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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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2월 한 편지가 미국정부로 날아왔습니다. \나는 세계 2차 대전 당시 담요를 훔쳤습니다. 이에 $10을 보냅니다. 나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이죠. Ex-GI로부터...\이 전역군인은 30년 간 자기의 잘못을 가슴에 안고 있다가 세상을 떠난 준비를 하기 위해 $10를 미정부에 보낸 것입니다.
콜로라도에 사는 한 여인은 한 우표를 두 번 사용한 후 오랫동안 양심의 가책을 갖고 있은 후 두 장의 우표를 정부로 보내왔습니다.
한 오하오이오 주에 사는 사람도 어릴 때 페니(Penny)들을 철도 레일(rail) 위에 놓아 납작하게 만들곤 했었는데 그 후 커서 어릴 때의 잘못을 보상하려고 $1를 정부에 보내왔습니다.
1811년부터 미국 정부는 양심기금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자기가 지은 잘못을 안고 괴로워하다가 정부에 돈을 보내온 것을 모아 저축하는 기금입니다. 현재까지 3백 50만불의 돈이 모아졌다고 합니다.
1달라에서부터 수 천달라에 이르는 돈들이 양심기금에 저축됩니다. 그들은 그것으로나마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양심의 자유를 얻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잘못에 대해 반응하는 것은 아마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경우는 모른척하고 입을 싹 닦아 버리는 경우일 것입니다. \이런 것쯤이야 뭐 죄라고 할 수 있나…\라고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전혀 없었던 일로 간주합니다.
두 번째 경우는 계속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경우일 것입니다. 바로 양심기금에 돈을 보내는 사람들일 줄 압니다. 분명히 잘못은 했는데 이것을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으니 남몰래 편지를 쓰는 경우입니다. 정부에 잘못을 했으면 정부에게 몰래 편지를 쓰고 하나님께 잘못을 했으면 몰래 하나님께 편지를 씁니다.
세 번째 경우는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께 아뢸 뿐 아니라 자기의 사랑하는 공동체에 알리는 경우일 줄 압니다. 선클래타카라라는 여자 수도사가 있었는데 그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어떤 공동체에 살게 되거든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마십시오. 큰 손해를 보게 될테니까요. 새가 알을 두고 떠나가면 그 알들은 결코 부화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수도사들이 이곳 저곳 옮겨 다니면 믿음이 점점 식고 죽게 됩니다.\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여튼 세 번째 경우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공동체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알리는 경우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 가지 중 어디에 속하십니까?
얼마 전 놀라운 교회사의 한 이야기를 접해 보았습니다. 보통 우리는 콘스탄틴 대제 때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화 함으로써 기독교가 부패하기 시작했다라는 말을 줄곧 들어왔습니다. 곧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끊어졌을 때 도리어 기독교는 안정 가운데서 시들어지기 시작했다고들 말해왔습니다. 물론 그러한 요소가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보다 더 큰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원래 초대교회는 숨어서 소수의 사람들이 작은 그룹을 이루어 모이곤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드리는 예배순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첫 번째 순서가 자신을 노출시키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Self-disclosure and confession of sin). 이것을 exomologesis라고 부릅니다. 그런 후 참회를 합니다. 그리고는 용서를 구합니다. 두 번째로는 지은 죄를 보상하는 방법을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는 친교를 나눕니다. 이것이 콘스탄틴 대제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이때까지 계속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콘스탄틴 대제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회중 안에서의 고백을 신부 앞에서의 고해성사로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후 천주교는 타락 일로로 가게 되었고 끝내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콘스탄트 대제는 아마도 평신도들 앞에서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 싫었던 모양입니다. 자구책으로 신부 앞에서 몰래 고백하는 묘안을 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구교의 타락을 초래하게 되었고, 오늘날의 신교를 낳았는데 신교는 분열의 분열을 거듭하면서 때로는 추한 교회의 모습을 사회에 보여주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게 됩니다.
저는 이 역사적 사실을 읽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보았습니다. 사실 초대교회의 타락은 해가 없어져서라기 보다는 서로의 죄의 고백이 없어진 이유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기독교의 시작은 언제나 죄의 고백과 함께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첫 번째 제자, 아니 수제자인 베드로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셨습니다. 베드로의 배 위에서 무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가 대답하길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하고는 그물을 내리니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그래서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두 배에 가득 채웁니다. 이에 베드로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때 주님은 베드로를 진정시키면서 말씀하십니다.
