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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아모스 강해 / 깨어지는 영광들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암 3:9-15 | 설교자: 김태훈

    본문

    아모스 강해


    깨어지는 영광들: 벧엘, 저택들, 야곱의 집
    (암 3:9-15)


    김태훈



    1.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 아모스의 심판 선고를 들어왔다. 그러나 아직도 그것은 계속된다. 아모스서의 내용은 바울의 전도 여행 이야기처럼 다양하지도 않고 족장들의 이야기처럼 흥미롭지도 않다. 용서도 사랑도 격려도 없는 심판 선고가 계속된다.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하나이다. 사마리아의 엘리트들이 온갖 부귀, 영화, 명예를 다 누리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동족들의 희생 위에 선 것이요, 여호와를 배반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임할 것은 심판 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시대에 무슨 아모스냐?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교회가 잘 되고 있는데 무슨 심판 이야기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모스서는 참으로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우리의 죄악을 판단하시며 사랑하는 자일지라도 그 악을 간과하지 아니하는 분이다. 이스라엘은 이름이 말하는 것처럼 특별한 백성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신의 배만을 위해 살았다. 온갖 이기심, 탐욕, 악행으로 자신들을 위해 마치 성채 같은 명예와 부와 권력을 쌓아 놓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대적이 되어 그들을 부수어 버린다. 옛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새로운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생각으로 바꾸어 버리고 거짓 신학을 좋아하고 세상적 정욕과 하나님의 복을 혼돈하여 산다면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성장으로 칭찬 받고 있으나 비도덕, 성공 지상주의와 배금 사상으로 세상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하나님은 누구 편이실까?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세상 사람들의 의로움보다 무디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회개를 외쳐야 할 때다. 마음을 바꾸어야 할 때다. 심판의 내용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더욱 겸손해져 사마리아에 임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선고를 우리 자신들과 우리 교회에 주는 말씀으로 읽어본다면 그것은 생명의 지혜가 될 것이다. 이번 호에서 살피려는 본문은 사마리아에 관한 세 개의 신탁들이다. 제목을 붙인다면 \약탈당하는 약탈자(3:9-11)\, \엉터리 구원 신학(3:12)\, \무너지는 영광들(3:13-15)\로 붙일 수 있을 것이다.



    2. 본문 주해



    1) 약탈당하는 약탈자(3:9-11)



    아스돗1)의 궁들과 애굽 땅 궁들에 광포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사마리아 산

    들에 모여 그 성 중에서 얼마나 큰 요란함과 학대함이 있나 보라 하라(9절)



    이 절에 따르면 아모스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아스돗과 애굽의 지도자들을 초대하여 사마리아의 형편을 좀 보라고 요청한다. 아모스는 촌 목자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앗시리아의 왕이나 된 듯 아스돗과 애굽 땅에 명령을 하고 있다. 여호와의 권위와 여호와의 사자라는 자기 확신에 충실한 아모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왜 외부의 사람들인 아스돗과 애굽의 지도자들을 초대할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아모스가 좀 삐딱하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파괴적인 성격의 사람이기 때문에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아모스에 대한 평가 때문에 하나님의 선고의 진실성이 의심받지 않도록 제 삼자를 불러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평가자들은 오랫동안 블레셋의 경제적 중심지 역할을 해 온 아스돗과 아스켈론과 두로를 잇는 해상 교역과 블레셋 도시 국가들과의 육로 교통을 통해 많은 이득을 얻어 온 애굽이다. 그들은 사마리아 못지 않게 부유한 나라들이다.

    궁들로 번역된 히브리어 아르모노트는 아르몬(??????????)의 복수형태이다. 아르몬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아르몬은 다층 건물이나 견고한 성(잠 18:19; 애 2:7), 요새의 한 부분(시 48:13의 궁궐), 왕궁에 속하는 한 건물(왕상 16:18; 왕하 15:25)을 뜻한다.2) 이 건축물에는 권력과 특권을 누리는 자들이 살고 있었다. 아스돗과 애굽의 아르몬에 사는 사람들은 사마리아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이라 평가할 것인가? 세 곳 모두 경제, 문화적으로 발달한 나라이다. 교역과 상업이 발달되어 있고 크고 호화로운 건축물(아르몬)들이 즐비한 곳이다. 아스돗, 애굽과 사마리아가 다른 점은 사마리아에는 독특한 종교가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를 섬기는 성소들이 있고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이 있고 속죄의 제사가 있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여호와 말씀들이 있는 나라이다. 아스돗과 애굽은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도 말씀도 없다. 그들이 인간의 욕심에 따라 행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할 지 모른다. 그런데 두 나라는 사마리아에서 여호와 신앙의 냄새와 색을 느낄 수 있었을까? 아니다. 그들이 본 것은 호화로운 건물들과 백성들의 처참한 삶이다. 몇 층이나 되는 높은 건물들, 수많은 방들이 있어 그 안에서 왕과 귀족들이 모여 살고 궁궐들, 웅장한 건물들을 그들은 보게 된다. 실로 아르몬은 엘리트들의 위대성을 대표하는 건축물들이다. 즉, 자신들의 성공이요 자랑이다. 교역과 소작 자본주의(rent capitalism)3)에 근거한 도시 엘리트들의 삶의 방식을 대변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그들 입에서 나오는 감탄사는 \대단하다\가 아니라 \요란\과 \학대\이다.

