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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땅과 바람과 하늘의 응답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우경재 | 설교자: 삼상 2:1-10

    본문

    누가복음 1:67-80


    약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

    오늘 읽어 드린 사무엘 상 2장의 시편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기도한 후 아들 사무엘을 낳게 되자 감사함으로 부른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보면, 단순하게 아들을 낳은 것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노래가 아니라, 아주 억울하게 짓눌리고 고난 당하던 사람이 구원함을 받아서 감사하는 노래입니다.

    너희는 교만한 말을 늘어놓지 말아라. 오만한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라. 참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보시는 분이시다. 용사들의 활은 꺾이나, 약한 사람들은 강해진다. 한때 넉넉하게 살던 자들은 먹고살려고 품을 팔지만, 굶주리던 자들은 다시 굶주리지 않는다. 자식을 못 낳던 여인은 일곱이나 낳지만, 아들을 많이 둔 여인은 홀로 남는다.

    이 노래에 보면, 하느님께서 한 때 교만했던 자들, 용사들, 넉넉하게 살았던 사람들, 아들을 많이 두었던 여인을 약하게 하시고 부끄럽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한나가 아들을 낳지 못하므로 이런 사람들로부터 숫한 수모(受侮)를 당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사회에서 아들을 못 나는 것은 큰 죄에 해당하였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것은 곧 대를 잇지 못함이며, 대를 잇지 못하는 것은 그 가문의 문제만이 아닌 민족적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아들을 낳으려 했고 그렇지 못할 경우 양자를 드리거나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그 대를 이으려 했습니다. 따라서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자는 멸시와 수모를 당했고 완전히 버림받은 여자로 취급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자기 몸종을 남편에게 주어서라도 아들을 보려했던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고, 룻기에 나오는 시어머니 나오미가 남편과 세 아들이 모두 죽어버리자 완전히 절망에 빠진 것도 이런 까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며느리 룻이 가장 가까운 친척인 보아스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자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처럼 기뻐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였던 한나도 온갖 비난과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특히 그의 남편 엘가나에게는 또 다른 부인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브닌나였습니다. 그 부인은 여러 자녀를 낳았기에 아기를 못 낳는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습니다. 엘가나의 가족들은 매년 한차례씩 실로에 있는 성막에 올라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마다, 브닌나가 한나의 마음을 늘 그렇게 괴롭혔으므로, 한나는 울기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남편 엘가나가 한나를 위로하였지만, 한나의 슬픔은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제사를 드린 후 한나는 괴로운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 흐느껴 울면서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만군의 주님, 주께서 주의 종의 이 비천한 모습을 참으로 불쌍히 보시고, 나를 기억하셔서, 주의 종을 잊지 않으시고, 이 종에게 아들을 하나 허락하여 주시면, 저는 그 아이의 한평생을 주께 바치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입술만 달싹거리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술에 취한 줄로 알고 포도주를 끊으라고 호통을 치자 한나가 말했습니다.

