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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아모스 강해 / 비극적 환상 - 여호와의 날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암 5:18-27 | 설교자: 김태훈

    본문

    아모스 강해

     

    비극적 환상 - 여호와의 날
    (암 5:18-27) 


     

    김태훈




    1. 들어가는 말

    이번 구절들도 화 있을진저(호이, יוה)로 시작하는 심판선고다. 이 단어 뒤에 심판의 대상이 누구인지, 왜 화를 당하게 되는지, 그 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진술된다. 화를 당하는 사람은 예상 외로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사람들이며, 열심히 제사를 드리며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날에 원수들이 패배를 당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여호와께서 임하는 날, 그들 자신이 심판의 대상이 된다.
    아모스는 이 구절들에서, 이스라엘 종교생활에서 중요한 신학적 확신인 여호와의 날과 이스라엘 백성의 기본적 제도중 하나인 제사문제를 다룬다. 여호와의 날은 여호와의 나타나심과 함께 주어지는 이스라엘의 ‘최종적’ 승리의 날이며, 제사 제도는 이스라엘 국가 ‘초기’부터 실행된 신앙의 한 핵심요소다. 여호와의 날이 복된 날이라고 그날을 기다리고 선포하고 준비하는 사람들, 귀한 제물로 그리고 열성으로 제사를 드리니 여호와를 만족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 앞에 아모스가 나타나서 그들의 착각을 지적하며 여호와 말씀을 선포한다.
    아모스가 이 구절들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본문의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18-20절은 ‘여호와의 날’을 언급하며 27절은 ‘만군의 여호와’를 언급한다. 후자를 ‘전쟁하시는 여호와’(거룩한 전쟁) 개념에서 본다면 18-20절의 ‘여호와의 날’과 평행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8-20절에서, 여호와의 날이 빛이 없고 어두운 날이며, 그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화가 임할 것이라고 선포하는데, 27절에서 화 있음의 구체적 표현인 전쟁에서의 패배를 뜻하는 적국으로의 이송이 언급된다. 21-23절은 25-26절과 비교된다. 두 부분 모두 제사와 관련되어 있다. 앞부분에는 이스라엘의 절기와 제사에 대한 여호와의 거부가, 후자에서는 제사의 실상, 즉 우상숭배라는 것이 지적된다. 24절은 한 가운데 위치한다.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

    ----- 18-20절: 여호와의 날: 어두움/죽는 날

    -------21-23절: 제사의 거부

    24절: 공법과 정의가 넘치도록

    -------25-26절: 제사의 고대성 주장? 실상은 우상숭배

    ------ 27절: 여호와 승리와 이스라엘의 패배

    2. 본문주해

    1)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들(18-20절)

