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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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여러 해 전부터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롬 15:23)\
우리의 인생 체험에서 가장 큰 고통은 지극히 적은 부류의 사람만 마음에 품은 소망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년 시절의 소망과 어른이 되었을 때 그렸던 모습은 미완성 교향곡입니다. 와츠(George Frederic Watts)는 유명한 그림에서 땅의 꼭대기에 앉아서 머리를 슬프게 숙인 채 하프 줄을 계속해서 뜯고 있는 고요한 사람으로 소망을 묘사했습니다. 소망이 사라지고 꿈이 좌절된 분노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바울이 로마의 기독교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좌절된 소망이 괴롭히는 문제를 강력하게 묘사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바울이 품었던 열렬한 소망은 당시에 세계의 끝으로 알려졌던 스페인을 여행하는 것이었고 이 곳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로마 기독교인들 중 열정적인 그룹과 개인적 친교를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이 이 기회를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바울의 마음은 더욱 더 기쁨으로 생기를 띄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은 로마 도심부에서 제국과 멀리 떨어진 스페인에 목음을 전하는 것에 쏠려 있습니다.
얼마나 큰 소망이 바울의 마음을 자극하고 있었을까요! 그러나 바울은 그의 소망대로 로마에 가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예수를 믿는 용감한 믿음 때문에 바울은 정말 죄수로 로마에 가게 되었고 바울은 아주 조그만 감옥에 포로로 수감되었습니다.
바울은 스페인의 먼지 가득한 길을 걷지도 않았고 스페인의 구불구불한 해안을 보지 못했으며 스페인 해안도시의 바쁜 하루를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 순교당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바울의 생은 깨어진 꿈의 비극적 이야기입니다.
삶은 비슷한 여러 체험들을 비춰줍니다.
누가 멀리 떨어진 스페인에 가는 것과 거창한 목표, 영광스러운 꿈의 실현을 누가 마다 하겠습니까? 결국 바울은 이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웁니다.
우리는 로마 거리를 자유인으로 결코 걸을 수 없습니다.
대신 환경적 제약, 우리를 옭아 맨 감옥에서 살고 있을 뿐입니다.
맞은 편에서 기록되는 우리의 삶은 치명적 오류이며 이것은 역사 속에서 비이성적, 편견의 정맥을 타고 흐르기 마련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우리 역시 약속의 땅을 향해 여행을 하지만 우리는 너무 자주 “동일한 약속을 받았던 아브라함의 상속인”이 되지 못합니다. 항상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현실을 뛰어 넘습니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수년의 투쟁 후에 마하트마 간디는 힌두교와 모스렘 사이에 벌어진 피의 종교 전쟁을 목격했고 연이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열은 간디의 마음 속에 있던 통일 국가의 염원을 깨뜨려버렸습니다. 윌슨(Woodrow Wilson)은 국가 동맹을 실현하기 전에 눈을 감았습니다. 미국의 많은 흑인 노예들은 아주 오랫동안 자유를 갈망했지만 노예해방 전에 죽었습니다.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후 잔이 예수에게 건네졌고 예수는 그럼에도 결국, 마지막 비통한 쓴잔을 마셨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계속해서 간절하게 “가시”가 그의 몸에서 사라지기를 기도했지만 가시의 고통과 괴로움은 그의 평생에 지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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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고귀한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 지 결정하기 전에 이러한 환경 속에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질문해야 합니다. 한 가지 가능한 반응은 좌절을 쓰라림과 분노의 고갱이로 증류시키는 것입니다. 이 길을 추구하는 사람은 냉정한 태도와 차가운 마음과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통한 증오와 그 자신에 대한 비통한 증오를 개발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나 삶을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향한 무시무시한 복수의 틀 속에서 자신을 풀어놓습니다. 이 사람은 아내에게 아주 잔인하고 아이들에게 비인격적일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의미는 그를 지배하는 특징이 됩니다.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아무도 신뢰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신뢰해 주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어떤 일에나 누구에게나 결점을 찾아내고 계속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반응은 영혼에 독을 뿌리는 것이며 인격에 상처를 내는 것이며 다른 누구보다도 이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 자신에게 해를 줍니다. 의학계에서는 관절염, 위 궤양과 천식과 같은 질병이 비통한 분노로 발병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말합니다. 정신의학은 육체의 질병이 정신의 질병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깊은 분노가 건강 악화를 어떻게 유발하는지 보여줍니다.
