주위 여건이 좋기만 한 밝은 낮에 우리를 인도합니다. 또 다른 빛은 우리가 낙담할 때, 우리 마음에 우울과 절망으로 잠자는 거인이 일어날 때 또 다른 빛은 한밤의 어둠에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는 어둠에서 결코 걷지 않는다는 것을 시편 기자는 증언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찌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 139:7-12)
이 믿음이 악의 애굽의 족쇄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우리를 지탱시켜 줄 것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허약한 발에 빛이 될 것이며 우리가 가는 굽이진 길에 빛이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사람의 높은 이상은 조용히 통과하여 먼지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1) 역주: 미국 남부전쟁의 전, 후 시대(1865-77년)를 말한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후에 연방에서 탈퇴했던 남부연합 11개주가 연방에 재편입했기 때문에 발생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문제의 해결을 모색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2) 역주: 기차에 설치된 \흑인전용\칸은 인종차별조항에 어긋나며 제14조 법률인 \평등보호법\에도 어긋난다고 내린 판결이다.
이 세상에서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보다 더 분명한 것이 있습니까? 악은 사람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눈에 보이는 촉수를 인간 실존의 모든 과정에 불쑥 밀어 넣습니다. 우리는 악의 기원에 대해서 논쟁을 벌일 수 있지만 피상적인 낙관주의로 낭패를 본 사람만 악의 실체를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악은 을씨년스럽고 냉혹하며 어마어마한 현실입니다.
성서는 악의 실체를 정확하게 확언하면서, 정원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인생의 선율을 불협화음으로 만드는 악을 상징적으로 그리며, 이미 굳어진 불의와 추악한 위선을 예언적 관점에서 비난하며, 강도로 오해되어 두 강도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악에 대한 성경의 정의는 수정처럼 분명합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처럼 악의 실체를 정확하게 인식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는 악의 기원에 대해서 어떤 신학적 설명도 하지 않았고 애써 악의 기원을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가라지 비유에서 예수는 가라지는 가라지 대로 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일시적 착각이나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가라지와 함께 뿌려진 좋은 씨앗은 잘 자라 곡식이 됩니다. 사단이 뿌린 씨앗으로 자란 가라지든 사람이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뿌린 씨앗으로 자란 가라지든, 이들은 언제나 해로운 존재이며 화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는 아주 나쁜 씨앗에 대해서 실제로 \나는 아주 나쁜 씨앗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들은 악이 하는 일을 나타낸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는 악의 힘이 선의 힘만큼 실제적이지 않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매일의 삶 중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악의 추악한 전모를 목도합니다. 우리는 악이 비극적 본성과 절제되지 않는 이기심으로 드러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기심의 제단 위에 진리를 희생 제물로 바치려고 사람들이 서 있는 거룩한 곳에서도 악을 봅니다. 우리는 사회적 불의의 파괴적 무기로 다른 민족을 파멸시키는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존재하는 악을 봅니다. 우리는 악이 사람들과 여러 국가들에 도덕적, 육체적 파산만 남기는 재앙을 부르는 전쟁의 옷으로 덮여있는 것을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는 선과 악 사이의 투쟁입니다. 대표적 종교들은 거의 모두 세상의 핵심인 이러한 긴장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힌두교는 이 긴장을 환영과 실제 사이의 갈등이라고 했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빛의 신과 어둠의 신과의 갈등이라고 했고 전통 유대교와 기독교는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갈등이라고 했습니다. 이 종교들은 선이 앞으로 힘차게 도약을 하면 악이 뒤에서 선을 끌어 당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결국 선과 악의 투쟁에서 결국 선이 영원히 승리자가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단언합니다. 결국 악은 힘이 있으나 영원한 선 때문에 비운에 처할 것입니다.
부활절 승리의 찬가에 성 금요일(수난일)은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곡식을 헤치는 가라지는 싹이 트고 있는 곡식의 목을 질식시키지만 추수 때가 되면 나쁜 가라지는 곡식과 구분되어 거두어질 것입니다. 시저는 궁전을 차지하고 예수는 십자가를 차지했습니다. 후에 시저의 시대는 그의 이름으로 기억되었고 십자가를 차지했던 그리스도는 역사를 A.D.와 B.C.로 나누었습니다.
