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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어떻게 영생을 얻을까?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눅 18:18-30 | 설교자: 박은조

    본문

     어제는 밤늦게까지 종일 비가 왔습니다. 5년 전에 우리 비틴스(아름다운 십대 선교회)가 맨 처음 청소년들을 위한 집회를 하려고 했던 그 토요일 날에도 종일 비가 왔습니다. 5년 전에는 하루 종일 오던 비가 집회 시작하기 1시간 전, 오후 5시에 그쳤습니다. 오후 6시에 청소년 집회가 시작되었는데 비속에서도 놀랍게도 2만여 명 가까운 청소년들과 가족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분당을 중심으로 한 청소년 사역이 자라기 시작했고 5년이 지난 지금 라이즈 업 코리아(Rise up Korea)라는 이름으로 수도권 청소년 집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우리가 잠실 메인 스타디움에서는 아쉽게도 비가 그쳐주지 않고 집회가 시작된 다음에도 비가 내렸습니다. 집회가 끝날 때까지 장대같은 비가 내렸습니다. 많이 실망했지만 비가 오는데도 3만 명 가까운 분들이 모여 꼼짝 않고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10만 명이 모일 수 있는 잠실 운동장에 3만 명이라는 숫자는 미미해 보일지 모르지만 비속에서도 3시간 동안 꼼짝 않고 함께 한 3만이라는 숫자는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참 놀라운 광경이었습니다.  
       어제 밤에 한 설교자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똑같은 한 가지 꽃을 놓고 어떤 사람들은 제비꽃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오랑캐꽃이라고 한다.” 그 꽃을 보고 어떤 사람은 오랑캐들이 쳐들어 올 때 피었던 꽃이라고 오랑캐를 연상했고 또 어떤 사람은 아주 날렵하고 물 찬 제비의 모습을 연상했던 것 같아 보입니다. 비가 쏟아지는, 10만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운동장에 3만 명밖에 모이지 않았다고 라이저 업 코리아 집회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물찬 제비같이 아름다운 꽃을 보고도 오랑캐 꽃이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는 속에 주를 찬양하며 나라와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3만 명의 모습은, 오랑캐 꽃이 아니라 아름다운 제비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보는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오랑캐 꽃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제비꽃이라고 말합니다. 어제 저녁 집회에서 정근모 장로님이 청소년들을 위한 간증을 10분 정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9월 3일 간증했던 내용이어서 저는 두 번째 듣는데도 얼마나 가슴이 뜨거워졌는지 모릅니다.
       정근모 장로님은 경기중 수석 입학, 경기중 수석 졸업, 경기고 수석 입학하신 분입니다. 경기고 1학년을 마치고 월반해서 서울공대로 진학을 했고 23세 때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미국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미국 고위 관료로 일하다가 한국에 와서 중요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국제 원자력 기구 의장을 지냈고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냈고 호서대학 총장을 지냈습니다. 아마 우리 사회에서 정근모 장로님처럼 화려한 이력을 가지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정근모 장로님의 아버지, 어머니가 그 아들 때문에 굉장히 자랑스러워했을 겁니다. 그런데 어제 정 장로님이 자신이 부모님에게 효자였던 것보다 자신의 아들이 훨씬 더 효자였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아들이기에 그렇게 효자였다는 것일까요?
