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강해 / 벧엘과 길갈마저 썩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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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모스 강해
(암 4:4-13)
| 김태훈 |
1. 들어가는 말
앞 호에서 바산의 암소로 대변되는 지도층들의 이기심과 경제 사회적 폭력에 대해 살펴보았다. 아모스의 눈은 또 무엇을 보았을까? 벧엘과 길갈이다. 겉보기에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성공적이다. 사람들로 메워지고, 종교적 열성으로 가득 찬 사람들의 갈망, 자신의 성공에 대한 감사로 가득한 헌물과 제사, 그러므로 벧엘과 길갈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성소가 아닌가? 이는 아모스 시대의 지도층 사람들, 혹은 성소를 규칙적으로 찾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진 판단이었을 것이다. 아모스는 이번에도 다르게 보고 다르게 판단한다. 열광적인 예배에서 하나님 무시와 백성들에 대한 폭력을 본다. 정화 장소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오염의 진원지인 교회를 본다. 지도층의 부패를 용인하고 부추기는 성공지향적 직장인들로 전락한 종교 지도자들을 본다.
이스라엘 사회가 고쳐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마지막 보루인 성소의 타락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절망이다. 그 심장이 썩은 것이다. 그 가운데 중앙 성소들인 벧엘과 길갈이 있다.
4장 4-13절을 하나의 연속적인 신탁으로, 세 단락으로 나누어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된다. 4-5절은 성소에서 드리는 예배의 본질을 밝힌다. 6-11절은 이스라엘을 깨닫게 하려는 하나님의 수고를 보여준다. 12-13절은 하나님 영광송을 통해 이스라엘에 임할 심판을 보여준다.
어디서 한 설교인지는 분명치 않다. 벧엘에서 선포된 것인지, 길갈에서 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아마 앞에 구절들과 연결하여 본다면 사마리아에서 선포된 것일지도 모른다. 아모스의 설교는 순례 절기가 배경인 것 같다. 절기는 초막절일 가능성이 높다. 초막절은 일년 농사가 완결되는 것을 축하하는 절기다. 여름동안 포도, 무화과, 감람, 석류 등이 차례로 익어가고 여름 중반이 되면 곡물 추수가 거의 끝난다. 이 때 초막절을 지킨다. 새포도주도 이 시기에 나오므로 내용 상 포도주 축제가 된다.1) 사람들은 지난 농사가 성공한 것처럼, 새로 시작되는 농사도 성공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축제를 즐긴다. 기후적으로도 뜨거운 여름 가뭄이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는 때라 농민들의 마음은 단비를 맞는 땅처럼 부드러워진다. 기다리던 가을비가 이미 시작된 경우에는 초막절은 더욱 큰 기쁨의 절기가 된다.2)
초막절이 암시하는 것은 \완결의 때\요 결산의 시기이다. 동시에 끝과 새로운 시작의 경계이기도 하다. 한 해의 추수가 끝나고 오는 해의 농사를 추정해 보는 시기다.3)
그러므로 아모스의 예언은 일년마다 되풀이되는 절기에 대한 관심을 넘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곡식농사의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시간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초막절을 비롯하여 순례절 때는 신이 나타나 만나 주신다는 전승이 있다. 순례자들에게, 신이 나타나는 것은 무제한적인 복의 약속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문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된다. 하나님의 나타남을 갈망하는 순례자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그 들이 만나는 하나님은 복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들을 심판하는 하나님이다.
2. 본문 주해
1) 부적합한 장소, 부적합한 방법, 부적합한 사람(4-5절)
모여 든 무리들 앞에서 아모스는 마치 자신이 제사장인 양 소리쳐 외친다. 제사장이 늘 하는 말로,4) 목소리까지 거룩한 목소리로 흉내내면서, \하나님의 집으로 모여들어라, 예배 드려라, 헌물드려라,(기도든지 찬송이든지) 목청 높여 외쳐라.\고 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제사장 투의 말 뒤에는 조롱이 송영처럼 붙는다.
