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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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2장을 오늘부터 공부하게 됩니다. 창세기 12장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운 아브라함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아니고 여기서는 아직 \아브람\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훈련의 때가 거의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으로 아직은 “아브람”입니다. 여러분의 이름은 부모님이 또 누가 지어주었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이름은 하나님이 지어주셔야 합니다.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 비전이 있는 이름, 그 이름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의 시작은 구원의 시작입니다. 아브라함의 출발로 인하여 성경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우리의 믿음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사람인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10장 10절 이후에 보면 아브라함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얻게 됩니다.
첫째, 그는 셈의 후예였다고 말을 합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과 경외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주로 야벳과 함의 후예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벽돌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그 벽돌로 성과 배를 쌓고 놀랍게도 하나님을 믿고 경배하기 보다는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올라가려고 그들은 하늘까지 성을 쌓아보자.’하는 잘못된 야망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온 지면에 내고 유명해 지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보호를 거절하고 인간 스스로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아직도 전세계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는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로 이 세상은 가득 차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셈의 후예였습니다. 셈의 7대손 가운데 ‘데라’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24,25,26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나홀은 이십 구 세에 데라를 낳았고 데라를 낳은 후에 일백 십 구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데라는 칠십 세에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았더라.”
여기서 우선 데라의 가족을 보기 전에 연대에 변화가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인간은 원래 연대가 없습니다. 죽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존재로 선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죄의 개입은 죽음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사탄의 개입은 인간에게 죽음을 의미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가 돌아온 다음부터는 인간에게 죽음이 시작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에서부터 노아 때까지 인간의 평균은 900세 안팎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보게 되는 이 셈대로 오면 연대가 400, 500년대로 줄어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와 아브라함의 연대를 보면 200년대 내외로 줄어들게 됩니다. 나홀은 100년대입니다. 그리고 데라는 200년 조금 더 살았습니다. 시편 90편을 보면 모세의 기도가 나오는데 시편 90편 10절에는 모세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니이다.”
그래서 모세 시대 인간의 평균 연령은 칠십, 팔십입니다. 그것은 요즘 우리 현대인들이 살고 있는 연대수와 거의 엇비슷합니다. 왜 이렇게 연대수가 자꾸 증가할까요. 죄의 증가는 인간 수명의 단축을 의미합니다. 죄가 관여하면 할수록 홍수를 지나고 바벨탑 사건을 지나면서 인간의 연대는 자꾸 줄어드는 것입니다. 데라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오늘 소개되는 24절에 나홀이 29세에 데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데라는 119년을 더 살았습니다. 데라의 가족은 갈대아 우르라는 지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데라는 3형제를 낳았는데 제일 큰 아들이 아브라함이고 둘째가 나홀이고 셋째가 하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셋째인 하란이 가장 먼저 죽습니다. 아버지보다 먼저 죽는데 27절, 28절에 그런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서 “갈대아 우르”라는 지역을 볼 수 있습니다 하란은 갈대아 우르에서 죽은 것 같습니다. 갈대아 우르는 지금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후세인이 지배하는 아랍, 이라크가 바벨론입니다.
이라크 후세인이 세계에서 가장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계속 싸우는 것은 자신이 이스마엘의 후예라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벨탑을 지었던 이스마엘 그것이 바로 후세인의 상징적 전제입니다. 이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주변에 있었던 바벨론 문화를 만들었던 하나님 없는 인간의 상징적 도시가 바로 바벨론 제국입니다. 이 갈대아 우르는 그 당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한 때 무역이 왕성해서 인도까지 교역을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곳에 데라의 가족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데라의 가족은 고대에 생활양식이 그랬던 것처럼 근친결혼을 합니다. 29절 30절이 그 내용입니다. 아브라함과 나홀이 결혼했음을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이고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입니다. 그런데 둘 다 하란의 딸입니다. 그리고 또 이스가라는 여자가 하나 더 있었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그런데 29절 30절에서 우리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사래가 불임녀였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건들이 나오지만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중요한 사건이지만 구속사적으로 보면 중요하지 않은 사건들입니다. 사래가 임신을 할 수 없는 여자였다는 사실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래가 아기를 낳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래가 90세가 넘어서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너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니까 사래가 웃었습니다. “내가 이 나이에 어찌 아들이 있겠습니까” 했는데 사래가 아기를 낳지 못하는 것은 늙어서 경수가 끊어졌기 때문에 못 낳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 월경이 다 지나가고 나면 여자는 아이를 가질 수가 없게 되겠지요. 그러나 사래의 경우는 그것이 아니라 결혼할 때부터 불임녀였기 때문에 아기를 못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기를 낳게 해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 인간이 불가능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과 기적과 하나님의 놀라운 불가사의한 일들이 일어났다는 메시지를 우리는 바로 이 사래의 불임이라는 사실로 인하여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31절, 32절을 보십시오.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데라는 이백 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데라의 가족이 집단적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는 부분에서 이 “떠나라”는 단어가 참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가나안 땅으로 갔다.”라는 말. “떠났다, 갔다.” 이 두 단어가 우리의 구원을 설명해주는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인생은 어디로부터 떠나 어디로 가는 것인가. from, to입니다. 떠남이 없으면 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떠났다고 모든 것이 되지 않습니다. 가는 곳이 분명하지 않으면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데라의 가족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게 되었는데 갈대아 우르가 그 당시에 정치와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었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다 갈대아 우르로 모이려고 했을 것입니다.
