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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미래 교회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 설교자:

    본문

    미래 교회 설교의 새로운 패러다임

    이성희 목사


    서론

    최근에 와서 한국 교회는 목회 패러다임의 변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관심은 21세기라는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는 한국 교회의 생존 양식이다. 개신교가 이 땅에 전래된지 110여년이 지났지만 요즘만큼 새로운 패러다임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그러나 최근의 패러다임 변혁에 대한 관심은 새로운 구도와 기조의 사회로 진입하는 길목에서 당연한 관심일 것이다. 농경사회 3,000년동안 사회는 다소간 변화하였지만 사회의 기초는 변하지 않았다. 농경사회 전체를 돌이켜 보면 농경사회가 시작하던 때와 농경사회가 끝날 때는 무려 3,000년의 차이가 나지만 같은 문화를 가진 사회였다. 산업사회의 시작과 더불어 사회는 변화하였고 농사의 기계화가 시작되었다. 산업사회 300년은 엄청난 변화를 가지고 왔지만 그러나 300년 동안 그 기조와 문화는 동일하였다. 그러나 정보사회는 산업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문화와 기조를 그 기초로 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산업사회의 패러다임은 맞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이렇게 목회하여 성장하고 잘 되었는데 왜 바꾸어야 하느냐”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지난 110년동안 한국 교회는 그 패러다임을 전환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같은 산업사회의 문화와 기조를 가진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산업사회가 아닌 정보사회이기 때문에 패러다임의 변혁은 필연적인 과제가 된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사회변동과 교회의 환경변화로 말미암아 목회 패러다임의 변혁(Paradigm shift)은 필연적이 되고 있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로 인하여 기존의 목회 패러다임들은 사회의 변화에 적응력을 상실하고 그 결과로 사회인은 교인이 되지 못하고 교회는 장기적 침체 기 내지는 쇠퇴기로 접어든 것이다. 실제로 한국교회를 통계적으로 보면 1987년에 교회 성장이 최고도에 달했고 1987년부터 1992년까지는 거의 성장하지 못하여 수평성장을 보였고 1992년 이후에는 약간의 쇠퇴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 분위기는 새로운 천년을 눈앞에 두고 연구하고 신속하게 대처하고 극복해 나가야 할 21세기 목회자들의 필수 과제인 것이다.
    최근의 기업이나 모든 조직들이 변화를 추구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하지 못한다는 필연적 요청 때문에 모든 것이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변화한 기업이나 조직은 어려운 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세계화적 변화에 적응했지만 그렇지 못한 기업이나 조직은 자동 도태된 것을 경험적으로 볼 수 있다. 변화는 곧 생존이다. 실제로 우리 나라의 경우 1960년대의 100대 기업 가운데 현재까지 생존하고 있는 기업은 29개라고 한다. 생존하고 있는 기업들은 과감하게 시대에 따라 변화를 추구하였고 변화 그 자체를 두려워하여 변화하지 못한 기업은 도태되었다는 것이다. 변화를 요청하는 긴박한 시대를 맞이하여 교회도 변화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교회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변화하여야 한다.
    근래의 사회를 정보사회라 부른다. 정보사회란 정보가 사회를 규정하는 중심개념이며 정보가 재산이며 정보가 힘인 사회란 의미이다. 성경은 그 배경이 고대 유대 농경사회이다. 농경사회의 배경에서 기록된 성경을 정보사회에서 어떻게 맥락화(contextualization)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이다. 또한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전통의 목회 패러다임은 한국교회의 경험에서 나온 한국적 목회의 소산이다. 그러나 급격한 사회의 변동과 함께 전통적 목회 패러다임은 그 적응력을 상실하고 동질의 목회가 교회에 적용되지 않는 것을 최근의 목회자는 경험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목회 패러다임의 변혁을 강요받게 된다. 흔히 한국교회의 목회는 새벽기도, 심방, 설교 등으로 인식되었으나 이러한 목회 패러다임은 제3의 천년에 이르러서는 그 적응력을 상실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목회 패러다임을 변혁해야 할 이유는 대개 다음과 같다.

    (1) 미래현상인 가속적 사회변동에 교회가 적응해야 한다.
    (2) 이미 한국교회가 성장이 둔화되어 기존의 패러다임이 변혁을 요구한다.
    (3) 미래 사회는 유토피아의 반대개념인 디스토피아(dystopia)로 가까워질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교회의 사명과 존재이유가 있다.
    (4) 세계화와 지방화 시대를 맞이하여 다양성 속에서의 통일성(unity in diversity)을 추구해야 한다.
    (5) 신세대의 문화와 사고구조는 전통문화와 기성세대의 사고구조와 다르다.
    (6) 컴퓨터 등의 발달로 기술발달과 정보교환이 교회에 요청된다.
    (7) 임시성과 대여개념의 발달로 교회의 소유개념 보다 대여개념이 발달한다.
    (8) 과학의 발달로 생명에 대한 심각한 과제가 교회에 요청될 것이다.
    (9) 이동성의 발달로 기존의 목회 패러다임을 무력화하게 될 것이다.
    (10) 교회의 구조가 성직 패러다임에서 평신도 패러다임으로 전환될 것이다.
    (11) 여성 성직자가 증가되고 여성의 기능이 증대될 것이다.
    (12) 정보화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성을 추구하고 영성이 발달한다.
    (13) 교회의 관심이 교회 자체의 성장 보다 사회에 대한 교회의 사명이 높아질 것이다.
    (14) 교회도 마케팅이론이 발달할 것이다.
    (15) 민족 통일시대 세계 중심국가 시대를 대비한 한국교회의 관심이 고조될 것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혁의 당위성을 기초로 미래 교회의 설교 패러다임을 예측해 본다.