    화 있을진저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18절)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 신앙의 중심적 주제 중 하나다.1) 아모스는 그 중심주제를 가지고 청중들 앞에서 선포하고 있다. 아모스의 비난을 받는 청중들은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여호와의 날을 어떤 날이라고 가르쳤을까?
    여호와의 날 사상이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으며 아모스의 청중들에게 무엇을 뜻했는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있다. (1) 다른 종교의, 종말론적이며 신화적인 자료로부터 발전된 것으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반화된 신앙이다. (2) 원래 신년축제일을 말하는데, 이 날은 이스라엘은 악의 세력에 대한 여호와의 우주적 역사적 승리를 기념했었다. (3) 이스라엘의 독창적 사상이며, 그들의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 백성들의 삶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시는 미래의 어느 날이다. (4) 이스라엘 초기 역사의 ‘거룩한 전쟁’ 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적군에 대한 여호와의 승리의 날이다.2) 세 번째 혹은 마지막 의견이 아모스나 그의 청중들에게 익숙한 사상으로 생각된다. 여호와의 날을 언급하는 구절들의 내용은 대개 우주적 역사적 암흑과 격랑의 시기에 여호와가 적들을 향하여 일어나 전쟁에 나서며, 원수들을 물리친다는 것이다.3) 이러한 이스라엘의 전통적 사상은 아모스 청중들에게도 살아 있었으며 그들의 종교적 정치적 신앙의 핵심적인 교리이기도 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과거에 있었던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사건들을 기억하며, 미래에 임할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우주적 승리의 날을 대망했을 것이다.
    아모스의 여호와의 날에 대한 선포는 매 가을에 열린 ‘여호와의 절일’을 기념하러 벧엘에 모인 청중들 앞에서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4) 이 기념일에 회중들은, 여호와와 과거 구원을 기억하며, 미래의 구원에 대해 확신하고 위로를 받았을 것이다. 그곳에서 열린 대성회, 대제사, 웅장한 음악, 화려한 제의, 축제 등을 보고 회중들은, 국가의 부흥과 ‘임마누엘’의 안전보장을 확신했을 것이다.
    사모하는 자(미트아윔, םיꕸאַꚚꗬ)는 히브리 동사 아와의 히트파엘형 분사형인데,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히브리 단어 아와는 욕구와 관계있다. 예들 들면, 광야 한 장소에서 고기를 먹고 싶다고 울며 불평하며 탐욕 낸 사람들(미트아윔)을 징계하였다(민 11:34).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투중 물을 먹고싶어(사모하여, 이트아웨) 베들레헴에서 물을 가져올 사람들을 찾는다(삼하 23:15). 탐욕(타아와, הꕯꔣꚔ)은 게으른 자와(잠 13:4; 21:25), 사악한 자와(잠 11:23; 21:26), 훈육이 없는 자(잠언 23:3, 6)의 특징이다.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라는 표현이 여호와의 날을 탐욕적으로 바란다는 뜻만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아모스가 이 표현을 통하여, 그들이 모든 것에 탐심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날에 마저 탐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일 수 있다. 여호와의 날을 “탐하는 자” 그들에게 여호와의 날이 무엇인가? 탐욕이 완벽하게 성취되는 날인가? 그들은 여호와와 바알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화 있을진저, 시작 자체가 기분 나쁜 말이다. 화 있을진저의 히브리 단어 호이(יוה)는 “아이고”에 해당하는 단어다. 산 사람들 앞에 놓고 그들의 죽음을 곡하는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열성적인 종교인들 앞에서, 그 날이 흑암의 날이라고, 빛의 날이 아니라고 선포한다. 아모스는 정말 별난 사람인가? 그는 신성모독을 하고 있는가? 아모스는 정통신학을 비웃고 있는 것인가? 아니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선포하고 있다. 여호와의 날이 어떤 날인가에 대해서는 청중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제사장들과 회중들은 여호와의 날이 어떠한 날인 지 잘 안다. 여호와의 날은 악인들에게는 어두움의 날이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의인들에게는 빛의 날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모른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여호와의 평가를 모른다.5) 그들은 의인들이 아니라 악인들이다. 그 날에 악인이 심판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누가 이상한 사람인가? 아모스인가? 회중들인가? 회중들은 아모스를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 어찌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그리 말하는고? 자신들에 대한 오해 때문에 아모스가 그들에게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아모스는 그들을 이상하게 생각한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6)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마치 사람이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거나 혹 집에 들어가서 손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도다(19절)

    아모스는 여호와의 날이 청중들에게 어떤 날인가를 자신이 늘 하던 식으로 시골 사람의 경험으로 다시 설명한다(참고 3:3-6; 2:13; 3:12; 6:12; 9:9). 이번에는 사자와 곰과 뱀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시골 한적한 곳을 가다가 사자를 만났다. 혼비백산, 젖 먹던 힘을 다하여 달아났다. 숲 속으로 뛰어들었는지 사자를 피할 수 있었으나, 채 한숨도 돌리기 전에 곰을 만난다.7) 으르렁거리며 쫓아오는 곰을 피해 죽을 힘을 다하여 집을 향해 뛰었다. 그 곳이야 안전하지 않겠는가?
    아모스의 회중들은 이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들이 늘 들어오던 여호와 날의 구원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마치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박사가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을로 돌아온 것처럼, 그리고 ‘쥬라기 파크’에서 식육공룡의 추격을 따돌리고 헬리콥터에 올라탄 사람들처럼. 그러나 아모스의 주인공은 영화 속의 주인공이 아니다. 집안에 들어와서 안심하며 벽에 기대어 한 숨 놓는 순간, 뱀은 튀어 올라 그를 물어버린다. 그는 비명과 함께 서서히 죽어간다. 이제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인지 명백해진다. 그 날은 어두운 날, 생각도 못했던 날이다. 어느 곳에 있어도 안전하지 못하다. 절대로 피할 수 없다. 여호와의 날은 너희들이 뱀에게 물려 죽는 날이다. 아모스는 정말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20절)