       정장로님의 아들은 10살 때부터 병을 앓았습니다. 건강이 나빴기 때문에 공부 잘하기를 바랄 수도 없었고 그저 건강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신장을 하나 떼 주었는데도 부작용이 생겨서 몸이 더 나빠졌습니다. 그렇게 병들어서 고생을 하던 그 아들이 결국 부모와 아내와 어린 아이들을 남겨놓고 36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정장로님은 자신의 아들이 자신보다 더 효자였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예수 믿게 만들었고, 자기 아버지를 기도하게 만들었고, 자기 아버지를 성령 충만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 장로님 자신은 부모님에게 공부 잘하는 아들이라는 효도 정도밖에 못했지만 자신의 아들은 그보다 훨씬 큰 효도를 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식이 먼저 죽는 기막힌 상황을 두고 오랑캐 꽃이라 부르지 않고 ‘제비꽃’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가 그런 상황을 오랑캐꽃이라고 말하지 않고 제비꽃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에게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보는 시각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사물을 오랑캐꽃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느 관원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높은 관직을 가지고 있었고, 부자였고 그리고 젊고 건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위에 그는 영생을 갖고 싶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는 질문을 들은 후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지켰느냐?”고 묻습니다. 관원은 “다 지켰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돈 문제를 가져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계명을 지켰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이 청년을 향해서 이 사람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요청합니다. 그것이 바로 돈 문제였습니다. 이 청년은 “모든 것을 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근심하면서 떠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돈을 내가 놓치고 영생을 받아봐야 뭐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이 사람이 꿈꾸는 영생은 돈도 움켜쥐고 출세도 하고 몸도 건강한 것을 오래도록 누리는 것이 영생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하는 영생이 무엇이든지간에 돈을 팽개치고 가질 수 있는 영생이라면 나는 싫다면서 물러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청년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젊은 나이에 출세하고 돈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돈만 많은 멍청이도 있고 출세는 했는데 멍청이인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돈을 많이 번 사람은 똑똑합니다. 멍청이들이 돈 버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남의 등을 쳐서 돈을 벌면 그건 나쁘지만,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은 분명히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뇌물을 주고 출세한 사람은 문제가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출세한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이 청년은 멍청이 바보가 아닙니다. 굉장히 겸손하고 굉장히 괜찮은 사람입니다.
       마가복음은 이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을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오다가 예수님 가까이 와서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채신머리 없이 뛰기는 왜 뜁니까? 높은 사람일수록 그러지 않습니다. 천천히 걸어가야지 촐랑거리면서 뛰는 것은 안 됩니다. 이 사람의 신분을 생각하면 그렇게 뛰어가서 될 일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 사람은 부자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옷을 입었을 것 같습니까? 예수님이 입은 옷하고 비교가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갈릴리 촌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돈도 없었습니다. 제대로 옷을 갖추어 입고 맵시를 내는 것도 몰랐습니다. 시골 랍비인 그 예수님 앞에서 높은 관직을 가지고 있고 부자인 이 사람이 달려와서 무릎을 꿇고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묻을 수 있는 사람이면 분명 이 사람은 괜찮은 사람입니다. 겸손하고 고상한 가치를 추구할 줄 아는 괜찮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이 사람의 이런 모습을 묘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론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괜찮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영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괜찮은 사람이 안타깝게도, 돈 때문에, 돈을 포기하지 못해서 결국 예수님을 떠나가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영생은 괜찮은 사람이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겸손하고 수양이 잘 되어 있고 교양이 있다고 해서 얻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주님은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25절에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을 이렇게 이해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자라고 다 천국에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깨끗한 부자는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의 문들 중 아주 작은 문 하나의 별명이 바늘귀 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문은 너무 좁고 낮아서 뚱뚱하고 큰 낙타는 지나지 못하나 작은 낙타는 지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이 문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셨다고 생각하면 부자라고 해서 아무도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고 청빈한 부자는 마치 날씬한 낙타가 바늘귀 문으로 통과할 수 있듯이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인가? 라고 생각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위의 해석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약대는 바늘귀로 못 들어가는 것처럼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에 동의가 잘 안되십니까? 혹시 여기 부자가 계십니까? 어떤 사람을 부자라고 할까요? 여러분은 누가 부자라고 생각합니까? 옛날에는 억대 부자라고 그랬는데 요즈음 억대 부자는 없습니다. 초가에 살고 있어도 일억 이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자입니까? 10억 이상 가지고 있으면 부자일까요? 100평 넘는 집에 살면 부자일까요?