    1. 교회와 설교

    1) 한국 교회와 말씀

    한국 교회의 성장의 요인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교사보다 먼저 전래된 점이다. 한국 개신교의 전래를 교회사적으로 1884년 알렌이 한반도를 상륙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적고 있다. 그후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본격적으로 상륙하므로 선교가 시작되었다. 알렌이 우리 나라에 오기 2년 전인 1882년 이미 성경이 우리 나라에 전래되었다. 당시 지금의 심양인 중국 봉천에서 스코트랜드의 선교사인 로스(John Ross)와 그의 매부인 매킨타이어(John McIntyre) 그리고 우리 나라의 이응찬, 이성하, 백홍준, 김진기 등이 이들을 만나 세례를 받고 성경을 번역의 일을 시작하였고 1880년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하였다. 이 무렵에 서상륜이 만주에서 이들을 만나 로스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성경번역과 목판조각을 하고 그후 1882년에 친히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쪽복음을 가지고 의주 남문을 통하여 우리 나라에 들어왔다.
    이때 서상륜이 가지고 온 성경은 한글로 된 성경이었다. 어느 사회이든지 상류사회는 전체 인구의 5%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 즉 당시에도 한자를 주로 쓰던 상류사회인 사대부들은 우리 나라 전체 인구의 5%를 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서상륜이 가지고 온 한글성경은 당시에 5%의 사대부를 선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95%의 일반 평민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당시에만 하더라도 한글은 ‘언문’ 혹은 ‘암클’이라고 불릴 만큼 여성들이 집에서나 읽는 글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러한 천시된 글로 성경을 번역하였다는 것은 한자를 모르는 평민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증거이고 다수를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교회성장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말씀이 선교사보다 먼저 들어왔기 때문에 한국교회는 굉장히 말씀 중심이다. 그리고 한가지 분명한 것은 말씀 중심인 교회는 절대로 쇠퇴하지 않는다는 확신이다. 한국교회가 구미교회와 같이 쇠퇴할 것이라는 예측에 반대하는 한가지 이유는 우리의 문화적 배경이 그들과 같지 않다는 점이며 또다른 하나는 한국교회는 말씀 중심이라는 점이다.

    2) 목회와 설교

    목회란 성경의 목자와 목양의 개념에서 유래한다. 목회란 그리스도인의 전반적 사역을 묘사하는 말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근본적 관계를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이시며(시 23:1; 80:1), 그리스도는 선한 목자이시고(요 10:11),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양을 먹이라고 하셨으며(요 21:15), 초대교회의 직제에는 목자가 있었다(엡 4:11, 성경의 ‘목사’는 ‘포이멘’으로 목자로 번역되는 것이 옳다). 목회란 헬라어의 ‘포이멘’에 그 어원적 근거를 두며 양떼를 먹이며 돌보는 일을 의미하였다. 일반적으로 목회는 영혼을 돌보는 일을 의미한다. 독일어(Seelsorge)나 영어(Pastoral Care)도 다같이 영혼을 돌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목회란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이었다.
    설교는 목회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독일의 실천신학자 투르나이젠(Eduard Thurneysen)은 목회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가 가장 넓은 의미에서 중심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선포하는 행위인 설교는 모든 실천신학의 본질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설교란 기독교 예배의 본질적 구성요소이다. 설교가 없이는 예배가 성립될 수 없고 예배 없이는 예배의 본질이 상실되고 비기독교적인 예배와 구별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예배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그런 의미에서 설교는 중요하고 복잡한 행위이며 여러 가지 신학 분야들이 취급하는 수많은 기능들을 다 내포하고있는 선교행위이며 선포행위이다.
    힐트너(Seward Hiltner)는 목회를 구성하는 세 가지 면을 전달(communica- tion), 목양(shepherding), 조직(organizing)이라고 하였다. 그는 목회의 세 가지 면을 동시에 잘 할 수 있는 목회자는 없고, 어떤 목회자이든 셋 중 하나는 잘 할 수 있고, 셋중 하나만 잘해도 성공적 목회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목회자에게 있어서는 다른 면보다 전달을 잘 한다는 것은 성공적 목회의 요소이고 어떤 목회자이든 가장 바라는 소망일 것이다.

    3) 목회자와 설교

    목회자에게 있어서 설교는 가장 큰 과제이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좋은 일꾼이 되기를 힘쓰라(딤후 2:15)고 하였다. 목회자는 설교자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목회자에게 있어서 설교는 비중이 크다. 종교개혁 이전 중세의 설교는 종교 윤리적 과제를 취급하였지만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성경을 바로 가르치고 선포하는 것이 설교의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의 설교는 성경에 충실해야 한다. 17세기 후반의 계몽주의의 사상의 영향으로 설교는 다시 이지적이며 합리주의적 사상의 변론으로 변질되었고 자유주의 물결의 영향을 받게 되었지만 설교는 끊임없이 성경적이어야 함을 개혁주의는 강조하였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설교는 가장 힘든 목회 업무인 동시에 가장 보람있는 목회 업무이다. 아무리 설교가 힘들다고 하더라도 목회자에게 설교가 없다면 목회는 그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목회자에게 설교는 자칫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일이면 반드시 설교해야 하고 주일이 빨리 다가오는 느낌을 가지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의 작가들은 좋은 소재가 떠오르지 않으면 드라마를 쉬기도 하고 소설가들은 소재를 위하여 여행도 떠나지만 목회자는 소재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해서 설교를 쉴 수도 없고 설교의 구성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일에 여행을 떠날 수도 없다. 그러나 실제로 목회자는 주일이면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소재가 성경에 가득차 있는 것이다. 교회행정학에서는 교회행정이 목회자의 업무 가운데 가장 힘들고 전체 목회의 4분의 3의 시간을 소모하는(time-consuming)업무라고 한다. 실제로 행정은 목회 업무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지만 설교는 목회자 스스로가 힘 쓸 업무이지만 힘드는 업무는 아니다. 행정은 사람과의 갈등을 초래하지만 설교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2. 미래 교회의 설교 패러다임

