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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사회과학적 해석과 마가복음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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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과학적 해석과 마가복음 설교

    심상법 교수

    월트 디즈니 영화 중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Alice in the Wonderland)라는 만화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엘리스라는 소녀가 낯선 환상의 나라에서 경험한 것을 영상화한 것으로 어린이들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영화다. 아마 우리의 (신약)성경읽기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성경은 오늘의 우리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그리고 특히 문화적으로 거리가 먼 ‘낯선나라의 성경’이다. 성경의 기자 어느 누구도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사회 내의 첨단의 기술문명과 개인주의의 핵가족 속에 사는 독자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는 신약성경은 지중해 연안에 살고있는 독자들 - 팔레스타인의 유대 기독인들이든 아니면 소아시아나 로마의 이방 기독인들이든 간에 - 을 염두에 두고 쓴 지중해 연안의 문서이다. 성경기자가 염두에 둔 이들 독자들은 지중해 연안의 사회 가운데에서 살았던 독자들로서 우리와는 사회문화적으로 다른 세계 속에서 그들의 사고와 행동이 형성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사물이나 사건을 보는 점, 즉 그것들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점이 우리와 다르다(Malina & Neyrey 1988:145-151; Malina 1991:82-86). 이점은 신약성경의 독자들에 대해서 뿐 아니라 신약성경이 언급하는 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을 주해(註解)하는데 신약성경의 ‘사회-문화적 세계’(socio-cultural world)를 이해함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성경 읽기란 오늘의 독자들과 다른 ‘낯선 나라의 성경’이 ‘낯선 나라’에서 읽혀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시편 기자가 말하는 것처럼 마치 ‘이방의 땅에서 주의 노래’(시 137:4)를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올바른 성경해석에 있어서 ‘사회과학적 읽기’란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1. 성경해석에서 사회과학적(혹은 사회학적) 해석의 필요성

    본 강의는 사회과학적 해석을 통하여 ‘성경적 설교’의 지평을 넓히는데에 그 초점을 두려고 한다. 물론 지금까지의 성경해석에서 사회학적 해석이 전혀 배제되어온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약성경(혹은 초대기독교)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는 이러한 해석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연구와 사회학과의 관계는 거의 적대관계로 이해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성경연구에 사회학을 사용한 사람들이 종교에 대해 매우 도발적이었고 축소 지향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까닭에 성경연구에 있어서 사회학의 사용은 극히 부정적이었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최근의 성경해석분야에 있어서 사회과학적 해석방법의 사용(필요성)은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상당히 긍정적으로 취급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최근의 경향에 비추어서 우리는 사회과학적 해석이 본문의 의미를 올바로 밝혀 ‘성경적 설교’를 하는데 어떤 공헌을 할 수 있는지를 먼저 살핌으로써 사회과학적 성경해석의 중요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본문(특히 신약과 같은 고대문서)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본문이 나온 혹은 형성된 ‘사회-문화적 정황’(본문의 사회-문화적 세계)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물론 ‘본문’(text)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정황’(context)에 대한 강조는 Schroggs(1988:18)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에게 상반되는 두 가지 결론을 갖게 할 지 모른다. 그것은 정황에 대한 강조가 본문의 의미를 깨닫는데 어떤 ‘명료성’(clarity)을 줄 뿐 아니라 또한 그 반대로 ‘위협’(threat)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명료성’을 준다는 것은 본문의 저자와 그 공동체(청중)를 둘러싼 사회-문화적인 현실들(상황들/세계들)을 이해함으로써 본문에 나오는 특정한 사건들과 인물들의 의미나 본문(저자)의 의도를 보다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고, ‘위협’이 된다는 것은 신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계시)이 아닌 철저히 특정인간이나 집단의 우발적이고 정황적인 산물로만 간주함으로써 반(비)신앙적인 축소 지향적 해석을 추구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해석자가 성경의 계시(영감성)와 역사성에 대한 적절한 견해를 가지고 본문의 사회-문화적 정황(세계)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본문이 의미에 보다 명료하게 접근할 수 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이것은 성경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또는 흔히 말하기를 진공상태에서 온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 속에서 기록된 말씀을 의미한다. 이 경우 성경은 그것이 기록된 특정한 시간과 장소 안에서 한정됨을 의미한다. 이렇게 될 때 성경의 해석은 고대 지중해 연안의 성경과 오늘 우리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메워 갈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곧 해석에 있어서의 성경의 ‘사회문화적 세계’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사회문화적 세계를 이해할 때 우리는 성경본문을 보다 입체적이고 생생하게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영화 “쥬만지”(JUMANJI)의 게임과 같은 성경이해이다. 영화에서 보는 대로 ‘쥬만지’의 책을 열어 게임을 시작하면 그 때부터 살아있는 정글의 세계가 책을 읽고 있는 현실가운데 펼쳐져 가공할만한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성경의 사회과학적 읽기란 바로 이와 유사한 경험을 가짐을 말한다. 이러한 성경읽기에 대한 또 다른 비유로서는 마치 물기 있는 본문으로 대함 혹은 음각과 양각이 있는 본문으로 이해함과 같다고 할 수 있다.