    이것은 아모스가 한 평가가 아니니 얼마나 객관적인가? 지나친 도덕을 강조하는 여호와의 평가가 아니니 얼마나 정확한가? 이방 나라인 아스돗과 애굽의 엘리트의 눈에도 사마리아의 악은 지나친 것이다. 무슨 악인가? 우상숭배인가? 아니다. 탐욕이다. 불법천지요 억압이 강물처럼 흘러 넘치는 곳이었다. 우리 한국교회는 타종교의 우상숭배 뿐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악행에 대해서도 철저히 깨닫고 외치고 고쳐야 한다.

    아모스가 사마리아의 악의 정도를 평가하기 위해 아스돗과 애굽을 초대하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그들 나라는 여호와가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다. 그들 나라에서는 엘리트들이 모든 권력과 특권을 자신들을 위해 마음껏 휘두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이 방문하여 사정을 하면 그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이런 무법천지!\, \참혹한 억압!\이었다.

    요란함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므호모트는 므후마(??????????)의 복수형태이다.4) 뜻으로는 \파괴적 살상으로 이어지는 혼돈\(신 7:23; 삼상 5:11),5) \샬롬이 전무한 상태\(대하 15:5)이다. 즉, 무법천지요 오직 권력만이 정의인 세계였다는 말이다. 왜곡된 재판행위, 억울하게 집행되는 공권력, 턱없이 높은 이자, 불공정한 상거래, 결국은 온 백성을 거지로 만들고 노예로 만들고 죄인으로 만드는 탐욕적인 성공의 세계가 사마리아였다. 어떻게 한 사회에 샬롬이 전무할 수 있는가? 종교의 부패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삶이 샬롬의 상태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잘 먹고 잘 마시고 잘 입고 즐기고 쌓아 놓고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백성들은 샬롬이 전무한 삶을 살아야 했다.

    아스돗과 애굽의 지도자들이 또 본 것은 억압이었다. 정치도 경제도 법도 종교도 오직 탐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 층층이 쌓인 탐욕, 넓게 퍼진 부정 부패, 백성의 희생을 깔고 사는 호화로움 등. 아르므노트 랍(거대한 건물들)은 사실 므호마트 랍(거대한 혼돈)과 다르지 않다. 사마리아는 그 견고함으로 이름난 곳이었고 사마리아의 성곽들은 그들 나라들에게 자랑거리였다. 샬만에셀 5세는 3년이나 그 성을 포위한 후에야 점령할 수 있었다. 그 성이 얼마나 위대한가? 그러나 그 성이 강력한 성벽으로 보호되고 있을지라도 취약함은 그 내부에 있었다.

    무슨 말로, 무슨 이론으로 치장하든지 \탐욕으로 쌓은 부\요 이것이 사마리아의 현실이었다. 사실 사마리아는 그 성 중에서 그 위대함과 풍요로움을 보여 주며 택한 백성의 복이라고 자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기대와 달리, 하나님은 오히려 그 성 속에 만연한 큰 요란과 학대를 주목하고 있었다. 오늘 우리 교회는 거대한 성공을 자랑하고 있는가? 수와 크기 외에, 더 거룩해졌는가? 사랑이 깊어졌는가? 더 겸손해졌는가? 이런 덕목을 겸비했다면 우리의 아르몬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교인들의 성공은 어떠한 성공인가? 상류층에 포진해 있는 신앙인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심한 혼돈과 학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할 때가 아닌가?