지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서울로, 서울로” 합니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가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자녀를 낳아도 서울로 보내고 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대도시, 행복을 약속해 줄 것 같고 그들의 교육과 그들의 성장의 보증 수표라고 생각하는 곳으로 다 가려고 합니다. 일류대학을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데라의 가족이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는 사실은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느낄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데라의 가족은 왜 살기 좋은, 모든 사람들이 가고 싶어하는 갈대아 우르를 떠났을까요? 그것은 데라의 생각이거나 데라의 선택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데라의 문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데라는 아버지지만 나이가 많음과 적음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느냐, 못들었느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면 그가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고 아무리 나이가 많고 아무리 관록이 있어도 그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나이 자랑하지 않기를 바라고 지위 자랑을 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의 전공이 여러분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얘기를 들었어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아마 부인하고 의논을 했겠지요. 그리고 그 아버지하고도 의논을 했겠지요. 가족과 회의를 했을 것이라고 상상이 됩니다. 그리고 나는 이 명령에 순종해야 된다는 결단을 아브라함이 했을 것입니다. 가족들도 따라서 결정을 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따라 갈 것인가, 가지 않을 것인가?’ 가족들도 의논을 했습니다. 그리고 같이 정든 땅, 조상 대대로 살아왔던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된다고 그들은 결정을 합니다. 사실 자기가 익숙한 곳, 오래 살던 곳, 고향, 자기를 키워주고 자기의 산업 기원이 잘 정착되어 있는 고향 땅을 떠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자기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이라고 되어있지만 영어 성경에는 “You\re country, you\re people”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를 떠나야 하고 우리 백성을 떠나야 하는 요즘 말로 하면 파라과이나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야 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민갈 때 보면 나라에서 미움을 받았거나 사업에 실패했거나 자녀의 교육 문제나 어떤 특별한 일이 있기 때문에 조국을 떠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또 어떤 사람은 꿈을 가지고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가 좋은 사람들은 떠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떠나는 것이 이민을 가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이유인데 여기는 자기 민족, 자기 백성, 자기 고향, 아버지가 터를 닦아 놓았던 곳. 그런 집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상식은 우리 이성은 안주하는 곳으로 갑니다. 늙으면 안정하려고 합니다. 믿음은 모험을 하려고 합니다. 믿음은 모든 기존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득권을 포기하기가 어렵습니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 많은 기득권 안에 안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보면 기득권을 포기하고 내가 익숙하고 나를 잘 아는 주변의 사람들을 포기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 나라가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싶어도 왜 안 가져 지는 것입니까?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을 가지고 옛 사람 나를 포기하지 않고 옛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 믿는 것은 새로운 출발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가 지금까지 가져왔고 생각했고 살았던 것을 좀 잘 해 달라는 것입니다. 보호해 달라는 얘기예요. ‘오래 살게 해달라. 장사 잘 되게 해달라. 진급하게 해달라. 자녀들 잘 되게 해달라.’ 새로운 출발이 아니라 있는 것을 잘해 달라고 계속 하기 때문에 믿음의 삶에는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를 단절하지 않으면 새로운 미래는 열리지 않습니다. 내 중심으로 살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기가 어렵습니다. 옛 사람 나의 죄인된 모습, 세상적인 사고방식, 가치관을 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는 그 사람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지요. 변신과 변화, 보통 사람들은 이것을 거부합니다. 아니 변신하고 변화하기보다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더 확장하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이런 것들이 보통 인간의 마음인데 데라의 가정은 조국을 떠나야 하고 자기 백성을 떠나야 하고 자신이 가야 할 땅도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이 아니라 지시할 땅이었습니다. 가봐야 아는 땅이었습니다. 이런 땅으로 가기로 그들은 결심을 합니다. 31절에서 굉장히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31절을 보십시요.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으며.”
