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네 부모를 공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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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2장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가까이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을 위해 그 땅을 정탐하면서 일어난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두 사람의 정탐꾼을 보내, 가나안을 면밀하게 정탐해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잠입은 즉시 발각 되었고, 가나안에는 삽시간에 첩자가 침입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에 가나안 당국은 즉시 이 두 사람을 체포하도록 명령이 내렸고, 두 사람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라합이라고 하는 여자가 자기 나라를 배신하면서까지 이 두 사람을 은밀하게 챙겨주고 목숨을 보존해 주었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정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라합이 행한 이 일을 훌륭한 믿음의 일이었다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이름이 기라성 같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히브리서 11장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라합은 이방의 하찮은 여자에 불과했지만,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정탐꾼을 도울 수 있었고 그 믿음은 하나님께 충분한 기쁨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행한 이 일을 계기로 해서, 이 여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구속의 역사를 이어오는 메시아의 가문의 한 여인으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라합의 믿음 1.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믿음
그러면 이 여자에게 있었던 믿음이 어떤 믿음이기에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면서까지 이 정탐꾼들을 숨겨줄 수 있었을까요? 어떤 믿음이 있었기에 이 여인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품안으로 돌아오는 신앙적인 귀화를 하게 되었을까요?
이 여자가 보여주었던 믿음은 크게 두 가지인데 그 중 첫 번째는 바로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믿는 신앙은 다시 세 가지로 나뉩니다. 먼저 이 가나안 땅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땅이란 사실을 굳게 믿는 믿음인데, 라합이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은 직접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풍문에 들려오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녀는 깊이 감화를 받았고, 그 결과 그녀의 마음속에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하셨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드시 그것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라는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에 대한 신앙이 이 여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에 대한 이 여인의 신앙의 두 번째 증거는 홍해 사건에 대한 정확한 평가였습니다. 2-3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 여인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반신반의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크신 능력을 보이사 홍해 바다를 가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물기둥 사이를 지나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뒤따라오는 애굽의 병거들을 수장시키심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는 소식이 바람을 타고 가나안에 있는 이 여인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 때 이 여인은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는 것을 경험하였고, 그 두렵고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은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에 대한 이 여인의 믿음을 확고하게 만들어준 마지막 사건은 아모리 사람 시혼과 옥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에 대한 소식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아모리 족속의 왕들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과 전쟁하고 싶은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저 그들의 땅을 잠시 지나 가나안쪽으로 가고 싶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시혼과 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길을 막아섰습니다. 사실 누가 보더라도 이 싸움은 발달한 병기를 가진, 조직적으로 잘 정비되어 있는 아모리 군대의 승리가 자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아모리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전멸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풍당당하게 가나안 앞까지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가나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물같이 녹아내리게 만든 충격적인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포 이상의 아무 것도 품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라합의 마음속에는 ‘어떻게 하면 저 큰 능력과 위엄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 사랑받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싹텄습니다. 그리고 비록 거기서 자신이 받는 대우가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어먹는 상태가 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없이 멸망을 기다리는 내 민족 속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것보다 그 편이 훨씬 더 행복할 것이라고 하는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라합의 믿음 2.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믿음
라합이 가지고 있었던 또 하나의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이 가득 찬 심판 가운데서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신앙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마음이 물같이 녹아지고 혼절할 정도가 되면서도, 거기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라합은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으로 가득 찬 심판 속에서도 자신이 구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믿음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소유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이 여인을 비참한 여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는 훌륭한 믿음의 여인으로 돌려놓게 만든 그 희망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과 임박한 진노 앞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서 구원을 갈망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지극히 예외적으로 이 여인을 살려주셨습니다. 심판으로 말미암은 멸망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는 그녀의 신앙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
멸망 중에 구한 은총
그런데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여인이 가나안을 정탐하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 두 사람에게 하는 간곡한 요청입니다. 그녀는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가 나를 선대하라.” 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는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자신의 집안을 어떻게 기억해주어야 하는지를 거론할 때 제일 먼저 등장한 것이 부모의 구원에 대한 부탁이었습니다. 물론 그녀는 뒤이어 자신의 형제들과 그들과 함께 한 모든 골육지친들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애원했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그냥 애원했을 뿐만 아니라, ‘너희들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 나에게 그 말이 진실이라는 표를 보여 달라.’ 요구하는 것을 보며, 그녀가 자신의 부모와 형제의 구원을 얼마나 절박하게 소망하였나 하는 것을 매달렸는가 하는 느끼게 됩니다.
