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 아침에 생긴 일
페이지 정보
본문
오늘은 세계의 모든 교회가 성령 강림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매년 부활절이 지난 후 50일 째 되는 날 하나님은 약속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기독교는 오늘을 성탄절, 부활절과 함께 교회의 3대 축일의 하나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의 삼위의 l한 분이신 성령이 강림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을 위로하시며 \내가 너희를 떠나지만 너희로 하여금 고아와 같이 외롭게 두지 아니할 터이요 내가 가면 반드시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낼 것입니다.
이 보혜사는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고 항상 너희와 계실 것이다.\(요 14:15-16)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 하시기전 다시금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한 성령을 기다리라\ 그리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성령을 받기까지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한마음 한뜻이 되어 기도에 힘썼고 사도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성례를 나누고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하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천 후 40일째 되는 날 갑자기 급하고 바람같은 소리가 들려왔고 혀 같은 불이 모든 사람 위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날 아침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은 11 사도뿐만 아니라 많은 신도들이 다 같이 성령의 충만함을 얻었고 또한 전혀 새 사람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즉,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때 새 역사가 시작되었으니 오순절 아침에 비로소 지상의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생전의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유대인 사회에서 신국 운동을 하였으나 그 주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성령은 이제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역사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 주님은 성령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세계 어느 곳에서나 그의 교회를 통하여 역사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 한때 제자들은 깊은 낙망과 슬픔 중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은 저들은 저들을 위로하시길 \너희가 내가 떠난다고 울고 슬퍼하느냐. 그러나 너희 슬픔이 기쁨으로 충만할 때가 오리라\(요 16:20) 한 말은 성령의 강림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는 구약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삼손도 성령이 그에게 함께 하실 때 무적의 용사처럼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사울왕도 성령이 그와 함께 할 때 능력 있는 왕으로서 통치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성령이 그와 함께 할 때 전무후무한 지혜의 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구약에 나타나는 성령은 어느 특정인에 한해서 그를 통해서만 역사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언젠가는 그 성령을 모든 그의 자녀들에게 물 붓듯이 부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라\(44:3)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엘 선지자는 \그 후에 내가 나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라\(2:28)고 하지 않았던가! 구약 시대의 결론을 지은 세례 요한도 \나는 그를 알지 못하였사오니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에게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 인줄로 알라 하시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이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요1:33)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동사는 문법적으로 말하면 현재 분사로서 시간성이 없다. 성령강림은 첫 번째 오순절에만 임한 것이 아니라 현재도 임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일찍이 요엘 선지자는 \마지막 날 나의 성령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2:28)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즉, 성령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임하는 우주적인 축복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는 데는 조건이 따른다. 그래서 일찍이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얻으리니\(행 2:38) 하였습니다.
즉, 성령의 은사는 먼저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그리고 죄사함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이요 축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순절 아침 성령을 받은 베드로의 설교의 내용이었고 또한 베드로의 이 설교를 들은 사람이 하루에 3천명 씩이나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마술적이거나 기계적인 역사가 결코 아니다. 이는 먼저 나의 생각, 나의 주장, 나의 지식, 나의 재능 등 모두를 주의 뜻에 복종시키고, 거지같이 빈 마음, 겸허한 마음을 가질 때 비로소 주님은 성령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과 기쁨, 평안, 그리고 삶에 승리할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을 더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순절 아침에 성령에 충만하여 변화된 제자들을 본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말하기를 도대체 이 어찌된 일이냐 이들이 혹시 새 술에 취한 것이 아니냐 하고 수군거릴 정도로 성령을 받은 저들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모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곳에 술을 몹시 즐겨하던 분이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직장의 술 마시기 대회에서 4년 간을 연속 챔피언일 정도로 술고래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아내의 간곡한 권유로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목사의 설교를 듣는데 취하다 보니 점점 술맛이 떨어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술을 끊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그렇다 성령에 취하다 보면 술꾼에게는 술맛이 변하고 노름꾼에게는 노름 맛이 변하고 사치와 호사스럽게 살던 사람은 자연히 검소해 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초대 교회의 제자들도 성령이 충만하여 완전히 새 사람들로 변모되어 있었습니다.
첫째, 제자들이 담대해졌습니다.
