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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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창 12:1-9 | 설교자: 홍정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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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 직항으로 가면 9시간에서 10시간 정도 걸립니다. 이번 러시아 유학생 수련회를 가는 데는 돈을 아끼느라 싼 표를 끊었더니 비행기를 25시간이나 탔습니다. 서울에서 출발, 일본과 스위스 쮜리히에서 다시 갈아타서 모스크바에 도착했습니다. 이번 여행을 하면서 여행이 주는 긴장과 문제점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하면 2-3일 전부터 몸의 모든 조건들에 이상이 생깁니다. 몸이 비행기를 타려고 하면 거부 반응이 일어나나 봅니다. 참 수 많은 여행을 했기 때문에 이력이 날 만도 한데 늘 비행기 탈 때마다 긴장이 됩니다. 제 아내도 예민해서 가족 여행이라도 하려면 무척이나 신경이 날카로와집니다. 여행에 있어 두 번째로 해결해야 될 문제가 있다면 \짐을 얼마나 줄이는가\하는 것입니다. 짐을 줄이는 것이 여행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한번은 짐을 부쳤다가 다른 곳에 잘못 도착해서 일주일동안 설교 원고도 없이, 내의도 없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 이후로 저는 반드시 짐 가방은 하나로 만들어서 갑니다.
또 여행에 있어서의 가장 귀한 축복은 멋진 경치나 좋은 경관이 아니라 좋은 동반자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동행이 있는 여행은 참 즐겁습니다. 감격을 같이 할 줄 모르는 동반자처럼 쓴맛이 없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유학생 수련회가 끝나면 현지 유학생들이 강사들을 위해 유학생이기 때문에 싸게 살 수 있는 공연표를 사서 문화 공연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볼쇼이 발레를 보면서도 코를 드르렁거리며 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위대한 여행을 했던 아브라함을 생각해보며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택할만한 본질상 아름답고 귀한 것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던가? 그것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 이방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방은 점점 무서운 세속주의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향해 항거하고 있었고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그들과 함께 숨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에는 이미 살렘왕으로 수고하고 있던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멜기세덱을 세우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지 않고 이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사람으로 삼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변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똑같이 인생을 사는 데 “예수 믿기에 좋을 조건”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믿음이 찾아와서 나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게 만들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만드십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아셨고 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떠남은 불순종의 떠남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났지만 그 아비와 함께 떠납니다. 친척 롯과 함께 떠났습니다. 온전한 순종이 아닙니다. 실패한 순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연약한 불순종을 하나님이 보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애 최대치로 봐주고 계십니다. 실수를 보시지 않고 그의 조그마한 순종의 발걸음을 기뻐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이 생깁니다. 내가 나를 볼 때 내 삶 속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너무 없는 것을 봅니다. 순종도 어쩌다가 하는 순종입니다. 순종도 온전한 순종이 못될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나를 볼 때도 실망해서 보기 싫을 정도로 내 몰골이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합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이 사용해주십니다. 은혜로 붙잡아주십니다. 내가 너 무 연약해서 순종이 부족해서 쓸모 없다고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자 리로 발걸음을 옮긴 조그마한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실수와 연약함을 보지 않고 그 중에 조금이라도 쓸만한 것을 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연약한 불순종, 넘어짐을 보시지 않고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고 히브리서를 통해 인정하시고 복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를 내가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내 생애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신 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나를 향해 비판하고 지적할 때 처음에는 감정적으로 화가 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안에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사람들이 진짜 내 죄악과 실수와 부족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보는 진짜가 있습니다. 내가 나를 봐도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많습니다.
