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중의 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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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고난이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도서 7: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인생으로 하여금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게 하여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고난은 언제나 있습니다. 고난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나만 고난당하는가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때만 넘기면 고난이 없겠지 하는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고난이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은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119:71에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하고 깨닫지 못하던 것을 깨닫게 하고 고치지 못하던 것을 고치게 하는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가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없기를 바라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맑은 날만 기대 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비가 오지 않고 구름 한 점 없이 계속해서 태양이 뜨겁게 내려 쬐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사막입니다. 우리 인생에 비 오는 날과 바람 부는 날이 없다면 사막처럼 황폐한 인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욥기서는 고난이 어디로부터 오며 어떤 사람이 고난을 당하며 그 고난을 어떻게 이겨내야 되는지 그 결과는 어떤 것인지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1절을 보면 욥이라는 인물은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욥이 고난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고난을 당하는 것이 죄인이나 악한 사람이기 때문에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정직한 자, 의로운 자, 믿음이 뛰어난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도 예외 없이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맨 먼저 생각하는 것이 무슨 죄를 지어서 진노 받는가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고난 중에 기도하게 하시고 (야고보서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죄의 결과인 하나님의 진노로 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친척, 본토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팔레스틴의 헤브론 마므레에 당도했습니다. 거기 정착하려했을 때 기근이 왔습니다. 흉년이 들고 먹을 것이 없어서 애굽으로 내려갔던 일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순종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여정을 계속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에 의존했고 명령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지시한 땅에 당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이 다가왔습니다. 죄인이나 악인만이 아니라 순종한자, 의로운 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도 고난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묵상해야 할 중요한 말씀은 5절의 말씀입니다.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자녀들이 혹시 마음으로라도 범죄 하였을까 염려하여 그들의 명수대로 아침에 번제를 드렸다. 자녀에 대한 신앙 교육은 물론 번제를 드려 그들의 죄가 그들 안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성결케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자세가 일시적이 아니라 항상 그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녀들이 하루아침에 모두 생명을 잃는 불상사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나무랄 데 없는 하나님의 사람에게도 고난은 있습니다.
셋째로 유의할 말씀은 9절에서 11절의 내용입니다.
사단은 참소하여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려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단의 음모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사단이 어떤 존재입니까? 사단은 이미 쫓겨난 자입니다. 이미 망한 자입니다. 오래지 않아 무저갱의 신세를 면치 못할 자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으면 많은 사람을 미혹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서 자신의 동반자로 삼으려 합니다.
우리는 이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게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6: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그러나 한 가지 더 기억할 것은 사단은 제 임의로 행동할 수 없고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만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욥을 시험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범위 안에서 시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단의 시험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역량을 아시고 시험을 허락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셔서 승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고전 10: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네 번째로 묵상할 말씀은 20절과 21절에 나타난 고난 중에 쏟아낸 욥의 고백과 기도입니다.
욥의 고난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극한의 고난이며 상상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한 가지만이 아니라 연속해서 덮친 재앙에 절망하고 낙심하지 아니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결코 절망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고백하는 데서 그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찬송을 돌려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구원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받지만 축복은 준비된 그릇에 따라 받는데 욥이 전에 받았던 복과 그의 신앙고백은 복 받을 만한 인물임을 충분히 증거하고 남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사야43:21-“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어느 순간에라도 이것이 중단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존재케 하신 중요한 목적을 그르치는 것이며 궤도를 이탈한 무의미하고 위험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섯째 유의할 말씀은 22절의 말씀으로 어떤 경우에도 원망은 금물이라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했음을 성경은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이 욥에게 있어서 하나님만 의뢰하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경외하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망은 중대한 불신앙의 발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지혜를 믿지 않는 것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약속입니다.
(로마서 8: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는 이 약속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원망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감사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인생은 본래의 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불평과 원망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바울이 바울이 되기 전에는 어떤 세계관을 가진 자 입니까?
사도행전8:1을 보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일에 앞장선 후에 그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예수를 따르는 이단자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생각합니까? 무식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 어떻게 변합니까?
(빌립보서 3: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8절-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는 육체를 신뢰할 요소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바로 깨닫고 본 후에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가치관의 변화를 말합니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내려놓습니다. 배설물로 여깁니다. 그리고 오직 한 가지에 가치를 집중시킵니다.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2: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렇게 결단하고 난 후에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판이하게 달라지게 됩니다.
고린도전서15:9-“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다.” 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좀 더 신앙적 경험이 쌓이고 성숙해 졌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에베소서 3:8-9에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낮추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수록 은혜는 커지게 되고 감사는 넘치게 됩니다.
그 뿐 아닙니다. 그는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백합니다.
디모데전서 4: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런 고백을 품고 자신을 두고 생각한 바울은 위의 고백 앞에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디모데전서4:12-14(“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그 때문에 감사하며 그 때문에 은혜가 풍성했다고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바로 알면 감사 할 수밖에 없고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욥은 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 욥기 1:21“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만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인생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바로 알게 됩니다. 자신을 바로 알고 나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고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난 중에도 자신을 바로 깨닫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 찬송했던 욥처럼 자신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알아 간다면 감사와 감격이 넘쳐 찬송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소명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