희망이 좌절된 경험을 한 사람이 나타낸 또 다른 반응은 완전히 자기 자신 속으로 숨어서 굉장히 내성적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들의 삶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이들도 다른 사람의 삶에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삶의 노력을 포기하고 삶에 대한 열정도 잃어버리고 아주 냉담한 현실세계를 도피해서 자신의 마음을 현실에서 멀어지게 하여 도망치려 할 것입니다. 고립이라는 말은 이들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입니다. 너무 무관심해서 사랑할 수 없고 너무 고립되어 있어서 이기적이고 너무 활력이 없어서 이기적이지 못하고 너무 무관심해서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너무 냉정해서 슬픔을 느낄 수 없고, 이들은 죽어 있지도 그렇다고 살아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존재할 뿐입니다. 이들의 눈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이들의 귀는 아름다운 음악의 선율에 반응할 줄 모르고 이들의 손은 귀여운 작은 아기의 감촉에 반응할 줄 모릅니다. 살아있는 것 그 어떤 것도 이들에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황량한 존재의 무미건조한 움직임만 있을 뿐입니다. 좌절된 희망은 이들을 냉소주의로 마비되게 합니다 카얌(Omar Khayyam)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두었던 희망이 희미해지네
희망이 피어오르는 듯 하다 곧 사라지네
메마른 사막을 덮었던 눈이 사라지는 것 처럼,
몇 시간 빛을 밝히던 빛이 사라지는 것처럼
이 반응은 삶에서 회피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는 사람이 현실을 벗어나고자 할 때 이들의 인격은 점점 메말라 가다가 마침내 쪼개지고 만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정신장애의 원인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의 실패에 반응하는 세 번째 방법은 일어나는 모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고 모든 사건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규정하는 운명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운명론은 모든 것은 운명지어져 있고 피할 수 없다는 사상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생각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들이 운명이라고 간주하는 절대 권력에 굴복하고 자신을 무시무시하게 넓은 공간에 홀로 던져진 고아라고 생각하고 이것이 그들의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람은 자유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생각하지도 않고 결정을 내리지도 않으며 오히려 이들은 수동적으로 이들에게 결정해 주는 외부세력을 기다립니다. 이들은 절대로 적극적으로 환경을 바꾸려고 하지 않으며, 그리스의 비극과 마찬가지로 모든 환경은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고 믿습니다.
어떤 운명론자들은 하나님이 모든 일을 결정하시고 운명을 주관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아주 신실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견해는 기독교 찬양의 한 구절에서도 나타납니다.
내 길이 어둡고 내 운명이 슬퍼도
침묵하게 하소서 불평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이 가르쳐 준 기도를 하게 하시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운명론자들은 자유는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믿으면서 자신을 마비시키는 결정론에 따릅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밤낮으로 만들어진 체스판 위에 그가 움직이는대로 어쩔 수 없이 놓여지는 말이로다
이것은 우리가 미래를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입니다.
그의 쉬지않고 움직이는 손가락이 우리의 생을 저술하고 있기 때문이네.
당신의 신심이나 기지, 그 어떤 것도 운명의 저술, 그 책의 어떤 한 줄, 한 줄의 반도 지우기 위해 되돌릴 수 없으리니
당신의 사무친 통곡의 눈물로 그것의 단어 하나도 씻어 내지 못하리
운명론의 사막 늪에 빨려드는 것은 지성과 심리적인 면 양면 모두에서 숨 막히는 것입니다. 자유는 사람의 특징의 핵이며 운명론자들은 자유를 부정하므로 사람이 아닌 꼭두각시가 돕니다. 절대 자유는 없고 자유는 언제나 미리 운명지어진 틀의 상황 속에서 자유가 항상 조작된다는 신념에 있어서 운명론자는 옳습니다.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은 아틀란타에서 북북 워싱톤까지 자유롭게 갈 수 있고 남부 아틀란타에서 마이애미까지 자유롭게 갈 있지만 마이애미가 북부일 수는 없고 워싱톤이 남부일 수는 없습니다.