라합은 하나님의 두렵고 무서운 심판을 생각하며, 제일 먼저 아버지의 집을 떠올렸습니다. 자신의 부모를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이 부모가 라합과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라합의 마음에는 부모가 그것을 알던 모르던 상관없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득 찬 두려운 멸망으로부터 자신의 부모가 안전하게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구출해준 이스라엘 정탐꾼들에게 간곡하게 징표까지 요구하면서 자기 부모의 구원을 위해 매달렸습니다.
두 명의 정탐꾼은 자신들을 추격하던 모든 가나안 사람을 따돌리고, 라합의 도움으로 창문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와 숲으로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때 그들이 타고 내려온 밧줄은 붉은 밧줄이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이 대신 죽어 그 붉은 피가 문지방과 문설주에 골고루 발라졌고, 그 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얻었던 것처럼 창문에 드리워진 이 붉은 줄은 라합의 집이 구원받을 것을 보여주는 진실한 징표가 되었습니다. 붉은 줄이 드리워진 집에 모여 있던 라합의 식구만이 가나안이 멸망할 당시에 구출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임하게 될 구원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표였던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사명, 가족 구원
사도 바울은 옥 속에 갇혔을 때, 홀연이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풀어지는 역사가 일어나자 두려워 떠는 간수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며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이것은 “네가 구원을 얻으면, 너의 집안 식구들은 모두 너 때문에 저절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네가 진실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되면 너의 기도와 전도로 너의 가족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예고적 선언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이 선언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우리 때문에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전도와 구원의 참된 가치를 깨달은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우리 뿐 아니라 우리의 가족도 함께 구원을 받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가족들을 돌아보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목양의 수고를 감당해야 할 사람은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말할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가정을 위해 많이 헌신해야 할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정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하십니다.
가족을 향한 큰 부담과 근심이 있어 그들을 구원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우리가 바로 우리의 가정을 책임지는 목회자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깊이 만났고 인격적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고, 진리의 빛 안에 아름답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우리의 가족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게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족을 구원하시고 자라게 하시는 이 일에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가족 가운데 먼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다른 식구들보다 더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더 많은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공로와 관계없이 거저 주어지지만 그 은혜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의 계획이 있는 곳에 비로소 사명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은혜를 못 받은 사람들은 자기가 목숨을 걸고 이루어야 할 사명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사도 바울을 택하신 것이 언제입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만세 전에 택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그를 택하사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는데, 그는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하기 전까지 그 사명과는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이라는 것은 은혜가 있는 곳에서만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그의 인생을 향한 당신의 계획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사명은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의 빛을 더 많이 받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더 깊이 만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위해 주님을 먼저 만나고 많은 은혜를 받은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도 이와 같습니다. 이 사명은 우리 가족들 중에 우리에게 독특하게 부여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살아가는 가족들에게는 사명이라는 것이 있을 수도 없거니와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어떤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믿지 않는 우리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앙 안에서 자라도록 돌볼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의 마땅한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가족 가운데, 혹은 믿음이 연약한 가족 가운데 그들을 섬기도록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신앙생활의 분주함을 핑계로, 또는 우리 가슴에 사랑이 없음을 인하여 가족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믿음을 배반한 것이며 불신자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하며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라고 말할 때 이것은 결코 불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그는 보편적으로 있어야 할 도덕이나 윤리를 가르치려고 이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대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고백한 신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가족을 돌아봐야 할 책임이 은혜 받은 우리 어깨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가정이 믿음 안에 견고하고 아름답게 서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실 예수를 믿고 나면 믿기 전보다 삶이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고단해집니다. 신앙을 갖기 전에는 우리와 상관없던 일들이 우리의 의무가 되고, 이전에는 그저 의무를 이행하는 것으로 충분했던 삶의 자리에도 온 마음을 담아 주께 하듯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신앙을 갖게 되자 우리 안에는 놀라운 은혜의 샘이 터지고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축복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에 부합하는 의무들이 새롭게 우리 어깨 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주어진 삶을 사는 우리에게 시간의 흐름은 유수와 같아서 한 주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게 지나가고 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살려면 게으름을 피울 수 없습니다.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명의 자리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최선의 효도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효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효도의 마음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도 유지되어야 할 마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향해 효도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공경의 마음과 눈에 보이는 육신적 아버지를 향한 섬김의 마음은 결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참된 도리를 성경에 입각해서 분명하게 알아가야 합니다. 