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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과 서사적 설교”에 대한 논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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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과 서사적 설교”에 대한 논평

    김영봉 교수(협성대 신대원, 신약신학)

    어림잡아 1950년대에 발전된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은 약 20여년간 복음서 비평에 큰 공헌을 하면서 점차로 발전해 왔다. 편집비평 연구의 결과, 학자들은 복음서 저자들이 무시하지 못할만한 문학적, 신학적 의도를 가지고 복음서를 썼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러한 배경에서 본문에 반영되어 있는 복음서 저자들의 문학적 작업들을 살피게 되었다. 편집비평이 처음 시작할 때에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복음서 저자들의 문학적 창조성이 그렇게 많이 작용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구가들은 본문 안에 있는 단편적인 흔적들에 초점을 맞추어 복음서 저자의 문학적 의도를 밝히려고 하였다. 하지만 편집비평적 연구가 계속되면서 연구가들은 복음서 저자의 문학적 창조성이 과거에 생각했던 것처럼 단편적이거나 제한적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들의 문학적 창조성이 점차로 강하게 강조되었고, 마침내는 “구성비평”(composition criticism)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 초기의 편집비평이 본문 안에 있는 작은 단서들에 천착하여 저자의 문학적 성격을 판단한 반면, 구성비평은 하나의 복음서를 전체로서 보고, 문학적인 분석을 하려고 하였다(대표적인 연구서가 Talbert 1982이다).
    그러나 구성비평의 수명은 매우 짧았다. 그래서 구성비평이라는 연구 방법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그리 흔하지 않다. 왜 그런가? 구성비평이 이야기될 즈음, 학자들은 편집비평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문학비평”(literary criticism)을 이야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Petersen 1978). 다시 말하면, 구성비평은 편집비평으로부터 문학비평으로 넘어오는 다리의 역할을 하고 사라진 것이다. 그리하여 편집비평의 시대는 가고, 문학비평의 시대가 7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기에 이르렀고, 지금은 온통 문학비평이 지배하고 있는 형국이다. 물론, 문학비평이 절대적이고 완전한 수단은 되지 못한다. 문학비평은 그 이전의 역사비평방법에 의해서 여러 가지 면에서 보완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문학비평은 이 시대의 전반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가장 좋은 해석 방법으로서 그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금 필자는 “문학비평”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 용어는 다양한 비평 방법들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이다. 문학비평이라는 것도 자세히 나누면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포웰 1990, 35-51). 그 중에서도 오늘날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법이, 우리말로 “서사비평”이라는 용어로 굳혀져 가고 있는, narrative criticism이다. 이 비평방법은 신학의 한 방법으로서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는 narrative theology와 함께, 최근의 가장 중요한 신학적 흐름을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설교학에까지 영향을 줌으로써, 설교학자들 사이에 narrative preaching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다.
    심상법 교수께서는 이러한 최근의 흐름들을 매우 자세히 그리고 알기 쉽게 안내를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린다. 서사비평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서사 비평의 이론적 배경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체적인 적용까지 실제로 행해 보임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서사비평의 이론과 실제에 대하여 잘 소개받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사실, 서사비평도 깊이 들어가면 매우 복잡하다. 특히 화자(narrator)와 저자(the author)와 내재적 저자(the implied author)에 대한 논의는 항상, 알듯 모를 듯,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심교수께서는 일반 독자를 위해서 이러한 세부적인 부분에 대하여 과감하게 생략하고, 일반 설교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안내를 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독자는 서사비평에 대하여 “쉽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사실, 서사비평을 포함한 모든 문학비평의 근본적인 의도 중 하나는 독서 행위를 좀 더 쉽게 하자는 데 있다. 지난 3백년 동안을 지배해 왔던 역사비평방법이 너무나도 어렵고 지루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좀 더 쉽고 친숙한 읽기 방법을 찾아 나선 것이고, 결국 문학비평이 그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하지만 일부의 비평가들이 이 방법을 너무나도 어렵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또 다시 일반 독자에게서 멀어져 가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심상법 교수님처럼 이 방법을 아주 손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소개하는 노력은 문학비평의 근본적인 취지와 일치한다.
    심교수님의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며, 이 논문을 읽고 난 후에 떠오른 몇 가지 생각들을 내보이는 것으로 논평을 대신하려 한다.