    어두워서(호쉨, ꗗꚆꖓ)와 캄캄하여(아펠, ל꘬אָ)는 곤란, 고통, 불행, 죽음 등을 뜻하는 비유적 표현이다(호쉨: 삼상 2:9; 욥 5:14; 시 35:6; 잠 2:13 사 5:30; 49:9; 아펠: 시 91:6, 욥 3:6). 뱀에 물려 죽은 사람 이야기를 마친 후, 다시 여호와의 날이 절망의 날임을 단언한다.

    2)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21-24절)

    앞 절에서 아모스는 섬뜩한 이야기를 했다. 여호와의 날은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날이다. 그러면 지금 드리는 제사는 어떤가? 향기로운 예물은 어떤가? 열심히 모인 절기와 성회는 어떠한가? 전과목 낙제다. 절기와, 성회, 제사, 찬양 등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사회 지도층들이 자랑하는 모든 것이 거부된다.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21절)

    가장 강한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앞자리에 위치한다. 지금 드리는 종교 행위도 하나님이 미워하고 멸시하는 것들이다. 절기를 지키고 성회로 모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리아흐, ꖏיꙞ) 아니한다. 미워하여의 히브리 단어 사내(אꗽꙴ)는 하나님이 악인을 미워하고(시 5:6), 폭력을 사랑하는 자들을 미워하며(시 11:5), 우상 숭배자를 미워하신다(시 31:7)는 구절들에서 사용된다. 이스라엘의 절기가 미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절기를 지키는 자들이 악인이요, 폭력배요 우상숭배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분이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이미 알고 있는 바이다. 그들이 미워하고 멸시하고 기뻐하지 않는 말씀이긴 하지만. 여호와를 거스려 청종치 않으면 성소는 파괴되고 향기로운 향은 거부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레 26:21, 31). 여호와께서 괜한 사람들을 미워하고 괜한 사람들을 거부하겠는가? 이스라엘(여기서는 지도자들이 문제)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증거는, 그들이 여호와가 원하는 삶의 방식을 싫어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참고. 삼상 15;23, 호 4:6).
    절기들(학김, םיꕁꕢ)과 성회들(아차로트, תוֹר꘼꘥)8)은 매년마다 열리는 세 순례절기(출 23:15-18; 34:22-25; 신 16:10-16)와 먹고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다른 몇 개의 절기들을(참고. 아 8:5, 호 2:11, 느 10:33) 포함한다.9) 절기와 성회들은 여호와께서 명하신 것이며, 이스라엘이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지켜온 것이다. 그런데도 거부된다.
    그렇다면, 엘리트들이 드리는 최상의 제사는 어떠한가? 인정받는 제사장이 집전하고, 유력한 인사들이 참여하며, 최상의 품질과 대규모로 드려지는 제사는 어떠한가? 너무도 장엄해서 마치 여호와 하나님이 앞과 같이 압도적인 그 제사들은 정말 신앙적인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22절)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23절)

    세 개의 전통적 핵심 제사인 번제(올로트, 레 1), 소제(민호트, 레 2), 화목죄(쉘렘, 레 3)10)가 다 거부된다. 이스라엘 백성(지도자)들은 받을 대상이 없는, 자기 만족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닌 행사를 예배라며 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받지 아니할 것이요의 히브리 단어 라차(ה꘼Ꙝ)는 희생제사의 ‘공식적 열납 여부’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11) 레위기 19장 5-7절이 한 예다.