나는 옳다고 우기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보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내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보면 내가 얼마나 초라하고 부족한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내 연약함과 실수와 부족을 보시지 않고 내 생애를 가장 귀한 것으로 보기를 기뻐하는 하나님입니다. 마치 아들이 뭐든지 잘못하다가도 어느 것 하나만 잘 하면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 엄마처럼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대로 아브라함을 대우하지 아니 하시고 그의 최선을 보시고 축복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면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네 이름이 창대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아랍 백성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믿음의 후사인 이 땅의 15억이나 되는 예수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민족을 이룬 사람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의 이름보다 더 큰 이름이 없습니다. 징기스칸이 큽니까? 알렉산더가 큽니까? 아브라함은 성(城) 하나 빼앗은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편리한 물건 하나 발명하지 않았습니다. 감동적인 시 한편 쓰지 않았습니다. 좋은 교훈 하나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늙은 영감이 조그마한 땅을 오르락 내리락한 이력밖에 없는 그 이름보다 더 큰 이름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큰 이름만 주실 뿐 아니라 내가 너를 축복하겠고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진정한 축복입니다. 축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받았느냐” 까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어떻게 나누었는가”까지가 축복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고쳐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지독한 이기심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내 자식만 공부 잘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내 자식이 잘 자라도 내 자식과 함께 자란 아이들이 잘못되면 그 잘못된 아이 때문에 내 자식들이 평생 고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 자식만 잘 되기를 바랍니다. 또 사람들은 나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운전할 때도 나만 질서를 잘 지키고 속도도 정확하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주 오는 차의 운전자가 술이 취해 중앙선을 넘어 내 차를 받으면 내가 잘 한 것과 아무 상관없이 같이 무너집니다. 그런고로 나 혼자만 잘 되면 안됩니다. 아랫집에서 불이 나니까 방화시설이 잘 된 내 집까지 불이 붙습니다. 내 중심의 이기심, 이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면서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너로 복의 근원을 삼겠고,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겠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 네가 근거가 되어서 네 주변이 함께 똑같이 축복을 누리는 축복을 네게 주겠다.”고 친히 선언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요셉의 생애에서도 요셉에게 잘했던 요셉의 축복권 안에 포함된 모든 사람들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축복하고 그 아들 므비보셋 시대까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고로 삽니다.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인생으로 우리들은 지금까지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복 받을 자격이 있었으려니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내가 그래도 쓸만하니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내가 잘 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할 때 더 귀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찬송가 411장을 찬미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3절은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입니다.
이렇게 날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자식이 잘 될 때 아빠는 기뻐합니다. 즐거워서 어쩔 줄 모릅니다. 사랑이 불타오릅니다. 그런데 그 때 보다도 더 사랑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자식이 잘못되었을 때입니다. 자식이 실수했을 때입니다. 자식이 곁길로 갈 때입니다. 자식의 인생에 큰 실수와 좌절과 실패가 있을 때 부모의 마음은 불탑니다. 친구는 떠나고 사람들은 그를 외면합니다. 형제들도 그를 보려고 하지 않을 때 부모의 마음은 불탑니다. 자식 사랑 외에는 아무 일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잘해서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선해서 내게 복 주시지 않습니다. 그 분이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 밖에 못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 내가 이런 죄를 지었고 이런 실패를 했고 이런 불순종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돌이키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 십니다. 은혜 베풀기를 기뻐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아십니까?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나 같이 못나고 실패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임하실 수 있을까? 하고 염려하시는 분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잘난 사람보다 나를 향해 더 깊은 사랑으로 함께 하십니다. 이 사랑 앞에 나오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그가 불순종해서 부모님을 모시고 떠났지만 하나님은 하란에서 그 부모를 데려가심으로 환경적으로 순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아브라함은 세겜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하나님이 지시한 그 땅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이 시간 주께서 성령으로 이렇게 명하십니다. “너는 지금 네가 있어 야 할 자리에 있지 않다. 내가 원하는 축복의 자리에 있지 않다. 지금 일어나라.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기득권과 편안하게 앉아 있던 그 자리를 차고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의 음성 앞에 반응하십시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생애보다 더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생애를 펼쳐 놓으시고 나를 인도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짐을 정리하십시오. 간단하게 만드십시오. 복잡하게 여러 짐을 가지고 여행길을 떠나지 마십시오. 쉽게 피곤하고 좌절합니다. 히브리서 12장은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경주를 할 때 어떻게 하는가?를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히 12:1)” 그 습관 버리십시오. 그 죄를 던지십시오. 근심 걱정을 모두 팽개치십시오. 그리고 일어나십시오. 일어나서 가실 때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자신과 동행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줄 확실히 알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즐기십시오. 어떤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십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이 위대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이 위대하십니다. 그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십시오. 그 분은 어느 때든지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 분이 함께 하시는 곳은 성공이고 그 분이 함께 하시지 않는 곳은 실패입니다. 주께서는 심지어 차가운 죽음의 강물을 건널 때에도 나의 목자되셔서 의로운 오른 손으로 나를 붙잡고 아무도 함께할 수 없는 그 외로운 인생길을 함께 하십니다. 그 분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 분의 기쁨에 우리의 기쁨을 두십시오. 그 분과 교제의 축복을 누리십시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취의 자리에 앉아서 우리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께서 주셨던 과거의 경험에 그 신앙 인생이 붙들어 매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도 가짜입니다. 진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과 교제요, 그 분의 사랑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부족한 우리가 오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는 지금 여기서 네가 살아야 할 자리라고 생각하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보느냐?” “그 습관, 그 기득권, 그 편안한 자리가 하나님께서 지시한 자리가 아니라면 일어나라. 믿음으로 일어나서 짐을 정리하고 나와 함께 가자.” 함께 하시는 주님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그 땅에 도달할 줄로 믿습니다. 가는 모든 여정을 축복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믿음으로 일어서십시오. 믿음 속에 주신 그 빛나는 보화와 축복의 걸음으로 올 한 해도 준비하면 21세기가 다가서도 두려울 것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할 것 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 속에 함께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남서울은혜교회 담임목사
