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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평: 시편의 기독론적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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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평: 시편의 기독론적 설교

    이태훈 교수(개혁신학교 구약학)


    먼저 내게 논평을 맡기신 김정우 교수님께 감사를 표한다. 개인적으로 김정우 교수님은 내게는 신학의 대 선배님으로서 내가 신학을 시작할 무렵에 이미 석사과정에 계시며 많은 지도를 내게 해 주셨던 분이다. 그는 신학교 시절 나에게 여러모로 유익한 말씀들을 해주시며, 특히 정신적으로 어려울 때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다. 이런 면에서 김 교수님은 논평자가 존경하는 선배이며, 특히 그의 성실과 학문활동은 내게 큰 귀감이 되는 분이다. 이런 분의 글에 논평을 한다는 것이 내게 과분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러나 그의 글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우며, 그 가운데 몇 가지 질문을 던진다는 입장으로 나의 논평을 전개하려 한다.

    1. 논문의 개요

    김교수님은 “시편의 기독론적 설교”라는 제목으로 쓴 이 논문에서 모든 시편은 기독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시편의 기독론적 해석은 예수가 친히 세우신 방법이며 (눅 24:44), 초대교회부터 이 방법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열심히 사용되어온 방법이라고 얘기한다.
    *“예수께서 보실 때에 시편 (전체시편)은 분명히 그리스도이신 자신을 증거한다. 이리하여 그는 자신의 메시야적 사역을 구약에서부터 증거하기 위해 많은 시편을 인용하셨다. (1쪽)”.
    *“……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기독교회의 영원한 임무요 또한 과제임을 보여준다. (1쪽)”
    그러나 그는 모든 시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둘 사이를 연결시키는 방법론은 아직 불완전하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불완전을 극복하여 시편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함에 있어 새로운 해석학적 파라다임을 발견하여 제시하려는 시도를 그는 이 논문에서 하고 있다. 그는 이 방법론적 난제를 “정경적 해석법(canonical criticism)”이라는 방법론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한다. 우리는 초대교회부터 이미 시편의 메시야적인 해석방법론에 익숙해 있는데, 우리는 이제 이 “정경적 해석법”을 통해 어떤 새로운 해석학적 구도를 대하게 될지 흥미진진해 지는 것이다.

    그는 이 정경적 해석의 원리를 왈키를 빌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경적 해석에서 왈키는 어떤 본문의 1) 원저자의 의미, 2) 정경수집기의 의미, 3) 정경이 완성된 후의 의미, 4) 신약에 인용되어 사용된 최종의 의미 등의 단계를 나눈다. 그러나 여기서 그 본문의 의미는 서로 유기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단계 사이에 상충되지 않고 나중으로 단계로 갈수록 그 의미가 더욱 명료해 진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신약에 인용된 본문의 의미가 가장 명료한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신구약) 정경 완성 후의 의미가 최종적인 의미를 갖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입장에서 그는 시편의 기독론적 해석을, 물론 신약의 시편인용에서 출발하지만(2쪽) 주로 신약의 시편 인용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해 왔던 지금까지의 방법론과는 달리, 정경적 해석법을 통해 “신약이 시편을 인용하는 범위를 넘어서, 모든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쪽).

    그는 이 기독론적 해석을 신약에서 인용된 시편뿐 아니라 모든 시편에 적용하기 위해 인용된 시편을 통해서 모든 시편에 적용될 수 있는 어떤 ‘파라다임’을 찾으려고 한다. 그는 이 작업을 하기 위해 시편에서 선별적으로 1) 저주시(시 69; 109), 2) 애가(시 41; 22; 31; 34; 16), 3) 제왕시(시 2; 45; 72; 110; 18; 89)를 예로 들어 이들이 신약에서 어떻게 인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원래의 구약의 의미와 신약의 의미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 구약과 신약 사이의 ‘발판’을 살펴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시편의 “기독론적 해석의 근거는 (단지) 신약에 있으며”, 그러나 한편 “신약의 시편 인용은 결코 종합적인 것이 아니라 파라다임적이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런 파라다임적인 관찰을 통해 그는 1) 신약에 인용된 시편구절이 기독론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아, 2) 그 구절을 담고 있는 시도 역시 기독론적으로 이해해야 하며, 3) 더 나아가 그 시가 속한 장르전체, 4) 그리고 최종적으로 시편 전체가 기독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논리의 연결고리를 그는 시편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 근거를 주는 파라다임으로 부르는 것 같다.