    너희는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열납되도록 드리고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 제 삼일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제 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가증한 것이 되어 열납되지 못하고...12)

    여호와는 그들의 제물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로 에르체) 눈도 돌리지 않는다(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로 아비트). 제사를 드릴 때에 함께 드려지는 ‘예배용 찬송’(노래, 쉬르)도 집어치우라고 말씀하신다. 찬송이 아무리 웅장할지라도, 전문음악인들이 부르는 고상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소리(하몬, ןוֹמꕟ)에 불과하다. 그들은 예배 찬양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하나님 들으시기에는 전쟁할 때나,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말할 때 생기는 ‘소음’(하몬)에 불과하다(참고. 왕상 20:13). 그들이 지금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길을 입을 닫든지(그칠지어다), 그 분 앞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이 예배에는 악기들도 동원되었다.13) 비파(네벨, לꔫꗽ)는 하프 모양이지만 위 부분에 가죽이나 도기로 만든 울림통을 가지고 있는 현악기다. 이런 현악기로 연주하는 음악이 지므라(הꙜꗱꖀ)인데 한글 개역성경에서는 그냥 소리라고 번역했다.14)
    이스라엘은 제사 규정을 어겼는가? 그렇지 않다. 단지 그들의 예배는 하나님 경외가 없는 형식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 15:22-23)

    이스라엘의 제사장들과 예배자들이 제사 규정을 어겼을 리도 없고, 열심이 모자라지도 않았을 것이며 수가 작았다고 볼 수도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눈도 돌리지 않고, 향 냄새를 거부하며 귀를 닫아버렸다. 분명히 아모스의 눈에도 그 절기와 모임과 제사는 굉장한 것들이었다. 한 가지 빼고는 모두 다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말씀을 들어보자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24절)

    공법(미쉬파트)은 ‘성문 앞(안) 법정’과 관련된다. 그러므로 법의 올바른 적용과 정직한 판결,15) 이것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덕목이다. 공법이 바로 행사될 때 이로써 사회적 제반 관계가 올바로 유지된다. 공법이 바로서야, 부패와 억압이 제압되고, 약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보호된다. 정의(츠다카)는 기본적으로 관계의 개념으로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계약 백성간에 가져야 할 올바른 관계를 말한다.
    아모스와 다른 예언자들은 제의 자체를 거부하는 안티-제의 그룹이 아니다. 그들이 의도하는 바는, 행위 없는 제사는, 최소한, 이스라엘 신앙에 있어서는, 무의미할 뿐 아니라 악한 것이라는 것이다. 시장이나 법정에서의 행위는 성소에서의 태도와 일치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약자를 억압하고 거짓 저울을 쓰며, 권력으로 부를 축적하는 것은 언약을 저버린 것이다. 이웃을 착취하고 억압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고백은, 자기 기만 아니면 인격 분열에 다름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들이 약자를 억압하지 않고,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그 법정은 정의로우며, 지도층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아모스는 정의와 공법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그림같이 설명한다. 아모스는 겨울 비 후에 콸콸 넘쳐흐르는 고향의 개천들을 생각하며, 여름 가뭄에도 마름이 없이 꾸준히 흐르는 강을 생각한다. 쿵쿵거리며 쏟아지는 물줄기들, 가뭄에도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 번영과 풍성한 추수를 가져다주는 것. 풍부한 수량으로 넘쳐 흐르는 물줄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젖줄 같은 강, 폭포물처럼 굴러 흐르는(이갈<갈랄)16) 공법, 풍부한 수량17)의 강물(하수, 나할 에탄)과 같은 정의,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이것들을 소유하길 원하신다.
    이스라엘의 성소들과 제사장들은 공법과 정의를 살고 사모하고 가르쳤는가? 아모스의 비판에 그들은 무엇이라 대답했을까? 왜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사 제도를 비판하느냐고 비난했을 것이고, 제사 제도는 그 기원은 광야 시대까지 올라가는 고대적이고 정통적인 것이라고 변호했을 것이다.