\무서워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예수께서 당신의 첫 번째 제자를 부르는 엄숙한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사역을 위해서 첫 번째 부르신 제자는 바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한 베드로였습니다.
2,000년 전 주님께서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베드로를 부르셔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는 어떠합니까? 오늘날은 20세기 말이고 21세기를 향하는 시대니까 좀 다를까요?
양심의 가책을 안고 몰래 정부에 돈을 보낼 정도의 사람들을 찾고 계실까요? 사람들의 눈이 무서워 몰래 골방에서만 하나님을 향하여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사람들을 찾고 계실까요?
지난주 우리는 많은 분들이 수양회에 가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수양회 주제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이었는데 참석한 교우님들 모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결단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이번 수양회가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이유는 첫날 저녁 강사 목사님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함과 더불어서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저도 강사 목사님께서 자신의 허물을 말하실 때 크게 감명을 받았고 그것에 힘입어 폐회예배 때 저도 담대하게 저의 허물을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수양회에 참석치 못하신 분들을 위해 잠시 말씀드리면 강사 목사님이 한국에서 설교 통역을 하곤 하셨는데 어느 날 통역할 때 자신이 모르는 단어가 나왔다고 합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I beg your pardon\하면서 그 단어의 뜻을 확인하고 통역을 하셨어야 했는데 강사 목사님은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 그럴싸하게 문맥에 맞추어서 해석하고는 대충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설교 통역 후 선배 목사님이 와서 정중하게 \설교 통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지 통역자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충고하실 때 깊이 회개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저 자신의 허물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도 폐회예배 때 저의 허물을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이 자신의 허물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도리어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저는 강사 목사님과 주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을 더욱 깊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고백의 힘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는 삶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두 가지 축복이 임합니다.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아울러 우리와 같은 죄의 성정을 가진 이웃과 하나가 됩니다. 주 안에서 참된 사랑의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자들을 들어서 하나님은 인류구원의 사역을 계속하십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야고보 선생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서로의 병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각색된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있습니다. 밀밭에 가라지가 심겨진 것을 보고 주인은 나쁜 원수가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고 하면서 노발대발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자랄 때까지 가만 놓아두라고 하인들에게 명령합니다. 주님이 떠난 후 하인들을 서로 말합니다.
\이 가라지를 지금 뽑는 것이 더 나아. 주인은 뽑지 말라고 하지만... 그러나 주인이 뽑지 말라고 명령하니 하는 수 없지. 그냥 놔두어야지.\ \그런데 우리 가라지가 자라는 동안 누가 이 나쁜 짓을 했는지 한번 알아봐야 하지 않겠어?\ \누가 우리 착한 주인에게 이런 나쁜 짓을 했지?\
하인들은 동네방네 수소문을 했습니다만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한 하인이 최고책임자에게 밤중에 찾아 갔습니다.
\책임자님, 저를 용서하세요. 나는 내가 갖고 있는 비밀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요. 나는 가라지를 뿌리고 간 그 원수를 압니다. 제가 똑똑히 보았어요.\
최고 책임자는 화를 내면서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다구칩니다.
\나는 감히 말할 수가 없었어요. 지금도 간신히 와서 말하는 겁니다. 나는 가라지가 뿌려지는 날 깨어있었어요. 나는 그것을 뿌리는 사람을 보았어요. 그는 깨어있어 보였지만 조는 듯 했어요. 그는 나를 보지 못했어요.\
최고 책임자는 소리를 지릅니다. \그래 그게 누구야?\ 하인은 고개를 숙이더니 나지막하게 말합니다. \그는 바로 그 착한 주인어른이셨어요.\
착한 주인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밀밭에 가라지를 뿌렸던 것입니다.
저는 이 비유를 읽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크리스챤들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세상이 죄로 가득 찼다고 고발합니다. 늘 크리스챤들의 입으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듣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혼율이 50%를 넘는다는 등, 빈부의 격차가 극심해진다는 등, 세계는 인간의 끝없는 욕심 때문에 공해가 계속 심해진다는 등, 성윤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등 끝없이 많은 이 세상의 죄악상들을 오늘날 크리스챤들이 고발합니다.