출발점은 분명합니다. 갈대아 우르입니다. 혼자 가지 않습니다. 가족이 함께 갑니다. 죽은 동생 하란의 아들 조카 롯도 데리고 갔고 사래(부인)도 데리고 갔습니다. 목표도 분명합니다.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가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31절에서 이상한 현상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들이 가다가 도중하차했다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을 향해 갔습니다. 출발도 잘 했습니다. 목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는 도중에 하란이라는 곳을 봅니다. 하란이라는 곳은 살만합니다. 물도 있습니다. 구태여 가나안 땅까지 갈게 뭐 있냐 여기가 좋사오니 거기를 발견하는 순간 이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란에 잠깐 머무르게 되었는데 머물려고 한 것이 그 곳에 기거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계획은 위기에 부딪히게 됩니다. 당신의 어떤 선택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느냐 안 이루어지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불순종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이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까지는 아주 먼 거리입니다. 끝까지 간다는 것은 보통 인내와 위기와 헌신과 결단을 하지 않으면 어려운 일입니다. 크리스찬의 삶으로 끝까지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도중에 가다가 시험 들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하고 방탕하기도 합니다. 세상이 좋아서 돌아가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일들을 경험합니다. 신앙생활은 하나의 마라톤 경주와 같은 것입니다. 끊임없이 지치고 피곤하고 힘들고 포기하고 싶고 뒤돌아보고 싶을 때에도 계속 그 경주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끝까지 경주하지 못하고 하란에 머물듯이, 잠깐 쉬자고 했던 것이 그냥 거기에 영원히 머물게 되는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데라의 가족이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도 도중하차라는 돌변적 사건이 생깁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계획한대로 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가다가 혹시 도중하차해서 딴 데서 놀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안주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하란에 머물렀던 데라의 가족.
하란은 하나님께서 예비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예비하신 것은 약속의 땅입니다. 약속의 땅은 화려한 곳이 아닙니다. 그곳에는 기근이 있고 역경이 있고 고난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야할 곳은 환경이 좋고 편안한 하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당신이 좋아보여서 만약 하란에 갔다면 거기는 하나님의 계획과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 보기에 좋은 땅이 어딥니까? 소돔과 고모라예요. 에덴 동산 같고 문화가 꽃이 피고 재미있고 내 인생을 행복하게 약속해줄 것 같은 곳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였다는 것이죠.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하는 것을 앎에도 불구하고 자꾸 우리는 육의 본능과 세상적인 유혹 때문에 하란으로 잠깐 도중하차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왜 데라의 가족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가지 못하고 하란에 머물게 되었을까. 저는 그 본문을 보다가 아브라함 때문이 아니라 데라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데라가 가장입니다. 힘이 있습니다. 능력권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데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아브라함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반드시 도중하차합니다. 끝까지 갈 능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위기에 닥치면 시험이 들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포기해 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음성을 들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다가 왜 자꾸 걸리적거리는 줄 아세요? 바로 여러분이 하나님 만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신앙의 체험을, 그 역경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셨다는 이 놀라운 체험이 없을 때 구원에 대한 감격이 없었을 때 우리는 쉽게 고난에 무너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그런 의미에서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인생을 출발하는 그런 분명한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있으면 어떤 환경도 어떤 오해도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지만 여러분이 몸만 왔다갔다하고 감정적으로 예수 믿고 형편에 따라 예수 믿으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데라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가장이었고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데라 밑에 있는 동안 아브라함은 고민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움직이고 싶은데 그러면 부모도 버리고 다 버리고 자기 혼자 가야 하는데 갈 형편도 못 되고 또 아버지 말에 순종하자고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게 되는 이 이중적 갈등을 아브라함은 갖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아브라함의 고난이 여기 있습니다. 32절을 보십시요. 데라는 이백 오 세를 향수하고 하란에서 죽었더라. 데라의 죽음은 아브라함의 출발입니다. 데라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브라함은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잘 죽었지요. 해서는 안 될 말일지 모르지만 데라는 죽어야 합니다. 옛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과거의 가치관이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새로운 세계가 탄생하는 이것이 믿음이예요. 이게 믿음의 원리예요. 여러분 옛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사람들은 자기가 죽는 걸 두려워하고 싫어해요. 오히려 하나님이 당신을 옛 사람을 죽이려고 하면 얼마나 안 죽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는지 몰라요.