또 여행에 있어서의 가장 귀한 축복은 멋진 경치나 좋은 경관이 아니라 좋은 동반자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동행이 있는 여행은 참 즐겁습니다. 감격을 같이 할 줄 모르는 동반자처럼 쓴맛이 없습니다.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유학생 수련회가 끝나면 현지 유학생들이 강사들을 위해 유학생이기 때문에 싸게 살 수 있는 공연표를 사서 문화 공연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볼쇼이 발레를 보면서도 코를 드르렁거리며 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 위대한 여행을 했던 아브라함을 생각해보며 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택할만한 본질상 아름답고 귀한 것이 아브라함에게 있었던가? 그것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 이방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이방은 점점 무서운 세속주의와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향해 항거하고 있었고 아브라함은 그 땅에서 그들과 함께 숨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한 땅에는 이미 살렘왕으로 수고하고 있던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멜기세덱을 세우셔서 믿음의 조상으로 삼지 않고 이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사람으로 삼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변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똑같이 인생을 사는 데 “예수 믿기에 좋을 조건”을 가진 사람이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믿음이 찾아와서 나로 하여금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게 만들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게 만드십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아셨고 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그 떠남은 불순종의 떠남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했습니다. 그는 갈대아 우르를 떠났지만 그 아비와 함께 떠납니다. 친척 롯과 함께 떠났습니다. 온전한 순종이 아닙니다. 실패한 순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연약한 불순종을 하나님이 보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애 최대치로 봐주고 계십니다. 실수를 보시지 않고 그의 조그마한 순종의 발걸음을 기뻐하십니다. 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이 생깁니다. 내가 나를 볼 때 내 삶 속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이 너무 없는 것을 봅니다. 순종도 어쩌다가 하는 순종입니다. 순종도 온전한 순종이 못될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나를 볼 때도 실망해서 보기 싫을 정도로 내 몰골이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합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이 사용해주십니다. 은혜로 붙잡아주십니다. 내가 너 무 연약해서 순종이 부족해서 쓸모 없다고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자 리로 발걸음을 옮긴 조그마한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실수와 연약함을 보지 않고 그 중에 조금이라도 쓸만한 것을 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연약한 불순종, 넘어짐을 보시지 않고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 고 히브리서를 통해 인정하시고 복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를 내가 멸시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내 생애를 위해 놀라운 계획을 가지신 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나를 향해 비판하고 지적할 때 처음에는 감정적으로 화가 납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안에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사람들이 진짜 내 죄악과 실수와 부족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보는 진짜가 있습니다. 내가 나를 봐도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많습니다.
나는 옳다고 우기고 주장했는데 나중에 보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내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보면 내가 얼마나 초라하고 부족한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내 연약함과 실수와 부족을 보시지 않고 내 생애를 가장 귀한 것으로 보기를 기뻐하는 하나님입니다. 마치 아들이 뭐든지 잘못하다가도 어느 것 하나만 잘 하면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은 엄마처럼 우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실수대로 아브라함을 대우하지 아니 하시고 그의 최선을 보시고 축복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면서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네 이름이 창대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 중에 이스라엘 백성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아랍 백성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 믿음의 후사인 이 땅의 15억이나 되는 예수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민족을 이룬 사람이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브라함의 이름보다 더 큰 이름이 없습니다. 징기스칸이 큽니까? 알렉산더가 큽니까? 아브라함은 성(城) 하나 빼앗은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편리한 물건 하나 발명하지 않았습니다. 감동적인 시 한편 쓰지 않았습니다. 좋은 교훈 하나 우리에게 남겨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늙은 영감이 조그마한 땅을 오르락 내리락한 이력밖에 없는 그 이름보다 더 큰 이름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큰 이름만 주실 뿐 아니라 내가 너를 축복하겠고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하십니다. 진정한 축복입니다. 축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받았느냐” 까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어떻게 나누었는가”까지가 축복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고쳐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지독한 이기심입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내 자식만 공부 잘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내 자식이 잘 자라도 내 자식과 함께 자란 아이들이 잘못되면 그 잘못된 아이 때문에 내 자식들이 평생 고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내 자식만 잘 되기를 바랍니다. 또 사람들은 나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운전할 때도 나만 질서를 잘 지키고 속도도 정확하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주 오는 차의 운전자가 술이 취해 중앙선을 넘어 내 차를 받으면 내가 잘 한 것과 아무 상관없이 같이 무너집니다. 그런고로 나 혼자만 잘 되면 안됩니다. 아랫집에서 불이 나니까 방화시설이 잘 된 내 집까지 불이 붙습니다. 내 중심의 이기심, 이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면서 “아브라함아, 내가 너에게 복을 주고, 너로 복의 근원을 삼겠고,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겠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 네가 근거가 되어서 네 주변이 함께 똑같이 축복을 누리는 축복을 네게 주겠다.”고 친히 선언하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요셉의 생애에서도 요셉에게 잘했던 요셉의 축복권 안에 포함된 모든 사람들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축복하고 그 아들 므비보셋 시대까지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사고로 삽니다. 상선벌악(賞善罰惡)의 인생으로 우리들은 지금까지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복 받을 자격이 있었으려니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내가 그래도 쓸만하니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내가 잘 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할 때 더 귀히 여기십니다. 우리가 찬송가 411장을 찬미했습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3절은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입니다.