브라이언트(William Cullen Bryant)가 \이 땅에서 무너진 진리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칼라일(Thomas Carlyle)이 \당신은 진리가 오지 않을 것처럼 당신이 거짓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다, 실제로 발행한 어음이 단기 순환이나 장기 순환을 거쳐 반드시 돌아와 \현금 지불\을 요구하는 것처럼 진리는 우리의 대답에 상관 없이 반드시 돌아온다\고 말한 것처럼 진리를 오래 전 성서적 종교는 인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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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리의 문자적 증언은 히브리 민족의 초기 역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 노예로 굴종의 삶을 살고 있었을 때 이집트는 굴욕적 압박과 지독한 착취와 폭압적 지배의 옷을 입은 악을 상징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께 헌신과 충성의 옷을 입은 선을 상징했습니다. 이집트는 억압적 착취를 지속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이스라엘은 자유를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바로는 연속된 재앙이 이어져 자신의 국가가 위협을 당해도 고집스럽게 모세의 요구에 거절로 답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악에 대해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것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즉, 악은 감당하기 어려우며 견고하고 약한 저항이나 치명적인 저항에도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꼭 확인해야 할 지점이 있는데 악은 결코 영원히 그 스스로 설 수 없다는 점입니다. 길고 긴 투쟁의 시간 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역사로 홍해를 갈랐습니다.
그러나 결코 굴복을 인정할 수 없는 나폴레옹 1세의 친위대처럼, 이집트인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도망치는 것을 막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썼고 이들의 군대는 이스라엘을 뒤쫓아 홍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집트인들이 물이 마른 바다에 들어가는 순간 물기둥이었던 물이 이들에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습니다. 소용돌이치는 바다의 여세에 곧 그들은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이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들이 볼 수 있었던 전부는 곳곳에 쓰러져 있는 익사한 비참한 시체들이었습니다.
이 순간은 이스라엘에게 위대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들의 역사에 놀라운 시대의 종결점이었습니다. 이들의 포로생활의 긴 밤 끝에 찾아온 기쁨에 찬 새벽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이집트 군사들이 익사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사람의 죽음이나 실패를 즐거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는 악과 비인도적인 억압과 불공평한 착취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바닷가에 쓰러져 있는 이집트인들의 죽음은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들이 선이 악과 벌이는 영원한 투쟁을 지원해 준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이 신약성서는 이 부분에 대해서 정확하게 선언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히 12:11)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을 착취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자손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지만 그로 말미암아 부활했습니다. 초대교회 기독교인들은 사자 우리에 던져졌고 두꺼운 도마 위에 뉘여졌지만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평강을 얻었습니다. 세익스피어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은 정의롭습니다.
우리의 존재를 만드시는 하나님이 계시네.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얼기 설기 만들 수 있을 것인가?
로얼(Lowell)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악의 원인이 기승을 부리지만
그러나 오직 진리만 힘이 있네
테니슨(Tennyson)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선이 추락한다는 것을 믿을 수 없네
결국, 마침내, 모든 것들이…, 모든 겨울은 봄으로 바뀐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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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정의의 옷을 입은 선과 억압과 식민주의의 옷을 입은 악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는 지금의 상황에서 본문의 진리가 드러납니다. 최대 30억에 이르는 사람들, 최소 19억에 이르는 사람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 살고 있습니다. 두 세기 전만 해도 대부분의 아시아, 아프리카인들은 식민지 국민이었고 정치적으로 지배받았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했으며 외세에 의해 차별받고 멸시당했습니다. 수십 년 동안 이들은 무덤과 같은 불의에 저항해서 싸웠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 있는 용기 있는 모세와 같은 사람들은 그 백성의 자유를 열정적으로 갈구하였습니다. 20년 전에 마하트마 간디는 영국 국왕과 행정부와 대법원과 왕들에게 그의 백성에게 해방을 달라고 끊임없이 간청했습니다. 옛날의 바로와 같이 영국 지도자들은 이 고뇌에 찬 호소를 듣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위대한 수상인 처칠 마저 독립을 달라는 외침에 \나는 대영 제국의 몰락을 관장하는 왕의 첫 번째 성직자가 될 수 없다.\고 응했습니다. 두 힘의 대결, 식민통치권력과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민들과의 대결은 20세기에 가장 중대한 사건이었으며 가장 첨예한 갈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식민통치권력의 저항과 불굴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인류의 운명의 승리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5년 전, 아프리카 대륙에는 오직 세 국가만 독립국가였으나 오늘날 서른 두 국가가 독립국가입니다. 15년 전 영국 제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65억이 넘는 사람을 정치적으로 지배했지만 오늘날 그 수는 6천만 명 이하입니다.
