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대우하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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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이번 주에 하나님을 삶에서 풍성히 느끼셨습니까? 어떻게 느끼며 사셨습니까? 우리는 원천적으로 하나님을 삶에서 제외시키는 데에 능숙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는 그 감격과 재미를 빼앗기고 사는지 모릅니다. 왜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가 제외시키면서 사는가 하면 삶에서 쓰고 있는 사도행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가? 그 사도행전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그것은 사도바울이나 베드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 그 사건을 통해서 주인공들의 연출을 보여주시고 그 스토리를 통해 이 시대에 나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작품에 어떻게 부름을 받고 연출을 하고 있는지를 모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주인공이고 자기들은 엑스트라로 산다는 것입니다.
엑스트라! 별로 재미없습니다. 힘만 들고 옷만 바꾸어 입느라고 정신 없고 바쁘기만 한답니다. 윤리적인 설교의 결과 사도행전의 강해를 하기 위해서 주석과 여러 책을 참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10장에는 많은 설교자들이 대 부분 고넬료와 베드로의 이야기로 집중합니다. 이동원 목사의 설교는 이렇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가 이방인이었다는 것은 그에게 소위 신앙의 계승이라는 전통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들은 실감하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예수 믿지 않는 가정에서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둘째로 고넬료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군대안에서 지위가 백부장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넬료는 적어도 부하를 백명이상 거느리고 있는 군대의 장교였습니다. 그 당시 팔레스틴지역에서 로마 군대의 지휘관으로 백명을 거느리고 있었다는 것은 상당한 지위입니다. 고넬료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도들은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대부분 이렇게 말씀을 증거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새벽기도도 열심히 해야 하고 작정기도도 해야 하고 철야기도도 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물론 은혜가 됩니다. 그리고 결코 잘못된 말씀이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결과는 말씀을 은혜롭게 받지만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라고 물으면서 나는 고넬료도 못되고 베드로도 못되니 나는 내 방식대로 살겠다고 또 다시 사회인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것을 말했지만 그렇게 고넬료처럼 베드로처럼 산다는 것에 우리는 부러워하고만 있었을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 저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살아 갈 수 있었을까? 침만 흘리고 있는 겁니다.
세밀한 하나님의 간섭.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우하시는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고넬료의 회심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10장은 고넬료 집안에 베드로가 파송되는 이야기로 시작되고 끝이 납니다. 고넬료가 기도하는 중에 천사의 계시를 받습니다. 고넬료는 백부장으로서 사람이 참 본이 되는 자였습니다. 높은 지위에 있지만 냉냉함을 가진 자가 아니라 그는 기도와 구제를 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지금 같아서는 병원도 들러서 환자도 돌보고 고아원도 가고 양로원도 가는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은 그에게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고 합니다.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시면서 그 위치를 정확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고넬료는 사람들을 불러 욥바로 보내게 됩니다. 한편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지붕이라고 해도 우리나라 지붕같은 곳이 아니라 평평한 곳이기에 얼마든지 기도의 처소로 사용할 수 있었지요. 육시니까 우리나라 시간으로는 낮 열두시 정도 되었습니다. 점심시간인지라 배가 고팠던 모양입니다. 그 때 하늘이 열리고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메어 땅에 내리어 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발 가진 짐승과 가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납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않은 것을 내가 여태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 소리가 들립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한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이런 일이 세 번 있어집니다. 그리고 그릇이 하늘로 올려졌습니다. 베드로가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이 환상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납니다.
나가보니 두 사람이 문 밖에 서서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이곳에 우거 하느냐”고 묻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내가 그 사람이라고 하지요. 환상에 대해서 베드로가 생각할 때에 성령님이 두사람이 너를 찾으니 가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이 “내가 보내었다”고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고넬료가 누구인가고 두 사람에게 물으니까 그 신하들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고 칭찬을 받는 사람인데 저가 기도하는 중에 우리를 불러 가보니 당신을 데리고 오라고 명을 받아서 이곳까지 왔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튼날 베드로는 그 집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들은 성령세례를 받고 온 가족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이야기가 10장에 이야기입니다. 10장 전체를 고넬료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좀 생각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간섭이 너무 세밀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넬료에게 말씀하시고 누구를 부르라고 하고 그가 어디에 있다고 하고 그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분명히 알려 주십니다. 또 베드로에게는 기도할 때에 환상을 보여주고 그 환상을 가지고 고민할 때에 마침 사람들이 그곳에 도착해서 이곳에 배드로라는 사람이 살고 있는냐고 묻고 말입니다.