이렇게 날 사랑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자식이 잘 될 때 아빠는 기뻐합니다. 즐거워서 어쩔 줄 모릅니다. 사랑이 불타오릅니다. 그런데 그 때 보다도 더 사랑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자식이 잘못되었을 때입니다. 자식이 실수했을 때입니다. 자식이 곁길로 갈 때입니다. 자식의 인생에 큰 실수와 좌절과 실패가 있을 때 부모의 마음은 불탑니다. 친구는 떠나고 사람들은 그를 외면합니다. 형제들도 그를 보려고 하지 않을 때 부모의 마음은 불탑니다. 자식 사랑 외에는 아무 일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잘해서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선해서 내게 복 주시지 않습니다. 그 분이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사랑 밖에 못하십니다. ‘오늘 이 시간에 내가 이런 죄를 지었고 이런 실패를 했고 이런 불순종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돌이키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 십니다. 은혜 베풀기를 기뻐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아십니까?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는 하나님입니다. 나 같이 못나고 실패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임하실 수 있을까? 하고 염려하시는 분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잘난 사람보다 나를 향해 더 깊은 사랑으로 함께 하십니다. 이 사랑 앞에 나오십시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그가 불순종해서 부모님을 모시고 떠났지만 하나님은 하란에서 그 부모를 데려가심으로 환경적으로 순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아브라함은 세겜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 하나님이 지시한 그 땅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이 시간 주께서 성령으로 이렇게 명하십니다. “너는 지금 네가 있어 야 할 자리에 있지 않다. 내가 원하는 축복의 자리에 있지 않다. 지금 일어나라. 내가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기득권과 편안하게 앉아 있던 그 자리를 차고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의 음성 앞에 반응하십시오.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생애보다 더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생애를 펼쳐 놓으시고 나를 인도하시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짐을 정리하십시오. 간단하게 만드십시오. 복잡하게 여러 짐을 가지고 여행길을 떠나지 마십시오. 쉽게 피곤하고 좌절합니다. 히브리서 12장은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경주를 할 때 어떻게 하는가?를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히 12:1)” 그 습관 버리십시오. 그 죄를 던지십시오. 근심 걱정을 모두 팽개치십시오. 그리고 일어나십시오. 일어나서 가실 때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자신과 동행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줄 확실히 알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즐기십시오. 어떤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십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이 위대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었던 하나님이 위대하십니다. 그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십시오. 그 분은 어느 때든지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 분이 함께 하시는 곳은 성공이고 그 분이 함께 하시지 않는 곳은 실패입니다. 주께서는 심지어 차가운 죽음의 강물을 건널 때에도 나의 목자되셔서 의로운 오른 손으로 나를 붙잡고 아무도 함께할 수 없는 그 외로운 인생길을 함께 하십니다. 그 분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 분의 기쁨에 우리의 기쁨을 두십시오. 그 분과 교제의 축복을 누리십시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취의 자리에 앉아서 우리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께서 주셨던 과거의 경험에 그 신앙 인생이 붙들어 매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도 가짜입니다. 진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과 교제요, 그 분의 사랑입니다. 아브라함은 부족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부족한 우리가 오늘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너는 지금 여기서 네가 살아야 할 자리라고 생각하는 본토 친척 아비집을 보느냐?” “그 습관, 그 기득권, 그 편안한 자리가 하나님께서 지시한 자리가 아니라면 일어나라. 믿음으로 일어나서 짐을 정리하고 나와 함께 가자.” 함께 하시는 주님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그 땅에 도달할 줄로 믿습니다. 가는 모든 여정을 축복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믿음으로 일어서십시오. 믿음 속에 주신 그 빛나는 보화와 축복의 걸음으로 올 한 해도 준비하면 21세기가 다가서도 두려울 것이 없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할 것 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가 우리 속에 함께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남서울은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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