    3) 사이비 종교(25-27절): 삶이 없는 제사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는냐(25절)

    이 구절은 학자들에게 어려움을 주는 구절이다. 여러 주장들이 가능하다.
    (1) 아모스는 이스라엘 족속이 그 시대에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제사장들도 이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광야 시대의 제사를 말하고 있는 출애굽기와 레위기의 제사 제도는 아모스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2) 이스라엘 족속이 아모스의 선고를 반박하면서, 제사의 고대성, 즉 광야 기원을 말하지만 사실은 그 시대에 희생이나 소제물을 일상적으로 드리지 않았다. 제사제도는 식물이 정상적으로 생산될 정착 상황을 위해 미리 제정된 것이다(출 34: 23-24; 민 15:2; 18:24-27).18)그리고 순례절기는 정착 이 후에 실행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광야 기원을 주장하지 말라는 뜻이다.
    (3) 아모스는 ‘너희의 반박대로 광야 시절에 제사를 드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 왜 출애굽 직후에 주신 십계명을 비롯한 다른 법들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느냐는 뜻이다. 즉,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드는 것은 제사만이 그런 것이 아니며, 제사가 있기 전에도, 있을 때에도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 수 있었다는 뜻이다.
    (4) “왜 광야 시절에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말하느냐? 내가 지금 마치 제사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처럼”이라는 뜻이다.

    이 구절과 함께 다루어지는 구절은 예레미야 7장 22-23절이다.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1)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때에는 번제나 희생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제도는 후대의 것이다.19)
    (2)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는 아직 제사에 대해서 명하지 않았다. 그것 없이도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었다. 애굽에서 탈출 후 시내산에서 받은 것은 제사에 관한 명령이 아니었다. 출애굽기 19장 5절과 20장 1-17절에는 제의에 관한 언급이 없다.
    (3) 말하지 않았고 명하지 않았다는 말을 문자적으로 보면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사무엘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한 것이나 미가가 하나님께 나가는 사람이 가져야 할 것이 제사가 아니라 공의와 인애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는 것(미 6:6-8)과 같은 표현이다.
    위의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택해진 해석은 아모스의 설교 핵심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고, 또 다음 구절과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아모스의 선포는 공법과 정의가 넘치는 삶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다음의 구절은 과거가 어떠하든지 현재 너희들은 여호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제사, 절기, 집회, 여호와의 날) 실상은, 세속 권력 앗시리아의 정치 경제 관습 윤리를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그들의 신은 자신들의 배요, 그들의 왕은 앗시리아인의 신, 즉, 제사만 드리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치 않는 그런 신이라는 것이다. 그런 신을 좋아 하니. 앗시리아를 사모하니 너희 원대로 되어라. 그 신들을 잔뜩 짊어지고 그 나라로 가버려라. 그러므로 아모스는 제사의 기원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 역시 아나돗 제사장 가문 출신자로, 예루살렘 제의에 대해서도 잘 아는 사람이다. 그 역시 제사의 기원에 관한 이론 논쟁을 하고 있지 않다. 두 선지자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께 순종하고 악에서 떠나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26절)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 잡혀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7절)

    식굿과 기윤은 바벨론 자료에서 발견되는 별 신, 사쿳과 카이완을 달리 표기 한 것이다. 그래서 영어 성경 NRSV는 히브리(마소라) 본문과는 달리 Sakkuth 과 Kaiwan으로 번역했다. 히브리 본문은 거짓 신들을 비하하기 위해 ‘혐오스러운 것’(siqquṣ)에 붙어 있는 i 와 u 모음을 자음에 붙였을 것이다.20) 혼합 종교의 양상은 남북 왕국에서 흔히 나타난다. 우리의 본문도, 아마 친-앗시리아 세력이 도입한 우상예배를 말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다메섹은 중요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곳으로서 유럽과 아시아로 가는 교통의 요지다. 포로로 잡혀간다는 뜻이다. 여호와의 날이 원수에 대한 승리의 날이라고 믿던 이스라엘은 만군의 여호와의 적이 되어 포로로 잡혀 가게 된다. 이 역시 아모스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다.