    2. 사회과학적 해석이란 무엇인가?

    세계백과사전에 따르면 사회과학(social sciences)이란 인류학, 경제학, 지리학, 역사, 법률, 정치학, 정신의학,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통계학과 같은 학문들을 산하에 두는 총괄적인 학문의 범주(umbrella category)를 지칭한다. 그러나 신약연구에서 ‘사회과학적 해석’(Social-Scientific Interpretation)이란 주로 인류학(anthropology)과 사회학(sociology)을 중심으로 다루어진 해석을 말한다. 특히 사회과학적 해석은 역사비평의 해석적 한계를 보충하고 극복하려는 해석적 시도로서 역사비평의 적절한 대안 혹은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역사비평적 이해란 ‘본문 배후의 세계’를 통시적(diachronic)으로 이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회과학적 이해란 ‘본문주변의 세계’를 공시적(synchronic)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즉 본문을 중심으로한 본문주변의 사회문화적 세계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사회과학적 해석방법은 통상적으로 ‘주석’(exegesis)라고 불려지는 것의 전 단계의 해석작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본문의 원저자와 청중의 ‘사회-문화적 세계’(socio-cultural world)로부터 본문을 이해하려는 해석적 시도를 말한다. 통상적으로 해석자는 본문을 대할 때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세계관과 개인적 편견들과 경향들을 가지고 읽게 되는데 이러한 해석을 통틀어 우리는 ‘본문을 벗어난 아전인수격인 해석’(eisgesis)이라고 부른다. ‘eisgesis’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즉, 해석자가 가진 가치체계나 현실인식과 사회적 위치에 의해 본문을 해석하려는 소위 ‘자민족 중심[자가당착(自家撞着)]의 해석’(ethnocentrism))과 본문이 말하고 있는 시대를 벗어나 지금의 시대에서 바라보는 ‘시대착오적 해석’(anachronism)을 말한다. 이러한 ‘자민족 중심의 시대착오적 해석’은 고대문서인 신약성경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 비근한 예로서 우리가 잘 아는 눅 10:25-37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실제로 사마리아인이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결코 ‘선한’ 사마라아인이 아니다. 그들은 경멸의 대상으로 개 같은 사람들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재의 개신교적 시각에서 이 본문을 보면 그들은 결코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들로 이해된다. 그리고 앞으로 논의할 마가복음의 중풍병자에 대한 예수님의 죄 사함에 대한 선언도 이와 마찬가지다. 우리의 눈에는 예수님의 이 선언이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러나 그 당시 유대인들의 사회 특히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종교체계에서 이 선언은 엄청나게 도발적인 선언이다. 어떻게 성전 없이, 제사제도를 거치지 않고 회개와 믿음만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나? 그리고 어찌 사람이 죄 사람을 선언할 수가 있나? 이 선언은 전체유대사회의 지각을 뒤흔드는 도발적인 선언이다.

    결과적으로 사회(학)적 면을 고려하지 않는 신약(의 초대기독교)에 대한 이해란 일종의 가현설(docetism)에 빠질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신약을 매우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잘못에 이르게 된다(Richter 1993:272). 그러므로 신약의 사회과학적 해석에 입각한 설교는 그 당시의 사회-문화 속에 성육화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역동적인 선포로 나타난다. 특히 이 해석은 본문이 지닌 ‘삶의 자리’(Sitz im Leben)를 보다 명확하게 식별하게 해 줄 뿐 아니라 초대기독교가 직면하였던 보다 총체적인 삶의 모습을 이해하게 해 준다. 즉 이러한 해석을 통해서 발견된 신약의 초대교회의 메시지(신앙과 실천)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과 같은 개인적인 영역에서 이해되기보다는 보다 총체적이고 사회적(공동체적) 성향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Barton 1992). 즉 도덕, 정치, 경제, 법과 그리고 문화에 대한 질문들을 가진 삶의 전 영역에 스며들어 있는 총체적 삶의 모습을 지닌 초대기독교의 모습을 통해서 본문을 이해하게 된다. 특별히 여기에 문화인류학적 이해는 신약본문의 의미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으로부터 신약세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Malina의 책([1981]1993)과 그와 관련된 신약해석에 대해서는 Rohrbaugh가 편집한 책(1996)을 참조하라.