“아무라도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이 진리는, 이 원리는 바꿀 수가 없어요.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좀 더 오래 살아야 하고 좀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하고 그런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그런 미신을 하나 가지고 있어요. 여러분 인간은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불안지수는 높아집니다. 높이 올라가면 참 위험합니다. 장대 끝에 올라간 것 같아요. 높은 자리에 올라가신 분들은 다 조심하십시오. 그곳은 장대 끝입니다. 밑에서 흔드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없는 인간은 정상을 향하여, 정상을 향해 간다는 것이예요. 옛 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여러분 저는 믿음을 갖고 싶습니다. 포기해야 믿음이 생겨요. 덧칠하면 안돼요. 여러분 새 옷은 헌 옷을 벗어야 입지 헌 옷이 아깝다고 헌 옷 위에 새 옷을 입으면 폼도 나지 않습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거예요. 내가 죽어야 사는 것이고 옛 사람이 무너져야 새 사람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새사람을 시작도 못한 사람들이예요. 시작도 못하고 새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목마름이 있지요. 헌신해도 갈 수 없는 이유가 왜 그런 줄 아세요? 옛 사람이 당신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결정해도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는 이유는 옛 사람이 나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데라가 죽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데라가 죽고 나서야 이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것이 12장 1절입니다. 11장까지 해서 데라가 죽고 나서야 12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12장 1절을 보십시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믿음의 출발, 새로운 출발입니다.”
여러분, 출발이라고 하는 것은 성숙한 게 아니예요. 미완성이예요. 아이가 자라서 첫 걸음이 어렵듯이 크리스찬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미숙하고 불완전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십시요. 길을 잘 들어선 거예요. 계속 가면 열매가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12장 1절에서 굉장히 많은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데 오늘은 세 가지 정도만 이야기할까 합니다.
첫째, 출발을 시키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출발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왜 우리 출발이 위기에 부딪히는가? 그것은 내가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데라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출발시키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때, 우리는 불안하고 미숙한 내 인생이 자신만만하게 한 목표를 향하여 걸어갈 수 있는 거예요. 천지를 창조하신 분은 과학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과학자는 천지창조라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발견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은 내 부모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내가 예배할 분은 조상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조상숭배하지 마세요. 조상이라고 부모라고 하는 것은 나를 세상에 보내온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던 것이지 부모가 내 예배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예배의 대상은 나를 세상에 보내신 내 부모를 세상에 보내신 창조주 하나님 그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부모라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에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이용하셔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세상에 나를 보내신 것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인류를 구원할 믿음의 조상을 만드시고 믿음을 여행케 하신 믿음을 여행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위대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하나님이 위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하지 마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영광을 그분에게 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지시하셨고 하나님이 운행하신 일이라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잘못 되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안 보여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안 들려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은 그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0장 31절에 보면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시편 62편 1,2절에는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내 귀에 아니 들리고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없고 내 손에 잡히는 것이 없고 현실은 캄캄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저기 위에서 부르시는 상을 향하여 나는 뛰어가노라. 나는 이 길을 가노라. 이것이 믿음의 삶이예요. 믿음의 행실이예요. 세상이 감당치 못하고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에게 있는 것이예요. 우리는 그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12장 1절에서 주는 두 번째 메시지는 아브라함이 자격이 있어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은 우리와 똑같은 보통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택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은 내가 목회할 용기를 주는 사건이고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말씀이예요. 네가 잘나고 똑똑하고 믿음이 있어서 내가 널 택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아브라함이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이 택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는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하나님이세요. 여러분이 믿음이 있어서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예요. 여러분이 믿음이 없지만 착하셔서 하나님께서 손 좀 보셔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목표에 이르도록 여러분을 이끌어주신다는 사실을 오늘 이 본문에서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창세기 12장 이후에 아브라함 이야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참 실수가 많았고 아브라함만 보면 난 숨이 다 쉬어져요. 이런 사람도 하나님이 쓰는 그릇 되었으니 참 감사하다라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난 다윗이 실수한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 사람인지 몰라요. 이런 사람도 하나님이 쓰시는구나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요. 잘나고 똑똑해서 여러분을 택한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왜 하나님이 택했느냐. 나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그냥. 그냥 택했어요. 하나님 맘이예요. 그냥이라는 것은 우연이라는 뜻이 아니예요. ‘즉흥적’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너무나 오래 전부터 계획했다는 것이지요. 그냥 택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예요. 하나님의 준비가 있었다는 뜻이예요. 조건 없이 나를 사랑했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 조건 없는 은혜, 일방적인 사랑. 우리는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요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내가 할 말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불평해서도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불평할 자격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은혜.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신 은혜. 일방적으로 사랑해주신 그 은혜. 우리는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우리는 조건 없는 다시 반환하고 보상을 드릴 수 없는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 9절에 보면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죄송할 따름이예요. 죄송하게 사는 사람들이예요. 인생을 떵떵거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요. 남을 야단치고….