    1) 제목에서 강해 설교로 전환

    설교자는 훌륭한 창작자이다. 설교자는 창작자이어야 하며 창작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창작자이시고 설교자는 재창작자이다. 그것은 성경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며 설교는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을 가지고 설교자가 다시 만들어내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설교라 하더라도 성경 이상의 것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 이상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좋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해석해주는 강해 설교인 것이다.
    설교란 자신이 신학교에서 배운 신학적 논리의 전개나 신학강의나, 도덕적 권면이나, 시사 강연이나, 흥미를 제공하는 주변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설교란 설교자 개인의 경험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간증이나 자기 선전이 아니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면 더 이상 설교가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한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기 위하여 강해 설교를 권하며 미래 교회의 설교는 주제 설교에서 강해 설교로 전환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80년대에 접어들면서 강해설교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그러나 강해설교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설교의 방법이다. 느헤미야 8:8에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깨닫게 하여”라고 하는데 이것이 강해설교의 원리이다. 강해설교란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다. 중세 시대에 들어오면서 교리가 교회의 중심이 되고 의식이 예배의 중심이 되므로 설교는 예전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종교개혁까지는 설교다운 설교는 없어지게 되었다. 그후 칼빈에 와서 다시 강해설교가 살아나게 되었지만 계몽주의 사상으로 설교는 다시 자리를 잃게 되었다가 다시 최근의 복음주의 운동으로 강해설교가 살아나게 된 것이다.
    로빈슨(H. W. Robinson)은 강해설교를 “성경 본문의 배경에 관련하여 역사적, 문법적, 문자적으로 연구하여 발굴하고 알아낸 성경적 개념을 전달하는 것으로서 성령께서 그 개념을 우선 설교자의 인격과 경험에 적용하시며 설교자를 통하여 다시 청중들에게 적용하시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강해설교란 오래 전에 기록된 성경의 구절의 뜻을 현재적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중의 요청과 환경에 따라 설명함으로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오늘날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깨닫게 하는 말씀의 선포이다.
    그러므로 강해설교는 오늘의 사건과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기 위한 수단이지 이야기 자체는 아니다. 강해설교는 성경의 특정한 구절의 단어와 상황을 설명하지만 성경본문이 의미하는 바를 찾는 것이지 설명 그 자체는 아니다. 강해설교는 설교자의 독서와 학식과 배경이 전개되지만 모든 개념은 성경본문에서부터 나오며 전개 그 자체는 아니다. 강해설교는 설교자가 아니라 설교본문의 정확한 전달이며 결국 칼빈이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게 하라”고 말한 것처럼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 주는 것이다.
    강해설교는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분석적 설교와 종합적 설교의 두 가지 방법이 가지는 단점을 보완해 준다. 강해설교는 분석적 설교보다 더 통일성을 살려주고 종합적 설교보다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더욱 깊이 연구하게 해 준다. 그리고 강해설교는 성경이 가진 신적 능력을 훼손하지 않고 가장 완전하게 전달해 주는 장점을 가진다. 아무리 설교자가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을 수 없는데 강해설교는 설교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을 전달해 주는 설교이다.
    앤더슨(Leith Anderson)은 “21세기의 설교를 준비함에 있어서 피해야 할 두 가지 함정이 있다”고 하면서 “첫째, 성경 본문에 대한 부적절한 이해이며 둘째, 성경 본문에 관한 정보의 지나침이다”라고 하였다. 설교자의 준비는 성경 본문의 가르침에 관한 연구 조사, 질문, 대답, 근본적 이해와 더불어 그 본문과 관련된 근본 문제들을 포함시켜야 한다. 그러나 설교준비를 위하여 얻은 모든 정보를 공개 석상에서 모두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성경을 지나치게 영해(靈解)함으로 오는 본문의 그릇된 이해를 피해야 하며 너무나 많은 자료에서 발생하는 잘못된 정보를 인용하지 말아야 한다. 때로는 지나치게 많은 정보와 자료에 의존하다보면 본문의 비중이 감소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필요한 정보를 과감히 버리고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21세기를 바라보면서 한국 교회의 강단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더 중요한 개혁이다. 종교개혁이 중세의 깊은 잠에 빠져있던 교회를 깨웠던 것같이 한국 교회는 신 종교개혁을 통하여 깊은 잠에서부터 교회를 깨워야 한다. 교회를 깨우기 위하여 먼저 강단이 깨야 하고 강단이 깨지 않으면 다른 무엇으로도 한국 교회는 깨지 못할 것이다. 종교개혁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다고 한다. 종교개혁은 교리 중심의 교회에서 성경 중심의 교회로, 의식 중심의 교회에서 말씀 중심의 교회로 다시 돌아갔던 것같이 한국 교회도 교회의 원형으로 다시 돌아가는 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새로운 세기의 설교가 주제설교에서 강해설교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은 새로운 형식을 도입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성경이 가르치는 성경적 설교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2) 선포 설교에서 이야기 설교로 전환

