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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드보라의 승리의 노래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삿 5:1-18 | 설교자: 김서택

    본문

    지난 번 월드컵 예선 때 우리나라 대표팀이 일대 영으로 일본에 지고 있다가 후반에서 달아서 두 골을 넣는 바람에 역전승 했을 때 온 국민들의 입에서 환호의 탄성이 터져 왔습니다.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나 슬픔 또는 놀라움 등이 있을 때에는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이미 이길 줄 알았던 경기에서 이기면 이런 환호를 지르지 않습니다. 그냥 ‘잘했다. 나는 벌써 이길 줄 알았다’하는 식으로 말을 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이길 수 없었고 패색이 짙은 게임에서 끝까지 사력을 다해서 뛴 결과 놀라운 역전승을 거두었을 때 그 때 사람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되고 바로 이런 승리의 환호성을 지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승리의 순간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으며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는 부분들이며 우리의 삶에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되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살면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바로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려고 애쓰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의 벽에 부딪쳐서 나의 적은 믿음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볼 때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믿는 자들이 기도하면 들어주신다고 하셨는데 이 세상 현실 가운데서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때 마음 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생각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이렇게 끝까지 무기력하게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느냐 아니면 더 늦기 전에 나도 인간적인 방법으로 내 살 길을 찾아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시험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했거나 어쩔 수 없었거나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했는데 어느 한 순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나의 절망을 승리로 바꾸셨을 때 그 때 우리 입에서는 승리의 찬송이 터져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는 드보라의 노래는 바로 이 승리의 노래입니다. 드보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야빈과 시스라의 철병거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이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고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더라도 시스라의 철병거 구백승을 그들은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하나님께서 그들의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한 순간에 이십년 동안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어두움의 세력이 물러가고 환한 자유의 아침이 왔습니다.
    이때 터져 나온 찬송이 바로 이 드보라의 승리의 노래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좋은 일이 있으면 소리를 지릅니다. 이것은 거의 짐승의 수준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노래로 표현했습니다. 이 노래 가사를 보면 어떻게 세밀하게 그 상황들을 재구성해서 표현하고 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예배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승리를 예배를 통하여 다시 재연하는 드라마요 승리의 축제였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예배도 우리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께 주신 놀라운 승리를 다시 재연하는 승리의 축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인 18절까지는 이번 전쟁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으로 생각됩니다.

    1.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

    1-3절,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너희 왕들아 들으라. 너의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 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드보라와 바락에게 이 놀라운 승리를 주신 날을 의미합니다. 그 모든 싸움이 끝난 후 그들이 생각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해서 그들이 이 엄청난 시스라의 군대를 이겼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이겼지요. 그러나 실제적인 상황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 시스라의 철병거 앞에서 너무 많이 절망했고 너무 많이 좌절했습니다. 그들과 싸워서 이긴다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이겼고 적들은 모두 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이 엄청난 일이 그들의 삶 가운데 정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정들은 계속 사람의 마음속에 남아 있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 드릴 때 그 일에 대해서 결론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드보라와 바락은 이 엄청난 승리가 있은 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찬양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승리의 노래였습니다.
    2절,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아마 여기서 ‘이스라엘의 두령들이 그를 영솔하였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이 전쟁을 이끌었다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백성들이 즐거이 헌신하였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왕이 없기 때문에 전쟁에 참가하는 자는 모두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강제가 아니었습니다. 두령들도 자신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었고 또 백성들도 기꺼이 전쟁에 뛰어 들어서 싸웠던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전형적인 싸움의 형태인 것 같습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앞장서서 리더할 사람은 리더하고 뒤에서 따라 올 사람은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장 선 리더들도 더 잘난 것이 없고 뒤에서 따라오는 자라 하더라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 전쟁에 구경만 하지 않고 참여한 자들, 다시 말해서 조금이라도 기여한 자들은 모두 이 승리의 노래를 부를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려운 역경에 봉착했을 때 가장 답답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세상적인 방법조차 제대로 써 보지 못한 것입니다.  