    자기 궁궐에서 포학과 겁탈을 쌓는 자들이 바른 일 행할 줄 모르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0절)



    바른 일(????????, 느코하)은 \정직한\, \정의로운\, \신실한\을 뜻한다.6) 반대 개념은 \속임수\와 \거짓\이다(사 30:10). 이 단어는 원래 지혜적 교훈에서 연유했고 이스라엘 지파들 간의 법적 문제에서, 예루살렘 법정에서 사용되었다.7) 그러므로 느코하는 법정과 상거래 시 꼭 있어야 하는 덕목이다. 느코하는 어려서부터 가르쳐진 것이다. 모든 행위의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마리아의 지도자들은 느코하가 무엇인지 어떻게 행하는지 모르고 있었다.8) 사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무시해서 무관한 자가 된 것이다. 재판관이, 정치 지도자들이, 부자가, 선생들이, 종교 지도자들이 느코하를 모르면 백성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 지 뻔하다. 미가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지도자들의 패역을 지적한다. 그들은 공의를 모르는 자들이다.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며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미가서 3: 1-3).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가지고 있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도 무엇이 바른지를 모르는가? 신문을 장식하는 한국 교회들의 이야기. 느코하를 가르치면서도 왜 바르지 못한 일들이 행해지고 있는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을 고쳐야 한다. 배운 것을 행하지 않으면 배움은 헛된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만연한 성경공부를 보라. 그리고 그 행함을 보라. 성경 공부를 해야할 때가 아니라 성경 행하기를 할 때다.

    본문에 쌓는 자들이란 말이 나온다. 무엇을 쌓는가? 명성을 쌓고 부를 쌓고 권세를 쌓아 놓았다. 그들의 창고에 들어가 보자. 유명한 이름, 이루어 놓은 업적, 특권을 누리를 수 있는 보화가 있는가? 쌓아 놓았으니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런 것은 없다. 하나님은 본질을 보시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들의 정체가 드러나는데 그들의 귀중품은 포학과 겁탈로 얻은 것이며 그 귀중품들은 포학과 겁탈 그 자체다. 그러므로 그들이 큰 집에 쌓아 놓은 모든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포학과 겁탈로 드러난다. 포학(??????, 하마스)은 살인이나 치명상을 입히는 공격을 말한다.9) 겁탈(????, 쇼드)은 물질적으로 손해를 입히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다.10) 포학과 겁탈은 쌍을 이루어 \재산과 소유물에 대해 저지르는 범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11) 그러므로 이 두 단어는 사람과 재물에 대한 폭력적인 행위를 말하며 결국 \살인과 강도질\을 의미한다.12) 그들은 느코하의 파괴를 근거로 부자가 된 자들이다. 사마리아에서 호화롭게 살고 있는 재산가들은 그 위치와 업종이 무엇이든 간에 사실은 살인자며 도적놈들이란 말이 된다. 그들은 많은 것을 집안에다 쌓아 놓았다. 권력으로, 속임수로, 이념으로, 심지어는 종교의 이름으로. 그러나 가만히 보니 그것은 보화가 아니라 포학 겁탈이라는 호랑이를 집안에다 풀어놓은 것과 같은 꼴이 되었다. 이들은 자신이 쌓는 죄로 말미암아 살해당한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네 힘을 쇠하게 하며 네 궁궐을 약탈하리라(3:11)



    이제 사마리아에 대한 여호와의 결정을 보여준다. 그러므로에서 알 수 있듯, 행위와 결과는 서로 묶여져 있다. 그 행위대로 보응받는 것이다. 땅은 포위되고(땅 사면에 대적이 있어) 방어체계는 약화되고(네 힘을 쇠하게 하며) 결국은 성이 함락되어 쌓아 놓은 모든 것을 잃게 된다(약탈하리라). 권력으로 약탈하여 집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주변의 힘 있는 적들에 의해 힘을 써 보지도 못한 채 몽땅 털리게 된다는 것이 본문의 말씀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온 사면의 땅을 자신들의 것으로 빼앗아 주위 사방이 자신들의 땅인데 결과적으로는 땅 사면에 대적이 있고 그들이 믿고 의지한 것이 권력과 금력이었는데 그들의 힘이 쇠하게 되며 인생의 승리와 성공으로 평가되던 큰 건축물들은 파괴된다.

    적이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는 분명하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큰 패배를 당한 뒤에 수도가 함락되고 사마리아는 약탈되고 불타고 파괴될 것이다. 무엇이 강한 것인가를 우리가 보고 있다. 물질과 이름과 권력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 그것은 결코 자랑이 되지 못한다. 심판하는 날에 그것들은 우리의 적이 되어 우리를 파멸시킨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아모스를 오해하지 말라. 경쟁에서 진 자의 한이 아니다. 성공에 실패한 자의 자기 방어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절대로 미움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한국 교회여! 그리고 지도자들이여! 민족의 운명이기를 포기하지 말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다.