저는 이런 일이 있으면 놀랍니다. 왜 놀라는가 하면 하나님의 타임이 정확하게 역사 하신다는 것을 이곳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우연함이 없는 사람들, 이곳에서 베드로가 고민할 때 등장하는 단어는 17절에 “마침”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도 정확하게 그곳을 찾아 왔는가 그리고 베드로가 기도하고 환상 중에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헤매고 있을 때 대문을 두드리는 이 연출은 누가 이룬 것인가? 는 것을 보게 되면 전율이 흐릅니다. 하나님이 놀라우신 섭리의 시각을 그곳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너무 세밀하게 하나님은 간섭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유심히 보면 이런 것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인간이 하는 일이 줄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엄청나게 자상하게 간섭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할 일은 그대로 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고벨료가 환상을 본 후에 욥바에 사람을 보내서 베드로를 찾아가도록 하고 또 베드로는 그곳에서 환상을 보고 고민하고 그때 사람이 와서 부탁하고 베드로가 가서 설교하고 절차가 인간이 하는 것은 그대로 다 해야만 하는 절차를 거칩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 보다 천사가 직접 설교를 하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베드로를 그렇게 번거롭게 하셨을까요? 기도하면 이상한 짐승이 내려와서 헷갈리게 하는지요? 왜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핵심을 놓치게 되면 사도행전을 보면서 핵심을 도달하지 못하면 우리는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본질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시각은 원래 다른 의미가 있어서 기록했는데 사람들은 주제 파악을 전혀 하지 못해서 엉뚱한 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세 가지를 고르라고 하면 어떤 사건일까요? 삼대사건을 고르면 첫째로는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교회가 새롭게 출발하는 힘을 어떻게 공급받는가에 대한 정확한 현장입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사건을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입니다. 어떻게 이방인의 사도가 될 바울이 복음의 증인으로 변하게 되었는가? 그의 회심은 기독교에 이방인의 사도로서 교회 역사에 중요한 시작이 되었습니다.
세 번째를 이야기하면 고넬료 사건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이방을 향한 복음의 문이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을 향한 복음의 역사가 어떻게 증거 되는가? 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놓치고 우리는 대부분 그 이면에 흐르는 작은 것을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여겨서 나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태 말하고 증거 했던 설교는 이런 부분에서는 고넬료는 어떤 사람인가? 우리도 고넬료와 같이 구제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증거하고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역시 착하게 사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도 보고 나는 역시 믿음이 없으니까 보이지 않으니 내 멋대로 살아가자.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교훈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합니다.
왜냐하면 설교자가 유능해서가 아니라 그 말씀 자체가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교훈과 책망을 하더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시각이 삶에서 제대로 적용이 안되니까 신앙의 자리가 흔들리고 맥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울의 회심을 했다. 베드로가 회심을 시켰다,” 이런 식으로 사람의 열심과 방법을 통해서 결실이 되었다는 사업보고서 같은 성경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성경적인 시각을 가지고 말씀을 보지 못하면 핵심을 놓치게 됩니다. 핵심을 놓치고 엉뚱한 것만 붙잡고 있으면 있는 꼴이 됩니다.
그것은 마치 꽃만 보고 더 중요한 뿌리에서부터 오는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꽃을 꺽어다 놓고 화병에서 생명을 보려고 합니다. 곧 죽어 버립니다. 말라죽지요. 우리가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신앙의 열심을 통해 얻은 열매가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름답다고 해서 서로 막 꽃을 꺾어서 자기 집 안방에만 둔 꼴이 되었습니다. 맨 처음에는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름다움이 추해져 갔습니다. 말라갑니다. 그것은 뿌리가 되신 예수님의 마음을 잃고 겉으로 드러난 환상과 음성 그리고 이적과 역사 에 열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 열심을 믿음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 예수님의 생명력을 잃고 가버린 사람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뿌리를 잃어버리고 꽃만 가지고 설명할 때가 많았습니다.
“꽃이란 향기입니다. 꽃은 이렇게 아름다워야 합니다. 꽃은 호박꽃도 꽃입니다.” 이런 식의 설교를 통해서 진정 변화가 일어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니까 꽃은 아름답게 피기는 했지만 쉬 사라지는 꽃병 속에 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생명력을 깊이 소유하지 못하니까 목사님이 물을 공급하면 시원하고 공급하지 않으면 또 고갈되는 꽃의 아름다움을 오래 간직하지 못하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번거로운 방법 그 원인이 바로 이런 곳에서 진정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싶은 것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이것은 고넬료의 구제나 기도 열심, 지위 높은 사람으로서의 겸손함, 베드로의 기도, 환상이나 설교에다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그곳에 나타나는 꽃을 보고 감탄을 합니다. ‘와! 역시나 고넬료이구나! 착한 사람이 되어야겠구나, 구제를 해야 되겠구나, 기도역시 기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구나. 그러니 철야기도, 금식기도 작정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 환상을 보게 되는 구나.’
