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본문은 하나의 의미를 지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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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은 하나이다. 번역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나 그 내용은 동일하다. 그러나 동일한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해석과 다양한 설교들이 공존하고 있다. 더욱이 인터넷과 같은 매체를 통해 설교를 쉽게 보고 들을 수 있는 요즈음에는 같은 본문에 대한 다른 설교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같은 본문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같은 본문에 대한 서로 다른 설교들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보다 풍성하게 만든다는 장점이 있다. 본문이 지닌 의미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본문에 대한 다른 설교들은 때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수도 있다. 서로 상반된 해석이 있을 때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결정하기도 어렵거니와 서로 다른 해석에 대해 어느 것을 옳은 해석으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기준도 마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본문은 단 하나만의 의미를 지닌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나의 본문이 단 하나의 의미만을 지닌다고 쉽게 단정짓는 것은 더더욱 우리를 어렵게 만든다. 만일 그렇게 단정짓는다면 동일본문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 중 단 하나의 해석만 옳고 나머지는 모두 잘못된 해석이라고 심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의 본문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나의 본문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첫째로 성경 본문 자체가 해석의 다양성을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자체가 지니는 해석의 다양성은 성경 기록자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는데 표현에 있어 중의법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였거나 모형론으로서 기록하였다고 믿어지는 경우에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성경전체의 기록자가 모두 다양한 해석을 미리 염두에 두고 기록하였다고 단정짓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오히려 성경 자체가 지닌 해석의 다양성은 기록자에 의한 것이기보다는 성경자체가 역사와 계시의 기록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신약의 구약해석은 우리에게 해석의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우리는 신약성경을 읽으면서 곳곳에서 구약을 새로운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도 시편과 이사야 등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의 구속사역과 연관되어 새로운 의미들로 재해석하였고, 복음서나 바울의 서신서들 가운데에도 구약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한 표현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성경본문 자체가 우리에게 해석의 다양성을 제공해 주고 있다.
하나의 본문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한 두 번째 이유는 성경본문에 대한 해석방법론이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교회는 다양한 성경해석 방법론을 발전시켜왔다. 초대 교부들 가운데에는 성경을 알레고리로 해석한 경우가 많았다. 풍유적 해석을 가장 잘 사용한 사람은 오리겐이다. 그 이후의 역사에 있어서도 풍유적 해석이 사라진 적은 없었다.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은 풍유적 해석 외에도 문법적-역사적 해석, 교권 중심적 해석,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해석 등 다양한 해석방법론을 시도해 왔다. 서로 다른 해석 방법론을 둘러싸고 숱한 해석학적 논의들이 있어왔으며, 때론 성경의 해석으로 인하여 새로운 교파가 생겨나기도 하고 교단이 분열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성경을 대하는 사람의 실존적 정황에 따라서 하나의 본문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교회의 개혁을 갈망했던 루터가 바라보았던 로마서 1장은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다. 억압받는 제 3세계 국가의 기독교인은 미국과 같은 강대국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과 서로 다른 차원에서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였기에 해방신학이 등장했다. 누가복음의 라오스가 안병무에게는 성경 속에서 시대의 아픔을 읽어내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굳이 더 많은 예를 들지 않더라도 성경의 많은 본문들에 대하여 자신이 처한 상황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해석만큼이나 다양한 설교는 설교자에 의한 것이다. 설교자에 따라서 본문은 다양한 모습으로 옷을 입고 전해진다. 이 때에는 해석의 다양함이라기 보다는 강조점의 다양함이라고 해야 옳다. 설교자는 해석된 본문에 다양한 색을 입혀서 청중에게 전달한다. 그것은 본문이 지니는 본래적 의미의 문제 혹은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의 청중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설교전달의 문제이며 “어떻게 하면 실천적인 삶을 유도할 수 있을까?”하는 목회 현장의 문제이다.