    \제사장님, 저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슬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저의 마음을 주 앞에 쏟아 놓았을 뿐입니다. 이 종을 나쁜 여자로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나도 원통하고 괴로워서, 이처럼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원통하고 괴롭다는 그의 표현을 통해 그가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아 그의 재롱을 보고 그의 덕을 보겠다는 생각은 없고 오직 아들을 낳으므로 자기가 당하고 있는 괴로움과 수치를 벗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저 없이 서원기도를 통해 아들을 낳게만 해주신다면 그를 평생을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도 제사장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지 못하다가 뒤늦게 아기를 낳게 되었는데, 이들 역시 아기가 없으므로 해서 많은 고통과 조소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의롭게 사는데 왜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아들을 주시지 않느냐는 주변의 조롱은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아들을 낳지 못하는 일은 가장 큰 고통이었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한나의 경우나 사가랴의 경우나 다같이 단순히 아들을 낳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약자가 당하는 고통과 억울함과 원통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엘가나의 두 아내는 그 당시 사회의 대조된 두 계층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낳아서 큰 소리 칠 수 있는 브닌나는 그 당시 사회의 교만한 자, 권력을 가진 자, 재물을 많이 가진 자, 남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상징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의인의 기도에서 악인, 죄인, 대적, 원수 같은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약한 자들, 없는 자들, 가난한 자들을 업신여기고 착취하며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 반면에 아기를 낳지 못하였던 한나는 바로 그 당시 사회의 약자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강자들에게 억울하게 당하고 조롱과 수치를 당하며 가난과 곤궁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같은 한 남편의 아내이면서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며 살지 못하고 업신여기며 못 살게 굴었던 것처럼, 같은 사회, 같은 세계 속에 살면서도 더불어 살기보다는 서로 적대적으로 대립하면서 원수처럼 지냅니다. 결국 이런 사회 속에서는 언제나 약한 자들이 힘있는 자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통계청에 의하면 우리 사회는 IMF 이후 더욱 빈부의 격차가 커졌다고 합니다. 도시근로자 최하위 10%는 이전보다 실질 소득이 5.20%가 줄었고 최상위 10%는 14.02% 증가했다고 합니다. 최상위 10% 사람들의 소득배율이 최하위 10%의 사람들의 9.12배라고 합니다. 이것은 최근 4년 간 7.59배에서 9.12배로 늘어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되었다는 말이고 그 격차가 전보다 더 커졌다는 말입니다. 특히 농어민들의 소득은 97년보다 실질소득증가율이 -11.5%와 -16.3%이고, 부채는 농가의 경우 55.2%나 증가했습니다. 뼈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제 값을 받지 못하고 빚만 잔뜩 짊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데모가 자주 일어나는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이런 통계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데모는 하느님께 울부짖는 기도라고 하겠습니다. 억울하게 당하는 약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느님을 향하여 울부짖는 일밖에 없습니다. 정부나 정치인들이나 배부른 사람들은 그 부르짖음을 못마땅하게 여기겠지만, 하느님은 결코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냥 넘어가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그의 아들을 보내심으로 응답하시는 하느님

    한나는 너무 원통하고 괴로운 나머지 주님께 간절하게 서원기도를 드렸는데, 주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지었는데 \하느님이 들으셨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기 탄생 이야기는 항상 구원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첫 번째 아기 탄생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은 모세입니다. 히브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죽을 뻔 하였다가 오히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자랐고, 80세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좇아 히브리인들을 출애급시키는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야기가 바로 사무엘이고 신약성경에 와서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나옵니다. 이 아기들의 탄생은 곧 하느님의 구원의 표징이며 그의 역사 개입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나나 사가랴가 아들을 낳았을 때 그들이 기뻐하며 부른 노래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께서 단순하게 아들을 원하던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는 것에 머물지 않고, 불공평하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아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신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한나는 \참으로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보시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불평등하고 불의한 일들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전혀 무관심하게 내버려두시지 않고 사람이 하는 일을 저울에 달아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저울에 달아보신다는 것은 심판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관심을 갖고 이 땅의 일들을 지켜보고 계시면서 강한 자의 불의를 심판하시고 약한 자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티끌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사람을 거름더미에서 들어올리셔서, 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게 하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사가랴의 찬송에는 더욱 분명하게 그런 뜻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찬양 받으실 분이시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돌보아 속량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권능의 구원자를 당신의 종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셨다. 예로부터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으로 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셨다.