자유는 항상 운명의 틀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운명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유롭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이 있습니다. 자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 안에서 생각하고 결정하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운명이 우리가 가고 싶어하는 스페인에 가는 것을 막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는 그런 절망을 수용하고 절망에 반응하고 정말 그 자체에 대해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운명론은 사람을 구덩이 속에서 무기력하게 불충분한 삶을 살아가도록 방치합니다.
더 나아가 운명론은 무엇이나 선하거나 악한 일이거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으로 진행되었다고 하는 위험한 개념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건강한 종교는 하나님은 사람의 자유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악을 허용하는 것이지 하나님 스스로 악을 유발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으로 의도되었다는 주장과 하나님이 어린 아이가 눈이 멀어서 태어나고 사람에게 정신착란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을 사랑의 아버지보다 오히려 악의 하나님으로 그리는 완전한 이단 사설입니다. 다 이루지 못한 꿈의 문제, 비통하고 퇴행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운명론을 취하는 것은 비극적이고 위험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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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대답은 무엇입니까? 대답은 우리의 의지, 불완전하고 불만족스러운 환경을 수용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 무한한 소망을 붙들고 있어도 유한한 실패를 수용해도 우리는 여전히 밝은 희망을 부여잡는 우리의 의지에 있습니다. 운명론자들을 통렬하게 수용하는 것은 무자비한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이것은 슬픔이다. 나는 이것은 견뎌야 한다.”
당신은 정직하게 당신의 부서진 꿈과 대면해야 합니다. 도피주의적인 방법으로 당신 마음 속에 있는 좌절을 꺼내려 한다면 심리적 침체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실패를 마음에 꺼내놓고 그 실패를 가만히 응시하십시오. 당신 자신에게 물어 보십시오. “어떻게 이 부채를 이익으로 남길 것인가? 나는 어떻게 이 좁은 로마, 스페인에 갈 수 없는 이 상황을 바꿀 것인가? 이 고통에 정박한 항구의 수치의 지하감옥에서 탈출할 것인가?”
우리에게 일어나는 대부분의 것들은 서로 서로 엮어져 하나님의 계획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연민의 끈을 더 길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적인 자부심을 깰 지도 모릅니다. 사악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십자가는 하나님에 의해 세상 구속이라는 무늬로 엮여진 양탄자로 엮어졌습니다. 세상에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이들의 가시관을 바꾸었습니다. 다윈은 주기적으로 발병하는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고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은 폐결핵으로 고통을 당했고 헬렌 켈러는 눈 멀고 귀 먹었지만 이들은 비통해 하거나 운명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고 오히려 강력한 의지로 부정적 환경을 유용한 이점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핸딜(George Frederick Handel)의 전기에 다음과 같이 적힌 부분이 있습니다.
그의 건강과 그가 가진 운은 최저치에 달했다. 그의 오른 편은 반신불수였고 그는 파산했다. 그를 신뢰하던 사람들은 그를 붙잡고 감옥으로 보내겠다고 협박을 했다. 잠시 그는 싸움을 포기하기 위해 고용되었다. 그러나 그때 다시 회복되었고 위대한 영감을 받아 메시야를 작곡했다.
“할렐루야 코러스”는 스페인의 넓은 골짜기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좁고 처참한 감옥에서 태어났습니다. 스페인에 가기를 고대하는 것과 로마 감옥에 만족하는 것은 얼마나 비슷합니까! 참담한 실패를 예상한 것을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것으로 전환시킬 기회로 삼는 것이 얼마나 다릅니까! 그러나 생명력 있는 삶은 항상 이러한 승리를 그 자신의 영혼과 상황에 줍니다.