    3. 신약세계의 문화인류학적 이해

    신약의 문화인류학적인 이해는 신약세계에 대해 ‘낯선 외국인’과 같은 우리들을 그 시대의 사람으로 변신시켜서 신약을 이해(경청)하도록 해 준다. 이 말은 우리가 신약을 읽을 때 20세기 말(末)의 시나리오(안경)롤 통해 읽지(보지) 않고 1세기의 지중해 연안의 시나리오(안경)를 통해 읽도록(보도록) 해 준다는 말이다. 신약의 기록된 본문은 비록 그것이 거룩한 하나님의 계시라 할지라도 그것의 의미는 그 당시의 ‘사회체계’로부터 형성된/주어진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사회체계’(social system)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특히 복음서는 1세기 팔레스타인의 사회체계(즉 종교-사회-문화적 체계를 말함) 안에서 본문에 나타난 사람들(특히 신분과 계층)과 그들의 말과 행동과 제도와 사건에 대한 의미를 파악함이 필수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1세기 팔레스타인 세계를 구성하는 사회적 규범들과 가치들(일종의 그 당시의 상징세계[symbolic world])를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문화인류학(cultural anthropology)은 많은 도움을 준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Malina의 책[1991:1-27]을 보라.) 특정 본문(특히 신약과 같은 고대본문)의 의미를 위해 문화인류학이 다루는 것은 주로 그 본문의 스토리에 나타난 ‘누가’(who[인물]), ‘무엇을’(what[대상]), ‘언제’(when[시간]), ‘어디서’(where[장소]), ‘어떻게’(how[사건])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것의 이유인 ‘왜’(why)와 그 결과인 ‘그래서’(wherefore)에 대한 것들을 본질(nature로서 객관적인 것[It])과 문화(culture로서 사회적인 것[we])와 인간(human으로서 주관적인 것[I])의 혼합된 측면에서 다룬다. 특히 ‘문화’에 대한 이해는 우리에게 ‘낯선 책인 신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여기서 문화란 ‘사회적으로 상징화된 - 달리 말하면 사회적으로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 - 사람과 사물과 사건들과 관련되어지고 그것들을 포괄하는 상징들의 체계’(Malina 1991:12)를 말한다. 상징세계(symbolic world)로 불려지는 문화적 틀(matrix)/대본(script)에 대한 이해는 그 당시의 사회가 어떻게 사람들과 사물들과 사건들을 인지(認知)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믿고, 추구하고, 애쓰는가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신약성경내의 사람들과 사물들과 사건들 가운데 나타난 관계들(상호반응들과 행동들)을 체계화시킨(결정하는) 여러 가지 사회-문화적 모델들에 대한 이해가 요구된다. 특히 1세기 지중해 연안(팔레스타인을 포함)의 사회의 가치체계를 형성하는 사회-문화적 모델들로서는: 존경과 창피의 문화(honor & shame culture); 공동체적 인간성을 가진 사회(group-oriented personality); 혈족중심의 사회(kinship society); 제한된 자원을 가진 사회(preindustrial society); 정결체계의 사회(purity society). 이러한 문화인류학적 이해는 앞서 말한 대로 신약에 대한 자민족 중심의 시대착오적 해석을 벗어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러한 여러 가지 모델들 중에서 특히 ‘정결규례’(purity system)에 대한 이해는 (마가)복음서를 이해하는데 많은 통찰을 던져준다.

    3.1 정결규례 혹은 정결법에 대한 이해: 사회적 경계를 가로질러서

    유대사회 특히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한 유대사회의 근간을 형성하는 사회적 울타리는 모세법(Mosaic Law)이지만 그 중에 소위 ‘정결규례’ 혹은 ‘정결법’은 유대사회의 행동양식을 결정하는 중심된 규례라고 할 수 있다. 미쉬나의 거의 25%가 이 규례에 대한 것으로 이것은 양적으로 뿐 아니라 이념적으로도 유대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법이다(Neusner 1973:8-9). 이 규례는 단순히 종교의식에만 국한된 종교법 정도가 아니라 유대사회 전반을 형성하고 유지(지탱)하는 일종의 이념적 규례이다(한국사회로 말하면 일종의 반공법과 같다). 유대사회에서 이 규례(의 금기들[taboos])를 어기면 결코 유대사회 속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없다. 특히 하나님의 뜻은 ‘거룩’(정결)이기 때문에(레 11:44-45; 19:2; 살전 4:3) 이것의 엄중함은 더할 나위 없다. 그러므로 정결법은 유대사회를 형성하고 유지(지탱)하는 ‘사회적 경계’(social boundary) 혹은 ‘사회적 부도’(social map)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결법을 어기는 자는 거룩한 유대사회(의 관습)를 파멸로 이끄는 자로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파렴치범이나 보안법 위반자와 같은 지탄받는 대상으로서 그 사회의 기반(규범)을 무너뜨리는 암적 존재(불결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정결법(혹은 정결체계[purity system])은 유대사회의 가치와 구조와 그것의 경계(영역)를 결정짓는 일종의 사회질서 체계로서 그것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영역들에서 그것의 경계를 가진다: 장소; 사람; 사물(제물과 음식과 몸); 시간.