그러니까 기도의 욕심장이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고넬료나 베드로를 증거하기 위하여 사도행전이 쓰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통해서 일을 하는가? 이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베드로에게 시킬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자신이 직접 하시면 더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베드로가 설교하는 것보다 천사가 직접 하든지 베드로에게 오라 가라 하지 말고 직접 고넬료에게 가셔서 말씀하시면 더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안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볼 때 참으로 번거로운데도 직접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일을 시킬 때 인간의 하는 일이 생략되는 희한한 방법을 통해서 역사하기를 거부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것이 생략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으로 가는 것이 생략되거나 설교가 생략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이곳에 가장 중요한 키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중요히 여기시고 있다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중요히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야 죽든지 말든지 이기고 보아야 합니다. 이번 대선에도 사람들은 결과를 중요시 할 겁니다.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가 관심입니다. 그러니 이놈도 죽고 저 놈도 죽고 어떻게 해서든지 선거를 하면 여러 사람이 죽게 됩니다. 이때는 교회도 잘 기도함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이번에 용인 신갈교회에 갔는데 글쎄 그 교회에서 용인시장 후보가 둘이 나온 것입니다. 한나라당, 후보와 민주당 후보가 다 그 교회 집사입니다.
교회가 두 쪽 날 위기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기도만 하고 누구를 찍으라고 말하지 못했답니다. 하나님은 항상 결과보다는 사람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결과를 중요시합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번거롭게 기록했는가 하면 환상과 이적을 보여주시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한마디로 어떻게 대우하시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 속에서 인간과 함께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어떻게 대우하시는가? 하나님은 겉으로 나타나는 꽃의 모양을 중요하게 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특히 꽃의 생김새를 중요시입니다. 그러기에 호박꽃도 꽃이냐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자라게 하시고 그 생명이 시작되고 인격으로 요구하셔서 사랑의 대상으로 섬기는 것이 숨겨진 목표입니다.
이 고넬료 사건에서 고넬료가 베드로를 부르고 설교를 듣다가 성령의 체험을 하여 세례를 받기까지의 스토리는 하나님은 얼마나 인간을 깊이 있게 대우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얼마나 인간을 깊이 있게 대우하시는가를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이 지은 생명체가 단순히 동정을 받고 구걸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동등한 인격의 대상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고넬료 집안이 회심하는 사건은 중요하게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은 모든 일에 주선자이시지만 혼자서 독재자 같이 명령을 통해서 이루지 않는다는 인격적인 분이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환상을 보여주고 고넬료에게 욥바에 사람을 보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나 베드로에게 잡아 먹으라 하시고 그것을 보고 안 먹겠다고 버티고 있는 베드로에게 내가 깨끗하다고 하는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지 말라 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이 인간을 깊이 있게 대우하시는가를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여기 있는 짐승을 잡아 먹으라. 내가 깨끗하게 했는데 네가 왜 거부하느냐? 먹으라면 먹지 왜 말이 많아,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안 먹으면 죽어”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나님은 인간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동등하게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인간이 설득을 당하여 자발적인 행위의 결실로 그가 움직이고 있음을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를 동등하게 자신의 사역자로 인정하고 함께 하고 싶으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는 대부분 하나님의 종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데에 우리의 아픔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어떻게 대우하시고 계시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 창세기 18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향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가까이 나아가 가로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아브라함이 말씀하여 가로되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 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 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사십오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고하여 가로되 거기서 사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사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거기서 삼십 인을 찾으면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 거기서 이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이십 인을 인하여 멸하지 아니하리라 아브라함이 또 가로되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 거기서 십 인을 찾으시면 어찌 하시려나이까 가라사대 내가 십 인을 인하여도 멸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 (창 18:17-33)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아십니까?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대등한 입장에서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 땅을 멸하기로 하셨습니다. 이 멸망의 계획을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10명의 의인만 있어도 멸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아브라함과 절충이 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얼마만한 대접을 하고 있는가를 보셔야 합니다. 이런 대목이 모세와의 관계에서도 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모세가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 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주를 가리켜 그들에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나의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영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출 32:7-13)
이곳에서도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은 진노를 돌이키십니다. 모세의 간구를 하나님께서 받아 주십니다. 이곳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모세의 제안을 받아 주셔서 화를 면하게 하셨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때로는 자기의 계획을 변경하시는구나, 그것을 가르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이 소모품으로 사용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고넬료 사건에서 기억할 것은 단순히 고넬료가 착한 사람이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구제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기도라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 지면 안됩니다.