    차라리 남들이 다 써보는 세상적인 방법이라도 써 보았더라면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믿고 기도하다가 시간을 다 놓쳐 버려서 이제는 꼼짝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 자기 자신의 무능에 화가 납니다.
    그리고 어떤 때에는 믿음이 부끄러워지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저 모양 저 꼴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죽고 싶은 심정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형편은  도살당할 양과 같았습니다. 도살당할 양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한 순간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상황을 뒤집어 엎으시고 그들의 손을 높이 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때 지금까지 아무 말이 없던 그들의 입에서 말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그 동안 두렵고 부끄러워서 아무 소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니까 그 동안 하지 못했던 모든 말들을 다 당당하게 쏟아 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누구에게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3절에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이 때 왕도 없었고 장관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주위 나라의 왕들입니다. 모두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우습게 알던 자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무력함을 조롱하고 무시하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을 때 이들은 주위에 있는 모든 자들을 향하여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4절,“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너오시고 에돔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흘렸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길을 걸을 때 캄캄한 밤에서 길을 걷곤 했습니다.
    그들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어두움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영원한 어두움 속을 걸어야 한다는 두려움이 지배를 했습니다.
    그러나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았던 장면 중에서 가장 웅장한 장면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들에게는 동쪽에 해당되는 에돔에서 해 뜨는 장면이었습니다. 동쪽 산 위에서 약간씩 불그스레 해지더니 한 순간에 그 찬란항 태양이 떠오르면서 온 세상은 완전한 환희의 도가니로 바뀌고 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용하는 표현 중에서 하나님께서 데만에서 나오시며 에돔에서 나타나신다는 표현을 자주 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광야의 해뜨는 전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웅장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거친 광야에서의 아픔 해 뜨는 장면은 너무나도 웅장합니다. 그동안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두려움과 추위와 모든 염려를 한 순간에 없애 버리고 세상은 한 순간에 변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드보라는 이것을 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4절,“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들에게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흘렸나이다”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기대하지도 않았던 ‘비’였습니다.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흘렸나이다’
    그들이 이 철병거를 대상으로 해서 싸운다고 하는 것은 미친 짓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이 철병거를 두려워해서 산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생각하지도 않았던 엄청난 비가 쏟아져서 기손 강이 범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시스라의 철병거는 마치 진흙 땅에 빠진 수레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드보라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자기를 사랑하시며 자기 기도를 들으신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 드보라는 쏟아지는 비 가운데서 울고 또 웃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았는데 이제 도저히 부인할 수 없도록 온 몸으로 느끼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악의 세력 앞에서 나의 믿음이 통하지 않을 때입니다. 폭력을 휘두르는 자 앞에서, 혹은 돈을 가지고 권력을 가진 자 앞에서 나의 믿음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느껴질 때입니다. 악의 세력이 나를 덮쳐서 고통스럽게 해도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내가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응답해주시지 않을 때, 나의 가족이나 가장 가까운 사람 중에서 말도 되지도 않는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사고를 당했는데도 전혀 보상을 받지 못했을 때, 나의 사업은 망하고 직장에서는 쫓겨나서 생계는 막연한데도 하나님께서 길을 보여주시지 않을 때 바로 이때가 시련의 시기이고 가장 힘들 때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버릴 수는 없지만 신앙 생활을 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기뻐하라는 설교를 들으면 그렇게 화가 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는 내 사정이 되어보지 않아서 저런 배부른 소리를 하지. 자기도 내 같은 처지가 되어본다면 아마 기뻐하라는 이런 사치스러운 소리를 하지 못할꺼아’라고 말할 것입니다. 속은 답답해서 미치겠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런 일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얼마나 내 신앙이 이론적이며 실제로는 믿음이 없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때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기다리시게 했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악의 세력을 사용하셔서 내 안에도 이런 교만과 죄의 성향이 있는 것을 보게 하시고 깊은 회개를 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깊은 회개라고 하는 것은 이제 나는 완전히 죽어버리고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다 맡기는 것입니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고 일이 잘되고 못되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을 안 그 자체로 기뻐하고 만족하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악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셔서 그 은혜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 엄청난 어려움들이 한 순간에 축복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회복의 속도가 도저히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것을 온 몸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울지 않는 사람이 없고 감격해 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3.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