홍해가 열렸습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억압받았던 민중들은 이집트의 식민주의로부터 자유를 얻었고 지금 경제와 문화의 안정이 주어진 약속의 땅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악이 홍해 바닷가에 시체로 누워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와 정의를 얻기 위한 미국인들의 투쟁에서 우리는 악의 죽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1619년에 흑인들은 아프리카 땅에서 미국으로 강제로 이주당했습니다. 200년도 더 전에 아프리카는 강탈당했고 침탈당했습니다. 아프리카의 왕국들은 해체되었고 국민들과 통치자들은 의기소침해졌습니다. 미국에서 흑인노예들은 사람이 아닌 부속품, 거대한 농장 기계들 중 일부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사람들, 모든 사람들은 동일하게 창조되었다는 원리에 기초하여 설립된 국가이념과 상반되는 불의의 제도인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죽기 6년 전, 1820년에 토마스 제퍼슨은 암울한 글을 썼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인 노예제도는 밤의 유성처럼 나를 공포로 깨우고 공포로 채운다. 나는 노예제도가 미국의 불길한 전조가 될 것임을 느꼈다…나는 지금 믿음 속에서 죽어 가고 있고 자치 행정부를 수립하고 국가의 행복을 얻기 위한 1776년 세대의 쓸모 없는 희생을 후회한다. 이것들은 무너질 것이다.…그리고 나의 유일한 마음의 위안은 노예제도 때문에 통곡하기 전에 죽는 것이다.
제퍼슨 같은 수 많은 노예폐지론자들은 노예제도 때문에 마음에 많은 번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노예제도의 비도덕성이 백인 주인과 흑인 노예까지 파멸시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제도에 정면으로 대응하는 날이 왔습니다. 링컨의 고뇌와 마음의 동요는 잘 알려졌고 노예제도에 대한 링컨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선언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노예에게 자유를 주는 것으로, 우리는 자유가 자유케 한다는 것을 단언한다, 우리가 주는 것과 우리가 유지하고 있는 것은 둘 다 꼭 같이 올바른 것이다.
이 도덕적 기초 위에 링컨은 노예해방문의 기초를 고안했고 아주 뛰어난 강령, 노예제도에 종지부를 찍는 강령을 만들었습니다. 노예해방선언의 중요성은 위대한 미국인 더글라스가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설명했습니다.