    3. 나가는 말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과거역사와 교리를 잘 알고 있었다. 여호와의 날은 어떤 날인가? 성소에서의 주장은 옳은 것이었다. 여호와가 승리하는 날이요 악인이 망하는 날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아모스는 말한다. “너희 말대로 너희는 망한다. 왜냐하면 너희는 악인이요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이다.” 아모스의 시대는 경제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언약과는 대조적으로 사회적 불균형이 심화된 시기다. 사회 경제 엘리트들은 피라미드의 정점에서 온갖 특권과 권력을 독점하며 약자와 빈자들을 착취했다. 농토를 빼앗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 사회 정의도 무너져서 약자를 보호하기는커녕, 착취 엘리트들의 동업자가 되었다. 종교도 힘있는 자의 마음이나 위로했다. 오직 여호와 외에는 심판자를 기대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임하시는 날은 ‘정직한 재판’의 날이요, 악인들에게 어두움의 날인 것이다.
    제사의 고대성 정통성을 주장하느냐? 제사장들의 말이 맞다. 그것은 광야 시절부터 허락된 제도다. 그러나 광야 시절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야 할 삶의 방식도 함께, 그리고 \먼저\ 제시해 주셨다. 이스라엘에게는 그 때 무엇이 있었는가? 그들에게 어떤 호화로운 성소들이 있었는가? 그들에게 어떤 정교한 제사 제도가 있었는가? 그들은 드릴만한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었는가? 그들이 순례할 장소는 어떤 곳이었는가? 그들의 의복은 화려했는가? 그들의 예배는 웅장했는가? 그들은 사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 한가지 그들에게 있는 것은 그들을 은혜로 구원한 여호와 한 분이었다. 광야에서 그들은 가난하게 살았어도 하나님 한 분 의지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용서받고자 하는 겸손한 태도로 살았다(배반자도 있었지만). 그 때는 첫사랑의 시절이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 가져온 것은 희생제사와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이스라엘은 더 귀한 것을 버렸다. 언약을 파기하고 여호와를 멸시한 것이다. 그 언약의 고대성과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제정해 주셨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아모스는 종교 지도자들을 정죄한다. 언약은 파기되었다. 제사도 무효다. 다시 땅 잃은 자가 될 것이다(노예 생활로 역사 되돌아 가기).
    왜 아모스는 성소에 가서 몇 번이고 공법과 정의를 선포하는가? 종교장소에서 왜 정의를? 법정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예배장소에서는 신앙이나 우상숭배에 대해서만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 여호와의 날은 종교에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역사와 관련되어 있다. 여호와를 믿는 다는 것은 예배 행위를 넘어, 삶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 이스라엘의 성소에서 제사장들은 더 이상 언약의 요구사항인 이러한 삶을 선포하거나 가르치지 않았던 것 같다. 재판관들은 성문에서 공법과 정의를 버렸고, 제사장들은 성소에서 공법과 정의 가르치기를 포기했다. 아모스는 그들이 던져버려 쓰레기처럼 된 것을 다시 주워 올린 것이다.
    여호와가 간절히 그 때나 지금이나 바라는 것은 여호와와의 언약에 충실한 삶이다. 우리 사회가 깨끗한 사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삶의 신앙인들이 넘치는 사회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바울이 그렇게도 강조하는 깨끗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딤전 1:5, 19; 3:1, 9; 딤후 1:3, 5)의 사람들이 \우리 신앙인들\이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 신앙의 아버지 어머니의 눈물과 기도로 살아온 우리 조국은(우리의 광야시절) 부정과 부패의 나라가 되어 버렸다. 주일마다 예배는 이어지는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정말 다시 첫사랑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훌륭한 교회가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많은 신앙의 지도자들과 신앙인들이 있다. 법정, 정치, 경제, 주식시장에, 그리고 공사현장과 교육현장과 도로 위에, 공법과 정의가 폭포수처럼 풍부하고, 마르지 않는 강처럼 이어지기를 소망한다.

