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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하나님의 크고 불변하신 사랑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호 3:1-5 | 설교자: 박상호

    본문

     B.C.750년 전후 시대에 북 이스라엘에 호세아 선지자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음란한 거리의 여인인 고멜을 아내로 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출신 성분이 별로 좋지 않은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결혼 후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낳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사라졌습니다. 그는 신실한 남편의 사랑과 자식들을 버리고 물질과 쾌락으로 유혹하는 남자를 따라 간 것입니다.  호세아는 아내가 부정한 행실을 버리고 성실한 아내와 어머니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요청했으나 허사였습니다.
    고멜은 호세아를 떠나 다른 남자와 영원히 행복하게 살줄로 생각했으나 그 남자에게 버림 받았습니다. 할 수 없이 다른 남자를 만나고 그 사람에게도 버림 받고 이와 같은 생활이 반복되는 음녀의 생활이 계속되다가 드디어는 아무도 돌보지 않아 굶주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고멜은 노예시장으로 팔려가서 짐승처럼 경매에 부쳐지게 됩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호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호 3: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릅니다.
      호 3:2“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아내에게 부탁합니다.
      호 3:3“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1절의 말씀을 주목해 봅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라는 말씀에서 “또”라 함은 이 일이 반복되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은 돈으로 환산하면 30세겔로 노예한명의 몸값으로 거금입니다. 남편과 아이들을 버리고 다른 남자를 따라간 음녀에게 엄청남 투자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호세아서는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호세아와 고멜의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야기이며, 곧 하나님과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을 예표하고, 고멜은 죄인인 우리 인간들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란한 아내 고멜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한 호세아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과거에 현실적으로 우리가 죄악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한 없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호 3:1“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 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라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기고 그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들을 즐길지라도 저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통하여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방탕 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한 이후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었지만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랑을 버리고 오히려 이방 신들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되어왔습니다. 때로 그들이 위기에 처하여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오기를 구할 때는 언제나 받아주셨습니다.
    민수기 21장 5-9절에서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 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 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 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스라엘이 지속적으로 애굽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할 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 뱀을 내어 벌하셨으나 저들이 용서를 구할 때 놋 뱀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으니 이는 십자가에 달리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과 구속의 은총을 예화를 통하여 깨우쳐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8-24절,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이 말씀 중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 백성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으로서는 짐작도 못할 깊은 사랑임을 깨닫게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끝없이 사랑하시고 용서하시며 우리도 그렇게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기를 명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 21-22절,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 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베드로의 용서의 회수에 대한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그 시대의 사고를 넘어서는 것이며 곧 용서에 대한 새로운 교훈이요 명령이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란 수학적 수치가 아니라 사랑의 수치입니다.
      본문에서 방탕한 모습을 버리지 못하고 또 집을 나간 고멜을 데려오라는 하나님 명령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여인을 계속해서 용서하도록 명하시는 것이며, 이 하나님의 모습을 통하여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며 우리도 사랑과 용서함으로 살아 갈 것을 요구하심을 깨닫게 합니다.

    둘째, 대가를 치루시고 구속하시는 사랑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는 것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 내용은 호세아가 고멜을 값을 치루고 사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호3:2“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저를 사고”라 하였습니다.
      호세아는 고멜이 자신의 아내였음에도 불구하고 값을 지불하고 데려온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아니합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한다면 법정 소송이 일어날 일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호세아로 하여금 정당하게 값을 지불하고 고멜은 찾아옴으로 그의 아내에 대한 소유를 분명하게 하도록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역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잡히시고 처형당하시고가 아니라 은 30에 팔리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사실입니다.
    마 26:14-16“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은 30이면 당시의 노예 한사람의 몸값이 엇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은 우리를 값을 치루고 사셨고 소유권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하여 몇 가지의 방법을 선정해 주셨습니다.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화목의 관계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용납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십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사실과 같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구속의 은총으로 값을 주고 사왔기 때문에 이후로는 옛 주인과는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방법에는 반드시 대가가 주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전서 1장18-19절,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사도 베드로는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의 구속이란 말은 대가를 치루고 대신 사온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사 오듯이 주님께서 은 30에 팔리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피를 흘려 우리를 구속 하셨음을  깨달아 기억해야 합니다.

    셋째, 사랑을 입은 자의 올 바른 삶을 부탁하십니다.
    호세아서 3장 3절, “저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행음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호세아가 고멜의 몸값을 치루고 데려다 놓고 부탁하는 말입니다.
    용서와 사랑을 입은 자들은 사랑을 입은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을 입은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3-11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 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살리기 위하여 주님은 자신을 죽음의 위기 속으로 몰아 넣으셨습니다. 이 일은 고소할 조건을 찾는 야비한 무리들의 술책이요 한 여인의 생명이 걸려있는 사건이기도합니다.
      주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였을 때 그들은 하나씩 둘씩 물러가고 오직 여자만 남아있는 곧 모든 상황이 끝났을 즈음에, 주님은 그녀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도 그녀를 정죄치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란 말 뒤에 이 보다 더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말은 너를 정죄하지 않는 다는 말보다 더 소중합니다. 그 이유는 실제로 주님은 그 여인을 향하여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이 말씀 한마디를 하시기 위하여 죽음의 순간까지 내려 가셔서 그녀를 구하시고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새로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이지, 단순하게 죄를 묻어두려는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용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때로는 용서는 용서 자체가 그 사람을 더욱 깊은 악으로 몰아 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반면에 용서 없는 변화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용서는 여인의 가슴에 새로운 불길을 일으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 있을 때 옥합을 깨트려 향유를 예수님 머리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긴 여인이 바로 그 라고 하기도 합니다.
    주님은 사랑과 용서란 것을 말로만 하시지 않고 몸으로 하셨습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말은 대단히 짧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이루기는 쉽지 아니 합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말은 기독교 윤리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는 말은 복음입니다. 복음과 윤리, 윤리와 복음의 관계를 간음한 여인의 사건 속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행동에서는 윤리는 복음의 전제하에서 이뤄지는 것이며, 윤리가 선행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윤리가 따르지 않는 복음은 빛을 발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의 윤리를 우리는 성화의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용서와 성화가 이루어질 때 건전한 신앙의 조화를 이룹니다.
      호세아는 고멜에게 부탁합니다.  ‘너는 나와 함께 지내자’ ‘행음하지 말라’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욕망을 꺾으라는 부탁입니다.
    구원 받은 자의 삶이란 날마다 자신의 욕망을 처서 보종시켜 자신을 주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삶이 되어야합니다.
    고린도 전서 9장 27절,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이는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는 자신의 욕망에 대한 절제 입니다.
    고멜은 자신의 욕망에 대한 절제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가정을 이탈하고 범죄 함이 깊어 졌고 나중에는 자신을 가눌 수 없는 깊은 죄와 파멸의 늪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러기에 호세아는 고멜에게 절제를 요구합니다.   성도는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기에 사랑을 입은 자답게 절제 할 것을 철저하게 절제하며 살아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답게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곧 주님의 크고 변함없으신 사랑을 깨닫고  그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원 이사, 춘천제일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