    설교는 목회자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이며 동시에 가장 큰 보람이다. 목회자는 설교를 통하여 비로소 목회자로서의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아무리 많은 일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목회자에게서 강단을 빼앗는다면 목회자는 그 많은 일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나 강단이 주어지고 강단에서 만족하면 다른 모든 일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목회는 보람이 될 수 있다. 설교는 자칫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지만 스트레스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설교 준비는 토요일에 하지 말고 매일 해야 하며, 설교 때문에 긴장은 하되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 설교는 스트레스가 될 수 있으나 설교에 대한 긴장감을 가지고 있으면 설교는 살아 있을 수 있다. 스트레스는 사람으로 하여금 병들게 하지만 긴장감은 건강하게 하고 긴장감이 사라지면 죽는다.
    설교는 힘이 드는 목회자의 업무이지만 목회자는 설교 때문에 힘을 얻는다. 매주일 설교해야 하기 때문에 수많은 창작을 한다. 그리고 매주일 다른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 목회의 많은 다른 업무들이 목회자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탈진하게(burn-out) 하지만 매주일 새로운 창작을 하게 하는 설교는 목회자로 하여금 건강하게 하고 새롭게 한다. 매주일 다른 설교를 해야 하는 것은 목회자에게 짐이 아니라 목회자가 새로워지고 건강해지는 도움이며 비결이다.
    앞에서 거론한대로 강해설교가 가장 성경적인 설교이며 미래 목회는 제목설교에서 강해설교로 전환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을 현실에 맞게 적용하는 것은 강해 설교자의 중요한 임무이기 때문이다. 수천년 전에 기록된 말씀을 오늘의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현실화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두 개의 다른 현실에 부딪치게 된다. 수천년전의 성경 본문의 현실과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강해설교란 설교의 형식을 통하여 수천년 전에 기록된 말씀을 현실화하는 작업을 한다. 이 작업은 수천년 전의 전달 방식이 아니라 현대의 전달 방식이어야 한다. 이 현대의 전달 방식이 이야기체인 것이다.
    설교는 그 내용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일방적 선포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현재적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달 방식(delivery)에 있어서 전통적 선포의 방식에서 이야기체(narrative)로 전환하여야 한다.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미래인들에게는 딱딱한 문어체의 설교보다 부드러운 구어체의 설교가 호응을 얻게 될 것이다. 다가오는 21세기의 교회는 피곤하고 지쳐있고 낙담하고 외롭고 힘든 세대를 목회의 대상으로 할 것이다. 더구나 최근의 경제적 위기는 교인들을 의기소침에서 절망으로 몰고 갈 것이다. 이러한 교인들은 그들이 죄인이라고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고함을 듣는 것보다 죄와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고 위로 받기를 더 원하고 있다. 이것이 21세기를 위한 이야기 설교의 근거이며 접근방식이다.
    예수님의 설교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선포형식의 설교도 있고, 가르침 형식의 설교도 있고, 특히 비유나 교훈의 형식을 많이 사용하셨고 모든 사람들에게 듣기 쉬운 이야기체로 설교하셨다. 예수님의 설교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산상보훈에는 실천적 윤리문제를 부드러운 실생활의 이야기로 하신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산상보훈에 나타난 예수님의 신적 모습을 “부드러운 신관”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설교는 회개를 촉구하는 선포와 바리새인의 외식에 대한 책망도 있지만 대부분은 생활 이야기였다. 심지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나 말세에 대한 비유도 그 내용은 심오하지만 그 전달형식은 부드러운 이야기체였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설교가 설득력이 있었던 것은 청중의 요청과 수준을 알고 전했으며 청중과 함께 살고 대화하면서 전달하였다.
    청중의 습관도 다양하여 대부분의 성도들은 설교자의 메시지의 내용을 단순화하고 세부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작고 짧은 이야기체의 설교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자신에게 호감을 주는 메시지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만 그렇지 못한 메시지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오랫동안 교회를 다녀 수많은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설교자의 메시지를 자신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으로 자신과는 무관한 것으로 받아드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21세기의 설교란 단순하면서도 감동이 있는 이야기체의 메시지이어야 한다. 21세기 설교의 중요한 형태의 하나는 단순성이다. 설교를 단순하게 한다는 것은 설교자에게는 어려운 일이지만 설교를 듣는 청중에게 쉽게 하기 위하여 설교자는 어려운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청중의 또다른 특징은 자신이 이해하기 쉬운 말에 집중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일반 대중들은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청취활동은 피하려는 경향이 점점 짙어진다. 신세대들은 심각하고 의미 있는 인생 이야기보다 쉽고 재미있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관심을 가진다. 이런 경향은 비단 신세대뿐만 아니라 기성세대에도 확산되고 더구나 교회에서 들려주는 메시지에까지 심각하고 어려운 말을 원치 않는다. 교회는 복잡한 세상살이에서 벗어나는 피난처가 되기를 원하고 설교는 쉽고 용기를 주는 삶의 분석이 아닌 대답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딱딱한 명제들로 구성된 설교보다 쉬운 이야기를 원하는 것이다.
    설교의 내용과 형태도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지난날의 설교의 형태는 연설적이고, 형식적이고, 소리가 크고, 윤색되고, 강한 웅변적 어조였다. 설교의 구성도 의미 있는 역사적 예화들을 사용하며, 사람들에게 무엇을 할 것인지를 말해 주었다. 아직도 이러한 설교가 정통 설교라고 선호하는 교회와 교인들이 물론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설교는 더욱더 대화적이며 이야기체이다. 이전의 연설가들은 천편일률적으로 웅변가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연설가들은 웅변가가 아니라 이야기꾼이다. 텔레비전에서 시청자를 사로잡는 연설들은 웅변이 아니라 시청자와 교감을 이루는 이야기들이다. 설교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의 교인들은 일방적 설교자보다 교환적 설교자를 더 좋아한다. 오늘날의 형태는 강의보다 대화이다. 이러한 경향은 미래 교회에서는 더할 것이다. 미래 교회의 성도들은 강의식 웅변식 설교보다 대화식 이야기식 설교를 듣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이전의 설교가 “해야 한다”, “마땅하다”, “당연하다”와 같은 어투를 많이 사용하였고 강요적이며 지시적인 내용들을 사용하였지만 이후의 설교는 문제를 설명해주고 그 대안을 제시하며 그 다음에 설득을 추구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강요적인 결론이 아니라 모든 결정을 청중 스스로가 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맡긴다. 현대인들은 그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강요적인 목사들을 원치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에게 알려주기를 원하고 결정은 그들 스스로에게 맡겨주고 그들에게 일러준 대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목사를 원하고 있다. 지시적이고 강요적인 옛 형태가 미래 교회에 적합하지 않는 이유의 하나는 이전의 형태는 연역적지만 이후의 형태는 귀납적이라는 것이다. 이미 성경공부의 형태도 귀납적으로 전환되었는데 이에 맞추어 설교도 이전의 형태가 아니라 이후의 형태인 귀납적으로 하여 청중 스스로가 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1세기의 설교는 이야기와 예화를 사용하는 이야기체의 설교로 전환되어야 한다. 길고 지루한 교리적 설교가 아니라 짧고 흥미로운 공감적 설교로 전환되어야 한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일반적으로 외쳐대는 청중과의 삶과 동떨어진 설교에서 강단 위와 아래가 쌍방적으로 전달되는 청중의 삶을 치유하는 설교로 전환되어야 한다. 설교의 전달자인 설교자와 청중인 교인 그리고 설교의 외적 조건인 분위기, 시간 등이 조화되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설교이어야 한다. 미래 교회를 위한 설교의 형태의 전환은 예배의 갱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설교자의 노력과 의지가 있어야 설교 형태의 전환을 통한 예배의 갱신이 가능할 것이다.