    이제 갑자기 드보라의 노래는 분위기가 바뀌게 됩니다. 지금까지의 그 영광스럽고 은혜스러운 것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까지 얼마나 무기력하게 살아왔는지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6절,“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소로 다녔도다”
    삼갈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 죽인 때부터 야엘이 시스라의 머리에 말뚝을 박는 이 순간 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로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행인들은 길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는 비밀 통로를 통하여 다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로에는 시스라의 철병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탈하는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7절,“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나 드보라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관원이 그치고 그쳤다’는 말을 아무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하고 이끌어 줄 사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12절에 보면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찌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소리는 바로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드보라가 자기 자신에게 수없이 한 말이었습니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드보라가 말씀을 들고 일어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은 너무나도 처참해서 도저히 살아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드보라 자신의 마음 속에도 자꾸 주저앉고 싶고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유혹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때 마다 드보라는 자신을 일깨웠습니다. “드보라여 정신을 차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너는 안일한 생각을 하느냐 죽더라도 말씀으로 결판을 내어야 할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드보라는 자기가 여자로 태어난 것이 이처럼 후회되었던 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집이 너무 어려우면 어떤 자매들은 자기가 여자로 태어난 것을 후회를 합니다. 자기가 남자였다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러나 드보라는 말씀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8절, “무리가 새 신들을 택하였으므로 그 때 전쟁이 성문에 미쳤으나 이스라엘 사만명 중에서 방패와 창이 보였던고”
    적이 바로 눈 앞에 쳐 들어 왔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 사만명 중에서 창이나 방패를 들고 싸우려는 남자가 없었습니다. 더욱 드보라는 실망하게 한 것은 남자들이 힘을 내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신을 택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힘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을 믿었으면 끝까지 하나님을 결판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잠들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깨어야 합니다. 춥다고 해서 잠들면 결국 얼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산에서 왜 얼어 죽습니까? 졸리니까 잠을 자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체온이 떨어져서 죽는 것입니다. 아무리 졸려도 깨어야 하고 살아남아야 합니다.
    그런데 낙심 중에 있는 드보라에게 힘이 되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듣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한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9절,“내 마음이 이스라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심하였음이라. 여호와를 찬양하라”
    이스라엘 지도자들 중에서 드보라의 말씀을 듣고 자원해서 헌신하는 자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숫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강한 지파 출신들도 아니었습니다. 주로 스불론과 납달리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헌신이 드보라의 마음으로 하여금 사모하게 했습니다.
    13절도 같은 표현입니다.
    “그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도다”
    ‘남은 귀인과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한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드보라와 함께 하셔서 그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습니다.
    10,11절,“흰 나귀를 탄 자들,귀한 화문석에 앉은 자들,길에 행하는 자들아 선파할지어다. 활 쏘는 자의 지꺼림에서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의로운 일을 칭술하라. 그의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의로운 일을 칭술하라. 그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
    아마도 이들은 이번 전쟁과 상관이 없는 다른 이스라엘 백성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그들은 활 쏘는 자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우물 곁에서 한가하게 자기 양떼를 먹이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놀라운 구원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아무리 구석진 곳에서 되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드러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산 위에 있는 동네가 감추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세상적인 일인 것 같습니다. 누가 어떤 시험에 합격하고 어느 대학이 들어갔다더라 하는 것이 큰 뉴스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자들은 이야기 거리에도 들지 못합니다. 한 자리에 모여도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모임을 피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할 말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붙드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어느 한 순간 그를 위하여 일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는 온 세상에서 그 사람이 이야기가 들려지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보다 더 특별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4. 드보라와 함께 한 자들과 외면한 자들

    드보라는 먼저 이 영적인 싸움에 함께 한 자들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14, 15절,“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는 아말렉에 뿌리박힌 자요 그 다음에 벤냐민은 어느 백성 중에 섞였으며 마길에게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 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가 내려 왔도다.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의 심사를 바락도 가졌도다. 그 발을 좇아 골짜기로 달아내려 가니 르우벤의 시냇가에 큰 결심이 있도다.”