성도들이 다 성숙한 자리에 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고넬료와 베드로와 같은 동화 속의 인물을 모델로 하여 나의 모습을 바라보니 감당할 길이 없는 겁니다. 하나님과 나와 무관한 관계 속에 불교에서 말하는 천지 신명이 되고 어려울 때 도와 주도록 기도나 하고 그 분이 나와 동행하신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상당히 거리가 나와는 먼 이야기로 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대우하시는가를 전혀 보지 못하기에 이 대목에서 우리는 고넬료와 베드로의 사역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동역자요, 사랑의 대상이요, 관심입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이 친히 하실 수 있지만 인간을 동참케 하여 자신의 동역자로 그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실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친히 하실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나가보니 김칫독 딤채에 김장을 하지 않았는데도 김치가 가득하게도 할 수 있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도 이만 명의 인원을 먹이신 분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누도록 하십니다. 먹일 수도 있으나 친히 인간이 그것을 나누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돕도록 인간이 할 부분을 남겨두시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동역자로 대우하시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보고 인간은 하나님 왜 이렇게 번거롭게 하십니까?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 그런 고백을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사람을 감찰하시는 자여 내가 범죄하였은들 주께 무슨 해가 되오리이까 어찌하여 나로 과녁을 삼으셔서 스스로 무거운 짐이 되게 하셨나이까” (욥 7:17-20)
욥이 하나님에게 불평하고 있는 것은 “왜 나 같은 인간을 그렇게 높이 평가합니까? 내버려 주십시오”라는 고백입니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이기에 그렇게 관심을 두십니까?” 부모가 자녀들이 철모르고 다닐 때 가정교육을 시킵니다. “어른들을 만나면 깍듯이 인사를 해라. 어르신들이 있을 때는 아빠에게 존댓말을 해야 된다. ‘아빠 밥 먹어.’이러면 안 된다.” 우리는 그때마다 묻습니다. ‘그럼 무엇이라고 말해요?’그러면 어머니는 ‘아빠 진지 잡수세요.’라고 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이게 안 하던 것이라 연습한번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협하지요.“아빠, 밥 먹어요”라고 합니다. “사람들을 만나면 복장을 단정히 해라. 먹을 때 쩝쩝 하는 소리를 내면 안 된다.”
왜 그렇게 간섭하시면서 말씀할까요? 번거롭게 하시려고요? 아닙니다. 자녀가 잘 교육받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문제를 놓칩니다. “하나님, 왜 고민하게 둡니까? 하나님이 알아서 미리 다 해주시면 얼마나 간편하고 좋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사사건건 나를 힘들게 합니다. 기도 안 하면 기도 안 했다고 괴롭게 하시고 성경말씀 안보면 믿는다고 해 놓고 성경 안보냐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 돈이 필요하면 제가 십일조도 드리고 구제 헌금도 하고 감사헌금도 할 수 있으니 삶 가운데서는 제발 귀찮게 좀 하지 마십시오. 좀 거짓되게 살 때도 눈감아 주십시오, 교통 위반해도 조금은 눈감아 주셔야지 그것을 범했다고 “너 교통 경찰 없다고 위반했냐?”라고 따지고 들으시면 제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왜, 무엇 때문에 찾아 오셨습니까? 돈이 필요하시면 제가 온라인으로 부치겠습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에 쉽게 나갑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진정으로 사귀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의도를 놓친 채 혼자서 갈등하고 울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베드로가 목표입니다. 베드로가 고벨료에게 설교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네가 내 말에 순종하여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코 유익을 위하여 따르지 않고 내 말에 순종하여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시는 분입니다. 왜 이런 일이 중요한지요? 사도행전 목표 자체가 일에 있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베드로의 능력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과 얼마나 동등한 대접을 받고 하나님의 동역자로 움직이고 있는가? 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 목표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했는가는 부수적인 일입니다. 사도행전의 중요한 초점은 베드로처럼 사울처럼 엉망이었던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어떻게 대우하시고 있는가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대접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이 고넬료 사건도 우리가 얼마나 귀하게 하나님의 대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어 세상에서 하나님과의 동행함을 놓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하나님의 간섭을 받는 사람으로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여정에 하나님이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우리가 누릴 축복입니다. 그래야 후대가 삽니다.
벨선교회 대표(www.bel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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