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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라합과 하나님의 믿음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수 2:1-14 | 설교자: 허명철

    본문

    오늘 본문의 라합은 이방인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복과는 상관없는 여리고 백성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이 라합의 가계를 통해서 오는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주 예수님이 그 족보를 통해서 왔다는 것을 본다면, 라합은 얼마나 축복 받은 인생입니까? 창녀 라합이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도 엄청난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러분중에 혹시 왜 내 삶 속에는 복은 고사하고, 갈수록 어려움만 더 커져가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의 진리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연극으로 구성하고 그 배경을 그려 넣는다면, 한쪽에는 싯딤이라는 장소와 산과 강과 들 넘어 웅장히 서 있는 여리고 성이 있겠습니다.
    다시 중요 장면을 가까이서 찍는다면,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은밀하게 두 점탐꾼을 이스라엘 무리에서 떼어서 정찰병으로 임무를 맡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의 한 시장통 모서리 지붕에 삼대같은 풀잎이 놓여진 기생 라합의 룸 싸롱이 보이고, 또 한편에 여리고 왕의 궁정도 보입니다. 본문에는 등장하는 사람 수도 몇 명 안 됩니다. 살펴보면, 눈에 보이지 않은 인물이 있는데, \율법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던 유대 왕 요아스 시대의 궁중 변사입니다. 그 곧 요시아 시대 당시 예언자가 이 사건을 무대 뒤에서 해설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쪽 편에서는 여호수아와 두 정찰병, 창녀 라합, 여리고 왕과 왕의 병사 세정도, 무명의 엑스트라 둘이고 소품이라고 해야 여기에 창으로 홍색 실을 드리우는 정도로 간단합니다.  
    본문에 대해서 메투 헨리 같은 주석가라든가, 많은 주석가들은 두 정탐꾼들과 라합의 믿음과 신앙 고백, 여호수아의 용기와 지략에 대해서 매우 놀라운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라합에 대해서도 히브리서 11장이나, 야고보서 2장에서도 그 믿음에 대해서 그는 축복 받을 만한 남다른 사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호수아와 두 정탐꾼에 대해서 기대 이상의 뛰어난 용사로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설교가들이 자신의 바라던 뛰어난 용사의 모델로, 자신의 상상력과 꿈에 불을 붙여 설교해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용사보다 더 축복받은 라합의 용기와 신앙, 그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습니다.
    라합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안다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때의 현장으로 시계추를 거꾸로 돌려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오늘 우리가 상상했던 것만큼, 정탐꾼들의 믿음이 좋았던 것도 아니고, 마음도 아름답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세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서 파송과 위기 그리고 적장들의 심리적 충격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적의 왕을 통해서 신앙의 눈을 뜨는 라합의 모습과 라합의  목숨 건 신앙적 결단과 목숨을 건 신앙 결단을 하는 라합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 장에서 시간과 공간의 세 번 이동을 통해서 주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싯딤에서 정찰병을 임명하고 임무를 부여하는 여호수아의 모습을 살펴보세요.    먼저,  모세의 종인 여호수아와 모세와 비교해보세요 모세는 책임감 있고, 누구보다 뛰어난 사람들을 뽑아서 보냈습니다 각 지파마다 인정받는 대표자들이요 지도자들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도 실패했습니다. 책임은 있고, 보는 눈이 있었으되, 하나님에 대한 믿음 있는 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본문의 해설자는 여호수아가 뽑아서 보낸 자들의 모습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 믿음 좋은 자도 아니요 책임감 있는 자도 아니요 지식 있는 자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보낸 것도 아니요. 여호수아의 개인적 차원에서 은밀하게 보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찰병을 보내되, 은밀하게 보내니까, 갔다가 잡혀 죽어도 여호수아만 알 정도가 되었고, 신중히 선택해서 보낸 인물도 아니었고, 정탐꾼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는 그저 되는 데로 뽑은 인물들입니다. 