    2) 엉터리 구원신학(3:12)



    아모스는 또 다시 시골에서 살던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예를 들어 사마리아의 운명에 대해서 목자, 사자, 양과 비교하면서 선포한다. 과도히 실은 마차가 만들어 내는 땅의 울림 같은 심판 때의 흔들림(2:13), 물과 하수처럼 흐르는 공법과 정의(5:24), 목자가 양 조각을 건져낸 것과 같은 국가의 운명,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의 신탁을 전달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

    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13) 걸상에 비단 방석에14) 앉은 이스라

    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



    이 구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는 말이 나온다. 건져냄을 입으리라는 히브리어 나찰(??????)의 수동형으로 \구원받는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구원받으리라\고 번역할 수 있다. 사자 입에 들어간 것과 같은 죽음의 상황에서도 사마리아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뜻일까? 아모스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목자들과 관계 있는 법령들을 알 필요가 있다. 법령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야기 하나를 만들어 보았다.

    옛날에 어떤 목자가 있었다. 그는 목장의 주인이 아니며 고용된 사람이었다. 어려운 살림에 남의 집 양들을 치게 되었으니 그가 주인의 양들을 먹이게 된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품삯으로 가족이 겨우 먹을 수 있는 식량을 얻어갔다. 최선을 다하긴 했으나 가끔은 사나운 짐승들에게 양을 빼앗길 때도 있었고 양들이 어디론가 가버려 찾지 못할 때도 있었다. 양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며 험한 골짝 마다하지 않고 찾아 나섰다. 어떤 때는 잃은 양을 찾기도 하였지만 어떤 때는 헛수고로 끝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근심 어린 얼굴로 주인을 대해야 했다. 그가 받는 품삯이 얼마라고 양 값을 물어줄 수가 있겠는가? 잃어버린 양의 값을 치러야 한다면, 그는 얼마 동안이나 품삯을 받지 못하고 일해야 할까? 부자인 주인은 고의가 아닌 것을 알고는 다음에는 주의하라는 말만 할 뿐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참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떤 주인들은 분명히 짐승이 잡아갔는데도 불구하고 무조건 목자보고 물어내라고 다그쳤다. 목자는 짐승과 싸운다고 부상을 입고, 양 값마저 물어내고 또 억울하게 내침을 당하기도 했다. 반대로 목자들 중에는 마음씨가 나쁜 사람들도 있었다. 주인의 눈을 속여, 양을 팔아먹거나 잡아먹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주인에게 가서는 짐승이 잡아갔다고 눈물을 흘리며 거짓말을 했다. 주인이 억울하게 손해를 보는 경우였다.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난다면 목장의 주인들은 어떠한 조처를 취해야 했을까? 증거 없이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을 것이다. 목자 역시 억울한 일을 당하기 않기 위해 어떤 약속을 요구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에서 쌍방이 인정하는 규정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 목자 법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내용인 즉, 양을 잃어버린 목자는 그 양 값을 주인에게 물어주어야 한다. 단 짐승에게 물려간 간 증거를 보여줄 수 있다면 목자는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짐승이 양을 물고 갔을 때 목자들은 기를 쓰고 증거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희생당한 양의 뼈 조각이나 껍질이나 신체의 한 부분이라도 건지려고 했다. 자신의 태만으로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팔아먹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출애굽기 22장 12-13절은 이러한 법 정신을 보여준다. 나귀나 소나 양이나 다른 짐승을 맡았다가 도적 맞으면 주인에게 배상해야 하며(12절), 만일 사나운 짐승에게 물려갔다면, 그가 책임을 면하기 위해 찢긴 것을 증거로 가져가야 한다(13절). 함무라비 법전 역시 이러한 상황을 알고 있다. 이 법전에 따르면, 목자는 물려 죽은 양의 시체를 주인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15)

    아모스는 시골 목자 혹은 목장 주인 출신으로 이러한 일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한적한 산지에서 양을 치면서 만나곤 했던 사나운 짐승들의 공격,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짐승들을 좇아가는 목자들의 이야기, 가끔은 악한 마음으로 양을 팔아먹는 신실하지 못한 목자들. 자신의 출신적, 직업적 경험으로부터 하나님의 의도를 전파한다. 아모스가 의도하는 것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죽은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이라도 건져내려고 기를 쓰는 것을 너희들이 알고 있다. 바로 그것처럼, 너희의 운명은 죽은 양의 시체 조각과 같은 신세가 될 것이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생각하면서 본문을 다시 읽어보자.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상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



    이 구절을 얼른 보면 사마리아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처절한 멸망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피를 입가에 흘리고 있는 사자, 그 입 속에 남아있는 부서진 뼈 조각들, 먹지 않고 뱉어버린 털 붙은 껍질들, 비참한 죽음, 이것이 사마리아의 운명이다. 이 구절에서 사자의 울부짖음의 결과가 드러난다.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3:4). 그러므로 건져냄을 입은 조각들은 완전한 상실의 증거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16)