여러분 그렇게 살지 마세요. 여러분, 미안하게 사세요. 부끄럽게 사세요. 그러면 감격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충고할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는 섬길 수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셋째,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이 아니라 지시할 땅을 향해 떠나는 것입니다. 보여주신 땅도 아니고 또 내가 본 땅도 아닙니다. 가봐야 압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지시한 땅으로 가니 거기에는 기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우리는 자꾸 편하고 쉽고 안정된 곳으로 가고 싶어합니다. 주변에 직장을 떠나고 싶어하고 주변에 싫은 사람들을 떠나고 싶어하고 골치 아프고 머리 아픈데 내가 왜 살아야 하나? 내게 이익도 나지 않는데 내가 이런 데서 왜 이 사람들 때문에 고생을 하느냐? 그러나 하나님은 말합니다. 그것이 네가 설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을 변화시켜라! 그 세상을 변화시켜라! 그 직장을 변화시켜라! 거기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이게 하나님의 땅, 가나안 땅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그렇게 행복한 땅이 아니고 원수들을 다 내쫓아야 하는 골치 아픈 땅입니다. 얼마나 골치 아픈가? 지금까지 골치 아프잖아요. 이 정도로 골치 아픈 땅입니다.
그 땅을 변화시켜라! 우리는 조국을 변화시킬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예요. 북한을 변화시킬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예요. 이 민족의 영혼을 책임져야 되는 사람들이예요. 이 땅이 내가 너에게 보낸 땅이다. 편하고 좋은 데로 빠지지 말아라. 약속의 땅이예요. 믿음이란 과거를 벗어나서 미래를 향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고 죄를 떠나 거룩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여행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떠나라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기득권에서 내가 안주한 것에서….
‘믿음은 모험이다. 이루어질지 안 이루어질지 아무도 보장하지 못한다. 말씀만이 너에게 약속했을 뿐이다.’ 그것이 믿음의 세계예요. 떠날 뿐만 아니라 믿음은 가는 곳이 있다. 떠났지만 가는 곳이 없으면 방황합니다. 당신의 가는 곳은 어딥니까? 당신이 가야 할 곳은 어딥니까? 당신이 이 세상에 부름을 받아 나와서 당신은 학교, 직장, 노동자, 어느 세계에든 다 들어가 있을 거예요. 왜 그곳에 들어가 계신지 아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그 직장을 보내신 줄 아십니까? 왜 하나님께서 그 남편과 아내와 자식을 주신지 아십니까? “거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라. 그 사람들을 변화 시켜라. 네가 변화시키기로 결정하면 변화시킬 능력은 내가 네게 주겠다.”는 거예요.
“네가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니까 두려워말라. 너는 순종하고 믿음으로 떠나거라. 하나님이 약속한 곳으로 가라.”
드디어 아브라함은 믿음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하란에서 또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도 믿음의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행의 끝은 어디일까요?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은 것처럼 너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 왜 아브라함을 보내 주었는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믿음 없던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순종함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똑같이 구원이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여행의 결론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결론도 예수 그리스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여 내 삶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잡혀 있나이다.
온누리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