\모여라, 반역하러(????????: 피셔우),
드려라, 누룩 든 것으로,
드려라 선물을! 온 사람이 다 알도록,
너희 영광을 위하여, 너희 원하는 짓이니.\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3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4절)
벧엘에 가서는 히브리어 보우 벧엘(???????????? ??????, \벧엘로 오라\)의 번역인데 이 표현은 제사장들이 백성들에게 주는 권고처럼 들린다. 보(??????, \오다\)는 \가고 오다\는 뜻을 넘어 순례자들이 \성소에 들어가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5) 사마리아의 지도층이나 벧엘의 종교인들에 대해 좋지 않은 견해를 가진 아모스가 웬일인지 제사장의 일을 대신해 주고 있으니 사람들은 의아스럽게 생각했을 것이다. \벧엘로 모여 예배드리라.\ 아모스를 아는 사람들은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을 것이고, 만일 아모스가 이 선포를 벧엘이나 길갈에서 했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순례자들은 아모스를 성소에 속한 제사장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순간 뿐, 아모스는 독한 말로 청중을 비난한다. \반역자들아!\ 그러니 아모스의 초청은 흉내요, 패러디일 뿐이다.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표현으로 시작하지만, 한 말 덧붙여 제사장의 말들을 비웃어 버리고 순례자들을 당황케 한다.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는 \벧엘로 오라, 그 반역질이나 잘해 보라\는 뜻이다. 범죄하며의 히브리 단어 파샤(??????)는 \정치적인 결별,\ 즉 반역에 사용되는 단어로 여기서는 여호와와의 결별을 뜻한다.6) 여호와를 만나러 온 사람들이 사실은 여호와와 결별한 사람들이고, 또 더 결별하러 온다고 아모스가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예배자가 여호와와 결별하러 오는 사람일 수가 있는가? 열정과 헌신이 반역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다. 선한 삶 없는 예배는 우상숭배와 다름 아니다. 사기로 얻은 것, 억압으로 뺏은 것, 탐욕 덩어리는 제물이 될 수 없다. 옷이 화려하고, 분위기가 좋고, 음악이 장엄해도 그것은 범죄를 더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 교회를 걱정한다. 우리 교인들을 걱정한다. 우리 예배가 걱정된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어야 하는데, 바른 사람이, 바로 살아 얻은 것으로 드리며, 탐욕을 구하지 않는다면 염려할 것은 없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가?
벧엘과 길갈은 어떤 곳인가? 이 두 성소 모두 오랜 전통의 장소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 단을 쌓은 곳이 벧엘 근처이며(창 12: 8), 야곱이 꿈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본 곳이고(Gen 28:17?2), 사무엘이 판결하던 곳이었다(삼상 7:16). 여로보암 때에는 예루살렘과 필적하는 북왕국의 종교적 수도였다(왕상 12:29). 아모스 시대에는 더욱 위상이 높아져 제사장 아먀샤가 언급한 것처럼 왕의 성소요 왕국의 궁상성소가 되었다(암 7:13).
벧엘은 그 전통성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역사 상 가장 악명 높은 장소 중의 하나로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원죄와 같은 곳이다.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을 대항하여 북왕국의 성소로 삼은 곳이고, 그곳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절기를 바꾸며(왕상 12:32), 자신이 임명한 무자격의 사람들로 제사장을 삼은 곳이다(왕상 12:31). 벧엘은 전통을 지닌 곳이로되, 내용은 이미 변조된 가짜였다는 말이다. 이 벧엘에서 종교인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향유하기 위해 벧엘의 신앙의 질을 물량으로 대치시켜 버렸다. 경외와 순종은 물량과 정열로 바뀌어졌다. 벧엘은 고치고 하나님과 화해하는 곳이 아니라 경제 사회 지도자들의 삶을 승인하고, 그들에게서 물질과 번영을 돌려 받는 자기 만족의 장소가 된지 오래였다.
아모스가 언급하는 길갈은 여리고에서 1 마일쯤 떨어진 오늘날의 키르벧 메흐지르(Khirbet Mefjir)다.7)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이 요단을 건넌 후 제일 먼저 숙영한 곳으로서 이 곳에서 온 백성이 예배를 드렸다.
정월 십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서 여리고 동편 지경 길갈에 진 치매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 온 열 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수 4:19-24).
그러므로 길갈은 기억의 장소다. 구원하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을 영원토록 기억하는 장소 말이다. 사울이 왕이 된 곳이다(삼상 11:14). 본문에 단 대신 길갈이 언급된 것은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주전 8세기 경에는 길갈이 순례지였을 것이다. 길갈에서도 벧엘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보다는 사람의 행위가 자랑되고 있었다.