    부자들은 자신의 부흥하는 경제 상황에 \사마리아의 성공\을 외칠 것이다. 정치 군사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군사력과 성곽을 바라보며 \사마리아의 난공불락성\을 믿었을 것이다. 거짓 종교인들은 말씀에 근거하기보다 현실과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근거하여 \사마리아는 구해냄을 받을 것이다!\, \사마리아는 구원받을 것이다!\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스스로 의식화하고 스스로에게 믿음을 강요하는 큰 소리를 쳤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이기를 바라며 \믿습니다\를 연신 외쳐대는 사람들처럼. 아모스는 거짓 종교인들의 외침을 비꼬고 있는 듯하다. \건져냄\이라고? 아모스는 그들의 말을 받아 말한다. \그래, 건져질 것이다. 사자 입안의 고기조각처럼\. \사자가 뱉어낸 뼈 조각\이 구원인가?

    예언자의 선포는 심판의 대상과 원인을 지적한다. 사마리아가 파멸 당하는 이유는 지도자들의 호화스럽고 방탕하고 부도덕한 삶 때문이다. 그들의 경제적 태도는 자신들을 파멸시키는 절대적인 원인이다. 침대로 상징되는 편안한 삶, 근심 없는 나날들, 흔들림 없는 여호와의 구원에 대한 신앙, 성공으로 평가받는 높은 명예와 특권. 그들이 자신들의 성공을 즐기며 시 23편을 외우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외워야 할 시편은 시 23편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의 본문 아모스 3장 12절을 외우고 있어야 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자고 하는 것은 실패자의 뒤틀린 심보에서 나오는 것인가? 돈과 권력과 명예가 우리가 추구했던 그 이상을 대체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우리가 그것들을 얻었는가? 우리가 그것들을 얻으려고 하는가? 그래서 다투고 그래서 놓기 싫고 그래서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라고 말하는가?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은 없네\ 라는 찬송을 온 교회가 회개하는 심정으로 불어야 할 때다. 우리에게도 그 찬송을 눈물로 부를 때가 있었다. 무엇을 사기 위해 무엇을 주었는가? 무엇을 얻기 위해 무엇을 잃었는가?



    3) 무너지는 영광들(3:13-15)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는 야곱의 족속(히, 야곱의 집)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증거 된다.



    주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듣고 야곱의 족속에게 증거하라

    내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보응하는 날에 벧엘의 단들을 벌하여 그 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뜨리고(13-14)



    증거할 사명을 맡은 너희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다. 가능성으로는 예언자 무리들, 9절의 외국 지도자들, 이스라엘 백성들, 전 세계 백성 등이다. 아모스는 듣고, 증거하라가 복수 명령형이기 때문에 후보에서 제외된다. 그러나 특정한 대상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여호와는 재판관이고, 야곱의 집은 피고며, 증인들이 소집되어 야곱의 죄를 증언하는 한 재판정으로 생각하면 된다. 사마리아가 야곱의 집이라고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이 누구인지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주전 8세기의 한 나라가 아니라 여호와로부터 족장들을 통해 특은을 받았으며 출애굽과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된 그 나라를 가리키는 것이다. 야곱의 집이란 말은 선택과 축복과 보호를 뜻하고 이스라엘이 자랑스럽게 생각한 자기정체성이다. 그런데 야곱의 집은 재판정으로 억지로 끌려 나온다. 이스라엘이 무슨 짓을 했는가? 모든 죄들(프샤임, 반역들)이란 단어로 요약된다.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언약 위반, 즉 여호와께 행한 고의적이며 대대적인 반역 행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앗수르와 맺은 계약을 존중하여 주기적인 공물을 바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의무는 무시해 버린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주소와 수준을 표현하는 것이다.

    벧엘은 야곱의 성소였으며 여로보암 이후 북왕국의 국가 성소였다. 벧엘은 종교적 중심지 일 뿐 아니라 왕조의 신학적 기반이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선전으로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시키는 이념적, 종교적 중심지였다. 벧엘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벧엘은 온갖 악을 정당화하는 아편같은 종교의 중심지였다. 말이 되지도 않는 \경건한 악인\들이 가득 찬 곳, 그곳이 벧엘이었다. 벧엘은 사마리아에 거하는 지배계층의 성소였다. 더하여 그 자체가 우상숭배의 중심지였다(왕상 12:28-30). 순례자가 그득하고 헌금이 넘치고 호화로운 예배가 행해지는 곳이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증거는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의 문제점은 바로 벧엘의 타락에 있었던 것이다. 한 사회에 죄악이 관영 한다면, 아무리 신앙을 자랑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벧엘(하나님의 집)의 책임이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손가락질을 해대고 있다. 세상의 기준에도 못 미쳐 지탄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리니 상아궁들이 파멸되며 큰 궁들이17) 결단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다음의 심판 대상은 벧엘에 투자하고 벧엘에서 위로받고 배를 두드리고 안심하며 사는 예배자들의 집들이다. 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벧(집)이다. 벧엘(하나님의 집) 다음에는 그 집과 관계 있는 사람들의 집들이다. 여름 궁과 겨울 궁은 같은 건축물 안에 있는 다른 장소라기 보다는 두 장소에 있는 별개의 건물들을 가르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한 고대근동 텍스트는 여름 집과 겨울 집을 언급한다. 주전 8세기 후반부의 건축물을 완공하고 기록해 놓은 건물 인스크립션에는 사말(Sam\al)의 왕 바라킵(Barrakib)은 그의 조상들이 좋은 집을 가지고 있지 못했으며 집 한 채로 겨울 집, 여름 집으로 삼아 지냈다고 강조한다.18)