    2. 몇가지 질문들

    1) 필자는 신약의 시편 인용에서 어떤 통일성 있는 해석의 원리를 찾는데 2가지 사실, 즉 (1)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시편이 신약에서 기독론적으로 해석되고 (시 69등 저주시?, 6-7쪽), (2) 기대되는 시편이 그 반대라는 사실(시 72?)에 당황한다고 했는데, 이 “기대”에 대한 기준이 어떤 것이었는지, 기대에 어긋나는 시들을 구체적으로 좀 더 많은 예를 들어 언급해 주셨으면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된다(2쪽).

    2) 그는 논문의 제한상 “저주시, 애가, 제왕시”에 국한하여 살펴본다고 했는데 이 장르만 특히 살펴보는 어떤 이유가 혹시 있는지?(3쪽) 제왕시는 우리에게 메시야적으로 친숙해 있으므로, 오히려 애가와 대응되어 시편에 많이 나오는 찬양시를 예로 들어 주셨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후에 찬양 시를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 기회를 갖게 해주시리라 기대된다.

    3) 시편 쟝르에서 “저주시”란 장르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지? 이 장르는 궁켈의 장르구별에 나타나지 않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독립된 장르로 여겨지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장르를 단지 애가 중에서 정죄의 기도가 좀 더 많이 나오는 애가의(탄식시: Klagelieder) 한 종류 (Untergattung)로 생각해서 그 장르를 애가에 포함시켜야 하지는 않을지? 그리고 저주시라는 독립된 장르가 존재한다면 그 장르가 다른 장르, 특히 애가와 구별되는 특징은?(3쪽 이하)

    4) 시 69:21의 시편 인용에서 저자는 이 의미가 시편의 배경에서 살펴볼 때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지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구절은 예수의 고통을 감해주기 위해 “쓸개 탄 포도주”를 주는 것으로 해석하나, 시편에서는 이것을 적대감을 가지고 대적자들이 시편 기도자에게 주는 것으로, 즉 시인의 대적자들의 행위에 대한 탄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시편의 배경에서 우리는 이것이 예수에 대한 적대적 행위 즉 예수의 고통을 감하는 것이 아니라 증가시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시편의 원래 의미를 신약에 잘 적용하여 신약과 구약의 의미간의 거리를 좁히는 좋은 예로 생각된다.(6쪽)

    5) 필자는 특히 저주시에서 원수를 저주하는 모습과 이것이 신약에서 메시야적으로 사용될 때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의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한다. 그래서 그는 이 저주시도 “구약적 영성”을 갖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저주 시편도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이런 면에서 저주시에도 기독론적 해석의 발판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시편의 입장을 이같이 신약의 틀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 시편의 내용을 신약에 맞게 뒤튼다면 이 저주시에 나타나는 한 이스라엘 개인이 그 사회 속에서 겪는 갈등, 미움, 고난등 우리가 갖는 원초적인 인간의 감정의 표현들이 희석되어 오히려 구약의 의미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을지? 왜냐하면 저주시에서 기도자가 간구하는 것은 자신을 망하게 하려는 적들에게서 자신을 건져달라는 기도이며, 이것이 원수들을 망하게 해달라는 것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이상적인 윤리와는 다른 인간의 본연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원초적인 모습과 예수의 고도의 윤리 사이를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 것인가에 대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구약에 신약의 색깔을 칠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구약의 원색적인 모습을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더 친근하게 시편의 의미가 다가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면에서 신약과 구약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구약의 의미를 고급화하기(?) 보다는 그 거리를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저급화하는(?) 것이 더 객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7쪽)