    여기에 기록된 자들은 드보라와 함께 싸운 자들입니다. 드보라가 모두 방백이요 대장군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제로는 보잘 것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번 싸움에 기꺼이 동참한 자들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지역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그들은 아마도 정상적인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 아말렉의 피가 섞인 자들인 것 같습니다. 벤냐민은 독자적인 군대를 형성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 중에 섞였습니다. 인원이 많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마길은 므낫세 지파인데 아마 지도자들만 몇 명 참가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불론은 그들의 종노릇을 톡톡히 해 낸 것 같습니다.
    아마도 므낫세 사람들은 몇 명 오지도 않으면서 상관 노릇을 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볼론 사람들은 전심으로 그들을 섬겼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았다’는 말은 비서노릇이나 부관 역할을 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르우벤 지파는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15절 끝에 ‘르우벤 시냇가에 큰 결심이 있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르우벤 사람들은 드보라의 소식을 듣고 시냇가에서 큰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16절,“네가 양 우리 가운데 앉아서 목자의 저 부는 소리를 들음은 어쩜이뇨 르우벤의 시냇가에서 마음이 크게 살핌이 있도다”
    르우벤 지파는 처음에는 분명히 참가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쟁의 나팔 소리 대신이 양의 피리 부는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번 전쟁 보다는 양을 돌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무엇인가 할 것처럼 큰 소리를 내었는데 곧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17절,“길르앗은 요단 저편에 거하거늘 단은 배에 머무름은 어쩜이뇨 아셀은 해빈에 앉고 자기 시냇가에 거하도다”
    길르앗 사람들은 길이 멀어서 오지 못하고 단 지파는 배로 무역을 하느라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셀 사람들은 자신의 편안한 삶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드보라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유를 이 영적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자들입니다.
    18절,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 쓰고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
    결국 이 모든 전쟁의 승리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아니한 스불론과 납달리에게도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번 전쟁에 참가하지 아니한 르우벤이나 단이나 아셀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에게 전쟁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르우벤은 두고 두고 길르앗 동편 땅 때문에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단은 블레셋과 싸워야만 했습니다. 므낫세는 곧 미디안 사람들의 침공을 받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만히 앉아서 편안하게 살면 학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아무 어려움 없이 지낸다면 그것 자체가 이상한 것입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아무 일없이 지낸다면 그것 자체가 정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편안할 때에는 영적으로 싸우고 있을 때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삶에 어려움이 있었을 때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렸습니까? 그때가 가장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편안하면 자꾸 세상으로 떠내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는 꼭 싸워야 하는 것도 양을 돌보거나 혹은 무역을 하거나 결혼을 준비하거나 혹은 밭을 사거나 하는 일 때문에 외면하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하신 비유와 너무나도 비슷합니다. 왕이 잔치를 벌려 놓고 사람들을 초청했는데 사람들마다 이 핑계 저 핑계대면서 오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엑스트라로 밀리게 됩니다. 복음의 요청이 있을 때 개인적인 삶에 손해를 좀 보고 기꺼이 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주연이 돌아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것만 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에게 악을 허용하셔서 우리 안에 있는 교만과 죄성을 보게 하시고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영혼의 잠을 자지 않는 것입니다. 드보라처럼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 자신을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잠이 쏟아진다고 해서 그대로 자면 얼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설득해서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긴 어려움은  다른 사람이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내 자신이 믿음으로 풀어야 할 숙제들입니다. 이것을 외면하면 안됩니다.
    르우벤 지파처럼 결단만 하고 결국 양 때문에 주저앉으면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어두움이 계속되어도 낙심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 순간에 아침에 찾아 오기 때문입니다. 그때 모든 것인 한 순간에 다 뒤집어 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불쌍했던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나로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때 찬송 외에는 생활이 정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 껏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본원 이사, 대구동부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