    3) 언어 설교에서 미디어 설교로 전환

    우리는 이미 정보통신의 혁명을 경험하고 있다. 장거리 통신수단은 세계화의 한 요인이며 나이스비트(John Naisbitt)가 말한 대로 세계화와 지방화가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글로벌 패러독스의 동인이 되는데 장거리 통신수단은 멀티미디어 시대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다. 정보통신혁명이란 미디어간의 기술적 수렴 곧 디지털화(digitalization), 영상화(visualization), 종합화(integration), 융합화(conver- gency), 상호작용화(interactivity), 탈 대중화(demassification), 비동시화(asynchronity) 등의 과정을 통해 정보유통 과정에 사용되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발생한 광범위하고 근본적인 사회변동이다.
    이러한 정보화 기술의 발전은 우리 사회로 하여금 이미 케이블 텔레비전 시대를 열게 하였으며 위성방송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미 가정에 들어와 있는 고화질 텔레비전(HDTV)이나 비디오텍스 등은 지금까지의 미디어 형태가 아닌 다매체와 통신과 컴퓨터가 이루어놓은 전혀 새로운 방식의 미디어 형태이다. 이러한 영상혁명은 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프로그램을 편성하는 전문화가 가능한 정보내용의 변화를 일으켰다. 동시에 기존의 미디어 체계 외에 케이블, 광섬유, 통신위성, 마이크로파, 컴퓨터 네트워크 등의 정보전달 방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의 미디어가 가지고 있는 일 대 다수(one to many)의 등식이 일 대 일(point to point) 또한 다수 대 다수(many to many)의 등식으로 바뀌고 정보교환이 방향과 대상에 관계없이 자유롭게 되었다. 이런 상호작용성(interactivity) 뿐만 아니라 영상과 음향을 저장하는 기술을 통하여 커뮤니케이션의 비동시성(asynchronity)이 가능하게 되었다.
    최근에 와서는 책이나 신문과 같은 활자매체나 라디오와 같은 음성매체가 상대적으로 쇠퇴하며 대조적으로 시각적인 매체가 주도하는 것은 정보사회에서는 시각화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보사회를 맞이하여 단순한 음성매체, 활자매체 등 일방적인 정보전달에서 시각적인 매체로 복음선포와 생활양식이 변혁되어야 함을 뜻한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의 방식이나 설교도 언어 중심에서 미디어 중심으로 이동하여야 한다. 다매체가 발전한 시대에 언어 중심의 전달은 효과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멀티 미디어 시대에 걸맞는 미디어 설교로 전환해야 한다.
    구약 시대의 하나님은 음성으로만 존재하였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음성으로만 전달하였고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 관계도 음성에 제한되었다. 구약의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대언하는 “소리”에 불과하였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계 요한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던 것이다. 구약의 히브리주의는 귀라는 단일 미디어에 의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약 시대는 미디어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토탈 미디어로 오신 미디어의 전환이다. 지금까지는 음성으로만 듣고 머리로 생각하던 하나님을 육신으로 보고 듣고 느끼게 한 상황의 전환이었다.
    근래에 와서 많은 교회들이 멀티 미디어를 통하여 예배를 드리고 있다. 대형 스크린을 통하여 예배의 실황을 화면에 그림으로 보여준다. 예배 인도자의 얼굴이 크게 나타내 보이도록 해주며 참석자의 모습도 보여주며 설교시간에는 설교자의 얼굴과 표정이 또렷이 보이게 해주고 설교자가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즉시 화면에 기록하여 참석자의 기억을 도와준다. 그리고 찬송가와 복음성가의 가사를 화면과 함께 보여주므로 모두가 예배의 동참자가 되게 한다. 예배의 멀티 미디어와는 예배 참석 시에 부득불 준비하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찬송가와 성경을 구비해 주는 친절함이 한 단계 발전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이런 배려를 통하여 참석자들은 보는 재미와 함께 예배 전체에 대한 이해와 기억의 효과를 높일 수 있고 예배 인도자와의 친근감을 느끼게 해준다.
    교회 안에서의 멀티 미디어화를 반대하는 생각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많은 개신교의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배타성이 위험에 빠지는 것처럼 보일 때 언제나 공식적으로 우려를 표명하곤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세속화되어서는 안되며 배타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교인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극단적 우파 외에도 교회 내에서는 새로운 형식의 변화나 도입에 대하여 거부감을 느끼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전통을 고수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성이 강하게 교회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변화와 예배의 미디어화에 대하여 반대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찬성과 시도도 많이 있다. 구미에서는 이미 예배의 멀티 미디어화가 보편화되어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점차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심지어는 영화에 익숙해 있는 현대인들을 위하여 예배도 시도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반응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교회는 적절한 변화를 시도해야 하며 현대인들에게 가장 효율적인 복음전파의 도구를 찾아야 하는데 이것을 위해서는 반드시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확신과 배경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예배를 멀티 미디어화할 때에 교인들의 정서와 교회의 건물의 여건과 목회자의 신학적 입장이 분명히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4) 놀이 설교에서 영성 설교로 전환