    6) 저자는 시편 41과 51에서 이 시편을 유대교와 초대교회가 했듯이 다윗의 시로 여기고 “예수 - 다윗, 유다 - 아히도벨” 이라는 대적의 등식을 세워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시편의 타이틀, 특히 다윗의 시라는 타이틀이 다윗의 저작을 반드시 가리킨다고 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를 다윗의 생애에 비추어, 또 그 결과를 신약에 적용하여 해석하는 것이 상당한 어려움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시편의 타이틀과 신약의 인용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해석의 적용을, 즉 해석의 변천을 정경화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해석의 변천으로 적극적으로 이해한다면(이것이 정경적 해석법?), 그리고 최종의 정경에서 나타나는 최종의 의미를 중요시 여긴다면 이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9쪽)

    7) 저자는 시편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단순한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시편의 기독론적 해석의 근거를 신약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면서 신약의 시편 인용이 결코 종합적인 것이 아니라 “파라다임”적이라고 말한다 (21쪽). 이 신약에 인용된 구절 → 그 구절이 나오는 시 → 그 시가 속한 장르 → 시편 전체로 연결되는 고리가 혹시 과장된 논리는 아닌지? 그리고 논평자가 이해하기에 이 파라다임의 연결 논리 외에 그 파라다임의 구체적인 내용은 결여된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아울러 그는 이 파라다임을 발견하는 정경적 해석법의 전제로 “1) 구약과 신약의 고유한 의미는 훼손되어서는 안됨, 2) 둘 사이는 유기적 조화와 통일성을 이룸, 3) 둘 다 그리스도 중심적임 (3쪽)”을 들고 있다. 그러나 어떤 방법론에서 이미 전제를 두고 제한을 한다면 이것이 Dogma가 되 버리고 따라서 객관적인 방법론에 장애가 되는 것은 아닌지?

    8) 그리고 그는 이 파라다임 속에서 신약과 구약간의 거리를 충분히 인식해야 하며,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갈 수 없는 캡슐들은(구약의 본문들 혹은 사상들은?) 바다에 떨어뜨릴 것을 얘기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루터가 주장했듯이,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만을(Was Christum treibet)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것은 시편에서 그것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Kanon im Kanon을 찾는 새로운 시도가 되지는 않을지? (21쪽)
    이런 어려움에 직면해서 오히려 우리는 시편의 기독론적 해석을 신약의 인용에 제한해서 신약의 해석에만 의존하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추측을 덧붙이는 것보다 더 객관적이지는 않을지? 이것이 오히려 시편해석의 Allegorie화를 막는 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을 Allegorie 해석이 주가 되는 “설교”라는 장르에 적용할 때는 이 논문에서 서술된 방법론이 충분한 적용성을 가지는 것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편의 기독론적 설교”라는 제목은 이런 내용에 충분한 타당성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겠다.

    9) 이런 파라다임 속에서 우리가 모든 시편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도움으로 신약에 인용된 시편은 사실 일상적인 것이고, 또 기독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충분한 토대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그보다 신약에 인용되지 않는 시편들을 어떻게 기독론적으로 해석할 수 있을지를 보여준다면 우리에게 보다 더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은 후에 우리에게 계속 발표해 주실 것이라 기대된다.