우리 흑인들은 아주 오랫동안 자유를 꿈꾸어 왔지만 여전히 우리는 인종차별과 분리의 억압된 감옥에 묶여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쓰라림과 냉소로 맞서야 합니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우리의 인격에 해가 되고 인격을 파괴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인종차별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인종차별을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 하나님에 대한 신성모독적인 태도는 사단의 것은 물론 아닙니다. 불합리한 구조에 수동적으로 협력하는 것은 박해받는 자를 박해자만큼 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실효가 있는 것은 과감한 결정에 굳건히 서서 낙심한 마음을 그대로 인정하고 희망을 붙잡은 채 비폭력적으로 장애물과 방해물 가운데로 전진하는 것입니다.
멈출 수 없다는 우리의 결정은 결국 현실의 문을 열 것입니다. 우리는 인종차별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불이익을 이익으로 바꿀 수 있는가?” 정당한 이유에서 비롯된 고통의 필요를 인식할 때 우리는 비로소 완전한 성숙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비통한 상처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이 시대가 주는 시련을 우리와 이 시대를 변화시킬 기회로 보는 비전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과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은 살기 위해 필사적인 몸부림을 치고 있는 서구 사회에 일종의 영적 원동력을 제공할 지도 모릅니다.
물론 우리들 중 일부는 자유가 쟁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을 수 있지만 이미 예정된 항해는 계속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시적 절망을 보듬어 안아야 하지만 무한한 소망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쓰라림, 아픔, 분노의 폭발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선조 노예들이 걸어갔던 비밀스러운 생존법이었습니다.
노예제도는 천하고 더럽고 비인간적인 사업입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이주당했을 때 흑인들은 목에 가죽 목걸이를 하고 있었고 때로는 짐승처럼 묶여졌습니다. 가족과 언어와 자신의 뿌리에서 이탈한 것 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많은 경우 남편은 아내와 헤어졌고 아이들은 부모와 헤어졌습니다. 부인들이 백인 주인의 동물적 욕구를 채워 주기를 강요당할 때 노예 남편은 이것을 말릴 아무런 힘이 없었습니다. 입에 담지 못할 잔인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는 살아 남았습니다. 새 날이 되어도 꼭 같은 목화와 풀, 따가운 햇빛과 거칠고 난폭한 감독의 잔인한 채찍질에도 선조들은 더 찬란한 날을 꿈꾸었습니다.
이들은 노예제도를 불가피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럴수록 더 끈질기게 ‘자유’라는 희망을 붙잡았습니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우리 선조들은 창조적 낙관주의로 스스로 영혼을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의 끝없는 생동감은 좌절의 어둠을 희망의 빛으로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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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프로펠러기를 타고 뉴욕에서 런던으로 날아갔을 때 9시간 30분이 걸리던 거리가 지금 제트기를 타고 갈 때 6시간이 걸립니다. 런던에서 돌아올 때 비행시간이 12시간 30분이 걸릴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거리는 꼭 같습니다. 그런데 왜 시간이 더 걸리는 것일까요? 조종사가 승객들에게 인사하기 위해서 기내에 들어왔을 때 왜 비행시간이 차이가 나는 지 물었습니다.
“풍향에 대해서 아셔야 합니다.” 조종사가 말했습니다. “뉴욕을 출발할 때 부는 강한 바람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되돌아 갈 때 강한 바람이 우리와 반대편에서 붑니다.” 조종사가 덧붙였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네 개의 엔진이 바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도 종종 기쁨과 승리와 같이 우리를 즐겁게 하는 꼬리 바람이 붑니다. 때때로 실망과 슬픔과 비극과 같은 끝 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머리바람이 붑니다.
우리가 삶의 대서양을 횡단할 때 맞바람이 우리를 당황하게 하도록 방치할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영적 엔진을 가동하여 바람이 불지만 우리가 무사히 횡단하도록 할 것입니까?