검증된 사람들이 아니라 아무나 뽑아서 은밀히 보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가 12 정탐꾼, 필요해서 뽑은 뛰어난 용사 12명에게 임무를 맡기는 것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현장에서 칼을 들고 싸우는 데 누구보다도 탁월했던 여호수아가 전체를 이끌어갈 지도자로서 모세에 비하면 많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임무를 구체적으로 맡깁니다. 민수기 13장 17-20절 말씀을 보면 정탐꾼을 가나안 온 지역에 보내면서, “땅의 어떠함을 탐지하고 거기 사는 거민이 강한 지, 약한 지를 탐지하고 숫자가 많은지 적은지 땅은 좋은지 나쁜지 마을은 성속에 있는지 없는지 나무는 어떠하고 초목은 어떠한지 과실은 어떠한지 잘 살피고 오라. 그리고 담대하라.”는 임무도 부여하고 격려도 합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어떻습니까? 아직 보는 법도 서툴고, 인재 쓰는 법도 모르고 임무도 가만히 보내서 그 땅과 여리고를 보고 오라고 합니다. 뭘 보고 오라는 말도 없습니다. 지형지물을 보라는 말도 없고, 적의 동태와 군사를 파악하라는 말도 없어요. 어디를 구체적으로 탐지하라는 말도 없고 가서 땅과 성을 엿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귀히 쓰임 받았지만, 아직은 이렇습니다. 탐지하다가 오히려 역효과를 봐서 40년 광야생활을 했으면 이제는 탐지보다는 믿음이 있어야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모세를 대신하여 여호수아를 세웠고, 네가 평탄하고 형통하는 길은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전쟁 탐지나 전쟁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더욱 신앙 생활해야 할 것입니다. 아직 땅은 얻지도 못하고 축복의 약속은 성취도 되지 않았지만. 비록 얻지 못했어도 여호수아가 할 일은 안식일이면 온 백성이 쉬며 제사를 드리고 불안과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전쟁은 눈앞에 있지, 적의 성은 높고 탄탄하고 적 병사는 아낙 후손들처럼 거인입니다.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메뚜기처럼 작은데, 걱정한다고 해결이 됩니까?
    우리가 잘 아는 당태종이 고구려 연개소문의 때에, 고구려를 정복하려고 요동성을 공격해오다가 든든한 안시성과 양만춘 장군을 만나지 않습니까? 수 나라를 멸하고 중국을 통일한 후에 1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정벌하던 당태종도 작은 성 안시성을 정벌하지 못하고 오히려 후퇴한 것을 역사가 증명합니다. 하물며 견고하며 성벽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고 민수기 13장 28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당시 유명한 여리고 성이 얼마나 든든하겠습니까? 여호수아가 가서 엿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낙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했고, 너는 군대 훈련에 관심보다는 믿음 훈련, 영적인 훈련, 하나님 말씀 믿고 순종하는 훈련,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아무리 어려워도 안식일은 쉬고, 십일조하고, 예배드리는 훈련, 복음 전하는 훈련만 잘하면, 하나님이 여호수아 1장 8절,“평탄하고 형통케 하겠다.”고 했습니다. 축복은 네 노력으로 얻는 것도 아니고, 약속의 땅도 네 힘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말씀 믿고, 어떤 순간에서도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정말로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아닙니까? 나를 사랑하고 나의 삶에 관여하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염려와 불안은 이 사랑에 대한 불신앙에서 오는 것 아닙니까? 손에 잡힌 것 없어도 믿으십시오. 감사하십시오. 믿음 있는 자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요 적군은 우리의 밥입니다. 아무리 강한 마귀도 우리의 밥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주님께 맡기면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 쉽습니다. 어떤 환난이나 시험이 우리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먹기 쉬운 떡에 불과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직 말씀만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라합의 집에서 정탐꾼 모습이나 라합의 모습을 보세요

    자본주의 발달은 기독교 신앙에서 시작되나 그 자본주의는 공황을 초래하게 된다. 대량 생산만큼 소비가 안되므로 실업률이 증가하고 또한 생산성도 떨어지게 된다. 그래서 근검 절약같은 통제해서 소비를 부추기는 욕망자극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이 극대화가 성 상품화를 통한 자극이다. 자본주의가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극이 필요했다고 미셀 푸코는 간파했다. 이 자본주의 욕망 자극이 그 토대가 되는 기독교 윤리가 없을 때, 여리고의 운명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습니다. 풍요했기에 오히려 타락한 가나안땅, 그 땅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심판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도덕적으로 퇴폐하고, 자극적인 곳으로 정탐꾼은 들어갔습니다. 이러 곳에 동화되고 타락하는 모습을 두 정탐꾼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새로운 환경에서 그들은 자신의 사명을 잊어버렸습니다.  