    정보 사회는 기술시대이다. 과학기술이 최고의 가치로 각광받는 시대를 의미한다. 기술이 보편화되어 있고 기술이 가치를 동반하는 시대에 사는 목회자들에게는 목회 기술을 요청하고 기술 목회에 익숙해져 간다. 현실적으로 우리 주변의 목회 상황을 바라보면 수많은 재미있는 재료들과 놀이가 쏟아져 나온다.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많은 성경공부 자료들, 설교집과 예화집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무한한 목회자료들과 CD Rom에 저장된 목회 기술들이 목회에 도움도 되겠지만 목회자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목회의 기능공이 되게 하고 있다. 이전 세대의 목회자들은 이런 유의 목회 자료가 없었고 목회 자료 없이도 훌륭하게 목회하였지만 이제는 이런 자료들이 없으면 큰 일 나는 줄 알고 목회 계획이나, 설교나, 성경공부나 거의 모든 목회를 자료에 의존하고 있다. 자료가 없을 때의 목회는 기도와 명상을 통하여 이루어졌지만 자료 시대의 목회는 기도와 명상 보다 우선 자료에 손이 먼저 가게끔 목회의 상황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르네상스(Renaissance)와 종교개혁(Reformation)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 정신이 재생정신이었다는 것이다. 16세기의 르네상스는 중세에 대한 단절로서 재생을 알리는 인간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 역시 중세에 대한 단절로서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르네상스가 인문주의적 시도였다면 종교개혁은 영적 시도였다. 르네상스란 중세인이 입혀준 교리의 옷을 벗는 운동이며 형식의 거품을 빼는 운동이었다. 결국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은 중세의 세상과 단절된 방주 안의 구원에 만족하고 울타리 안에서 고행과 도덕률을 강조하여 내용보다 교리에 치중하였던 당시의 중세 풍의 경건의 탈을 벗어버리고 교리로부터 탈출하고 생명력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는 훈련을 하는 새로운 경건으로 전환되게 하였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중세의 탈을 벗고 형식의 거품을 빼는 운동이며 교회의 본래적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영성운동이었다면 현대교회는 다시 이러한 본래적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외형적 성장을 추구하면서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얻게 된 중세 풍의 형식과 거품과 깨기 힘든 두터운 껍질을 가지게 되었는데 교회는 과감하게 이러한 거품을 걷어내고 껍질을 깨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중세에서 교회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은 교회의 영성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새롭게 거듭나고 눈앞에 닥친 현실적 경제적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은 우선 교회가 본래적 모습으로 돌아가고 영성을 회복하는데 있다.
    교회는 이러한 미래인이 추구하는 영성의 제공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영성을 제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교회가 건전한 영성을 사회에 제공하지 못하면 사회는 엉뚱한 악령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미래학자들은 21세기에는 이단과 사이비가 횡행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이 말은 영성을 추구하는 미래인에게 교회가 건강한 영성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영성을 상실하지 말아야 하며 사회에 영성을 제공할 능력을 항상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기독교 외에도 영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불교의 영성이 있으며, 동서양의 신비종교가 영성을 가지고 있으며 ‘마인드 컨트롤(Mind Control)’이나 ‘초월적 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도 나름대로 영성이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러한 비기독교적 영성과 다른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영성을 가져야 하며 사회에 제공하여야 한다.
    한국교회는 최근에 와서 교회가 가지고 있던 영적 기운을 서서히 상실해가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한국교회가 통계적으로 침체하기 시작한 연도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침체하기 시작한 연도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한국교회가 영적으로 침체하기 시작한 연도는 1996년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1996년은 이상하리만큼 많은 사회가 그릇된 영적 분위기에 사로잡히게 된 해이다. 우선 1996년은 환생과 전생 신드롬이 사회를 어지럽게 한 해이다. 터무니없고 아무 근거가 없는 환생과 전생에 대하여 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급기야는 환생 신드롬이라는 신조어가 나오게 되었다. 1996년은 환생과 전생에 대한 신드롬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들 사이에 한해 내내 유행한 시리즈가 “만득이 시리즈”라는 것이다. 한해 내내 그들은 귀신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고 귀신을 희화(戱畵)하여 즐긴 것이다. 동시에 1996년은 무당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무당의 예언에 온 나라가 신경을 곤두세우던 해이다. 심진송의 “신이 내린 여자”를 비롯하여 갖가지 무당 이야기들이 서점가에서 베스트 셀러 대열에 오르고 무당이 사회, 정치, 경제를 예언하는 것을 대단한 관심으로 기사화하였다.
    기독교는 두 가지 큰 기능을 가진다. 하나는 영성적 기능(spiritual function)이며 또 다른 하나는 예언자적 기능(prophetic function)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영성적 기능을 가진 영성적 종교이며 동시에 예언자적 기능을 가진 예언자적 종교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교회사가들은 유럽 교회들의 급속한 쇠퇴의 원인을 “예언자적 기능에 지나치게 치중했기 때문”이라고 평가한다. 많은 종교학자들과 심지어 많은 기독교인들까지도 한국교회도 얼마쯤 지나면 유럽의 교회나 미국의 교회와 같이 쇠퇴하게 될 것이고 교회당은 빌 것이라고 판단한다. 구미 교회의 쇠퇴는 한국 교회 미래에 상당한 교훈을 준다. 예언자적 기능에 지나친 무게를 두어 유럽 교회가 쇠퇴하였다면 한국 교회는 두 기능의 균형을 유지하여야 할 것이며 특히 영성적 기능의 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성적 기능의 쇠퇴가 현실적으로 나타나며 두 기능의 불균형이 가시화 되기 때문이다. 미래적 전망에서 한국 교회가 재성장할 수 있는 길은 영성에 있다. 이 영성적 설교의 회복은 성경의 본래의 모습, 교회의 본래적 사명으로 돌아가려던 종교개혁에 버금가는 한국 교회의 신 종교개혁 운동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혹자는 한국 개신교가 기복적 종교라고 하지만 이 말에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한국 개신교의 본질은 기복적이 아니었다. 1960년대 박정희 전대통령이 집권하자 경제논리가 국민의식을 지배하였고 교회도 경제논리가 우선되었다. 1950년대까지 한국 교회의 설교는 “예수 믿고 천당갑시다” 혹은 “회개하고 구원받읍시다”라는 것이었으나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구호와 함께 교회도 “예수 믿고 부자됩시다”로 변질된 것이다. 한국 개신교가 소유 종교로 변질되었지만 다시 존재종교로 돌아가는 것이 새로운 종교개혁운동일 것이다. 한국 교회가 현실적 종교에서 다시 영성적 종교로 거듭나려면 목회자의 설교가 영성 설교로 전환되어야 한다.

