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새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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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사람들의 지혜를 모았다고 하는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어떤 남편이 자기 아내에게 “시장에 가서 맛있는 것을 사오라”고 했습니다. 그 아내는 바구니를 준비해 가지고 나가서 소의 혀를 사왔습니다. 그 혀를 가지고 그날 요리를 해서 먹었습니다. 며칠 후에 남편이 또 말하기를 오늘은 가장 싼 것을, 모든 음식 재료 중에 싼 것을 사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 아내는 또 가서 소 혀를 사왔습니다. 남편이 \어째서 가장 맛있는 것을 사오라고 했는데 혀를 사오고, 가장 싼 것을 사오라고 했는데 또 혀를 사왔느냐\ 하고 물었는데 그 부인은 대답하기를 \가장 맛있는 것이 혀입니다. 친절한 말, 사랑스러운 말, 그 아름다운 말을 듣는다는 것, 이보다 더 맛있는 게 없습니다. 좋은 소리를 듣는 거 가장 맛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사왔습니다. 가장 싼 것, 가장 쉬운 것, 그저 아무 생각없이 쉽게 할 수 있는 싸구려 행동이 바로 말입니다.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그래서 혀를 사왔습니다.\ 이렇게 지혜를 담아서 대답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가장 귀한 것도 말이요 가장 잘못되기 쉬운 것도 말이요. 그래서 말에 허물이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불행해 지기도 하고 그리고 망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유대나라 왕 웃시야라고 하는 왕이 죽었을 때에 선지자 이사야가 경험한 영적 경험이 나타나 있는 말씀입니다. 웃시야왕은 유대나라 왕으로서 52년 동안을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특별히 우상을 멸하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하나님 앞에 성실히 행해서 왕과 백성은 태평 세월을 52년 동안 누렸습니다. 그러한 좋은 세월이 이제 갔습니다. 그 왕이 죽었습니다. 이사야라고 하는 선지자는 모든 선지자중에 유독 정치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방백 중 하나입니다. 그는 웃시야왕의 친척입니다. 그래서 웃시야왕을 의지하고 그 왕궁에서 일하는 그러한 관료 중에 한사람이었는데 그가 의지하던 웃시야왕이 죽었습니다.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나의 장차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걱정이 있는 바로 그런 순간에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갔다가 소명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그는 오늘 본문의 세 가지 체험을 합니다. 요약해 말씀을 드리면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하늘과 그 영광으로 충만한 땅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큰 감격을 얻게 되고 동시에 그는 자기 자신을 보게 됩니다. 나는 부정한 사람이라고 나는 살아남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그가 사명을 보게 됩니다. 난 앞으로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을 만나고 보니까 내가 이제 앞으로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내게 주어진 운명을 혹은 사명을 받게 됩니다. “소명을 받게 되었다.”라고 이렇게 정리해서 흔히들 말합니다.
자, 이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고 나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은 있을 수 없습니다. 존 칼빈의 유명한 명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서야 나를 압니다.
여러분, 부모를 알고야 나를 압니다. 스승을 알고야 나를 압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 자신을 본다고 나를 아는 게 아니에요. 나를 아무리 보아도 나만 가지고 나를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만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어머니가 어린 아들이 마당에서 개하고 노는 것을 보았습니다. 개가 그 아이를 따르고 또 애가 개를 좋아해서 이렇게 같이 노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는데 잠깐 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어린애가 개더러 “이리 오라.”고 했는데 개가 오지 않았어요. 꼬마가 자꾸 오라고 해도 안 오니까 마지막에 이 꼬마가 \너 정말 안 오면 죽여버린다!\고 했습니다.
이 어머니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저 어린아이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깜짝 놀라서 가서 붙들고 하나님 앞에 깊은 회개를 했습니다. ”내 잘못이다! 언젠가 내가 이런 말을 꼭 같이 했구나!”
이것은 어린아이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어린아이를 보면서 자기 모습을 보았습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던가?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이대로 간다면 운명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린아이와 함께 깊이 회개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그 앞에서 자기의 추한 모습, 부끄러운 모습, 나아가서는 저주스러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확실한 정체와 그 정체에서 이어지는 미래의 운명까지도 그가 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특징은 죄가 많이 나열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가지 죄가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는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으로 집약되어 있습니다.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입술이 부정한 내가 하나님을 보았다. 아∼ 나는 저주받았다. 나는 살아 남을 수 없다”고 두려워합니다. 입술이 부정합니다. 동시에 저 부정한 백성 중에 살기 때문에 문화화되었습니다. 다같이 부정하니까 무엇이 부정인지 의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줄 압니다. 가만히 보면 그 부정한 말들을 하는 분들은 이미 습관화되어서 자신의 부정적인 어투를 모릅니다. 아주 깜짝 놀랄만한 더러운 말을 맘대로 하고도 태연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들어왔고 그렇게 하는 거니까, 그 속에 살아왔으니까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그 부정한 입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 언어와 자기 자신을 우리는 종종 분리해서 이해하려고 하고, 분리하려고 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거짓과 또 다른 불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입에서 나쁜 말이 쑥 나갔어요. 그리고 하는 말이 “본래 그런 마음이 아니었는데 잠깐 내가 실수해서 뭐 그랬다”고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본래 당신을 사랑했는데 그래 그 취중이라서 술이 취해서 그만 내가 실수한 말을 많이 해서 마음을 아프게 했노라. 나는 본래 그러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이제 묻습니다. 술 취해서 한 말과 정신차리고 한 말, 어느 쪽이 진짜입니까?