    주님이 “아이고! 너는 1억밖에 없냐? 너는 가난뱅이구나! 너는 전셋집에 사느냐? 너는 가난뱅이구나! 너희 집은 100평이냐? 너는 부자구나.” 우리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부자의 기준은 소유물에 있지 않습니다. ‘내 인생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부자입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진심으로 “내 인생이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내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부자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백 원을 가지고 있건 오백 원을 가지고 있건, “내 생명도 내 것이요, 내 가족도 내 것이요, 모든 것은 내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예수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이런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를 제자들은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26절에서 “아니, 그럼 도대체 누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까?”고 물으면서 반응하는 것은 예수님 말씀을 잘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부자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가난뱅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가난뱅이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도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러면 영생이 어떻게 온다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27절에서 “사람은 할 수 없지만은 하나님을 할 수 있다.” 영생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이 청년처럼 이렇게 고상한 삶은 살아도 영생이 이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법 없어도 사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괜찮은 사람도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 안 믿어도 그렇게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질 더럽고 예수 믿는 사람보다 예수 안 믿고 성격 좋은 사람이 훨씬 낫다.”는 말에 한 49%까지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성질 좋아봤자 오십 보 백 보지 어느 놈이 성질이 좋고 어느 놈은 나쁘냐? 다 똑같지.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걸 우리가 성경의 용어로 그대로 표현하면 무엇입니까? 다 죄인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다 한과 출신이라는 겁니다. “나는 죄인이고 나는 성질이 더럽고 저건 좀 괜찮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 관점에서 하는 말이고 주님이 보실 때 우리는 다 죄인이요, 아무도 천국들어 갈 수 없고, 아무도 하나님의 영생을 선물로 받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은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무엇을 위해서 가십니까.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가십니다. 31절 말씀을 보면 인자 예수그리스도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어지고, 로마인들의 손에  넘기어지고, 희롱을 받고 모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고, 채찍질을 당하고, 그리고 마침내 죽음을 당하시는,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지금 가고 계십니다.
       이 설교를 하신 다음에 한, 두 주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이 바로 이 일을 당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시면서 이 설교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일을 당하셔야 합니까? 성경을 조금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죽은 것이 내 죄를 위한 죽음이 될 수가 있느냐.”
       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의 죽음이 그런 죽음이라고 하자. 그러나 자기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그렇게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믿으라는 거냐.”
       오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의견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죄 없으신 그 분이 이 땅에 오셔서 이런 비참한 십자가를 당하셔야 하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3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지금 예수님하고 함께 3년 정도 생활을 같이 한 제자들도 이 비밀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였습니다. 신앙생활 초기에는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저는 교회에서 과자를 주어서 과자 얻어먹으려고 교회에 갔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처음 교회 왔습니까? 병 낫는다고 해서 왔습니까? 남편 술을 좀 끊게 하려고 교회 오셨습니까? 우리가 다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주일학교에서 과자 주면은 안 된다고요?  오늘 우리 전도사님이 애들한테 과자를 주고 상을 주어서 아이들에게 보상심리를 부추기고 그럴 것이 아니라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구요? 물론 성경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한테 과자를 주고 격려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도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애가 처음 부터 성경을 배워가지고 성경의 진리를 깨닫는 일이 가능한 일입니까?
       과자를 주면서 미끼를 던지면서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이들 비위 맞춰가면서, 맛있는 것 먹여 가면서,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해야지 아무 것도 안 주고 그냥 공부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나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치면 안 되지만 어른인 우리도 다 그 심리 때문에 교회 나오지 않았습니까?  “뭔지는 모르지만 그냥 교회가면 좋다고 그러더라. 우리 옆집 사람 보니까 남편이 술 끊고 담배 끊고, 돈은 별로 못 벌어도 사는 게 확 달라졌더라. 아이고 저런 집처럼 우리 집도 좀 변했으면 좋겠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가 다 오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 정도 알아서는 오늘 이 34절 말씀대로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계신 것입니다.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감추어진 말씀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지,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 못 박히셔야 하시는 것인지, 그 비밀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고 우리가 영생을 얻으면 우리 눈에 오랑캐꽃 같은 것들이 아름다운 제비꽃으로 보이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말썽을 부리는 자식이 말썽꾸러기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저 아이 마음속에 예수그리스도만 심겨지면 그의 인생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울 것인가.’라는 제비꽃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탄식과 원망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죄 없으신 그 분이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왜 하나님은 그렇게 비참하게 예수님을 죽여야 하는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죄 값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런 처참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매달아 놓은 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모습이 꼭 처참하게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얼른 보기에는 아름다운 모습이나 실상은 형편없는 모습으로도 자주 나타납니다. 이런 말을 들어보았습니까? ‘우리 옆집 사람들은 예수 안 믿어도 부부 간에 금슬 좋고, 아이들 잘 키우고, 매너 좋고, 얼마든지 멋있게 잘 살더라.’ 그런 분은 꽃꽂이 해 놓은 꽃을 떠 올려야 합니다.