    5) 제자 만들기 설교에서 사도 만들기 설교로 전환

    그간의 한국교회는 제자훈련을 통하여 성장에 큰 몫을 한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최근 한국 교회의 성장이 현 수준에서 멈추고 정체현상을 보인 한 원인은 제자화 훈련에 있다고 본다. 제자훈련이란 듣고 말하는 훈련으로 문자 그대로 제자로 만드는 훈련이다. 그 결과 한국교회 교인들은 듣기를 매우 좋아하고 말도 잘하는 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배우는 자체로 만족하는 교인들이 많게 만든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교인들로 하여금 ‘배우는 자’로서 제자가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사도가 되도록 훈련하여야 한다. 이러한 전환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성장의 전기를 제공할 것이다. 새로운 세기의 목회자의 설교는 사도 만들기에 초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께서 마지막 승천하시기 직전까지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의도를 알지 못한 자들이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아들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하였고 다른 제자들은 이 부탁에 모두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예수님은 세상에서의 일을 다 마치고 승천하실 때까지도 극단적인 유대주의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그들이 성령강림을 체험한 다음에는 더 이상 제자가 아니라 사도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일한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일한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에 3년이나 가르쳤지만 아무 것도 하지 못하였지만 성령강림 후에 그들은 굉장히 능력 있는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다. 능력 목회는 제자들의 몫이 아니라 사도들의 몫이었다.
    이제 한국교회에서 훈련을 받은 성도들도 제자에서 사도로 전환되어야 하며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가 많아야 다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30여년동안 한국교회는 매 10년마다 배가가 될 만큼 급성장해 왔다. 그 기간에는 양적 증가가 절대로 요구되었고 교회성장이 목회의 중요한 목적이었다. 또한 교회는 제자훈련을 통하여 “배우는 자”인 제자를 많이 양육했다. 제자훈련을 통하여 배운 것은 잘 듣는 것과 잘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교회 교인들은 듣기도 잘하고 말하기도 잘 한다. 그러나 세상 밖에서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양성되지 못하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는 교회 안에서 배우는 자가 아닌 교회 밖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인 사도가 많아져야 한다. 그래서 제자 만들기도 사도 만들기로 전환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110년의 개신교 역사 가운데 이방인 같은 처지에서 신앙을 배워 제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이미 제자가 된 유대인 같은 신앙적 전통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 행함을 일깨워 사도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제자훈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도훈련으로 전환해야 교회의 삶의 자리인 사회를 위한 교회가 될 것이며 비로소 사회가 교회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요청하게 될 것이다.

    6) 생활 이야기에서 생명 이야기로 전환

    우리 나라의 근대화 과정은 많은 사회적 부작용이 공존했던 것을 경험하였다. 경제성장이라는 일차적 목표의 달성을 위하여 수많은 정신적 가치의 손상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지난 날 우리의 현실이었다. 사회의 기술의 발전과 근대사회로의 발전과 가치관의 변화는 결국 사회를 위험사회로 전락시켰으며 물질위주의 사고방식은 위험사회를 가속화하였다. 성수대교의 붕괴,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파, 삼풍 백화점의 붕괴 등 하늘과 바다와 땅에서 줄줄이 대형사고가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통사고 사망자의 수는 세계 1위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위험사회의 가속화와 대형사고와 전쟁에 대한 불안감은 사회의 일반적 인식이 되었다. 이런 다발적 대형사고는 결국 생명 경시로 이어지고 “죽었다”는 말에 대하여 둔감하게 만들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 위험사회의 정체는 상당히 구조화되어 있다. 복합적 원인에서 발생한 위험사회는 외형적이고 물량적인 성장을 지속하면서 눈앞에 보이는 결과와 이익에만 몰두한 결과이다. 현대 문명의 문제점을 위험사회의 개념으로 분석한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Ulrich Beck)는 재난은 모든 사회가 경험하는 것으로 이제 위험은 특정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적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모든 순간의 결정이 엄청난 재난을 불러올 수 있는 상황의 지속성으로 위험사회를 정의한다. 올해는 특히 엘니뇨현상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가 기상이변으로 많은 세계적 재난이 있었다. 게릴라성 호우는 근래에 보기 드문 피해를 낳았고, 9월의 늦더위도 기상이변을 실감케 하는 것이었다. 이런 재난들도 결국 생명에 대한 경이감을 상실하게 하고 대형 재난과 사고를 통하여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사라지고 죽음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21세기의 과학의 꽃은 생명공학이라고 한다. 유전공학은 두 가지 인간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발달하였다. 한가지는 식량난 해소이고 다른 하나는 불임의 해소이다. 이런 과학적 노력은 생명공학의 가정을 증명하는데 기여하였으나 이와 더불어 또다른 역기능이 발생되게 되었는데 이것이 생명복제라는 것이다. 분명히 나이스비트(John Naisbitt)의 말대로 21세기는 생물학의 시대이다. 이는 물리학의 시대인 20세기와 엄청난 차별화를 과시하듯 생명의 존엄성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1997년 2월 스코틀랜드의 로슬린 연구소가 복제 양 돌리를 공개함으로서 생명복제는 현실적 문제로 대두되게 되었다. 유전공학의 새 장이 열렸다는 환호성과 긍정적 평가와 더불어 복제인간의 탄생이 멀지 않았다고 우려하게 되었다.
    실제로 지난 1998년 연초에 미국의 한 과학자가 인간복제 시도를 선언하였다. 인간복제의 이론이 이미 오래 전 확립된 다음 복제 양과 복제원숭이가 탄생되었고 이제는 인간복제에 대한 인간의 끈질긴 유혹은 드디어 가능성의 길을 열게 되었다. 인간복제가 비윤리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어 왔지만 시카고의 리처드 시드(Richard Seed)박사는 과학의 이름으로 인간복제를 시도하겠다고 선언하였고 90일 이내에 불임부부를 위한 인간복제 연구에 돌입한다고 선언하였다. 2년 내에 복제인간을 만들겠다고 호언한 그는 나아가서 과학의 발전은 누구도 막지 못한다고 전제하면서 전 세계 20군데에 클론 클리닉(Clone clinic)을 개설하겠다고 하였다.
    이런 과학의 발달은 교회로 하여금 생명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킨다. 교회는 그간의 생활 이야기에서 생명 이야기로 전환해야 한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으며 하나님만이 생명을 창조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빚으신 다음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는 영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살아있는 영이다. 사람은 죽어있는 영이거나 살아있는 육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생명으로 살아야 하고 영적으로 살아야 한다. 생명이 없으면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바울도 그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행 17:25)고 한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고들 가운데는 인간사라고 보기 힘든 사고가 줄을 잊고 있다. 아버지가 보험금을 타내기 위하여 아들의 손을 자르고, 동생이 언니와 짜고 형부를 살해하고, 아버지가 독극물을 넣은 요구르트를 아들에게 먹여 죽게 하였다. 이런 모든 것이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 상실되고 경색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급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계획된 살인보다 충동살인이 늘어나고 있다. 생명경시로 발생하는 흉악범죄는 해가 갈수록 증가되고 있고 이를 방지하는 제도적 장치는 제자리 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다. 흉악범죄는 해마다 지속적인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최근의 청소년 자살의 증가와 경제불황과 맞물려 기성인의 자살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는 것도 생명에 대한 경시풍조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 외에도 사형제도의 존속이나 낙태 등도 생명경시를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생명경시의 현실 앞에서 교회는 새로운 생명운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임을 바르게 알게 하고 생명을 사랑하며 생명의 존귀성을 신뢰하고 사회에 확산시켜 나갈 책임이 있다. 기독교윤리학에서는 생명의 생성과 지탱해나가는 과정을 다루는 생명윤리(bioethics)를 말하고 있지만 기독교는 육신적이고 물리적이고 생물적인 생명 이상의 생명을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생명윤리의 차원을 넘어서 생명의 본질을 깨닫게 해야 한다.
    교회가 이러한 생명운동의 중심이 되고 사회에 대한 양심의 소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인들로 하여금 생명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강단에서는 생명존중에 대한 소리가 흘러나와야 하며 교인들은 생활에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 생명이 경시되고 생명문제가 목회적 과제로 떠오를 미래 교회를 위하여 교회는 준비하고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르칠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미래 교회는 생명에 대한 설교가 강조되어야 한다.