저는 이 6·25전쟁 때 휴전되기 바로 직전, 신학대학에 입학했을 때의 일입니다. 부상병들은 많이 오고 치료할 병원이 모자라고 의사도 모자라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럴 때 군목도 많이 모자라서 저는 보조 군목으로 대구에 있는 27육군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낮에는 학교 가고 저녁과 밤에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했습니다. 그 때 진짜 의사는 몇 명도 없었습니다.
다 그냥 거들어서 일하고 간호사마저도 훈련받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나 불러서 간호사로 쓰는 것입니다. 병원이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수술을 받기 위해서 전신 마취를 합니다. 마취했다 깨어날 때 조심해야 합니다.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합니다. 간호사들이 지나가면서 뭐라고 한 마디 하면 수술환자가 대답을 합니다. 이 때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은 몇 안됩니다. 입에 담기조차 힘든 욕을 하고 더러운 말을 합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멀쩡한 얼굴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오지?” 그러나 마취 중에 하는 말이 그 사람의 진심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나는 미처 몰랐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을 떠날 때, 정신이 오락가락 할 때 그때 무슨 말이 나올 지 봅시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거기서도 감사와 찬송이 나올 만큼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찬송을 부르면서 거룩하다가 어느 순간에 가서는 형편없이 저속한 사람이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속에 있던 것이 나오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말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무의식중에도 주를 찬송할 만큼 그 입술이 깨끗하고 정결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식이 가출을 하면 어머니는 정신이 없습니다. 나가서 어떻게 될까봐, 집으로 돌아올 것인지, 안 돌아올 것인지 너무 답답해서 저를 찾아오는 어머니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돼서 나가게 됐습니까?” 상황을 다 듣고 나서 제가 꼭 한 마디 물어봅니다. “혹시라도 얘가 공부도 안하고 말썽부리고 그럴 때 ‘야! 그럴 바엔 집을 나가라.’ 그렇게 말해본 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꼭 물어봅니다. 그러면 대답은 언제나 꼭 같습니다. “그렇게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나가서 죽어라!’ ”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 아들은 효자입니다. 나가 죽어라고 했는데 아직 살아 있으니까요.”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말은 그의 인격이요 그의 믿음이요 운명입니다. 말 때문에 그는 저주를 받습니다. “나는 저주를 받았다. 부정한 입술을 가졌기 때문에 저주받은 운명이다.” 이렇게 이사야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성경은 나의 말과 나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거울을 보고 나를 보지 말고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을 종합하면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부정한 입술이 부정한 운명을 지향합니다.
탈무드는 험담은 세 명을 죽인다고 합니다. 험담하는 대상이 죽임을 당합니다. 내가 지금 험담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죽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험담하고 있는 내 자신이 죽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두운 말, 부정적인 말, 더러운 말을 하면 내 심령이 황폐해지고 나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운명이 삐뚤어져 나갑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 모세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한 평생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수고를 많이 했지만 그 마지막 장면이 너무나 유감스럽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을 저 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고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모세를 때려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어려워질 때 모세가 감당하기 힘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큰 실수를 합니다. “이 패역한 놈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그리고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 바로 이 죄 때문에 그는 꿈에도 잊지 못하는 가나안 땅에 못들어 갑니다. 비스간 언덕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기만 하고 거기서 죽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죄목을 낱낱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해석까지 합니다.
“너는 나를 믿지 아니한다!” 불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것은 나지 네가 아니지 않느냐. 네가 왜 절망하느냐. 너는 나를 믿지 아니하고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답게 할 것이지 네가 왜 감정에 사로 잡혀 있냐?” 이 말씀입니다. 그리고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니라. 시편 106편 33절에서 분명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거기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니라.\ 말로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얼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여러분이 쏟아버린 그 말들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나고 여러분의 운명으로 치닫는다면 어떤 결과가 올 것 같습니까?
이제 오늘 본문 성경에서 해답을 얻습니다. 이사야가 너무 끔찍하고 답답해서 “나는 망했다. 다같이 망했다” 하면서 슬퍼하고 회개하고 탄식할 때 스랍 중에 하나가 재단 숯불을 손으로 집어다가 이사야 입에 댔습니다.