    이들은 여리고성에 정탐을 가야하는데, 그들은 정탐은 잊어버리고 기생 라합의 집으로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였다고 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표준 새번역은 “어느 창녀의 집에 들어가 거기에서 묵었다.”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들어갔다는 [보]보츠, 와 유숙하다[샤카브]는 성적인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이 보라는 말은 칼-미완료 동사인데 들어갔다는 말은 [와야보]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말은 들어가는 이유가 ‘성적인 동기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유숙하다는 말도 와이수브크로 직역하면 그들은 드러누웠다고 해석하는데, 이는 성적인 것을 은밀하게 다른 뜻으로 표현할 때 샤카브라는 단어로 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상징하는 바는 싯딤에서 그들이 출발할 때, 모압 여인들이 바알 신 앞에 이스라엘을 초청하여 성적으로 유혹당하여 타락해서 24000명이 죽었던 곳이 싯딤 아닙니까. 음란한 유혹에 넘어갔듯이 이들은 음란한 목적을 가지고 창녀 라합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본래 겉은 믿음과 담대한 용사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여리고성의 창녀 라합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간 덩어리가 부은 남자들입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마당에 그들은 지금 창녀 집에 음큼한 동기로 들어가서 쉬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둘로는, 그들은 사실상 정탐꾼으로 직무 유기를 했습니다.
    정탐꾼의 보고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리고성에 들어가서 정찰은커녕 라합이 전한 말을 그대로 여호수아에게 보고합니다. 그들이 보고 판단한 것을 보고한 것이 아니라 실상 라합의 이야기를 여리고성에서 자신들이 직접 겪은 이야기인양 일반화해서 보고합니다. 한 개인의 이야기를 들은대로 전체의 이야기인양 보고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성실한 보고입니까?
    그 셋으로는, 이들은 정탐꾼이 갖추어야 할 기본 자격도 미달했습니다. 남, 북한의 전쟁 때 북한 지역에 들어가서 여론을 조사하는 정찰병이 있었다면 옷차림은 남쪽 모습 그대로 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북쪽 것으로 바꿔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말솜씨도 바꿔야 할 것이고, 신분이 들어날 장소는 가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창녀 라합의 집에서 얼마나 잘 난 척했든지, 지나가던 여리고인이 왕에게 112 돌려 간첩신고 했습니다. 그리고 조사단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죽을 일이 눈앞에 닥쳤어도 이들은 그들에게 죽음의 위기가 왔는지도 모르고 둔감했습니다. 이 정탐꾼의 네 번째 모습으로는 이들의 마음은 매우 악했습니다.
    여호수아 6장 17절은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무릇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라고 말하였는데, 정탐꾼들이 실제로 라합을 만나기 전에, 하나님은 여리고 성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죽이고 취하고 바치는데, 초병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 가운데 산 자가 있다는 것은 정복의 실패입니다. 이 정탐꾼들은 라합도 죽어야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라합의 지혜로 그들은 지붕 위에 숨김 받고, 성밖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그리고서는 약속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행동을 보면 겉으로는 세 가지 약속을 하면서 성밖에서 큰 소리로 라합과 약속합니다. 성안에 여리고 성의 파수병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간첩 소동이 있었기 때문에 경비병들도 잠을 안자고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성밖으로 자신들이 나가게 되자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큰 소리로 줄을 매달 것, 가족들을 집안에 모아들 것, 비밀을 지킬 것을 요구합니다. 이 이야기가 경비병들에게 발각되었으면, 라합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실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 중 창 밖으로 홍색 줄을 내놓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입니다. 지금 라합을 살리고자 했다면, 성 밖으로 나가기 전에 은밀히 이야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큰 소리로 말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했습니까?  자신의 죄가 드러낼 것 때문입니다. 술집에서 음란한 일을 했다는 것이 들어나면 자신도 망신이고 또 직무 유기가 들어나기 때문에 여리고 성의 경비병들이 간첩죄로 죽이기를 바래서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그리고서는 여호수아에게 와서 보고할 때에 콜 하아레츠 모든 땅 콜 요스베이 모든 주민이 간담이 녹는다고 보고합니다. 그들이 간 곳은 창녀 라합의 집에 들어가서 음란한 짓을 한 것뿐입니다. 2장 24절에서 실제로는 라합 한 집만 가고 전부 다 돌아다닌 것처럼 행동합니다.
    사실 이 정도 악한 자들이 가장 귀중한 정탐꾼들이라니, 이런 악한 자들을 하나님이 왜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그만 두었습니까?