은혜가 우리를 떠밀어서 참 사람 된 도리를 다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계십니까?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은혜를 활용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인간의 참된 도리가 무엇인지를 잘 깨닫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신앙의 열심이 있어도 가정을 거의 포기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사정을 들어보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불화와 갈등으로 얼룩진 집안사 속에서 상처입을 대로 상처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골 깊은 형제들 간의 갈등, 부모와의 씻을 수 없는 상처, 은혜를 받고 어떻게든 풀어보고자 하였지만 도무지 마음을 열어주지 않던 가족들이 비상식적인 반응 등으로 인해 그들은 수없이 고통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식 된 도리와 형제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설령 동기간 같지 않은 형제들이라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그들에게 가장 좋은 동기간이 되어주어야 하며, 부모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분에게 잘못한 부모라 할지라도 여러분들은 부모님에게 자식 된 도리를 다 하여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일들은 우리의 힘만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모를 깊이 사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만났고 인생사는 도리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가운데 로 행하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드리는 일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 알게 되었고, 그러한 삶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예전에는 도무지 부모를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를 위해서 자기의 아들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으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나를 향해 이 땅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가르쳐 주셨기에, 그 사랑에 목이 메어 이 땅의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철철이 좋은 옷도 사다드리고, 따뜻한 음식을 대접하고 넉넉한 용돈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하며 자식 된 도리를 다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충분한 효도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부모님께 마음을 열고 그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며 자식 된 의무를 다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충분한 효도일 수는 없습니다. 부모님의 눈앞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불러 부모님의 마음을 유쾌하게 해드렸다 하더라도, 아직 부모님이 예수님을 안 믿으신다면 그는 최선의 효도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장마철에 반짝 나는 햇빛, 추운 겨울에 잠깐 비추는 따뜻한 햇살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것이 노인들의 건강입니다. 건강하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건강이 확 꺾어지고 죽음 앞으로 성큼 다가서는 것이 노인들의 육체입니다. 그 분들에게는 시간이 무한정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의 부모님이 예수를 안 믿고 돌아가신다면, 교회는 나오셨지만 복음을 아는 정직한 그리스도인으로 그분의 중생을 확신할 수는 없는 상태에서 돌아가신다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어떨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그 마음은 부모님을 불신상태에서 떠나보낸 여러분들의 친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은혜 받지 못하고, 자기 역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할 때에는 부모님의 구원 문제 역시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스며들고 복음의 정직한 빛을 통해서 삶과 죽음의 진실을 확신하게 되면 부모님의 구원받지 못함이 가슴의 말할 수 없는 아픔이 됩니다. 오죽했으면 사도 바울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다”(롬9:3) 했겠습니까? 모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의 멸망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모세는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주옵소서”(출 32:32) 라고 기도합니다. “내 사랑하는 백성들과 내 골육지친이 없는 하늘나라가 나에게 어떻게 하늘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을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려면 생명책에 기록된 제 이름을 차라리 지워주십시오.”하는 것이 모세의 솔직한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가족들 가운데 여러분이 부모를 구원할 도구가 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복음의 빛을 주어서 예수님을 믿게 만들었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게 해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모두 자폐증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도무지 자신 안에 있는 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자기가 마땅히 사랑해야 하는 자기 부모에게 전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들으면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부모에게 받은 상처에 대한 가장 악랄한 복수입니다. 자신이 맡고 있는 주일학교 학생들이나,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는 친구들을 위해서는 눈물이 쏟아지는데, 부모님을 위해 기도할 때는 마음이 냉랭해 집니까? 이것은 그가 아직 부모를 단지 부모로만 볼 뿐, 영혼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온 마음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부모를 영혼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필요한 불쌍한 고아와 같은 영혼으로, 부모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여러분에게 상처를 남겼습니까? 여러분들을 주의 교훈과 교양으로 양육하지 못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속에 여러분의 부모님들이 한없는 존경의 대상으로 남지 못한 것은, 그 부모님에게 영적인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십시오. 영적인 아버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자신들도 그렇게 훌륭하게 변화되지는 않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의 부모님이 그렇게 밖에 못 사신 것은 사실 어떻게 보면 부모님의 죄라기보다는, 우리처럼 일찍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깊이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불행 때문에 부모님들은 여러분의 마음에 고통과 상처를 많이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여기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여러분들은 그렇지 못한 여러분들의 부모님들보다 더 큰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부모를 아버지가 필요한 고아의 영혼처럼 바라보며 돌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자폐증 내지는 메뚜기 콤플렉스에 걸려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은 아버지 어머니 앞에 서면 한없이 오그라듭니다. 뭐라고 이야기를 하다가도 누군가 큰 소리로 “야 관둬. 예수는 무슨 예수!” 하면 바로 입을 다물어버리고 마는 하는 소심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의 복음이 그렇게 하찮습니까? 여러분들이 받은 그 구원이 그렇게 왜소하고 초라한 구원입니까?