    전주 한일장신대 교수
    여호와의 날이라는 표현은 예언자들의 글에서만 나온다: 이사야(2:12; 13:6, 9; 22:5; 34:8), 예레미야(46:10), 에스겔(7:19; 13:5; 30:3), 요엘(1:15; 2:1l; 2:31; 3:14), 오바댜(15), 스바냐(1:7, 14-18), 스가랴(14:1), 말라기(4:5), 애가(2:22).
    J. L. Mayes, 104.
    Ibid.
    Ibid.
    Ibid. 105.
    너희가 어찌하여(람마 + 전치사 르)는 ‘어떤 것이 누군가에게 무슨 유익이나 손해가 있는가’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람마와 마켑으로 연결된 제는 ‘지시사’라기 보다는 람마를 강조하는 부사로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Wolff, 255b). 이렇게 보면 우리의 본문은 ‘여호와의 날이 너희에게 실로 무슨 이익이 있느냐?’는 뜻이 될 것이다.
    성경에서 나오는 곰은 시리아 곰으로서 팔레스틴의 산악 지대의 숲 속에서 산다. 직업이 목자인 아모스는 곰이 얼마나 위험한 짐승인 것을 잘 알고 있다. 호세아도 곰을 비유로 이스라엘의 심판을 선포한다(호 13:7-8).
    성회로 번역되는 히브리 단어 아차라는 절기를 지키기 위해 안식일이나 월삭처럼 일상적인 일로부터 물러나는 시간을 나타내기도 한다(사 1:13. 요엘 1:14; 왕하 10:20).
    Stuart, 354.
    우리가 화목제로 이해하는 히브리 단어 쉴라밈(여기서는 단수 쉘렘)의 번역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된다. 일반적으로 화목제(샬롬을 생각하며), 종결제(완전을 뜻하는 쉴렘에서 온 것으로 보아), 언약제(동일하게 쉴렘에서 온 것으로 보아 온전한 충성을 뜻하는), 또는 축제나 예배가 성공적이었음을 축하하며 식사를 겸하여 드리는 ‘연회(혹은 교제)의 제사’로 이해된다. 상세한 논의를 위해서는 G. J. Wehnham, The Book of Leviticus, NICOT, 76-77을 보라.
    Wolff, 263 a.
    다른 예(레 7:18; 22:23, 27).
    어떤 분들은 아모스의 설교가 이스라엘 일반 백성들을 향해 설교한 것인데, 이 글을 쓰는 사람이 왜 특정 계층에 초점을 맞추는가 의아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성경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모두, 즉 엘리트들이나 가난한 자나 구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며, 동시에 심판의 대상이다. 그러나 아모스의 예언은, 일차적으로는, 특별한 대상을 향하여, 특별한 장소에서, 그리고 특정한 사회종교 상황 속에서 선포된 것이다. 즉, 아모스가 배척하는 것은 제의 자체가 아니라 주전 8세기 아모스 시대에 행해지던 그 제의를 말한다(P. J. King, 89). 제의는 이스라엘 종교의 필수 불가결한 부분으로서 예언자들이 그 개념을 거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마치 기독교 신앙에서 예배와 성찬이 필수적인 것처럼.
    우리의 문맥은, 아모스 앞에 있는 상황이 ‘대규모의 호화스런 제사’임을 보여준다. 물론 대규모나, 정성의 제사 자체가 문제라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은 역사를 통해 국가 규모의 제사를 드린 적이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여호와의 언약을 무시하는 생활을 하면서, 온갖 탐욕적 악인들이 모여 드리는 양심마비의 제사를 문제삼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빈한 농민들에게 설교하기보다는(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대상이지만), 그들의 어려운 삶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전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가?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이시다. 누구의 눈물을? 억압하는 자를 아니면 억울하게 억압당하는 자를? 아모스는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는 각종 지도층들의 부패와 착취를 비난하며, 그들의 삶을 정당화시키는 우상숭배와 다름 아닌 지도자들의 삶을 비판하고 있다. 이들이 이스라엘 타락의 원흉이요, 실제로 하나님 백성들로 하여금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은 너무도 부유한 사람들이라, 세리장 삭개오처럼 돌아오기 힘든 사람들이고, 그들이 기득권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돌아오는 것은, 예수님 말씀대로,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어떤 사람들은 젊은 부자처럼 말씀을 듣고 ‘근심’하기는 하겠으나). 이스라엘의 심판에는 엘리트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의 책임이 크다. 여호와 신앙의 특징은 가장 높은 사람 위에도 가장 높은 제도 위에도(그것이 신에 관하여 말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더 높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한글 개역성경 시편의 제목(1절 앞에 나오는 부분)에 있는 “시”(예를 들어 38, 39, 40, 41 등)는 미즈모르(현악에 맞춘 노래)의 번역이다.
    P. J. King, 89.
    Wolff, 264b.
    Ibid.
    Stuart, 355.