    1). 장소
    이스라엘 땅 [이스라엘성벽 [예루살렘성 [성전산 [성벽 [여인의 뜰 [이스라엘의 뜰 [제사장의 뜰
    [행각과 제단사이 [성소 [지성소

    holy land -> holy city -> holy temple -> holy place -> the holy of holies -> [holy God]

    2). 사람
    A: [(대)제사장들]
    B: [레위인들]
    C: [순수 이스라엘 백성]
    D: [제사장들의 불법 자녀들] 이방인 개종자들] 노예로서 자유인 개종자들]
    D C E: [사생아들(근친상간이나 음행; 창녀)] 인공 거세된 자들]
    B F F: [태생고자들] 성불구자(고환 없는 자들)] 양성소유자들]
    E A G: [이방인들]
    G

    3). 사물: 제물들과 음식들, 그리고 병들
    - 제물: 흠없는 초태생 제물(짐승); 흥없는 제물; 결코 가증치 않는 언약하의 것들; 가증한 것들
    - 몸(병): 사체; 문둥병; 피부병; 유츌병; 앉은뱅이/소경/귀머거리(불구자); 등(레 21:16-20). 특히 벌거벗음과 몸의 입구와 출구에 대한 언급들(성기; 항문; 귀; 입)은 사회적 몸(공동체)의 입구와 출구에 대한 것들과 관련되어 있다(cf. 대하 23:19).
    - 음식: 음식내용과 함께 누가 무엇을 누구와 함께 먹느냐 즉 식탁교제의 문제가 또한 중요하다.

    4). 시간: 안식일; 유월절; 속죄일; 장막절; 월기와 절삭들; 신년절; 급식일; 부림절; 등등

    복음서에서 이 ‘정결규례’는 예수님의 치유(이적)기사와 관련된 육체적 질병에 대한 것과 그의 교훈(가르침)과 관련된 불결한 손과 음식 그리고 윤리에 대한 것을 들 수 있다. 특별히 마가복음은 언급된 것들에 대해 잘 제시하고 있다.

    4. 사회과학적 해석을 통한 마가복음 설교의 실제

    위의 정결규례에 대한 이해는 마가복음의 해석과 설교에 많은 도움을 준다. 이제 우리는 아래의 마가복음의 본문들로 돌아가 그것들을 어떻게 주해하고 설교해야 될 것이지를 살펴 볼 것이다.

    4.1 막 1:10과 15:38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 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1:10)라는 표현에서 ‘하늘의 갈라짐’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당시 유대사회의 우주관을 이해하여야 한다. 즉 그 당시 유대인들이 하늘을 어떻게 이해하였나를 알아보아야 한다. 여기 예수님의 세례 時 나타난 ‘하늘의 갈라짐[찢어짐]’(the tearing of the heavens)의 표현은 하나님의 현존과 피조세계를 나누는 휘장(curtain)으로서의 개념(사 40:22; 겔 1:1)을 가진 하늘의 유대적 우주관을 고려할 때 대단히 의미심장하다(Ulansey 1991:34; Rhoads 1992:140; Juel 1994:34ff). 즉 예수님의 세례 받음의 사건에서 보여진 ‘하늘의 갈라짐(찢어짐)’은 하나님의 거주하심이 더 이상 하늘 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피조된 이 세상 속에 영구적으로 나타나는 것(cf. 사 64:1)으로서 이것은 예수(의 사역)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영구적 강림을 의미한다. 특히 여기 “찢어짐”[sci,zw]의 표현은 다른 복음서의 ‘열림’보다 훨씬 강한 표현으로 다시 회복될 수 없는 면을 강조한다. 그리고 하늘이 찢어짐과 동시에 하늘로부터 성령이 그에게 부어짐으로써 예수는 ‘거룩하신 분’,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서 삶의 시작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세례 받으신 후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갈라졌다(찢어졌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은 더 이상 하늘 위에만 머무르지 아니하시고 예수를 통해서 영구적으로 부정한 이 세상에 들어오셔서 거룩한 성령을 통해 나타남을 의미한다. 특히 대속적 세례(부정한 그 백성을 위하여 그 백성과 함께 그 백성의 자리에 대신 서신 세례)를 통하여 예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더러움을 대신 짊어지실 것임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즉 예수의 세례는 거룩하신 분(하나님의 아들)이 정결의 경계를 넘어서 스스로 영구적으로 백성들의 더러움을 대속할 것임을 암시한다. 이 점은 예수의 사역(이적사역과 수난사역)을 통해서 잘 입증되고 있다.