지금까지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잘것없는 어부를 중심한 무력한 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게다가 그중 어떤 이는 은 30에 스승을 넘기는가 하면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한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예 절망과 패배감을 안은 채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낙향한 제자들도 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마가의 다락방에 숨어서 두문불출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토록 무기력하고 비겁했던 제자들이 어떻게 마가의 다락문을 열어 제치고 예루살렘 거리를 활보하면서 감히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이는 다름 아닌 오순절 아침에 강림한 성령의 역사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예루살렘 공회는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다가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라고 엄히 경고하자 전과 같으면 계집종 앞에서도 비실거리던 베드로가 담대히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하나님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스스로 판단해 보라\(행4:18-19)고 윽박지르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와 같은 베드로의 대담한 용기가 어디서 솟아났을까? 한 마디로 \주의 현존\으로서의 성령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복음의 사자들이 가는 곳마다 비방과 박해가 뒤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반란을 무릅쓰고 마침내 로마 제국을 저들 앞에 굴복하게 할 수 있었던 그 힘도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때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을 부를 때 쇠고랑이 끊어지고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힘이 쇠로랑에 채워져서 기력을 잃을 때에도 우리의 마음 속에 영적인 힘이 역사할 때 우리를 속박하는 모든 절망의 줄이 썩은 동아줄 끊어지듯 하여 승리의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 방언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두려운 나머지 다락방에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이후 이들은 문을 박차고 나가서 오순절을 지키려 15개국이나 되는 나라에서 모여 온 순례자들 앞에서 예수님이 곧 구세주이심을 힘있게 증거하고 있었습니다. 비겁하고 벙어리 같던 제자들이 입을 열어 담대하게 고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의 주님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만국에서 모여 온 순례자들은 통역관도 없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성령이 임하시면 비록 언어가 달라도 서로 말이 통하고 의사가 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창세기의 바벨탑 사건 이후 언어의 장벽, 사상의 장벽, 인종의 장벽, 계층간의 장벽 그리고 이념 간의 장벽 등이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소외시켜 왔으나 오순절 아침 성령의 역사는 모든 인위적인 장벽을 무너뜨리고 너와 내가 우리로 하나 될 수 있는 비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의사 소통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 간에, 스승과 제자 간에, 위정자와 국민 간에, 기업주와 고용자 간에, 나라와 나라 간에 대화가 단절된 채 긴장과 갈등 그리고 분쟁이 계속되고 있지 않는가.
그러므로 언어 소통의 운동 의사 상통의 운동이 절실히 요청되며 이는 우리 모두가 성령 안에서 닫힌 마음의 분이 상대를 향해 열릴 때 비로소 상대방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상부상조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오순절에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었습니다.(행2:43-47)
변모된 제자들이 모여 상부상조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한 것이 오순절 이후의 한 특징이었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시작이니 이들은 모일 때마다 두 가지 일을 잊지 않았습니다.
1.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습니다(2:42).
이 말은 저들이 그냥 모인 것이 아니라 모일 때마다 그리스도를 중심해서 모였다는 말입니다. 저들은 모일 때마다 떡을 떼며 그 떡과 잔을 통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이 되심을 상기하면서 개인적인 모든 욕망을 제거하였고 사유욕이라는 인간의 가장 큰 본능까지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저들은 자기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그리스도 중심에서 다시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에게로 행하는 마음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이웃의 필요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나를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즐겨 희생하며 자기 소유를 주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능력에 따라 분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공동체를 이룩한 것입니다. 이것이 유사 이래 모든 사람이 바라던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닐까요?
그리고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항상 기쁘고 감격적입니다. 여기에는 차별도 편견도 이기심도 개입될 수 없고 모든 이웃이 오직 형제와 자매들로 용납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꿈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찬은 그 꿈을 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강력한 비전을 가지면서 그런 세계의 확대와 완성을 위해 힘서 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이 그토록 염원하신 \하나님 나라\요 또한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입니다\란 기도의 원 뜻이기도 한 것입니다.
2. 모일 때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2:42)
초대 교회는 열심히 배우는 공동체였습니다. 성령은 자동적으로 기계적으로 혹은 마술적으로 무엇을 알게 하는 역사가 아니라 배워서 알게 되고 기억나서 열매 맺게 되는 생활이 곧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저절로 자동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배웠고 또 점차 지혜가 자랐다(눅 2:40)는 말씀과 같이 성령은 들은 바를 깨닫게 하며 소화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이길 힘쓰고 배우길 힘써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식욕이 왕성하여 먹어도 먹어도 더 먹고 싶어지고 음식이 마치 꿀맛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식탁 앞에서 수저 들고 깨지락대는 사람은 이미 병든 사람이듯이 건강한 심령은 모이길 힘쓰고 배우길 힘쓰는 자요 또한 주의 말씀을 왕성히 받아먹길 힘쓰는 사람에게 역사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이는 일에 게으르고 말씀을 배우는 일에 등한히 하는 사람은 이미 병든 영혼이거나 영적인 자살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성서를 기록할 때 역사 하신 성령은 그 성서를 읽는 자의 마음에도 역사 하시므로 비로소 성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마음을 성령이 열어 주셨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동행하시던 분이 주님이심을 깨닫고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낙심 중에 있던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그 후 저들이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면서까지 복음을 전하게 된 그 힘의 근원은 또한 성령의 역사였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행 5:41). 그래서 성령의 궁극적 목적은 전도에 있으며 전조의 목적은 구원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전하도록 모아내고 입을 열어 증거 하게 하며 구원을 받은 무리의 수가 날마다 더 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소멸치 말고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우리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팔복교회 담임목사, 루터대학교 교수
팔복교회 김해철 목사
-
- 이전글
- 그리스도를 통한 거룩한 교제
- 24.08.28
-
- 다음글
- 예수가 주시다
- 24.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