    많은 학자들이 아모스가 묻는, “너희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는 질문은 ‘아니다’라는 답을 기대하는 수사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너희는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드리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고 본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레위기에 나오는 제사제도는 언제 만들어져 아모스 이전 세대의 것인 양 재배치되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게 된다. 비평학자들은 이 구절이 레위기를 비롯한 소위 제사장 문서(Priestly Code[P 문서])가 아모스 시대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결론 내린다. 예레미야 7장 22-23절도 제사제도의 후대 제정설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주 언급된다: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은 예레미야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라고 했으니 번제나 희생에 대해 말하고 있는 소위 제사장 문서는 예레미야 시대까지는 존재하지 않아야 논리적으로 맞다고 주장한다. 즉, 예레미야 시대에 제사 제도가 시행되고는 있었으나 그 기원이 출애굽시대까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출애굽과 연결되어있는 레위기의 제사법은 언제 것인가 하는 질문이 또 생긴다. 벨하우젠의 결론은 오늘날 레위기에 있는 모세의 제사법은 예레미야 이후 시대, 포로기 제사장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그 기원이 모세에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앞 시대로 배치되었다는 것이다.
    이 구절들은 그 유명한 그라프-벨하우젠 가설(현재의 오경은 저자가 다른 J, E, D, P라는 네 개의 문서가 합해 진 것으로, 문서가 나온 연대 순서는 J-E-D-P라는 학설)의 한 근거가 되는 본문이다. 벨하우젠은 자신의 문서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그의 책 이스라엘 역사서설(Prolegomena zur Geschichte Israels, 1878)에서 다섯 개의 논제(예배장소, 희생제사, 절기, 제사장과 레위인, 마지막으로 성직자의 몫)를 다루는데 이 본문들은 그 중 ‘희생제사’의 후대성을 입증하기 위해 취급된다. 오늘날 비평적 구약학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이 가설 위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얼마든지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두 본문은 아모스나 예레미야 시대의 제사장들은 당연히 신앙인들이나 반대자들에게 제사제도의 여호와로 말미암는다는 정당성과 이스라엘의 국가 기원인 출애굽시대까지 올라가는 고대성을 가르치고 주장할 것이다. 예레미야나 아모스가 동시대의 제사장들과 제사들을 문제 삼으면서, 그것이 문제가 많다고 하면 되지 왜 난데없이 출애굽과 광야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은, 제사장들이 두 선지자의 비판에 대해, 정당성과 고대성의 근거로서, 모세(출애굽, 광야생활)을 들고 나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모스가 제사제도를 비판한다면 그 시대의 제사장들은 무엇으로 방어할 것인가? 예레미야가 제사의 무효성을 주장한다면 그 시대의 제사장들은 무엇으로 자신들을 변호하겠는가? 당연히 제사제도는 출애굽시대부터 하나님이 친히 제정한 것이니(‘40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으니),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모스는 무엇이라 반응하겠는가? ’너희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고 말하니,그 분이 말씀한 순종과 공법과 정의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하지 않겠는가? 아모스가 질문의 형태로 대답한다면, 예레미야는 서술적 형식으로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즉, ’너희가 제사제도의 고대성을 말한다마는 그 때에 하나님이 먼저, 더 기본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하신 것이다’고 반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벨하우젠이 인용한 예레미야 7장 22절의 뒷절에는 이것이 분명히 나타난다. 23절의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레위기 26장 12절의 인용이다. 24절은 제사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순종 없는 제사를 비난하고 있다. 아모스와 예레미야는 출애굽 시절에 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효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문제삼는 것은 출애굽 시대를 들먹이는 정당성의 주장들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이웃을 향한 삶이 없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Mayes, 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