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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사랑방 칼럼 - 그리스도의 거처와 크리스챤들이 거할 곳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 설교자:

    본문

    사랑방 칼럼


    그리스도의 거처와 크리스챤들이 거할 곳

    \누가 주님을 홈리스(homeless)로 만들었는가?\



    김우영




    시카고의 11월 초는 제법 쌀쌀한 겨울 날씨이다. 그러나 아침 일찍 시카고의 미시간 호숫가에 나가 보면 공원 벤치나 나무 밑 잔디 위에서 비닐 천을 뒤집어 쓰고 주위의 분주한 삶의 소리들을 외면한 채 잠을 자고 있는 \홈리스 피플(homeless people)\들을 보게 된다. 나는 갑자기 예수께서도 \홈리스\였다는 어느 저자의 글이 생각나서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성구를 묵상해 보았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우리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정말 그 말씀대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육신의 거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뜻을 알리시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을까? 나는 주님께서 정말로 자신의 거처가 없었다면 자신의 거처가 없다는 것을 일부러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 뿐만 아니라, 주님이 베푸신 기적으로 병 나음을 입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고, 또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주님이 그들을 피해 도망 다니시는 판국에 주님에게 잠자리조차 없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초옥 한 칸 쯤은 마련해 드릴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자신의 육신의 거처가 없다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보다는 자신을 따르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알려주고 싶은 내용을 담고 있을 것이다.



    가버나움에 거처를 정하시다



    사실 주님에게 자신의 거처(집)가 있었다는 것은 여러 군데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주님이 한 가정의 장남이자 목수로서 그의 아버지 요셉과 어머니 마리아, 그의 동생들을 위해 가계를 도왔다면, 주님 홀로 가버나움으로 옮겨 공생애의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홈리스\로서 아무 데서나 주무시고 문전 걸식을 하시면서 사역을 시작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리고 30대의 건장한 청년 예수께서 한 칸의 집을 마련하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텐데 자신을 따르기 위해서 \배와 그물과 아버지와 일꾼들 마저 버린 제자들\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신다는 것은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주님께서는 자신이 거처하는 가버나움(마 4:13)을 \본 동네(his own city)\라는 말로 표현하셨고(마 9:1을 비롯해 여러 번 나온다),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막 1:33; 2:1, 2)\라는 말도 주님이 거처하시던 집 문 앞이라는 걸 짐작하게 한다. 주님은 주님이 계신 집 지붕을 뜯어 병자를 아래로 내리는 사람들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셨지만, 지붕이 뜯어진 것을 신경 쓰시지 않은 것을 볼 수가 있다(막 2:4). 만약에 이 집이 제자들의 집이었다면 무리하게 지붕을 뜯는 사람들에게 한 마디라도 했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또 다른 면으로 본다면 이 집이 제자들의 집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음식을 잡수셨다고 하신 곳은 \마태의 집\(마 9:10)이라고 밝히셨고 또한 회당에서 나와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워 있어서 치료하시러 들어가셨을 때는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막 1:29)\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물론 \온 동네가 문 앞에(at the door) 모였다\는 말을 베드로의 집 앞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이 \홈리스\였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온 가족들이 찾아간 주님의 거처



    그러나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자신의 거처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보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가나 혼인 잔치와 관련된 사건이다.

    예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초대를 받아 가나 혼인 잔치 집에 가신 적이 있었다. 성경에는 그들이 잔치 집에서 나와 다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거기서 며칠을 묵었다고 기록되 있다(요 2:12).

    사실은 주님께서 유월절이 가까워지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가실 계획이었으나(요 12:13), 가나 혼인 잔치 이후 가버나움으로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다. 아마도 가족들이 예수님의 집을 방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거기 여러 날 계시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아마도 주님께서 곧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셔야 하기 때문이었겠지만 조그마한 초옥에 그 많은 식구가 한꺼번에 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자신의 집이 없는데 제자들의 집으로 그 식구들을 데리고 가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거리 상으로도 가나에서 남쪽으로 나사렛까지는 삼십 리 정도 되지만 가버나움까지는 방향이 다른 동북쪽이고 거리도 배나 먼 곳이다. 이렇게 먼 가버나움을 일부러 방문한 것에서 우리는 주님의 거처를 보고 싶은 가족들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주님께 집이 있었다고 주장할만한 일이 또 한 가지 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그의 스승의 소개로 주님을 좇으면서 그들은 \선생님,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는 \와 보라\면서 그들을 데리고 자신의 거처로 가서 그 날을 그곳에서 함께 지냈다(요 1:35-39).

    이렇게 말해도 주님은 \머리 둘 곳이 없었던\ 홈리스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또 주님께서 집에서 병자를 고치시는 사역을 하시면서 왜 자기 집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고 이의를 제기할 수가 있을 것이다.