\이 선언은 투쟁의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고 선언한 것이며 정의와 문화의 도시가 북부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 분명히 1863년 1월 1일은 가장 기념할 만한 날입니다. 7월 4일도 대단한 날이었지만 1월 1일과 모든 면에서 비교해 볼 때 비교할 수 없을 만큼 1월 1일은 대단한 날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국가의 정치적 시작이라는 점만 높이 사지만 대 다수의 사람들은 국민성이 삶과 질을 고상하고 고결한 덕으로 찬란하게 빛나게 할 것인지, 영원히 지독한 악명을 얻는 것인 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재건시대1)동안 흑인들이 제한된 정치적, 사회적 기회를 즐기고 있었다 해도 노예해방선언이 흑인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지 못했습니다. 흑인들은 곧 남부의 바로가 그들을 노예로 묶어두려 한다는 것을 알아챌 것입니다. 분명히 노예해방선언은 흑인이 홍해에 더 가까이 가게 했지만 물기둥 속으로 흑인이 걸어 가는 것을 보증하지 않았습니다. 1896년 대법원의 결정에 의해 회귀한 인종차별은 복잡하게 위장한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도였습니다. 인종차별과 불의의 제도를 유지하려고 하는 세력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 온 지난 반세기 동안의 위대한 투쟁에서 바로는 법률적 모략과 경제적 보복과, 심지어 인종차별의 애굽을 탈출하려는 흑인들을 막기 위해 무력행사를 했습니다. 모세와 같은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찬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흑인 민족이 가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대한 변화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놀란 미국대법원의 9개의 판결은 홍해를 열었고 정의의 군대가 홍해 저편으로 행진하고 있었습니다. 법정은 결국 1896년의 오래 전 플레시판결을2) 선언했고 차별받는 교통시설의 이용은 본질적으로 불공평한 것이며 인종 때문에 어린이들이 차별받는 것도 부당하다고 확신했습니다. 이 판결은 권리를 빼앗긴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비춰주는 거대한 등대입니다. 뒤돌아 보면 인종차별의 군대가 서서히 바닷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았고 저항의 거대한 산이 머리 맡에 누워 있지만 결국 우리는 애굽을 떠날 것이며 결국 고통은 우리가 약속의 땅에 도착했다는 확신이 될 것입니다. 불의와 착취의 옷을 입은 악은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역사 속에 기록된 홍해기사는 선의 세력이 궁극적인 승리를 쟁취할 것이며, 선에게 승리를 안겨준 바로 그 바닷물이 닫힘으로 악의 군대는 죽음과 파멸을 맞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악이 이미 그 속에 파멸의 기운을 배태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결국 패배한 선은 승리한 악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역사에서 어떤 큰 교훈을 얻느냐?\는 질문에 역사가 빌드(Charles A. Beard)는 다음과 같이 답했습니다.
\첫째로, 신들이 권력에 미친 사람들을 파멸시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제분기는 천천히 갑니다. 그리고 갈아서 아주 작게 만듭니다. 셋째로 꽃을 윤기 있게 한 꿀벌은 꽃을 강탈합니다. 넷째로, 날씨가 어두워질 때 별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설교자의 말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한 역사학자의 말이며, 이 학자는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역사연구에 바친 끝에 \악은 자기 파괴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악은 오래 버틸 수 있지만 곧 그 한계에 부딪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네메시스 신과 같은 존재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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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섣부른 낙관주의로 악이 부분적으로 바닷가에 쓰러져 죽은 것을 모든 악이 바닷가에 쓰러져 죽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과정은 불안정하며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사람의 존재의 전 차원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제 군주가 죽으면 그 후 또 다른 전제 군주가 등극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섣부른 낙관주의를 피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또한 절망적인 비관주의도 피해야 합니다. 모든 과정이 불안정하더라도 현실적 테두리 속에서 사회제도가 만들어 져야 합니다.
사람의 유한함이 이 땅에서 행하는 순례여행의 목적지에 이를 수 없게 한다 해도 쉬지 않는 투쟁들이 정의의 도시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느니라\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이 그가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냉혹한 무관심으로 바깥에서 이 세상을 방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인생의 모든 길에서 우리가 애쓰고 있을 때 하나님도 애쓰고 계십니다. 영원한 사랑을 품은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구속사를 통일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악의 군대를 이기려고 고군분투할 때 이 세상 주인인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싸웁니다.
악은 바닷가에서 죽습니다. 사람이 끈질기게 악에 대항하여 싸웠기 때문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이 악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하나님은 악의 군대를 정복하는 데 왜 그렇게 느릴까요? 왜 하나님은 히틀러가 6백만 명의 유태인들을 죽이게 허락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244년 동안 지속되도록 허락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피에 목마른 강도들이 충동적으로 흑인 남성과 여성을 벽에 묶어 놓고 흑인 소년과 소녀를 빠져 죽도록 허락하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악을 파멸하지 않고 악한 사람들의 완악한 계획을 무너뜨리지 않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모든 방법이나 악을 거머쥐는 하나님의 특별한 시간 계획을 다 이해하는 체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하나님이 거만하게 악을 처리하신다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루시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책임감을 가진 사람입니다. 눈먼 기계나 사람, 꼭두각시 인형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부여함으로 하나님은 그 자신이 가진 통치 수단을 양보하셨고 그 자신에 어떤 한계를 부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유롭다면 이들은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그의 의지를 강요하는 동시에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유지시킬 수는 없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그의 목적을 이행하지 못하신다면 능력의 하나님보다 유약한 하나님으로 표현될 것입니다.