    3. 마치는 말

    현대의 구약학 특히 시편 연구에서 그 본문 해석의 배경으로 신약보다 고대근동(이를 연구하는 학문을 Altorientalistik이라 부른다. 이전에는 Assyriologie라 불렀으나 이 용어의 편협성 때문에 W.von Soden 이후로 이같이 부르게 됨)을 더 가깝게 여기는 것이 사실이다. 이 같은 현실에서 구약해석에 있어 신약을 이용하는 비중이 현저하게 줄어들었으며, 심지어 많은 학자들에게는 거의 전무하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이 같은 현실을 비추어 볼 때에 시편을 신약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기도 하지만, 한편 그 동안의 시편 연구에서 열매를 맺은 많은 결과들, 특히 시편의 사용처소(Sitz im Leben)로 많은 학자들이 “제의(Gottesdienst)”를 들고 있는데, 이 방법론이 혹시나 시편의 독특한 사용과 그의 의미를 밝히게 된 지금까지의 연구의 결과들을 다시 거꾸로 돌리는 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시편 연구로 인해 시편이 메시아적 해석에서 많은 자유를 얻어(Emanzipation) 자기자신의 색깔들을 내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서 시편 전체를 메시야적으로 해석하는 시도는 시편의 해석을 오히려 제한하고 편협화하는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을지? 이런 면에서 필자도 “구약의 의미와 신약의 의미 사이에 충분한 거리”를 인식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1쪽).
    그럼에도 우리는 신약에서 시편의 많은 부분들이 메시야를 증거하는 본문들로 인용되고 있는 사실을 본다. 이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런 예를 시편 해석의 유일한 모델로 보아(pars pro toto) 모든 시편이 메시야를 증거한다는 결론을 유추해 낼 것인가? 그러나 그러하기에는 신약에 인용되지 않은 많은 시편들이 있으며, 또 필자가 지적한대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본문이 신약에서 기독론적으로 해석되고, 또 기대되는 시편은 오히려 인용되지 않는” 어려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쉽게 이야기해서 우리는 어떤 시편이 신약에서 기독론적으로 인용되어 해석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과연 전이해 없이 그 본문을 기독론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난제를 정경적인 해석법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러나 짧은 지면 때문인지 그 방법론만의 독특한 점이 잘 나타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앞으로의 글을 통해 더욱 자세하게 우리에게 서술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왈키의 정경적 해석을 인용하면서 1) 원저자의 의미, 2) 정경수집기의 의미, 3) 정경 완성 후의 의미, 4) 신약에 인용될 때의 의미를 나누며 이 사이에는 유기적인 통일성이 있으며, 이 발전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 정경적 해석의 과제인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에서 성경의 본문은 많은 해석 과정의 단계를 거쳤으며, 그 단계를 거칠 때마다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갖게 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를 과장해서 얘기한다면, 시편의 어떤 본문은 신약에서 인용될 때 원저자의 의미와는 달리 새롭게 해석되었던 것은 아닌가? 우리는 시편의 새로운 해석들을 (일부의) 제목에서(제목은 원래 시편에 붙어 있던 것이 아니고, 후대의 편집인에 의해 붙여진 해석적인 결과이다) 볼 수 있듯이, 또 랍비의 문헌들에서 시편의 유대적인 해석을 보듯이, 신약에서 기독교적인 해석을 보게 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이 신약에서의 단편적인 해석을 시편전체에 적용할 이유가 있을까? 이것은 시편의 부분을 신약에서 해석한 신약적 해석으로 만족하는 것이 더 이성적인 것이 아닐까?

    이런 면에서 우리는 시편을 기독론적으로 이해할 때 가능한 한 신약에서 인용된 본문에 제한을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며 우리는 오히려 시편에서 그의 고유한 배경과 의미를 박탈하고 그 해석을 빈곤화시키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논문제목에서 보듯이 이 메시야적 해석이 설교라는 특별한 장르에 적용될 때 이러한 해석 방법은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다고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설교에는 어차피 Allegorie라는 해석 방법이 중요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모든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전하여야 한다 (22쪽)”는 당위성보다는, 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이 지나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는 이 가능성을 필자가 주장한 정경적 해석에서 보았듯이 시편의 본문이 다양한 단계를 넘으며 새로이 해석되었다는 것을 주목하게 된다. 필자는 전혀 기대치 못한 저주시 (69편)도 기독론적 설교에 사용되었다면 더 나아가 모든 시편에서 우리는 더욱 기독론적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이 말에서 우리는 시편의 원래의 배경이 전혀 기독론적이지 못한 본문이 신약에서 기독론의 옷을 입고 새롭게 태어났다(해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메시야적이지 못한 본문이 신약에서 메시야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14쪽 참조). 우리는 이 같은 과정을 단순한 재해석의 차원을 넘어 본문의 재형성(Reform)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약에서 시편의 본문을 재형성하여 그리스도에게 현재화 시켰다면, 우리는 그 원리를 따라 (과거의) 시편의 본문들을 재형성하여 그리스도 이후의 우리에게 현재화시키는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