    주님께선 어릴 때부터 성전을 하나님의 집이며 자신의 집이라고 말씀하셨지만(눅 2:39),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강도의 굴혈(마 21:13)\로 만들어 버린 다음에는 주님은 \내 집\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 집(마 23:38)\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집, 곧 성전이 주후 70년에 초토화된 것이 아니라 \강도의 굴혈\이 된 저희 집이 \돌 하나도 돌 위에 겹 놓이지 않고\ 다 파괴되어 버린 것이다.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 강도들의 집으로 변해 버렸다. 그렇게 되어 버린 형편을 미리 보시면서 가버나움에 있는 자신의 거처, 그것도 임시 거처를 \내 집\이라고 말씀하실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래, 주님은 홈리스도 아니었고 주님의 집이 가버나움에 있었다고 치자. 하지만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감상적인 설교의 재료는 되겠지만…



    그렇다. 내가 이것을 이야기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 사신 전후 형편을 보면 그가 \홈리스\였다는 것이 더 어울리고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기에도 좋을 것이다.

    사실 이 말씀(마 8:20)은 한 서기관이 \어디를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마 8:19)\ 라고 다짐하는 말을 듣고 그에게 하신 말씀이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두 제자들이 \어디에 거처하고 계시는지\를 물으셨을 때 그들을 자신의 거처로 인도하여 그 날 함께 보내셨던 주님이셨다. 그렇다면 자신을 따를 수 없는 서기관으로 하여금 자신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려고 자신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흔히 주님의 영적인 교훈을 이해하지 못해서 사실을, 혹은 진리를 너무나 엉뚱하게 육적인 것에 적용하기도 한다. 또 한 편으로는 주님께서 실제로 베푸신 모든 기적조차도 영적인 교훈으로만 해석하고 사실을 없었던 일로 치부해 버리려는 의도적인 경향마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성경은 있는 그대로 읽혀져야 한다



    그러기에 성경의 기록을 사실 그대로 보아야 한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바로 보아야만 주님의 마음과 영적인 교훈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주님은 가버나움에 그의 거처가 있었다고 보는 것은 주님을 감정적으로, 혹은 감상적으로 보지 않고 주님을 바르게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주님께선 자신을 바르게 보지 않는 사람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요한(세례)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마 11:18)\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11:19)\.



    그들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두 분의 삶을 저희 마음대로 비교하면서 감정적으로 주님을 비난했던 것이다. 주님을 비난하는 그들은 세례 요한이 했던 광야 생활도, 또한 주님께서 세례 요한과 다르게 사신 것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에 주님을 비난했던 것이다. 비난하는 그들의 말대로 세례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 것\과 \인자가 먹고 마신 것\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주님 자신에게는 그가 \홈리스\라든가 혹은 가버나움에 집이 있었다던가 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또한 그가 포도주를 즐기고 음식을 탐해서 여기 저기서 잘 대접을 받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는데\

    주님께서 진정 거처를 정하고 살고 싶었던 곳이 있다면 자기 백성들의 마음과 믿음으로 거듭난 그들의 영혼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태인들이 주님을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주님은 갈 곳도 거처할 곳도 없는 진정 \홈리스\였다. 무엇 때문에 그 서기관이 주님을 좇으려 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그는 주님의 말씀의 뜻을 곰곰이 새겨 들어야 했을 것이다.



    진정 주님이 거하고 싶은 곳은 어디일까



    주님은 진정 내 속에 들어와 거하시고 싶은데 나는 엉뚱하게 주님을 닮아 \홈리스\가 되어야 한다며 일부러 거지 노릇을 한다면 주님께서 나는 \홈리스\라고 말씀하신 영적인 의미를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어줍잖게 나 자신이 주님의 흉내를 내는 결과가 되지 않겠는가?

    사실 주님이 부르셨을 때 제자들은 부모, 형제, 친척 그리고 그물과 배를, 곧 그들의 가업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와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도 고쳐 주셨다. 사도 바울의 말 대로라면 다른 사도들이나 베드로도 아내를 데리고 다니며 복음 사역을 했다는 걸 알 수가 있다(고전 9:4,5). 그들이 주님을 따르면서 다 버렸다고 했는데 그들의 집과 아내가 그대로 있지 않은가? 그들이 주님을 따르면서 모든 것을 다 버렸다는 말의 실제적인 뜻은 무엇인가? 영적 의미가 있다면, 그들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 영적인 의미가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주님께서 \홈리스\였으니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홈리스\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거처가 있으면서도 \머리 둘 곳도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실제적인 삶과 주님의 말씀은 다르게 적용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교리 상으로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없는 것인지, 공연한 문제를 가지고 나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홈리스였다\고 말하면 누구나 주님께 대해서 감상적인 반응이 앞설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선 가버나움에 그의 집이 있었다고 말하면 보다 이성적으로 주님을 생각하게 되지 않겠는가? 주님께서 집이 있었다고 해서 \주님이 가난한 자, 병든 자, 억눌린 자들에게 희년을 선포하신 그의 복음\이 훼손될 수가 없기에 주님께선 여전히 가난하고 병들고 억눌린 자들의 친구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이성이 아니라 감상이나 감정으로 주님을 생각하게 되면 주님을 억지로 가난한 자, 병든 자, 억눌린 자의 편이 되게 해서 다른 계층으로부터 부당하게 주님이 배척 당하게 만들 수가 있고 또한 공연히 주님이 사회 운동가들에게 이용을 당하는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런 잘못들이 사회나 교회 일각에서도 꾸준히 저질러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주님께서는 사회의 도덕 운동이나 사회 봉사 활동에 어떠한 빌미도 주시지 않았다. 우리는 주님이 보여주신 어떤 모범이나 비유를 듣고 나서 \나도 혹은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해마다 연말연시가 다가오면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을 기대하며 갖가지 봉사 활동 캠페인을 펼친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어쩌다가 한 번 씩 행하는 선한 행동으로 만들어지는 신분이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도 없고, 또 되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는 율법사, 그것도 자신을 시험하는 그를 향하여 주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아하, 사마리아인이요, 갈릴리 사람이라고 멸시받았던 주님 자신이 곧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감정을 앞세우면 하나님의 뜻을 놓친다