    특히 그의 죽음으로 성전(의 첫 번째) 휘장이 찢어짐(15:38)은 하늘의 장막이 찢어짐을 의미하는 것(Ulansey 1991)으로써 그의 세례와 죽음(일종의 inclusio)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현존을 가려주는 하늘 휘장이 영구적으로 파멸됨을 암시한다.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막힌 장벽(하늘장벽)을 허물고 우리와 함께 영구적으로 거하심으로 우리는 회개와 믿음으로 언제든지 거룩한 성전인 그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9:19-20).

    4.2 막 1:21-31과 2:23-3:6: 안식일에 귀신을 좇아내고 병고침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사역은 놀랍게도 안식일(거룩한 시간)에 회당(거룩한 장소)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규례를 따라 회당에 들어가셔서(1:21; cf. 1:39; 3:1; 6:2) 거기서 가르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능력과 권세의 사역은 회당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이것은 자연스럽게 마가복음의 중심 메시지인 예수의 신분(1:1)에 대한 의문으로 나아갔다(22, 24, 27절). 특히 ‘하나님의 거룩한 자’(1:24)로서 불려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시고 또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으로써 참다운 ‘안식일의 주인’(막 2:28)으로 메시아의 안식(회복을 통한 안식)을 선포하시고 실행하신다. 곧 그 당시의 서기관들과 다른 권세있는 가르침을 통해서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에게로 회복케 하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떠나게 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들로 회복되어 살게 하는 사역이 메시아의 사역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안식일에 베푸신 예수님의 이러한 회복의 사역들은 곧 앞으로 있을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의 촉발점(막 3:2)이 된다.

    특히 2:23-28에서 제자들이 안식일(거룩한 날)에 밀밭사이로 지나면서 밀 이삭을 따 비벼 먹은 것이 화근이 되어 안식일의 정결법을 어긴 것으로 예수는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3:2). 결국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심(3:1-6)으로써 예수님은 안식일의 정결법을 어긴 것으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판단되어 예수는 유대사회를 더립힌 자, 즉 유대사회의 경계를 넘어간 자로 제거의 대상이 된다(3:6). 이 때부터 예수는 그들에게 유대사회의 언약의 백성이 아닌 ‘외인’(outsider)으로 취급된다.

    4.3 문둥병자의 치유기사(막 1:40-44)
    문둥병은 유대사회에서 단순히 육체적 병으로만 취급되지 않고 그것이 갖는 사회-문화적 의미가 더 강하였다. 특히 제사장에 의해 이 병에 걸린 사람이 ‘부정한 자’로서 낙인이 찍히게 되면 이것은 일종의 신분박탈의 사회적 의식을 치른 것으로 간주되어 공동체 내에서의 자신의 신분과 위치가 완전히 박탈당하여 버림을 받게되어 진(공동체) 바깥에 쫓겨나서 혼자 살게되고 공적예배에는 결코 참여하지 못한다(레 13-14장; cf. Kazmierski 1992:42). 특히 문둥병 - 한센병의 경우 - 은 모르는 사이에 시작되어, 천천히 악화되는 병으로 신체의 끝 부분(귀, 눈, 코)의 통각(痛覺)의 마비를 일으켜, 그것들이 뭉그러져 없어지는 무서운 파멸적 결과를 나타내는 병이다. (죄의 파멸적 모습을 잘 묘사.) 이 병은 인간이 당하는 질병 중 최악의 고통스러운 질병으로서 저주받은 병으로 취급되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병에 걸린 자는 철저히 사람들(공동체)로부터 격리되어 산다. 혹 이들이 사람들이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되면 자신이 문둥병자인 것을 알리기 위해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거듭 소리질러 그들로 하여금 접촉하지 못하게끔 경고를 해야 하는데 이 경우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쳐야 한다(레 13:45-46). 왜냐하면 사람들이 문둥병자와 접촉하게 되면 그 사람이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의 문둥병자는 경고 없이 예수님께 왔다(41절). 문둥병자의 이와 같은 도발적인 모습에 대하여 예수님은 외면하거나 배척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를 만지시고 깨끗함을 주심으로써 메시아로서의 자비와 사랑의 모습을 보이신다. 그 당시 종교에 의해 만들어진 정결(淨潔)의 비정(非情)한(?) 사회적 경계와 제약을 넘어서서 이 부정(不淨)한 버려진 사람을 대하시는(“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의 우리(교회)의 종교적이고 신앙적 모습을 돌아보기에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예수님은 소위 그 당시의 ‘정결규례’(purity system)를 어김으로 인해 자신이 앞으로 받을 많은 비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의 고통과 함께 하시며 그를 치유하여 주셨다: 부정한 사람을 접촉하심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연대감을 가진 치유. 이점은 그 당시 종교(소위 거룩/정결)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모습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불결한 문둥병자를 만지셨지만 그러나 그는 부정하게 되지 않으시고 도리어 그에게 깨끗함을 선언하셨다. 그 결과 문둥병은 그에게서 떠나고 깨끗해 졌다(1:41). 확실히 예수는 정결(깨끗함)을 주시는 분이시다. 요한의 증거대로 예수는 ‘성령으로 세례(깨끗함)를 주시는 분’이시다. 이미 대속적 세례 받으심을 통해 예수는 이들의 더러움을 자신이 대신 짊어지시겠다는 것을 표현한 것처럼 예수는 부정한 자로 여겨져 죽음을 당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이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길이다(막 10:45)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의 정결의 원천이다.