멈추라는 명령에 “거절”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에의 용기”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진행한다는 우리의 결정은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어떤 짐에도 당황하지 않고 반대의 바람에 희망을 날려 버리지 않습니다. 그는 그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참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도 이런 “존재에의 용기”를 소유했는지 모릅니다. 바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바울의 계획은 깨졌고 꿈은 좌절되었습니다. 스페인을 방문할 계획을 세웠지만 바울은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버두니아로 가기 원했지만 드로아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예수에 대한 정열적인 선교는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으로 판단됩니다. 바울은 이 조건이 자신을 조정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까?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바울은 고백했습니다.
바울이 자족하기를 배웠다기 보다 바울의 삶에서 바울을 행복한 사람으로 여기게 만들 수 있는 세상의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깁본(Edward Gibbon)은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에서 “바울은 서구사회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 누구보다 더 자유와 해방의 정신을 고취시켰다.”고 기록합니다. 이 소리가 행복으로 들리십니까?
알 수 없는 운명에 순응하는 것을 바울은 배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영적 고요와 외부 환경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차이를 구분하면서 삶의 좌절의 한 가운데서 절망하지 않고 서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위대한 발견을 한 우리들은 바울처럼, “모든 지각에 뛰어남으로” 진정한 평화의 수호자가 될 것입니다. 세상이 공통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평화는 여름 하늘이 맑고 태양이 눈부시게 시릴 때, 지갑이 가득 찰 때, 마음과 육체가 고통과 질병에서 자유로울 때, 스페인의 해변에 도착하고 있을 때 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평강은 고난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편안한 영혼, 바람과 격렬한 폭풍 가운데서 느끼는 고요한 영혼, 요동하는 폭풍 가운데 있는 허리케인의 평화로운 침묵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제대로 되고 있고 우리가 “만사형통”일 때 평강의 의미를 서서히 깨닫지만 바울이 사람이 “극적인 침체\에 빠지게 될 때, 무거운 짐이 어깨를 내리 누르고 그의 육체를 찌르는 고통이 있고 감옥의 돌벽에 갇히고 좌절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될 때, 진정한 평화가 온다는 바울의 말에 난처해합니다.
모든 말과 설명을 초월하는 진정한 평강과 고요는 폭풍 가운데 평강이며 환난 가운데 고요함입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예수의 유산을 받을 수 있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빌립보에서 바울은 어둡고 황량한 지하 감옥에 갇혀서 몸은 매 맞고 피투성이였고 발은 사슬에 묶였고 영혼은 지쳤지만 한 밤에 기쁘게 시온을 찬양했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원형 투기장에서 굶주린 사자를 만났고 쇠뭉치로 내려치는 아픔을 겪었지만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통당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기뻐했습니다. 흑인 노예들은 찌는 듯한 더위로 약해진 뼈와 등에 난 채찍질 자국이 있었어도 승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점점 나는 이 무거운 짐을 내려 놓는다” 이 말은 모든 지각을 초월한 평강의 살아 있는 예입니다.
깨어진 꿈을 창조적으로 다룰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결정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시간 너머에 하나님이 계시고 삶 너머에 다른 삶이 존재하고 있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줍니다. 우울한 사건과 재앙이 현재의 환경이라 해도 하나님이 삶의 닫히고 억압된 감옥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혼자가 아님을 압니다. 간혹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약속을 다 받지 못하고 죽는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이라 불리는 신비로운 길을 지나서 마침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도성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힘은 이 세상의 삶에서 소진되는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이 시간과 공간으로 갇혀진 벽에 잠겨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종말에 덕과 심판을 결합하지 않는다면 정말 비이성적인 세계가 되지 않겠습니까? 죽음이 사람을 무존재로 만드는 어두운 통로에 불과하다면 얼마나 터무니없이 의미 없는 세상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수에게 고통을 주심으로 우리가 죽음의 통치에서 자유할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이생의 삶은 영화로운 새 인식의 전주곡이며 죽음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출입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변할 수 없는 것을 고상하게 받아들이도록 하고 실패와 슬픔을 영혼의 고요함으로 만나게 해 주며 가장 극렬한 고통 속에서도 소망을 포기하지 않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죽음이나 생명이나, 스페인이나 로마나,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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