    아마 그가 자랑하고 싶어한 것은 자신이 세운 건축물로 말미암아 비로소 독립적 용도를 가진 여름 집, 겨울 집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아합도 계절에 따라 각기 다른 곳에서 통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왕상 21:1; 왕상 21:18).

    이러한 근거로 생각해 볼 때 우리의 본문이 한 건물에 있는 두 용도의 장소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사회 지도층들이 누렸던 호화스러움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여름 궁, 겨울 궁, 큰 궁이 결단난다는 것은 통치 엘리트의 완전한 궤멸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복과 명예와 지위를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계급적 개념에서 상류층 사람들이 다 악인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사회에 악이 넘쳐 흐르고 있을 때, 신앙인들이 악인의 명단 속에서 자주 발견될 때,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회가 세인들의 입에서 자주 오르내릴 때,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지도적 위치에 있는 교회들이 자신들을 살피는 것은 지혜이며 신앙이 아닌가?

    상아 집(바테 하쉔)은 상아로 만든 집이 아니다. 내부가 상아로 장식된 호화스런 빌라들을 뜻한다. 상아는 내부의 벽, 침대, 가구들을 장식하는 데 사용되었다.19) 이스라엘에 상아가 나지 않는 다는 것을 고려할 때 엘리트들은 상아를 무슨 돈으로 사왔을까?

    그들은 호화스런 물건들을 사기 위해 현금 작물을 필요로 했고 두로가 필요로 하는 밀, 올리브, 포도를 거의 모든 영토에 심게 했다. 결과적으로 농민들로 하여금 특정한 기후 때에 아사를 방지하는 다양한 곡물의 농사 방식을 포기하게 만들고 국가가 계획하는 특정 작물에 중심을 두는 방식으로 변경하였다.

    현금화 곡물 농사가 부적합 기후로 망치게 되었을 때 농민들은 세금을 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당장 생계를 이을 곡식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농민들은 조상들이 물려준 땅을 잡히고서라도 곡식을 얻어 와야 했다. 다음 해에 풍년이 들어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풍년은 곡가의 하락을 가져왔고 빚진 것을 갚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곡식을 내다 팔아야 했다. 다음 해 역시 흉년일 경우에는 또 다시 빚을 지기 위해 자신을 노예로 팔아야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엘리트들은 대 토지가가 되어 갔고(latifundialization) 전통적인 농민들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농노(debt slave)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것이 \상아\라는 한 단어에 들어 있는 의미이다. 아모스는 약간의 사치를 정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족을 노예로 떨어지게 만든 지도자들의 탐욕과 그 탐욕이 만들어 낸 구조적 착취와 비신앙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건축물들(바팀 라빔)은 이사야 5장 8-12절에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소수의 상류층들이 대다수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란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지기에는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따라가며 밤이 깊도록 머물며 포도주에 취하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예레미야는 여호야김의 거짓 성공을 정확히 비판한다.



    불의로 그 집을 세우며 불공평으로 그 다락방을 지으며 그 이웃을 고용하고 그 고가를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가 이르기를 내가 나를 위하여 광대한 집과 광활한 다락방을 지으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창을 만들고 그것에 백향목으로 입히고 붉은 빛으로 칠하도다 네가 백향목으로 집 짓기를 경쟁하므로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비가 먹으며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공평과 의리를 행하였었느니라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예레미야 22장 13-16)



    하나님이 인정하는 성공은 집짓기 경쟁이나, 큰 집이나, 붉은 빛 장식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성공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 곧 가난한 자에 대한 연민과 사랑, 공평과 의리, 절제하는 삶이다. 우리가 이것을 모르고 있는가?