       꽃꽂이를 해서 오아시스에 심어 놓습니다. 꽃이 뿌리가 잘려서 오아시스에 꽂혀 있습니다. 그 꽃이 죽은 꽃입니까? 산 꽃입니까? 그 꽃을 보고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죽은 꽃임을 우리가 다 압니다. 그런데 죽은 꽃이 왜 그렇게 예쁩니까? 죽었지만 아직 물기가 조금 남아 있어서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주일만 지나 보십시오. 그 꽃이 어디 가 있습니까? 전부 쓰레기통에 버려집니다.
       영의 눈으로 우리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알지 못하는 그들이, 예수의 생명이 없는 그들이, 영생이 없는 그들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그들에게 예수가 없기 때문에 얼마 후면 저들의 생명이 어디에 가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침 큐티 시간에 기도합니다. “오늘 동창회 가서 예수님의 주 되심을, 어떻게 해서든지 증거하게 하옵소서.” 오랜만에 동창이 하나 왔는데 옷을 아주 잘 입고 왔습니다. 얼굴도 좋고 화장도 잘 받고, 큼직한 보석 반지를 끼고 아주 멋진 차를 타고 왔습니다. 밥 먹으면서 남편이 얼마나 돈을 잘 버는지 자식들이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지 이야기 합니다. 자식들이  좋은 대학 들어갔다고 합니다. 아침 큐티 시간에 친구들에게 주님을 증거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반지 앞에 주눅이 들기 시작합니다. 남편이 돈 잘 번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자기 남편도 못 벌지는 않지만 그 남편에  비하니까 아무 것도 아니다 싶고, 주님을 증거한다는 기도는 온 데 간 데 없이 기분이 나빠집니다.
       비밀을 모르는 자입니다. 영생을 모르거나, 알아도 그 영생을 확신하지 못할 때, 우리도 모르게 현실 앞에서 그런 모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가졌는가가 아니고 우리가 무엇을 행했느냐도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죽음의 의미를 우리가 아느냐에 따라 영생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 값으로 죽으신 분입니다. 그 분이 피를 철철 흘리는 그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은 내가 그 자리에 달려야 하는 것을 예수님이 대신 달리신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잔인하다구요? 하나님이 잔인한 것이 아니고 죄가 잔인한 것입니다. 죄가 우리에게 갖다 주는 결과가 얼마나 더럽고,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외롭게 만드는 것인가를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 죄의 결과를 주님께서 스스로 짊어지신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받기 위해서 손을 내미는 것을 우리가 믿음이라고 얘기합니다. 손을 내밀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우리가 손을 내밀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손을 내밀도록 우리를 코너로 몰아넣으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개, 돼지처럼 생각하시면 두들겨 패서 움직이면 되겠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행하시지 않고 우리를 설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설명하시고, 설득하시고 우리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추한 자들인가를 하는 것을 깨닫고 주님 앞에 고백하고, “주님 나를 살려주십시오.” 하고 “주님이 내 죄를 위해서 행하신 그걸 내가 받기를 원합니다.” 하고 손을 내미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기를 원합니다. 혹시 아직도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오늘 이 예배에 오신 분이 있다면 오늘 정말 잘 오셨습니다. 그러나 듣기만 하고 가시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가 주님 앞에 고백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죽으신 사실을 내가 받아들이겠습니다. 주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어주시옵소서. 그렇게 고백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받아들이실 때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고백을 기쁨으로 찬양 137장 가사를 통해서 주님 앞에 먼저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본원 이사, 분당샘물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