제단에는 숯불은 없습니다. 제물을 돌로 태우는 돌들이 뻘겋게 거기에 돌들이 있는데 돌이 뻘겋게 달아있습니다. 뻘겋게 불처럼 달아오른 그 돌덩어리가 숯불이라고 표현되었습니다. 그것을 입에다 대고 지져버렸어요.
성경에는 없지만 지지직 하고 입술을 지져버렸습니다. 그리고 “제단 숯불이 네 입에 닿았으니 이제 네 죄는 다 사함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제단은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물이 거기서 타 죽지 않습니까? “네 입술도 죽었다.”
그것입니다. “네 입술이 이젠 죽어버렸다. 지져버려라!”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속죄의 징표를 보여주고 “그런 고로 너는 정하게 되었다”고 선언합니다.
12세기에 끌레르보의 버나드라고 영성가가 있습니다. 그의 유명한 “Treatise on Humility and Pride”라고 하는 책에서 진리로 나가는 길 세 단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깨끗하게 되고 의롭게 되고 정결하게 되는 결정적인 길은 겸손입니다. 겸손해야 유순한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노를 쉬게 한다고 했습니다. 교만한 자의 말은 언젠가는 터지게 마련입니다. 언젠가는 불의로 치닫기 마련이에요. 아주 낮추고 낮추어서 겸손하게 되면 말이 부드럽고 온유하고 화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디라고 하는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온 천하를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과거에 구두를 깁는 사람이었습니다. 무디는 무식하고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정열적으로 다니면서 부흥회를 인도했어요.
어느 마을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는데 그 마을 신문에 무디가 무식하다면서 무디 험담을 줄줄이 나열해 놓았어요. 이 신문을 보고서 그 지방의 목사님들, 또 무디를 사랑하는 분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이 나쁜 놈들, 이런! 이런!”
주위 사람들이 욕을 할 때 무디는 그 신문을 보면서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버려 두라고. 신문에 나지 않은 허물이 훨씬 더 많으니까...그럴 것 없네.”
‘저들이 말하고 있는 그것보다 나는 훨씬 더 부족한 사람이다. 그들이 지적하는 죄인보다 더 큰 죄인이다\ 그 겸손이 부드러운 대답을 할 수 있게 만든 것입니다. 그가 누구를 용서하므로 도인이 되고 높아지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하고 보다 더 겸손했기에 그는 부드러운 말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또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두 이해하는 마음, 자비로운 마음, 믿어주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내 편에서가 아니라 상대방 편에서 생각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면 우리의 말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자기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항상 내 마음을 내가 다스려야 하고 순결해야 하며 무엇보다 입술이 깨끗해 져야 합니다.
다시 초대교회로 돌아가 봅시다. 오순절 성령 충만한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방언이라고 말합니다. 방언은 언어입니다. 언어의 변화가 먼저 오는 것입니다. 성령받은 사람의 말이 달라진 것입니다.
소통하는 말로, 그리스도인다운 말로, 복음전하는 말로 언어가 변화됩니다. 골로새서 4장 6절에 보면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가 나와 있습니다. 배추나 무에 소금을 탁 쳐서 잠깐만 놓아 두면 부들부들해집니다. 소금으로 고르게 함 같이, 맛없는 것도 맛이 있게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녹아 없어집니다. 자기 정체는 녹아 없어지면서도 자기 본질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소금입니다. 소금으로 고르게 함 같이, 부드럽게 화목하게 맛있게 그런 말을 하십시오.
이사야는 사명 의식을 받게 됩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는 대답합니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가겠나이다.\ 여기서 선지자가 됩니다.
우리는 지금 폭력시대에 삽니다. 언어 폭력시대에 삽니다. 언어 폭력이 실제 폭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입니다. 말초신경적이요 극단적이요 속된 말을 하고 잔인한 말을 합니다.
요즘 어쩌다 영화구경을 가보면 얼마나 잔인하고 더러운 말을 하는지 참 걱정됩니다. 죄송하지만 북한 사람들 참 거친 말을 합니다. 잔인한 말을 합니다.
“대가지를 까부시겠다\고 말합니다. 까부시는 게 뭡니까? 섬뜩섬뜩한 말을 합니다. 거침없이 합니다. 이것이 남을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고 자기 운명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언어는 그 마음에 있고 그 인격에 있고 그 신앙에 있고 그 운명으로 치닫는다는 것을 잊지 마십니다. 입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제단 숯불을 입에다 대서 지져버려!”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게 그리고 심령으로 새롭게 되고 입술이 새롭게 되고 다시 내 심령이 새로워지고 내게 듣는 사람 모두가 새로워질 거고 그에게 새로운 운명이 전개될 것입니다.
소망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