    첫째, 심교수께서는 story와 discourse의 차이를 구별하기 위해서 애를 썼다. 이것은 서사비평을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하나의 전제이다. 복음서 저자가 주어진 이야기(story)를 새로운 상황에서 어떻게 이야기(discourse)를 하고 있는가? 그렇게 이야기를 함으로써 저자는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곧 서사비평의 관심이다. 그런데 이러한 서사적 비평에 근거를 둔 서사적 설교(narrative preaching)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 점에 대하여 심교수께서는 별로 지면을 할애하지 않았다. 논문의 제목은 “마가복음과 서사적 설교”라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 내용은 “마가복음에 대한 서사비평의 한 예”라고 하는 편이 더 옳게 보인다. 우리는 어떻게 서사적 비평으로부터 서사적 설교로 넘어가는가? 그것이 설교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문제에 대하여 충분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다. 마치 서사비평만 잘 하면, 서사적 설교는 대부분 이루어지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복음서의 본문이 복음서 저자에 의해서 “다시 이야기된”(retold) 이야기(discourse)라면, 오늘의 설교자는 그것을 오늘의 상황에 맞게 다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미 사용된 복음서 저자의 문학적 기법들이 다시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고, 새로운 문학적 기법이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오늘의 설교자는 과거에 복음서 저자가 했던 것과 유사한 과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복음서 저자가 주어진 이야기를 그 당시의 청중의 삶의 자리에 맞게 다시 말했다면, 오늘의 설교자는 그 복음서 저자의 도움을 받아, 똑 같은 이야기를 오늘의 삶의 자리에 맞게 또다시 말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서사적 설교는 상당한 수준의 문학적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심교수께서도 이러한 문학적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 안에서 “다시 말함”의 과정을 분별할 수 있는 문학적 상상력, 그리고 그 이야기를 오늘의 회중의 이야기로 다시 풀어낼 수 있는 문학적 상상력--이런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서사적 설교의 성패는 바로 이 문학적 상상력에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문학적 상상력은 성령의 영감이 작용하는 한 방법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심교수께서는 “설교가 성서적(biblical)이 되기 위해서는 설교 형식(form)도 역시 성경 본문의 형식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문학비평가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필자는 이 주장을 처음으로 접했을 때부터 완전히 설득되지 않았다. 물론, 설교의 형식 중에서 서사적 설교 혹은 이야기 설교는 나름대로의 강점을 가지고 있다. 필자 자신도, 기존에 행해지는 설교 유형들 가운데 이야기 설교 혹은 서사적 설교가 가장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본문의 형식(form)을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비성서적”(unbiblical)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다.
    아무리 양보를 해도, 형식은 역시 변수라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본문의 메시지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형식이 가장 좋은 형식이지, 본문의 형식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형식이라는 말은 인정될 수 없다. 가급적이면 그 형식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은 성립할 수 있으나, 그 이상은 곤란하다. 이야기 형식의 본문(narrative text)도 필요에 따라서는 주제식으로 설교할 수도 있고, 단순한 윤리적 명령을 이야기 형식으로 설교할 수도 있다. 그 윤리적 명령과 관계 있는 어떤 일화나 체험을 중심으로 설교를 꾸미면, 그것도 역시 서사적 설교 혹은 이야기 설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세 번째의 지적으로 넘어가는데, 그것은 서사적 설교가 굳이 본문에만 매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서사적 설교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모범을 보여준 분이 바로 예수이시다. 그분은 설교를 함에 있어서 구약의 이야기를 별로 사용하지 않았다. 아마도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가 하나의 예외일 수 있다. 그것은 이사야의 비유를 이용하여 새롭게 만든 것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외의 대부분의 비유들은 그분이 스스로 만든 이야기들이다. 그분은 탁월한 이야기꾼(story-teller)이었다. 이야기를 잘 만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말하는 데도 뛰어났다. 그분의 이야기는 단순한 심심풀이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삶에 대하여 새로운 비전을 열어 주는 이야기였다. 그의 이야기들 가운데 청중으로 하여금 깜짝 놀라게 하지 않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예수의 전통을 따른다면, 굳이 성경의 본문에 매일 필요가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이나 우리가 만들어 낸 이야기가 신앙적인 진리에 대하여 날카로운 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그것들을 얼마든지 설교로 만들 수 있다. 문제는 그러한 이야기를 우리가 별로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또한, 그러한 이야기를 신앙적인 진리에 적용할 수 있는 문학적, 신학적 창조력이 부족한 데 있다. 그런 능력만 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설교의 가능성에 대하여 심교수께서도 잠깐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에 부연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에 대하여 우리가 우리 자신을 열어 놓고 있으면, 우리는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있지 않은 본문에 대해서도 서사적 설교를 구성할 수 있다. 설교자가 이야기 설교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회중이 그러한 설교 형식을 좋아한다면, 설교자는 어떤 본문에서도 이야기 설교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설교자는 풍부한 이야기 창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설교자의 많은 독서와 간접 체험은 매우 중요하다. 다만, 우리의 회중이 성경의 이야기를 가장 잘 알고 있고 가장 권위 있다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성경의 이야기를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로는 전혀 설명될 수 없는 경우,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서사적 설교 혹은 이야기 설교는 이러한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에게 있어서 하나의 “해방의” 소식으로 들리게 된다.