문제는 저들의 완고함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 없음입니다.
저는 할머니로부터 가히 병적이라고 할만큼 지극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사랑하시는 할머님이셨지만, 절대 저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를 믿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도 하고, 권유도 하였지만 할머니는 도무지 예수님께 마음을 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날 날을 잡았습니다. 할머니의 마음속에 나에 대한 애정이 특별히 더 흘러넘치는 날을 골라, 처음으로 그 분의 손을 꼭 잡고 무릎을 꿇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는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나요?” 할머니께서는 “나는 너밖에 없다. 나는 네가 제일 좋다”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말했습니다. “할머니, 저도 할머니를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이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할머니 제발 제 소원 하나만 들어주세요. 이제 얼마 있으면 할머니도 죽으실 텐데, 할머니는 죽은 다음에 우리가 다시 못 만났으면 좋겠어요, 다시 만났으면 좋겠어요?” 할머니께서는 당연히 다시 만나야 한다고 대답하셨고, 저는 이때다 생각하고 할머니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성경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다시 만날 수가 없어요. 할머니는 지옥으로 가고 나는 천국 가거든요. 할머니! 내 소원은 할머니가 예수 믿는 거예요” 저의 이 말에 할머니께서는 단번에 마음을 바꾸시고 교회에 나오마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할머니의 말을 기억합니다. “그래. 내가 마음을 바꾸마.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내 손자가 내가 예수를 안 믿기 때문에 이렇게 눈물이 글썽거릴 정도로 가슴 아파하는데, 예수 믿어서 아무 효험이 없다고 해도 내가 너 때문에라도 교회에 다니마.” 신기하게도 할머니께서는 그 이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매우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한번도 교회를 빠지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는 우리의 부모님이 너무 완고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진지함과 끈질김이 너무나 부족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단 한번이라도 사랑하는 엄마를 끌어안고 펑펑 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물론 어느날 갑자기 여러분이 엄마 손을 붙들고 “엄마! 나 엄마를 너무나 사랑하는데,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엄마가 너무 불쌍해.” 흐느낀다면, 엄마는 “애가 미쳤나?”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 번만 그렇게 반복하면 엄마는 두려워하기 시작할 것이고, 딸의 말을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결국 문제는 우리의 강퍅함입니다. 우리가 너무 강퍅합니다. 우리의 부모님은 복음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 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의 부모님들의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비참한지, 그 분들을 기다리는 미래는 어떤 것인지 우리가 느낄 수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부모가 있습니까? 여러분은 아파할 수조차 없는 그 영혼들을 끌어안고, 그 분들의 고단한 삶까지 사랑하면서 울어주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에게는 사랑이 부족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우리를 길러주신 우리의 부모님들입니다. 그 분들의 영혼에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쁨이 없는데, 이 세상의 자원으로 봉양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한 효도가 되겠습니까? 그 영혼들을 뜨겁게 끌어안고, 하나님을 만나 구원받도록 인도하는 일 없이는 효도도 없습니다.
설령 백번 양보해서 여러분들이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칩시다. 화해하지 못할 사연이 있다고 칩시다. 그게 한 사람이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져도 좋을 만큼 큰 것입니까? 원수에게 가서도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적군에게 가서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데 부모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말이 됩니까? 부모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부모를 깊이 사랑하고 있지 못하다면 이것은 깊이 회개해야 할 문제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부모의 영혼에서 들려오는 하나님 없는 영혼의 흐느낌을 한번 느껴보십시오. 그 흐느낌은 이 세상의 자원들을 풍족히 가져다주는 것만으로는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무정한 사람들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부모를 위해서 흐느껴 보셨습니까? 애끓는 마음으로 부모의 이름 석자가 가슴에 서러움이 기도해 보셨습니까?
“하나님! 우리 아버지 없는 천국, 우리 엄마 없는 천국에 제가 어떻게 갈 수 있겠습니까? 내 생명과 우리 아버지의 영혼이 결탁되어 있고, 우리 엄마의 생명과 내 영혼이 결탁되어 있사오니 우리를 함께 살리시든지 함께 죽여주십시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기도였고 모세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진정한 구원의 의미가 무엇이고, 영생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고백이자 가족사랑입니다.