    이들이 한 일이라고는 수많은 것 중의 딱 하나 보고한 일인데, 것도 남의 일을 전달한 일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나 이스라엘 앞에서나 사랑 받을 만한 것은 실상 아무것도 없었는데, 적지에 가서 비록 껄렁껄렁햇지만, 어쩌면 단 한 가지 불성실한 보고밖에 더 있습니까? 아마 이 사실을 여호수아나 이스라엘 백성이 알았다면 그들은 뼈도 못추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발각될까봐 라합이 죽기를 바라는 이들의 행동은 사실 죽어 마땅할 정도였지만 하나님이 이들을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한 죄가 들어남에도 주께서 보시기에 하나님의 공의로 보면 만물보다 마음이 더 부패한 것이 모든 인간의 마음이요 죄로 보면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나 잡아온 사람이나 꼭 같이 보이듯이, 오직 그들이 죽지 아니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하늘나라의 군사로써 파송을 받고, 복음 사역의 임무를 총사령관 되시는 주님으로부터 맡았음에도, 오늘 곁길로 가는 모습이, 이 두 정탐꾼과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주의 군사이면서 사실 불신앙적인 행위를 하고, 발각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 이 정탐꾼들입니다. 정탐꾼들의 행동을 보면, 직무 유기하는 모습을 보면, 사랑할 만한 명분도 하나도 없는 것 같고, 구원할 명분도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적으로부터 보호해주시고 이들에게 가나안땅의 축복도 허락해주었습니다. 사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잘 하는 것도 없음에도 하나님은 이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축복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이지요. 그져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기에,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십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과 은총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정탐꾼같은 우리를 하나님은 사랑하시고 은총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면 라합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문학비평으로 나오는 90년 이후의 독일 신학자들 주석중에, 이 라합이 두 정탐꾼을 숨긴 것은 경제적 이익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심리학에서도 행위-관찰자 편향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도로를 건널 때, 자신이 차량 운전자할 때는, 차량운전자입장에서 건너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자신이 운정하지 않고, 건너는 입장이 되면, 건너는 입장에서 운전자를 판단하는 입장을 행위-관찰자 편향성이라고 합니다. 여리고 백성의 입장에서 본다면, 라합의 행위는 라합은 왕의 파수병들이 조사 나오자, 두 정탐꾼이 숨겨 달라하기 전에, 돈을 얻고자 하는데서, 소님 보호 차원에서 숨겼습니다. 돈이면 나라도 팔아먹는 행위입니다. 돈을 더 귀히 여긴 것입니다. 당시 하나님을 모르는 여리성의 가치관이 누구나 그랬을지 모릅니다. 어느 누구를 뽑아도, 생각하는 것이나 판단하는 것이 돈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여리고 성 입장에서 보면, 라합의 행위는 애국심보다 적에게도 돈을 받아먹기 위해서 숨겼다는 것입니다. 돈이라면 뭐든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 이런 사고방식이 만연한 동네가 여리고이고, 오늘 한국 사회 아니겠습니까?   사실 이런 악한 백성들이 가득한 곳이기에 하나님은 가나안땅을 온전히 심판하려한 것이 아니겠습니가? 양심보다 도덕성보다 돈을 우선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다 망할 그런 사람들 중에, 라합에게 은총을 베풀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 라합을 사랑하시기에 나같은 죄인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줄 깨닫게 되니까요.
    간첩 리철진이라는 영화에 보면, 어쩌면 돈을 숭배하는 당시 여리고성이나 우리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리철진이 이 나라에 침투에서 택시를 타서 도둑맞은 것이 돈가방과 권총입니다. 간첩이 택시 강도를 만나서 맞고 버려졌는데, 그를 찾아나온 고정간첩조차도 돈 없는 그를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남한에 와서 보니까 돈이 있으면 사람행세하고 없으면 굶어죽는 사회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루는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개인택시를 타서 ‘돈이면 다되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택시타고 ‘평양갑시다.’ 라고 간첩이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운전사가 ‘경기도 양평 말이죠.’하고 다시 묻습니다. ‘아니야 평양 가잔 말이야 느그들은 돈이면 무슨 일이든 다 하잖아!’ 하고 평양가자고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딱지 떼어서 열받은 택시기사는 엉뚱한 놈이 장난한다고 둘이 치고받고 합니다. 이 둘은 싸우다가 경찰서로 잡혀갑니다. 경찰서에서 싸우게 된 동기를 묻고 직업과 주민등록을 묻는데 나는 북한 인민군 누구요 간첩이요 주민등록도 엉뚱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경찰관 왈 ‘네가 간첩이면 나는 김정일이다.’하고 말하고 택시기사도 ‘너는 간첩이고 경찰이 김정일이면 나는 모택동이다.’고 합니다. 결국 하루 감옥살고 나옵니다. 돈이면 뭐든지 다되는 사회가 당시 여리고 사회에서 이 여인은 돈을  위해서 왕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리고 여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그는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살 기회가 없습니다. 라합은 그 죄악으로 이미 심판받기로 예정된 사람이요 구원과는 관계없는 그런 사람이였습니다. 어쩌면 주님 앞에 간음하다가 나온 그 여인보다 더 악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정탐꾼이 죄의 길로 가다가 만난 여인에게도 구원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돌로 맞아 죽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던져지고, 망신당할 대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죽지도 않고 정죄받지도 않고 오히려 용서받았습니다. 공간과 시간을 주 앞으로 옮기는 순간, 그녀는 주님의 은혜와 변호 속에 율법의 정죄로부터 보호받고 또한 용서받았습니다. 죽을 자가 죽지 않고, 정죄받아야 할 자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라합이 그와 같고, 정탐꾼이 요한복음 8장의 여인과 같고, 그 모두를 닮은 것이 우리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내 모습 이대로 사랑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저 사랑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로시고, 이 땅에서 천국가는 날까지,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이 땅에서도 천국의 기쁨을 맛보게 하시고, 주님 앞에 가는 순간, 주님과 더불어 왕노릇할 것이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1) 라합이 하나님앞에 나오게 된 것은 여리고 성의 궁궐의 현장에서 시작됩니다.