    아모스서에 나오는 재산가들의 소유는 자신들의 생각처럼 안락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파멸을 가져다준다(파멸되며…결단나리라). 심판의 표적물은 두 곳, 성전과 빌라다. 모두 한 사회의 사회 경제적 분신이다. 벧엘은 윤리 없는 종교, 부귀영화를 지향하는 종교, 착취로 얻어진 호화스런 삶의 친구가 된 종교를 뜻한다. 즉, 하나님 떠난 종교를 말한다. 빌라는 최소한 주전 8세기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억압과 착취와 거짓과 무한 탐욕과 권력의 행사를 통해 세운 대 건축물(아르몬)과 호화로운 삶(상아)이다. 신앙은 생활을 만들고 생활을 그 신앙의 수준과 질을 반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제단과 탐욕스런 삶의 양식을 동시에 심판하신다. 오늘날 신앙과 행위의 분리 현상이 심각하다. 이제 우리는 타종교를 생각하며 우상숭배하지 말라는 말 외에,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행해야 할 행위가 무엇인지 가르치고 고쳐야 한다. 아, 불쌍한 한국교회! 아모스의 외침에 겸손해지고 예레미야의 눈물로 교회를 사랑할 사람들이 요구되는 때이다.



    3. 나가면서 생각해 보는 말씀



    사람들은 누구나 성공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기념비를 남기고 싶어합니다. 믿는 사람들 역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데 믿는 사람들은 성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랑할 것이 있으면 믿음으로 말미암은 복과 성공이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자랑합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은 기도가 부족한 사람이고 더 붙들어야 하는 사람들로 위로를 받고 또 성공을 향하여 소원하며 나아갑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역시 자신들의 기념탑을 쌓았습니다. 아르몬을 짓고 여름 궁 겨울 궁을 짓고 상아로 대변되는 호화롭고 안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른 것을 기초로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경제 행위에 불과했습니다. 탐욕적인 경제 행위 말입니다. 상대를 희생시키고 상대를 속이면서 말입니다. 그들의 호화스런 성공 뒤에는 혼돈과 억압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성공 뒤에는 사실은 희생자가 있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요란, 학대, 포학, 겁탈이 성공자들의 뒷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야곱의 집에 살고 있는 자들이며 이스라엘이며 벧엘에서 은혜의 뿔을 붙드는 자들이며 그곳에서 여호와를 부르는 자들이었습니다. 신앙의 행위를 포함합니다. 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고 그 분의 뜻을 받드는 삶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호화스럽게 신앙생활 했을 뿐 잘 믿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고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한국교회에 대해서 말한다고 하는 것은 참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잘 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기도가 살아있고 선교하고 베풀고 열심 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설교자의 생각일 뿐입니다.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도 생각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교인들이 의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세상 사람들의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지도자들 때문에 전도가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돈과 특권과 관계된 일로 신문지상에 오르 내립니다. 왜 세상사람들은 교인들의 희생으로 지은 교회 건물들에 감동하지 않는 것입니까? 왜 놀라운 수적 성장에는 찬사를 보내지 않고 지도자들이 비상식적으로 누리는 특권에만 주목하고 비난하는 것입니까? 혹 그들이 보는 관점이 바른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보아 왔다고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의 평가는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높은 탑을 쌓아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아스돗과 애굽이 지적한 것은 자신들의 나라에도 있는 명예와 성공과 대 건축물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가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두 나라의 지도자들이 본 것은 하나님의 도시 사마리아와 하나님의 집 벧엘에는 정의도 공의도 하나님의 앎도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교회와 지도자들에게서 바람직하지 못한 것만 찾아내니 참 안타깝습니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자랑해야 할 것은 탑이 아니라 높은 윤리 의식과 섬김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방인이 아스돗과 애굽에 의해 악독한 나라로 평가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재판 받는 날, 그들은 증인으로 재판정에 섰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윤리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신앙이 아직 어리다는 증거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부패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신앙이 변질되어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성공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자랑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신앙에 의한 평가는 고사하고 사회 통념에도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으면서 여전히 신앙의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 신앙인들 아닐까요?

    벧엘은 말만 하나님의 집일 뿐 사실상 풍요와 다산을 약속하는 바알 종교의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요즈음 말로 무늬만 여호와 종교요 내용은 기복을 신앙하는 바알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벧엘에서 마저 윤리가 없어지고 행위가 없어지고 있었고 의를 추구하면 반드시 맺게 되어있는 열매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부패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상아와 벽돌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의와 인을 행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게 될까요? 괜한 걱정이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합니다. 정말 좋은 교회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몸으로 보여주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수 없을까? 하고 눈물 흘리며 간구하는 찬양은 우리의 노래입니다. 이왕 주님을 위해 나선 우리들, 멸시 천대 우리가 받고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께 드리겠다는 찬송은 우리 심령의 간증입니다. 아모스의 피맺힌 절규를 듣고 우리가 우리를 바꾸면 우리가 사랑하여 한 평생 바친 교회는 든든히 서 갈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바꾸면, 우리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계절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 험한 십자가를 사랑하고 최후 승리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 순교와 희생 위에 세워진 우리교회, 믿음의 후손에게 사랑과 희생의 본을 보여주고 넘겨주면 주님께 칭찬을 받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한일장신대 교수