    7) 만족하는 설교에서 감동하는 설교로 전환

    많은 사람들은 한국 교회의 침체 요인을 외적인 것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국 교회의 침체 요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여야 한다. 한국 교회의 침체를 사회변동 등의 외부적 여건에 원인을 돌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한국 교회의 솔직한 자성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요인에 있다. 외부적 여건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하고 21세기를 위하여 연구하고 준비하고 있지만 교회는 사회의 변화에 대하여 둔감하며 개혁되기를 싫어하는 가장 보수적인 집단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교회가 새롭고 매력 있는 신상품 개발에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복음은 예나 지금이나 누구에게나 동일하지만 복음을 전달하는 매개는 대상과 상황에 따라서 항상 새로워져야 하고 달라져야 한다. 교회는 불신 사회에 대하여 매력 있는 신상품을 끊임없이 제공할 책임이 있다.
    오래 전 까지만 하더라도 물자의 절대수요가 모자랄 때에는 상품을 만들기만 하면 팔렸다. 그러나 이제는 상품 자체가 아니라 품질이며 품질이 얼마나 고객에게 만족을 주느냐 에서 고객을 얼마나 감동시키느냐에 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종래는 공급이 수요에 비해서 부족하던 상황이었지만 이제는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상황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변화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기업은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고 경영난에 빠지게 되고 종래는 도산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교회의 현실도 상황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교회로서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고 결국 교회의 침체 내지 쇠퇴의 원인이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고객인 교인들에게 만족을 주는 차원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교회가 성장할 수 있다. 문제는 현대 교인들은 좀처럼 감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감동을 줄만한 것이 사회에, 세상에 너무나 많이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경쟁력이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대안이 필요할 것이다. 첫째, 성직자에서 교인으로 교회의 중심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인이 외면하는 설교나 교회의 프로그램을 지양하여야 한다. 둘째,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교회의 목표를 한국 최고에서 세계 최고, 한국에 영향을 주는 교회에서 세계에 영향을 주는 교회로 바꾸어야 한다. 셋째, 교회의 목표나 경쟁의 수단이 양(quantity)에서 질(quality)로, 크기(size)에서 가치(value)로 바꾸어야 한다. 넷째, 기업에서 일회성 고객을 평생 고객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하듯이 교인을 일회성 교인에서 평생 교인으로, 한 세대(single-generation)의 교인에서 다세대(multi-generation)의 교인으로 바꾸어야 한다.
    기존의 품질에 대한 개념은 사양이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서 결정되었지만 총체적 품질관리 개념에서는 고객이 만족했느냐 만족하지 못하였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고객의 만족이란 이전에는 기능적 만족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능적 만족이 아니라 감성적 만족으로 변화되었다. 이제는 품질 관리가 제품의 생산 보다 더 중요하듯이 교회도 이러한 추세로 변화될 것이다. 이전의 고객은 제품의 국적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이제는 제품의 국적이 아니라 제품의 질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이전에는 교단이나 교파에 관심을 가졌지만 이제는 교단이나 교파보다 교회의 질에 관심을 가진다. 교회가 자신에게 영적인 만족을 줄 수 있고 감동이 있는 교회이면 교단이 달라도 얼마든지 선택한다. 교회도 이제는 교인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제공해 주느냐라고 하는 생존의 방식에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 이전의 교회와 같이 문만 열면 교인들이 몰려들고 한마디만 하면 새신자들이 등록하는 시대가 아니라 기존의 교인들도 새로운 고품질의 설교를 원하고 신선한 교회의 프로그램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교회는 교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설교와 프로그램을 개발하여야 한다. 이러한 개발은 결국 최고의 경영자인 목회자에게 그 책임이 있고 목회자의 의식전환이 가장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결론

    개혁이란 두 가지 과제를 동시적으로 제공한다. 하나는 본질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이며 또다른 하나는 항상 새롭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되돌아가려는 본질에 대한 명제와 항상 새롭게 되어야 하는 방법론에 대한 명제는 공존한다.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이란 본질과 현대적 언어라는 전달방법이 항상 공존된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가장 본질적이며 가장 현실적인 하나님의 일이다. 21세기란 미래 사회를 앞두고 교회는 산업사회란 패러다임에서 전혀 새로운 정보사회란 패러다임으로 모든 목회적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 설교의 패러다임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정보사회에 걸맞는 설교 패러다임은 미래 교회에 힘을 제공할 것이며 미래 교인들에게 만족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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