권능은 목적을 수행하는 능력입니다. 목적을 패배시키는 행동은 유약함입니다. 하나님이 악을 즉결처단하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유한한 인류이지만 우리는 정의의 승리를 위한 여행에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닌, 아주 끈질긴 힘이 정의를 만든다\라고 한 아놀드(Mattew Arnold)가 있습니다. 우리는 악의 세력에 희생당했던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잊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삶의 무거운 짐과 시련과 같은 내적 자원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압제하는 이집트와 같은 암울한 상황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가는 길에 빛입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시련을 견디는 데 필요한 힘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기와 앞으로 계속 할 여행을 감당할 힘도 주십니다. 희망의 등불이 꺼져가고 믿음의 촛불이 잦아들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생기를 운반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승리의 대낮 뿐 아니라 절망의 한 밤 중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저와 아내는 인도의 최남단인 카라라시에서 매우 아름다운 주말을 보냈습니다. 우리가 케이프 코모린에 있는 아름다운 해변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실제로 인도 국경의 땅끝이었기 때문에 \땅끝\으로 불려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앞에 파도가 부서지는 광활한 바다만 펼쳐져 있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곳은 세 개의 해류, 인도양, 아라비아 해, 뱅갈해가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바다에 약간 잠긴 큰 바위에 앉아 우리는 해양의 광활함과 무서울 만치 넓다는 사실에 황홀했습니다. 파도가 칠 때 거의 운율을 타고 움직였으며 우리가 앉아있는 바위 밑둥에 부딪쳤을 때 바다의 음악소리가 달콤하게 들렸습니다. 우리는 서쪽에서 거대한 해가 솟는 것과 거대한 불꽃들이 이글거리는 것을 보았고 다시 그 바다 속으로 해가 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해가 눈에서 거의 다 사라질 때 까지 저의 아내는 저를 치면서 \저봐요! 마틴,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반짝이는 아름다운 또 다른 원형의 물체인 달을 보았습니다. 해가 바다 속으로 저물어 가고 있을 때, 달이 바다에서 떠 오르고 있었습니다. 해가 마침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땅은 어둠으로 가득 찼지만 동쪽에서 반짝이며 떠오르는 달이 어둠을 이기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이 모습은 우리 인생에서 자주 일어나는 사건의 비유야!\
우리는 낮의 빛이 사라져 우리가 어둠과 황망한 밤에 남겨졌을 때, 우리가 비극적인 불의와 끔찍한 착취의 희생자일 때, 우리가 품은 고귀한 소망이 패배의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시간들을 겪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순간 우리의 영혼은 침울과 절망에 잠식당하고 어디에도 빛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또 다시 동쪽을 바라보고 어둠 가운데 빛을 밝히며 떠오르는 또 다른 빛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패배의 창살\이 \한 줄기 빛\으로 바뀌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오직 하나의 빛을 가지고 계셨다면 이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두 개의 빛을 가지고 계시다는 점에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의 빛은 소망이 이루어지고 주위 여건이 좋기만 한 밝은 낮에 우리를 인도합니다. 또 다른 빛은 우리가 낙담할 때, 우리 마음에 우울과 절망으로 잠자는 거인이 일어날 때 또 다른 빛은 한밤의 어둠에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는 어둠에서 결코 걷지 않는다는 것을 시편 기자는 증언합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찌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 139:7-12)
이 믿음이 악의 애굽의 족쇄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우리를 지탱시켜 줄 것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의 허약한 발에 빛이 될 것이며 우리가 가는 굽이진 길에 빛이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없다면 사람의 높은 이상은 조용히 통과하여 먼지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1) 역주: 미국 남부전쟁의 전, 후 시대(1865-77년)를 말한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후에 연방에서 탈퇴했던 남부연합 11개주가 연방에 재편입했기 때문에 발생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문제의 해결을 모색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2) 역주: 기차에 설치된 \흑인전용\칸은 인종차별조항에 어긋나며 제14조 법률인 \평등보호법\에도 어긋난다고 내린 판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