아침과 3일은 순례절 일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 첫째 날은 성소에 도착한 날이고 그 다음날이 둘째 날로서 아침에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셋째 날 십일조(마아세르, ????????)를 드렸을 것이다.8)
\하나님께 드려지는\ 십일조의 역사는 야곱에게까지 올라간다. 그는 자신이 귀환하는 날 벧엘에서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맹세한다(창 28:22). 신명기 법전에 따르면 수확된 곡식, 포도주, 기름의 십분의 일을 성소에 바쳐야 한다(신 12:17; 14:23). 바쳐진 것들은 축제 동안에 교제의 연회의 음식으로 사용되었다(신 12:6-7, 11-12, 17-18; 14:23, 26). 그 중 일부는 제사장의 몫으로 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9) 왕국 시대에는 곡식과 포도주를 세금으로 국가에 바쳤다. 이렇게 바쳐진 곡식과 포도주는 왕에 의해 국가 관리들에게 분배되었을 것이다(삼상 8:15). 십일조의 목록에는 양떼도 들어 있다(삼상 8:17).
아침마다와 3일 마다 드리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무용지물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절기 잘 지키고 제사 잘 지내고 십일조 잘 내는 것이 복 받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면, 즉 의식에 대한 열정에 따라 복이 정해진다고 생각한다면, 일년 내내 순례하고 제사 드리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일년 내내 지금 같은 일 해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둘째, 형식주의를 비판하는 것일 수 있다. 예전을 정교하게 발달시켜, 첫째 날에는 무엇, 둘째 날에는 무엇, 셋째 날에는 무엇하며 하는, 전문성과 형식성을 올바른 예배라고 하는 종교 엘리트 전문가주의를 비난한 것일 수 있다. 날이 갈수록 전문화되어 가는 예전, 화려해 지는 예배 분위기, 장엄함, 보다 근본적인 하나님 경외와 순종이 없는 그런 예배에 대한 비난일 수 있다. 아니면 아모스가 양쪽 다를 의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희 희생, 너희 십일조라는 표현은 그들이 드리고 있는 것이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희생도, 십일조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하나님은 무관하다고 하니 그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의 삶이 그들의 제물을 무용화시킨 것이다. 온갖 악을 통하여 얻은 재물로 하나님을 달래겠다고, 자신의 죄악을 숨기겠다고, 자신들의 양심을 무디게 하려고 바치는 그런 재물은 하나님이 받을 수 없는 것이며 여전히 그들의 것으로 남아있게 된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인과 그 제사를 받지 않은 것이며, 아벨의 제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 제사를 받으셨음을 명심해야 한다(창 4:4-5).
희생(제바흐)은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 모두에 쓰이는 단어다. 여기서는 화목제를 한정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를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5절)
수은제(酬恩祭), 즉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드리는 감사의 제사(토다, ????????)와 낙헌제(樂獻祭), 기쁜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느다보트, ??????????)는 앞에서 언급한 희생 제사와 구별되는 다른 제사라기 보다, 희생제사에 포함된 제사들이다. 화목제에 속하는 제사들로서 기도 응답이나 복 주심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 규정은 다음과 같다.
\만일 그것을 감사하므로 드리거든 기름 섞은 무교병과 기름 바른 무교전병과 고운 가루에 기름 섞어 구운 과자를 그 감사 희생과 함께 드리고 또 유교병을 화목제의 감사 희생과 함께 그 예물에 드리되\(레 7:12-13).
그러나 유교병, 즉 누룩을 넣은 빵은 불에 태워 드릴 수는 없게 되어 있다: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라\(레 2:11; 참고. 6:17, 10:12). 그러므로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드리는 것은 율법 규정에 어긋나는 것이다. 아모스는 두 가지 면을 비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율법을 경시하는 제사장과 성소를 비난하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의 비유로서 순결해야할 제물들, 즉 예배자와 제사장, 헌물들이 순결하지 못하고 누룩 든 것, 즉 부패한 것들이라는 것이다.
소리내어 광포하려므나는 제사와 헌물을 드리는 예배자의 속마음을 보여준다. 예배자가 예배를 통해 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감사도 아니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용서를 구함도 아니고, 헌신의 다짐도 아니다. 실상은 자기 자랑, 즉, 자발적인 제사를 드리고 있다는 것, 많은 것을 바치고 있다는 것, 믿음이 있어야 낼 수 있는 어려운 것들을 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 내세우고 싶은 것이다. 아모스는 예배는 있으나 하나님의 영광은 없고 자신의 영광만 챙기는 예배자들을 고발하고 있다. 아이들 말로 하자면, 할렐루야(여호와 찬양)는 없고 할렐루-\나\(나 찬양)와 할렐루-\너\(너 찬양) 만 있는 거짓 예배, 사람 놀음, 능력 과시의 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무엇을 선전하고, 박수치고, 광고하는가? 그것을 통해 만족을 얻는 이는 누구인가? 진실한 예배보다는 몇 명 모이는 예배인가, 어떻게 변하는가 보다는 어떤 위치의 사람들이 교인인가, 무슨 간판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액수가 얼마만큼 나오는가가 우리의 관심이라면, 소리내어 광포하는 아모스 시대의 교회와 무엇이 다른가?