    아마도 감정적으로 혹은 감상적으로는 누구나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룟 유다처럼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않았느냐(요 12:5)\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일시적인 감정이나 감상일 수도 있고, 또한 갸륵하다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선 그의 선한(?) 생각, 그의 감상적인 생각을 칭찬하시지 않고, 도리어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 12:8)\고 말씀하시고 마리아의 행위가 곧 주님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임을 말씀하신다. 주님의 죽으심과 그의 장례가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과 비교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감정이 극도로 절제되고 이성적인 반면에 가룟 유다의 제안에 극히 거짓되고 감상적인 휴머니즘의 치부가 드러난다.

    사실 나는 처음 새벽에 공원에서 찬이슬을 맞으며 늦잠을 자고 있는 \홈리스 피플(homeless people)\을 보고 감상적인 생각에 이것을 묵상하게 되었지만, 주님이 이 땅에서 나시고 활동하시며 또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신 일련의 모든 사건들과 주님의 모든 말씀을 보고 생각할 때에 감상적인 선입견은 금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그분의 행적을 극히 절제된 이성으로 보지 않으면 주님을 바르게 보지 못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의 뜻과 원대한 계획을 순간마다 변할 수 있는 내 감정으로 가볍게 처리해 버리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경을 감정적, 혹은 감상적으로 보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대상으로 삼는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 결과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찾고 이야기하는 실제적인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의 산물처럼 스스로 하나님을 자신이 좌지우지 해버리는 오류에 머무르고 있다.

    하나님께서 나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우신 계획과 이룩하신 역사가 대단한데 우리는 한낱 감정에 젖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다. 신앙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나의 의지적인 결단이요 선택이다. 의지적인 결단은 감정의 산물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 의사에서 나온다. 물론 신앙도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감사와 감격, 곧 뜨거운 감정이 동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감사와 감격이 큰 만큼 손을 내밀어 받아들이는 결단도 그만큼 클 수 밖에 없다.



    우리의 거처는 어디인가



    주님께서는 자신의 거처를 말씀하시면서 우리들의 거처를 확정지어주셨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크리스천들이 주님의 제자라면 자신들의 거처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선생님, 어디에 거하세요\라고 물었지만, 우리는 주님께 \주님, 저희들은 어디에 거처를 정할까요\라고 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된다(요 8:31,32)\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 가운데 살면 진리를 알게 되고, 진리를 알면 진리가 나를 자유케 해서 내가 자유를 누리고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세상에서 좋다고 말하는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를 다 가지고 있더라도 거기에 붙잡혀 자유를 잃게 되면, 그건 사는 것이 아니다. 자유를 잃는다는 건 단순히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죄의 종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요 8:34).

    그렇다면 실제로 \말씀 속에 거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단순히 문자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피로 쓰여진 주님의 말씀을 내 손에 가지고 그것을 늘 읽고 묵상하는 삶은 특권 중의 특권이요, 우리가 세상에 붙들리지 않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말씀 속에 거한다\는 말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그분과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으면 어느 누구도 자유를 누리고 살수가 없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 하리라(요 8:36)\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주께서 집을 세울 터전을 내어 놓자



    이제 주님께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뜻, 진정 자신이 \홈리스\라고 말씀하신 뜻을 이해할 수가 있겠는가? 주님은 참으로 어디에 거하고 싶어하시는지, 또한 우리를 향해서는 어디에 거처하기를 원하시는지 알 수가 있겠는가? 사람의 거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민자라면 뼈저리게 피부로 느끼면서 살고 있지 않는가? 날마다 육신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자유를 누리고 살기 위해 보다 나은 지역을 찾고 보다 나은 집을 찾고, 또 집을 꾸미고 있긴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들의 영적인 거처가 되어주시기를 원하시며 자신의 \말씀 속으로, 주님 안으로\ 이사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시는데 우리들은 계속해서 주님과 그 말씀보다는 세상의 가치관을 별장으로 삼고 그 안에 안주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을 \홈리스\로 만든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인자가 머리 둘 곳\은 과연 어디인가? 예수께서 아무리 목수라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우리들의 마음 밭, 영혼의 밭을 내어 놓지 않으니 어디에 집을 짓고 거처를 정하실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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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우영 / 재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