    아들을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고난받는 백성을 구원하시고 속량하시고 모든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셨음을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나나 사가랴의 믿음이 크다는 사실을 여기서 배우게 됩니다. 그들의 바람은 아들이 없어서 당하는 서러움을 벗어나는 것이었지만, 막상 주님께서 아들을 주시자 그것이 곧 그 민족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역사임을 깨닫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큰 역사를 볼 수 있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러고 보면, 한나나 사가랴는 자기들의 아들을 원했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의 나타남을 기다리는 모든 인류의 간절한 소망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한나와 사가랴는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보면서 하느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좀더 해석을 덧붙인다면 한나나 사가랴는 하느님의 아들의 탄생을 간구하였던 것이고, 그들에게 아들을 주신 것은 주님께서 자기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다는 응답의 징표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들을 낳고서는 마치 하느님의 아들을 낳기나 한 것처럼 기뻐하며 구원의 찬송을 불렀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아들을 얻으면서 구원의 희망을 보았던 것입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 희망의 싹이 돋아남을 보고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이후 이 땅은 언제나 고난과 절망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한숨과 탄식, 눈물과 울부짖음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 아벨의 피가 하느님께 호소하듯 가인의 후손들에 의해서 억압과 고통을 당한 아벨의 후손들이 눈물과 탄식으로 주님께 울부짖어 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고난 당하던 히브리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셨고, 사무엘을 보내셔서 길 잃고 헤매는 양떼와 같았던 이스라엘을 이끄셨으며, 마침내 세례자 요한을 보내셔서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메시야의 탄생 곧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아벨 이후 고난 당한 약한 자들과 인간의 무자비함으로 짓밟힌 피조물들의 울부짖음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바로 파괴된 하느님의 질서를 회복하고 죄악으로 멸망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하신다는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오심을 기다림은 바로 이 땅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불의와 불평등과 온갖 죄악에 대하여 심판하시고, 원통함과 눈물로 하소연하는 짓눌린 민중들을 구원하여 평화의 세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의 몸짓입니다.

    때로 우리의 신앙은 너무 자기에게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나라꼴이 어찌 되든, 중동 지역에서 죽고 굶주려 헤매는 사람이 얼마가 되었든 전혀 상관치 않고 그저 내 즐거움을 위해서 성탄을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 그 신앙이 이기적이고 편향되어 있습니다. 나 하나를 위해 그 크신 하느님의 아들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고난 당하는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응답하여 그들을 구원하려 오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함께 기억하고 그런 차원에서 감사의 찬송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나를 위해 저렇게 고난 받으셨구나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아담 이후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있을 고난 받는 자들의 한숨과 탄식과 눈물의 울부짖음에 대한 응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자리에까지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길거리로 뛰쳐나와 피를 토하듯 외치는 농어민들과 노동자들의 부르짖음을 외면하고서는 우리가 올바른 성탄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들을 위해 오신 예수님인데, 그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어찌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시기를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2001년 성탄에는 예수님께서, 휘황찬란한 크리스마스 등불로 장식된 미국땅이나 혹은 도시의 호텔에 오시지 않고, 이 땅의 호소할 길 없는 아픔을 안은 노동자들과 농어민들 가운데, 저 북녘에서 굶주리며 고난 당하는 형제자매들 가운데, 그리고 미국의 맹목적 전쟁으로 고향과 땅을 잃은 아프가니스탄 난민들 가운데 아기 예수가 탄생하실 것입니다. 저들의 울부짖음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이기에 21세기의 마구간인 버려진 땅 버려진 백성들 가운데 오실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화려한 성탄 장식을 하고 아름다운 노래로 성탄을 준비하여도 우리 마음에 고난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할 마음이 없다면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여러분 주변에서 들려오는 탄식 소리와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셨으며, 사무엘을 보내셨으며, 요한을 보내셨고, 마침내는 그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나의 고통과 고난 속에서 인류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볼 줄 아는 큰 믿음을 여러분 속에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이 땅의 모든 피조물이 드리는 탄식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여 마침내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땅의 모든 억울함과 원통함을 하느님께서 다 해결하실 것입니다. 불의한 자들을 하느님께서 심판하시고 모든 피조물이 더불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 대림절에 다시 한 번 이 희망을 우리 속에 분명하게 다지므로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로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마음을 비우고 고난 받는 자들의 부르짖음에 함께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그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