    4.4 중풍병자를 고치신 이적기사(막 2:1-12)
    이 치유이적사건은 무리(독자)로 하여금 예수가 땅에서 죄를 사하여 주는 권세가 있는 줄 알게 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여 주시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필자의 강조]”(10절). Marcus(1994)는 이 구절을 막 2:7과 관련하여 독자들이 알아야(들어야) 할 ‘마가복음에서의 쉐마(Shema)’라고 불렀다(cf. 신 6:4). 구약에서 ‘죄 사함’은 오직 하늘에서 발휘되는 하나님의 권한(출 34:6-7; 삼하 12:13; 사 43:25; 44:2; 시 51편; 103:3)으로 묘사되는데 이제 예수님은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죄 사함’을 선언하심으로써 자신이 종말론적으로 도래한 하나님의 대리자(메시야)이심을 밝힌다(cf. 사 33:24; 렘 31:34). ‘하나님 한 분 외에’ 죄 사함을 선언할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제는 그(의 신분과 사역)를 통해 이 땅에서 죄 사함이 주어진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이와 같은 선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로 생각하였다(7절).

    우리는 여기서 왜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그와 같은 선언에 분노하게 되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다. 초대교회를 지나 종교개혁의 유산(遺産) 속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이 선언은 정말 아름다운 복음의 선언으로 쉽게 여겨지지만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특히 유대종교지도자들)에게는 그들 사회의 지각변동을 촉구하는 도발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다. 아니 어떻게 성전(聖殿)을 통하지 않고, 제사(祭祀)를 드림이 없이 회개와 믿음만으로 죄 사함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것도 인간이 되어서 이러한 선언을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참람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절)라고 생각한 것이다. 흔히 우리는 우리의 현재 상황에서 본문을 보기 때문에(시대착오적 이해) 이 갈등이 갖는 중대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본문을 대할 때가 많다.

    ‘죄 사함’에 대한 예수님의 선언은 혁명적인 선언이었다. 예수님은 지금 옛 시대의 사회적 경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메시아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성전 없이도, 제사제도 없이도 이제는 ‘회개와 믿음’만으로 죄 사함을 받을 수가 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 없이도’ 속죄(죄 사함)가 가능한 길(히 9:12)이 열렸다. 부패하고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강도의 굴혈’이 된 성전(막 11:17)과 그 제도는 부정한 사람들(중풍병자; 문둥병자; 혈류증 여인; 소경; 등등)에게나 가난한 자들에게는 엄청 그 문턱이 높았다. 이와 같은 소외계층에게 성전과 제사제도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장애물로 전락하였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이러한 선언과 행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찾아왔지만 성전을 둘러싼 기득층의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정말 암적 존재였다. 그러니 예수를 살해(제거)하고자 하는 모의는 이들과 같은 기득권자들에게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는 옳지만 현재의 기득층 - 이것이 종교적 기득층이든 정치-경제적 기득층이든 간에 - 에게는 큰 도전이 될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잘못된 사회적 경계(금기)를 가로질러 가고, 잘못된 사회적 담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용기와 믿음이 있는가? 타락한 기득층의 저항에 희생물이 될 각오를 하며 복음(福音)을 위해, 의(義)를 위해 살 각오를 하는가? 아니면 돌밭에 뿌리운 씨처럼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4:17) 그냥 넘어지고 주저앉는가? 아니면 수난을 각오하고 잘못된 사회적 경계를 용감하게 넘어가는가?