    넷째, 심교수께서는 마가복음 3장 1-6절에 대한 서사적 분석을 실제로 해 보이고 있다. 이 이야기를 심교수께서는 “기적 이야기”(miracle story)라기보다는 “논쟁 이야기”(controv ersy story)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 점에 있어서 동의한다. 이 이야기가 논쟁 이야기라는 점은 이미 양식비평학자들이 인정을 해 왔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 대한 장면 분석은, 자세히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기적 이야기로 보면 5절에서 종결이 된다.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5절)는 말은 하나의 완전한 완결을 의미한다. 그런데 6절에서 화자는,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 하니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것은 앞에서 진행되었던 갈등의 해소가 아니다. 오히려 갈등의 증폭이다. 따라서 6절에서 “종결” 혹은 “대단원”을 보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심교수께서 그리신 구도의 곡선은 기적 이야기에 해당하지 논쟁 이야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논쟁 이야기로 이 이야기를 읽을 때, 구도의 선은 상승과 하강으로 그려지지 않고 오히려 점층적인 구도로 올라간다. 따라서 갈등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다. 앞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심교수께서 본문을 볼 때 너무 원자론적(atomistic)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심교수께서 선택한 본문은 2장 1절부터 시작되는 일련의 논쟁 이야기의 하나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그리고 예수를 죽이기로 한 대적자들의 결의는 복음서의 후반부에서 실행되고, 그 문제는 결국 예수의 부활로써 해결된다. 따라서 심교수께서는 선택된 본문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이 분석하고 있을 뿐, 좀 더 넓은 문학적 맥락에서 이 본문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본문의 문학적 차원이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아쉬움이 있다.
    본문의 이야기를 논쟁 이야기로 보고 해석하고 설교를 한다면, 마땅히 그 이전에 진행되었던 논쟁에 대한 언급도 있어야 할 것이며, 죽이기로 한 그들의 결의가 어떻게 실행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언급이 되어야 할 것이고, 그 갈등이 어떻게 해결되었는가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의 대적자들은 예수를 죽임으로써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고 그들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은 그 반대였다. 죽이기로 결정했던 그들이 죽었고(졌고), 죽음을 당했던 그분이 결국 부활로써 승리하였다. 이 이야기의 진정한 종결은 16장의 부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이야기는 마가복음 전체의 구도 안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사실, 하나의 단화를 복음서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보려는 것도 문학비평 혹은 서사비평의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이다. 그 동안의 역사비평방법은 본문을 너무 원자론적으로 보고, 본문을 너무 세부적으로 나누는 데 관심을 기우려 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복음서 전체 안에서 작용하고 있는 내면적인 역동성(dynamics)을 보지 못하였다. 현재 제기되고 있는 문학비평은 이러한 차원에 대하여 인식하고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다시 원자론적으로 선택된 본문만을 초점으로 삼는다면, 문학비평의 근본적인 취지를 위배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이런 점에서 좀 더 거시적이고 통전적인 읽기가 보완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상은 심교수님의 옥고를 읽고, 문학비평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제기할 수 있는 몇 가지의 “군말”이다. 이러한 군말은 결코 심교수님의 명쾌한 안내의 진가를 깎아 내릴 수 없다. 필자에게 논평이라는 과제가 주어졌기 때문에 굳이 제기한 지적일 뿐이다.
    심교수께서 지적했듯이, 성경에 대한 서사비평은 성경을 제대로 읽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좋은 대안으로서 다가온다. 서사비평에 근거한 서사적 설교 혹은 이야기 설교는 설교자들에게 설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서사적 설교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만능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성경 읽기의 새로운 눈을 열어 주고, 설교에 있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서사비평과 서사적 설교학이 제공하고 있는 새로운 은사(gifts)를 기쁘게 받아들여 목회 현장에서 성실하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심상법 교수께서 언급하고 있는 참고문헌들이 서사비평과 서사적 설교에 대하여 좋은 안내를 해 주기에 충분하다. 본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몇 개의 책들은 심교수께서 언급하지 않았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Petersen, Norman R. 1978. Literary Criticism for New Testament Critics. Philadelphia: Fortress.

    Powell, Mark Allan. 1990. 서사비평이란 무엇인가? 이종록 옮김. 서울: 예장 총회 교육부.

    Talbert, Charles H. 1982. Reading Luke: A Literary and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Third Gospel. New York: Crossroad.

    서사비평의 이론과 실제와 설교의 예까지 포함하고 있는 좋은 안내서로는 다음을 참고하라.

    Culpepper, Alan. 1992 \A Literary Model\ in Hermeneutics for Preaching, ed. by Raymond Bailey. Nashville: Broadman. pp. 77-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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