    라합의 용기와 믿음의 결단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온 여리고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로 말미암아 큰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요단 동편에서부터 죄인된 이방 백성들을 하나님이 그 크신 권능으로 심판하고 계시다는 것을 여리고 왕과 신하들, 그리고 백성들은 알았습니다. 라합은 적어도 왕과 그의 신하라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왕은 신의 대리인이요 아들로 여겨졌고 엄청난 위험을 간직한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당시 교육이란 것이, 우리나라 왕은 신의 아들이다. 왕을 거역하는 것은 신을 모독하는 것이요, 왕을 위해서 백성은 죽어야한다 왕은 너희와는 다르게 태어날 때부터 신의 점지를 받은 것이야 이렇게 교육받았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이야  왕은 두려움이 없는 신의 아들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여리고 왕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이 있음에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능력 앞에 두려워떠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니 그 신하들에 의해서  하나님은 심판자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죽음의 심판 앞에서 라합은 용기 있고, 지혜롭게 행동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 그녀는 하나님 편에 서기로 과감히 결단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알았던 라합은 지혜로운 청지기처럼 신앙의 결단을 합니다. 믿음은 결단입니다. 과감히 용기 있게, 결단할 때, 하나님께 복을 받고, 쓰임을 받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모세는 하나님이 지팡이를 던지라 하자, 던질 때 지팡이가 무엇이 되었습니까? 독이 강한 뱀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뱀의 꼬리를 잡으라는 것입니다. 땅꾼이라면 죽어도 꼬리를 안 잡습니다. 머리를 눌러서 잡습니다. 땅에 기는 뱀의 꼬리를 잡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입니다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땅꾼같은 기술을 가지고 잡은 것이 아니라, 그런 기술이 없어도 하나님이 잡으라하니까 믿음으로 잡으면 되는 것입니다. 독사를 꼬리 잡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 있어야하지만, 그러나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잡을 때, 그는 바로 앞에 서는 용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에는 눈에 보이는 근거를 쫓아서 결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구원의 은총을 믿고, 라합처럼, 모세처럼 결단해야 합니다. 믿음에는 이런 용기와 믿음의 결단이 요구됩니다. 라합은 그런 결단을 했습니다. 우리도 어려워도, 힘들어도, 그런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우리는 라합과 정탐꾼. 간음한 여인 이들이 축복받고 영생을 얻는 것, 곧 그들이 얻은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여기에 감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믿음과 비교됩니다. 태양과 달을 머물게 했던 놀라운 믿음의 여호수아도 아직 큰 믿음의 사람은 되지 못했습니다. 모세와 비교해서 형편없었습니다. 정탐꾼들도 너무나 타락하고 악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은 라합에게서 들은 것을 전부 보고, 여호수아에게는 여리고를 정찰한 것처럼  보고했습니다. 어쩌면 아간 보다 더 악한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간음한 여인이 주님 앞에 나올 수 있었다는 것만도 기적 아닙니까?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잡힌 정황을 보건데, 현장에서 죽을 뻔 했는데, 그럼에도 살았고, 그럼에도 은혜 받고, 축복 받았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사랑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잘나거나 선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원 얻은 것도 은혜입니다. 아무리 악한 죄인도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면 , 나의 죄 때문에 죽으셨음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이제 구세주로 생활의 주로 영접하면 구원받습니다. 바로 지금 고백해도 용서받고 구원 얻습니다. 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좋은 날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3. 은혜로 구원얻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바라시는 기대와 희망이 있습니다.

    이제는 과거와는 다르게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주의 말씀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 살고, 주님이 맡겨주신 복음의 증인으로써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 속에도 나를 사랑해서 목숨까지 버리신 그 은혜와 사랑을 믿고 늘 감사하며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삼창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