    1) 칠십인 역 성경은 아스돗 대신에 앗시리아로 읽는다. 아마 애굽과 평행되는 나라로는 아스돗 보다는 앗시리아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참고. Stuart, 328). 아스돗은 헬라와 로마시대에 Azotus로 알려졌고 위치는 블레셋의 한 도시 국가로서 지중해에서 약 5킬로미터, 항구도시인 아스클론 북쪽 16킬로 지점에 위치해 있다. 유다왕 우시야(783-742 B.C.)에 의해 정복된 바 있고, 사르곤 2세에 대해 반역함으로 712년 정복되었다. 701년 산헤립의 팔레스틴 원정시에는 반역 동맹에 가입하지 않음으로 화를 면할 수 있었다(Philip J. King, Amos, Hosea, Micah--An Archaeological Commentary, 53).

    2) Mays, 63-64.

    3) 주전 8세기 이스라엘과 유다 구릉지에 실행되었던 \집약농업\(intensification of agriculture)과 관련된 착취와 농노의 발생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Marvin Chaney, \Latifundalization and Prophetic Diction in Eighth-Century Israel and Judah,\ presented in Colloquium on Reformed Faith and Economics(Ghost Ranch, August, 1987); J. A. Dearman, \Prophecy, Property and Politics,\ 383-397 in SBL 1984 Seminar Papers; D. C. Hopkins, \The Dynamics of Agriculture in Monarchical Israel,\ 177-202 in SBL 1983 Seminar Papers; B. Lang, Monotheism and the Prophetic Minority: An Essay in Biblical History and Sociology. vol. 1 of The Social World of Biblical Antiquity Series, ed. J. W. Flanagan(Sheffield: The Almond Press, 1983)가 도움이 될 것이다.

    4) 추상명사의 복수형은 수적인 복수가 아니라 뜻을 강화하는 복수다(Gesenius-Kautzsch- Cowley, §124 e).

    5) Wolff, 193.

    6) Wolff, 193; Mayes, 65.

    7) Wolff, 193.

    8) Wolff, 193.

    9) Wolff, 194.

    10) Wolff, 194.

    11) Wolff, 194.

    12) Wolff, 194.

    13) 침상 모퉁이는 프아트 밑타(?????? ??????)의 번역이다. 프아트는 페아에서 나온 명사로서 페아는 \모퉁이\, \조각\, \언저리\를 뜻한다. ??????, yph에서 파생한 단어로 보면 \호화로움\, \사치품\의 뜻이다(KB, 750; Mayes, 66; Stuart, 328). 아모스가 뜻하는 바는 \사마리아가 건져냄을 입는 다고 주장들 하는데, \침상 끝 조각\이나 건져지면 다행이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모스의 의중은 \침상 끝 조각\과 \사치스런 침상\을 동시에 생각나게 하는 것으로 보인다.

    14) 걸상에 비단 방석에는 드메셰크 아레시(?????? ????????)의 번역이다. 아레시는 \침상\이나 \침대\, \긴 의자\를 뜻한다. 문제는 드메셰크을 어떻게 보느냐하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히브리어 글자를 수정하여, \침대 머리판\(headboard), \모서리\(edge), \부분\(part) 등으로 읽는다. 어떤 학자는 단어들의 순서를 바꾸어 \다메섹에서 수입한 침상\으로 이해한다(cf. Wolff, 196). 한글개역 번역은 드메셰크를 도시 다마스크로 보고 \질 좋은 섬유\로 이해한 듯하다. Stuart는 드메셰크 아레시를 \질 좋은 침상 직물\(fine couch fabric)로 본다(328).

    침상 모퉁이에와 걸상에 비단 방석에는 히브리 전접 전치사 브(??)를 \-에\(in)로 본 결과다. 그러나 전치사 브는 \-와 함께\(with)로 읽으며 뜻이 더 명확해진다.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가 건져냄을 입는다. 침상이나 장의자 나무 조각이나 천 조각만 남기면서.

    15) Law 266, ANET, 177a.

    16) Wolff, 198.

    17) 히. 큰(혹은 많은) 집들.

    18) Wolff, 201b.

    19) 상아의 수입, 고대 근동에서의 코끼리 생존지역, 상아 조각품들, 상아침대, 상아가구들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그림은 Philip, J. King, 139-149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