우리같이 아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보혈의 피를 흘려주셨고, 자기를 버리시는 희생의 공로로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의 은혜를 안 순간,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요 주님만이 우리의 전부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마음을 아직도 간직하고 계십니까? 그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우리의 믿지 않는 부모님들 속에서 울려나오는 하나님 없는 영혼의 흐느끼는 탄식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의 생애는 심한 통곡과 눈물의 생애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부모를 위해서 많이 울어야 합니다. 그렇게 충분히 눈물을 흘리기 전까지는, 우리 엄마 아빠의 구원받지 못함이 그들의 강퍅한 마음 때문이라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눈물로 여러분의 부모님의 이름을 적셔 보셨습니까? 여러분의 부모님을 위해 하나님 앞에 목숨을 걸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내 부모를 구원할 수 있다면, 내 생명을 바친가 해도 아깝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부모님의 영혼을 위해서 금식해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기도하면 반드시 역사해주십니다.
놀라운 기도의 역사
어느 토요일, 저희 교회의 자매 한분이 예고도 없이 불쑥 저를 찾아왔습니다. 남편과 함께 왔는데, 그 자매는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눈물 먼저 펑펑 쏟아 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물었더니, 자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가 변화 받지 않았을 때는 모르지만, 예수님 믿고 변화받은 이후부터는 십여 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하루도 저희 엄마를 위해 기도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비록 엄마에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지 못할 때도 많았지만, 그래도 힘닿는 데까지 부모님께 희생하고 헌신하며 10여 년 동안 마음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며칠 전, 어머니께서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식물인간이 되셨는데 의사가 며칠 못 가실 거라고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저 역시 난감함에 할말을 잃었습니다. 제가 그 자매에게 뭐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그 어머니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 주었고, 진심어린 마음을 담아 자매를 위로했습니다. “자매님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그래도 어떻게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 다음날, 교회의 목회자들을 그 자매의 어머니의 병원으로 심방 보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심방대원이 간 그 순간에 자매의 어머님의 정신이 명료하게 돌아온 것입니다. 심방을 간 사람들은 즉시 복음을 전했고, 자매의 어머님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그 어머님께서 “얘야, 내가 사실은 미션 대학을 나왔단다.” 하시며,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것, 이제 자신은 그 피로 용서함을 받아 하늘나라의 소망이 소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모두 고백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녀들을 모두 불러서 손을 잡고, “내가 먼저 가니, 너희도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되어라.” 유언하셨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은 죽어도 기도는 살아남아서 역사합니다. 조지 뮬러가 자기의 두 친구를 위해서 53년 동안이나 기도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뮬러가 죽을 때까지도 그 두 친구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뮬러가 죽은 후, 그들은 모두 예수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뮬러는 죽었지만 그의 기도는 살아 역사해서 그 친구의 마음에 울려 퍼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언제나 안 믿는 우리 엄마, 안 믿는 우리 아빠가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이 문제인 것입니다.
세상 모두 사랑 없음 냉냉함을 아느뇨
곳곳마다 소리 질러 사랑 받기 원하네
얼마 전, 새가족 환영회에서 이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간증을 한 사람은 가족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교회에 한 청년이었습니다. 앞자리에 앉아 설교를 듣고 있었는데, 한참을 졸고 일어나도 설교가 끝날 기미가 안 보여 손장난도 하고 하늘도 쳐다보며 설교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속으로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고 있었는데, 설교가 끝나갈 무렵 그의 시야에 설교자가 설교를 하면서 마지막에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모습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그 순간 의아함을 느꼈으나, 교를 통 듣지 않았기에 설교자가 왜 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는 가운데, 하나 명료하게 가슴에 새겨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뭔가가 있다. 뭔가 진정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진지해질 수 없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주에 다시 와 봐야겠다’ 생각하게 되었고, 그 다음 주부터는 설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부모님은 교회에 모셔와도 은혜 받지 못 하실 거야.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게 뻔해”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진심으로 우리의 부모님의 구원을 간절히 소망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말입니다.
맺는 말
우리의 가족들이 복음과 구원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다는 가족 구원에 대한 진지한 결의가 있습니까? 비웃어도 기도하고, 핍박해도 전하고, 멸시해도 사랑하는 자세가 있습니까? 온 방법을 동원하고, 온 마음을 다 바쳐서 부모님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의 사랑을 알리고 있습니까?
복음 전도는 결과에 의해서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는 우리의 발자취에 의해서 상을 받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서 구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부모님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을 사람으로 예정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고려할 일도 아니며, 관여할 사항도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생명 있는 날 동안 그 영혼을 깊이 끌어안고, 긍휼히 여기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껏 하나님 없이 살아온 것만으로도 너무나 불쌍한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걸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는 여러분 모두가 여러분의 믿지 않는 부모님을 깊이 끌어안고 살아가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속히 여러분들의 가정에 구원의 기쁜 날이 이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복된 가정 복음화가 여러분의 가정에 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열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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