    마가복음은 이러한 삶 - 고난을 각오하고 잘못된 사회적 경계를 넘어감 - 에 대한 도전이다. 주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나(예수님)를 따라오는 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아야 한다”(8:34)고 하셨는데 오늘의 우리는 어떠한가? 그리고 “누구든지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8:38)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 부름을 외면해야 하는가? 그 당시의 잘못된 사회적 경계(금기)를 과감히 넘어감으로써 제도권의 희생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救主)시다. 우리가 그러한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그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마도 이 본문은 독자들에게 이러한 도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계속되는 본문(2:13이하)은 이러한 주님의 도전적인 행동들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삶에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넌지시 교훈하고 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때론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서라도’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 마태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 나서야 하는 믿음의 행동을 취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믿음은 주님이 보시고 기억하시는 믿음이며 또한 칭찬하시는 믿음이다(5절).

    4.5 세리와 죄인들과의 식탁교제(막 2:15-17)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알패오의 아들 레위의 집에 들어 가셔서 거기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가지셨다. 바리새인들은 이 일을 보고 예수가 정결법을 어기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의원으로 비유하시면서 이르시기를: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원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 2:17)고 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이신 예수는 죄인들(부정한 사람들)의 친구(구주)가 되어 스스로를 부정케 하셨다.

    4.6 바알세불의 논쟁(막 3:20-30)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이’(1:8),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둘기처럼 그 위에 내리신 분’(1:10), 그리고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1:24)로 불려지신 예수님이 안식일의 거룩한 시간을 어기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또한 부정한 문둥병자와 접촉하여 치유하시고 중풍병자에게는 회개와 믿음만으로 그에게 죄 사함을 선언하심으로써 거룩한 성전과 거룩한 속죄제도를 멸시할 뿐 아니라 자칭 사람이 되어 가지고 거룩한 하나님만이 선언할 수 있는 ‘죄 사함’을 선언하는 불경죄(참람죄)를 범하였다는 이유로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예수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를 그 사회에서 제거하고자 하였다(3:6). 그래서 이들은 예수를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으로 언도를 내린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에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3:22). 한 마디로 예수는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3:30)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고소)은 이미 예수를 그 사회에서 제거하고자 하였던 종교지도자들의 모의(3:6)의 일환으로 나온 것이다. 이들은 유대사회의 기반이 되는 정결법을 마음대로 유린하고 어기는 예수를 더 이상 거룩한 유대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보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예수를 유대사회를 더럽히는 염병(일종의 문둥병)과 같은 존재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그를 그냥 버려 둘 수가 없었다. 만약 예수를 그냥 내버려둔다면 온 유대사회가 더렵혀질 것이라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는 사람들(서기관들)을 보내어 그를 ‘더러운 귀신들린 자’로 규정하여 유대 공동체로부터 축출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예수에 대한 일종의 종교재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고대세계에서는 소위 ‘마녀 사냥’(witchcraft accusition)과 같은 종교재판이 있었다. 이것은 자신들(자신의 집단)의 적들, 원수들을 ‘귀신들린 자’로 규정하여 그 마을에서 추방(축출)하는 관례들이다. 특히 갈등가운데 있는 정적들이나 원수들을 제거하기 위한 일종의 ‘이념적 대본’과 같다. 이렇게 언도되면 그 사람은 그 집단으로부터 완전히 축출(추방)되어 제거되어 버린다(Malina & Neyrey 1988:4). 사회학에서는 이것을 ‘이탈(명명)이론’(deviance theory)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Malina & Neyrey 1988:33-67을 보라.) 이와 같이 예수는 그 당시 기득권을 가진 종교지도자들(지배층)을 통하여 ‘귀신들린 자’로서 낙인이 찍히게 되고 결국 제도권의 희생물로 사라진다(cf. 눅 23:2: 백성을 미혹케 함). 스데반(행 6:11-14)과 바울(행 21:28) 역시도 이러한 언도를 받는다.

    이러한 정치적/이념적 명명(命名)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엄한 보수적 성향을 가진 사회에 이러한 관례는 팽배하다. 우리의 정치판에서의 색깔논쟁이 바로 그러한 예다. 한국에서 한번 ‘용공주의자’ 혹은 ‘공산주의자/빨갱이’(정치판)나 ‘자유주의자’(종교판, 특히 보수적 기독교)란 말을 듣게 되면 그 사회에서는 기를 펼 수가 없다. 끝장이다. 물론 우리의 신학이 어떤 면에서 보수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보수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면 그것은 문제다. 사람하나 죽이기가 간단하다.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들린 자’로 ‘백성을 미혹케 하는 자’로 찍혀 그 사회 속에 제거된 것(제도권의 희생물이 된 것)을 볼 때 우리 역시도 이러한 정치적 행각을 하지 않아야 겠지만 그러나 또한 중요한 것은 복음을 위하여, 올바른 성경적 진리를 위하여 살다가 이런 부류로 낙인찍혀 고통을 당한다 하여도 그렇게 서러워할 필요가 없다. (기독교 역사에 이와 같은 전례들이 수없이 많다.) 왜냐하면 패역한 불신의 세계에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는 언제나 고난이 있기 때문이다(마 5:10; 벧전 3:14). 이점에 있어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훌륭한 도전과 위로가 된다.