청중은 전달되는 설교의 재해석자라고 할 수 있다. 동일한 설교가 행해지고 있는 공간에서도 서로 다른 반응이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설교를 듣는 청중이 자신의 삶의 정황 가운데 설교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이고 영적인 체험의 기반 위에서 현재 선포되고 있는 말씀을 이해하기 때문에 같은 내용을 듣더라도 언제 듣는가에 따라서 그 반응이 달라지기도 하고 그에 따른 실천양식도 달라진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서 같은 본문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해석적 다양성의 터 위에 서있는 설교자는 해석의 방향을 어디로 잡을 지 늘 고민하게 된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하여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 즉 성경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를 서로 연결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성경의 세계와 오늘의 세계에 대한 설교자의 이해의 정도에 따라 성경 해석과 그에 따른 설교가 달라진다. 또한 설교자가 성경의 세계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가 오늘의 세계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가에 따라서도 설교 전달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같은 본문, 다른 설교 는 같은 본문에 대한 여러 편을 설교를 나열함으로써 이러한 설교자의 고민을 느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동일한 본문에 대한 서로 다른 설교들을 읽으면서 각각의 설교자들이 어떤 고민 속에서 이와 같은 설교를 하게 되었는지를 상상해 보기 바란다.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다음에 소개될 설교들이 각각의 설교자들의 대표적인 설교라기 보다는 늘 하던 설교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이다. 이 한편으로 그의 설교는 이렇다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단지 이 한편의 설교에 실린 내용과 그 구조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한 명의 설교자의 전체적 성향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 한편의 설교에 무엇을 담으려고 했는가를 파악하는데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앞으로 4회에 걸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네 사람 아브라함, 모세, 베드로, 바울의 소명기사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독자들은 이 네 가지의 소명기사를 각각의 설교자들이 어떻게 그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지를 살펴보는 매우 흥미로운 작업을 함께 하게 될 것이다. 같은 본문, 다른 설교를 대하는 독자는 설교자일 수도 있고, 청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하의 설교를 읽는 순간만큼은 모두가 청중이 되었으면 한다. 같은 본문의 다른 설교들을 보면서 삶에 새로운 결단을 하게 되는 것은 결국 그 설교를 들은 청중들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 속으로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 12:1-3)
이야기의 틀에 대하여1)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창세기의 본문은 성경에 나타난 독특한 소명 기사 중 가장 먼저 나오는 기사이다.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앞장인 10장에는 바벨탑의 인간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이 나타나고 있으며 본문의 이후에는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 간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전후 문맥을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창세기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사건에 대한 기록을 바벨탑 사건으로 드러난 인간의 죄악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바로 뒤에 두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이 심판 중에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는 장면으로 그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그 전에 나타난 노아의 경우처럼, 새로운 시작을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를 축복하시는 원 계획을 회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아브라함이 선민 이스라엘과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신앙인격이나 어떤 종교적 업적이 특출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의 수혜자가 됨으로 말미암아 가능하였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브라함을 “구속하신 여호와(사 29:22)”라고 표현함으로써 아브라함 소명기사의 신적 주권을 말해주고 있다.
아브라함의 소명기사는 구약 성경의 그 어느 경우보다도 특이하다. 본문의 내용이 밝혀 주듯이 그의 경우에서는 구약 성경의 다른 인물들이 받은 소명에서 흔히 발견되는 여호와의 현현, 소명을 받는 자의 반응, 그런 후에 다시 안심시킴이나 징조를 보여줌 등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소명은 오직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고 명령하시고 약속하시는 것이 전부이다.
소명기사의 처음 시작인 창 12:1은 원문이 초두를 “여호와께서…이르시되…가라”라는 형식으로 시작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그를 선택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선물을 주심으로써 시작하신다. 소명의 시작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해 무엇을 하시느냐에 있다.
본문에 나타난 동사들 중 “이룬다, 복을 준다 , 창대케 한다, 된다, 축복한다, 저주한다, 복을 얻는다”는 동사는 문법적으로 모두 1절에 있는 명령형 “가라”에 종속된다. 이들 대부분은 미완료 혹은 권유형으로 약한 접속사로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모두 목적 혹은 결과를 시사한다. 따라서 “가라…이리하여 내가 너를 만들리라…너를 축복하리라”는 것으로 번역될 수 있다.
창 12:1-4에 나타난 동사들은 축복의 약속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짧은 본문 가운데 다섯 번이나 “축복하다”는 동사 혹은 동사에서 나온 명사가 제시된다. “축복하다”는 동사의 어근은 창세기에 가장 자주 나타나며 하나님의 축복은 주로 인간의 삶의 윤택함과 연관된다. 즉 “장수, 부, 평화, 추수, 자녀들” 등과 연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축복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임재”(레 26:11-12)이다. 물질적 축복은 주님의 은총에 대한 가견적 표현일 뿐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소명기사에서 우리가 한 가지 잊지 말고 지나가야 할 점은 아무 공로가 없는 아브라함이 신앙의 선조가 되었다는 측면을 우리가 강조할 때에 그와 동시에 그의 신앙적 순종이라는 실천적 측면도 높이 평가(약 2:21)하는 데 결코 인색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으로 소유하게 된 것을 항상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러한 사실은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말 2:10에는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고 있다. 신약에 이르러서도 “우리 조상 아브라함” 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혈통만을 자랑하는 불신앙적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특히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가랴(눅1:72-72), 스데반(행 7:2), 바울(롬 4:1,12) 야고보(약2:21)와 같은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놀라운 은총 가운데 아브람을 부르신 하나님,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아브라함.창 12:1-4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소명기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제 성경의 세계와 오늘날의 세계를 이어주는 하이퍼 링크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창세기 12장에 나타난 소명기사를 살펴보기 위하여 한국신학정보연구원에서 제작한 “한국신학•종교 정간물 색인•초록 2001\을 이용하여 검색한 결과 창세기 관련 자료 총 490건 가운데 창세기 12장 관련 10건을 찾았다. 그 중에서도 김정우 교수의 오경 강의안과 윤영탁 교수의 창세기 12:1-3의 이해(신학정론, 제15권, 1997년 11월, pp.349-412)를 주로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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