그런데 그 시작은 바로 우리 크리스챤들이 아니었을까요? 콘스탄틴 대제의 힘을 빌어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고통을 더 이상 감수하지 않기고 결정했을 때부터 온 세상은 구원의 참 등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초대교회 시절에는 모두가 죄에 민감했었습니다. 작은 죄, 큰 죄 모두 공동체 안에서 고백하며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이제 콘스탄틴이 들어온 후 죄의 고백은 신부에게만 하게 됩니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고해성사 마저 없어집니다. 결국은 양심기금이 생겨 양심에 가책을 받은 대로 스스로 보상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리는 많은 잊혀진 죄들을 안고 살아가게 됩니다.
자기가 지은 죄도 이젠 기억을 못합니다. 그 죄를 지은 자가 원수라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있는 잊혀진 죄는 그 죄의 주인공을 알고 있습니다. 죄를 고백하지 않은 것, 그것이 모든 죄의 시작이 아니었을까요?
헨리 나우엔이 지은 죄를 잊어버리고 고백하지 않는 것은 그 죄를 짓는 것보다 더 중대한 죄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고백 안 하면 그 죄의 상처가 낫질 않습니다. 그것은 더 큰 죄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홀로코스트를 죄로 고백하지 않을 때 제 2의 홀로코스트가 도래한다는 것입니다.
콘스탄틴이 죄의 고백을 없앤 것이 그 어느 죄 보다도 더 큰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만 고백하면 되지 않냐고?\ 반문하실 지 모릅니다.
수양회 강사 목사님께서 통역하다가 지은 죄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고백을 들은 사람들이 같은 죄를 쉽게 범하게 될까요?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의 죄의 고백은 나의 죄사함뿐 아니라 이웃으로 하여금 같은 죄를 짓지 않게 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왜 세상에 죄가 관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첫 번째 이유는 교회에서 공동체 안에서 죄의 고백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를 높이지 않고 있습니다. 형제 자매가 같은 죄를 범하지 않게 하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반면 우리 안에는 잊혀진 죄들이 쌓여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내 안에 죄도 잊혀진지가 오래 됩니다.
죄의 고백을 포기했을 때 어느새 우리는 잊혀진 죄의 무덤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무덤 속에 있으면서 도리어 애꿎은 이웃에게 모든 죄의 원인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벌써 우리 교회가 본교회당의 주인이 된지 거의 2년이 되어옵니다. 저의 아들은 가끔 저에게 교회 수리를 얼마나 더 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곧 지금까지 교회가 예쁘게 단장이 되었는데 더 멋지게 단장되기를 바란다는 뜻의 질문을 해옵니다.
저는 이번 설교준비를 하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찬란했던 중세 카톨릭이 왜 망했는가? 왜 미국의 많은 교회들이 훌륭하게 교회당을 짓고는 이제는 텅텅 빈 교회가 되었는가? 교회의 본질을 상실했을 때 교회는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고백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할 줄 압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을 상실한 아름다운 건물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아름다운 건물 이전에 아름다운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서로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며 세워지는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아울러 우리와 같은 죄를 짓고 있는 이웃을 만납니다. 예수를 안 믿는 이웃이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사랑하는 공동체 앞에서 죄를 고백하신 적이 언제이십니까? 우리 안에 잊혀졌던 죄를 다시금 찾아내십시다. 주님 앞에서, 사랑하는 공동체 앞에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십니다.
말씀을 거둡니다. 중세기의 성녀 아빌라의 테레사는 늘 자신의 사랑하는 공동체 앞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자매들이며 내가 보여 주었던 잘못된 모습을 용서하시오. 나에게 아무 것도 본받지 마시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이라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였다오. 당신들을 위해 기도한다오. 당신들은 말씀대로 완벽하게 사시오.\
공동체 앞에서 늘 자신의 죄됨을 고백한 테레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 오늘날까지도 테레사의 저서가 각 신학교마다 읽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깊은 영성에 대해서 그보다 잘 가르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큰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여러분, 우리의 죄를 고백하십시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이웃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받으실 것입니다.
우리 다함께 베드로의 고백에 동참하십시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
보스턴 한인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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