    4.7 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혈류증 여인을 고친 이적기사(막 5:21-43)
    이 이적기사 역시도 앞에서 본 이적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소위 유대정결법에 의해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된 혈류증 여인에게 접촉됨으로써 외견상으로는 - 그 당시 정결법상으로는 - 부정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부정함(혈류병)을 치유(깨끗케 함)하셨다. 그리고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의 손을 잡고(부정케 됨) 일으키심으로써 그 딸이 죽음에서 살아났다(41-42절).

    4.8 정결규례와 수로보니게 여인(막 7 장)
    이 단락에서의 논쟁의 시발점은 예수의 제자들이 ‘손 씻음’의 정결규례를 어긴 일이었다(7:1-5). 결국 이 논쟁(“부정한 손으로 [거룩한] 떡을 먹을 수 있나?”)은 참된 정결규례의 준행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예수는 그들의 외식을 지적(6-13절)하시면서 참된 정결은 ‘밖’(외관)의 문제(입술이나 손)가 아니고 ‘안’(내면)의 문제(마음)임을 지적하신다(17-23절). (여기서 우리는 ‘밖’과 ‘안’[속]에 대한 언급이 본문에서 여러 번 반복됨을 유의하라.) 특히 7:20-23은 내면의 정결이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시사해 준다: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또한 이 구절들은 참된 정결이란 내면과 함께 도덕적 삶인 것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21-22절은 십계명 중 [5]6-10계명들을 어김에 대한 죄들을 지적하고 있다(Neyrey 1986:120).

    그리고 이어지는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가진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이적기사(7:24-30)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란 외견적인 혈통으로 이어지는 백성(유대인/자녀들)이 아니고 비록 이방인(수로보니게인/개들)이라 할지라도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내면의 변화를 가진 백성이면 된다는 점을 잘 시사해 준다. 결론적으로 초반부에 제기된 “부정한 손으로 [거룩한] 떡을 먹을 수 있나?”의 논의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기사를 통해서 ‘예’(yes)로 답변되어 진다. 즉 회개와 믿음으로 나아온 백성은 그가 이방인(부정한 사람)이라 할 지라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막 7 장의 단락이 두 급식이적기사들(6:30-8:13) 사이에 위치하는데 전반부의 급식이적(6:30-44)은 유대지역이 일어난 ‘급식이적’(열 두 바구니 남음)이고 후반부의 급식이적(8:1-13)은 이방지역에 일어난 ‘급식이적’(일곱 광주리 남음)으로 간주된다. 결과적으로 막 7 장은 하나님의 먹이심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되지 아니하고 이방인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짐을 자연스럽게 제시해 주는 근거가 된다. 결국 참된 정결은 내면(‘안’/‘속’)의 문제이고 도덕적인(윤리적인) 문제임을 시사해 준다.

    4.9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거함(막 14:3)
    어떻게 다가오는 거룩한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서 스스로를 정결해야 하는 사람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부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기거할 수 있는가? 예수는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기 위한 유월절 희생 양으로서의 대속적 죽음을 죽기 위해 예루살렘을 향하신다(막 10:32-34; 10:45).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성령으로 세례(깨끗케 함)를 주시는 분이시다. 세례 받으심을 통해 입증된 것처럼 예수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하늘휘장을 찢고 이 땅에 강림하신 분으로서 그의 죽음은 바로 이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들과 영구적으로 거하심의 완성을 보여준다. 그는 많은 이적사역들을 통하여 사람들을 온전케/깨끗케 하셨고, 죄를 용서하셨고 그리고 부정한 자들, 죄인들(과 세리들), 그리고 죽은 자들을 만지심으로써 그들을 깨끗케 하신 분이시다. 예수는 온전함과 거룩을 주시는 거룩의 원천이시다. 특히 그의 대속적 죽음은 바로 그가 이러한 거룩의 원천임을 입증하신 사건이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는 결코 정결법을 파괴하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원리 하에서 정결을 완성하셨다. 그의 정결의 관심은 외관이 아니라 내면 즉 마음에 있었고 그리고 그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으로 나타나야 함을 강조하셨다. 이처럼 마가복음에서 정결법에 대한 이해는 예수의 모습을 바로 이해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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