특이한 점은 속죄제가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확신할 수는 없으나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회개 없는 신앙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 없는 신앙이 있다면, 그들의 기도는 이기심으로 가득 차고, 모임은 온갖 모양의 이기를 충족하기 위한 싸움터로 변하게 될 것이다.
2) 돌아오라 하였으나(6-11절)
이 부분의 내용은 이스라엘이 돌아오도록 깨우치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역사와 어떤 환경에서도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인칭 단수 동사가 여덟 번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의 수고의 어떠함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의 역사는 벌이기보다는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기근, 가뭄, 농작물의 실패, 염병과 전쟁, 성읍의 붕괴로 이스라엘을 돌아 오라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았다. 각 부분들은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는 후렴부와 여호와의 말씀이란 인증으로 끝난다(6, 8, 9, 10, 11).
각 부분의 내용은 과거 역사를 회상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아모스가 농촌 목자로서 백성들과 함께 보고 듣고 겪은 극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열거된 재앙들은 하나같이 심각하고 무서운 것들이다. 특히 시골에서 농사지은 것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과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다. 기근, 가뭄, 흉작, 전쟁, 전염병, 자연 재해 등. 흉작으로 인한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과 가정 파괴, 구제역으로 인한 목축민들의 몰락, 수십 년 간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아프리카 상황 등을 생각해 본다면, 이스라엘 농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아픈 자극이 아무런 반응을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이스라엘은 무감각해졌고 타락했다.
또 내가 너희 모든 성읍에서 너희 이를 한가하게 하며 너희 각처에서 식량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6절)
첫 번째 재앙은 모든 성읍에 임한 것으로 식량이 떨어진 것이다. 이를 한가하게 하며는 자체로서는 뜻이 모호하다. 한가하게는 니크욘(??????????)의 번역인데, 니크욘의 원형인 니카욘은 \깨끗함,\ \무죄함,\ \황폐함\의 뜻을 가진다.10) 기본적인 뜻은 흠이 없이 깨끗하다는 뜻이니 \이가 깨끗하다\는 말은 \먹은 것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이를 닦지 않고도 깨끗하게 하려면 먹지 않으면 된다. 뒤에 나오는 평행구절은 그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히 보여준다. 모든 성읍과 각처가, 이를 한가하게와 식량이 떨어지게가 서로 평행된다.
하나님이 식량을 떨어지게 한 목적은 굶어 죽으라는 것이 아니라 돌아와서 여호와를 구하라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돌아오지 않았다는 표현에 엘(????) 대신 앋(????)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히브리어의 한글 음역은 로(않았다) 샵템(너희들이 돌아오지) 아다이(나에게까지)다. 엘이 어떤 장소에로의 방향을 가르킨다면, 앋은 목표 지점을 말한다. 그러므로 내게로는 단순히 \하나님 쪽으로 방향을\ 잡으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 그 지점까지\ 오라는 뜻이다. 목표지점까지의 정확한 귀환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아모스 외에는 호세아 14장 1절(히. 2절), 이사야 9 장 13절(히. 12절), 신명기 4장 30절 30장 2절에 나온다. 이 역시 아모스의 편협된 성품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아모스를 통해 친히 하시는 말씀이다.
또 추수하기 석 달 전에 내가 너희에게 비를 멈추어 어떤 성읍에는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내리지 않게 하였더니 땅 한 부분은 비를 얻고 한 부분은 비를 얻지 못하여 말랐으며 두 세 성읍 사람이 어떤 성읍으로 비틀거리며 물을 마시러 가서 만족히 마시지 못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7-8절)
두 번째 재앙은 일부 성읍 들에 임한 것이다. 본문이 말하는 바가 가뭄으로 인한 식수의 부족 현상이다는 것으로 아모스의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본문과 좀 더 친숙해지려면, 팔레스틴의 기후를 알 필요가 있다. 그 곳에서는 우기가 우리와 다르다. 겨울과 봄에 비가 내리고 여름과 가을에는 비가 거의 오지 않는다. 일년 마다 거의 정확한 때에 비가 오고 비가 그친다. 히브리 성경에는 한글 \비\를 뜻하는 몇 개의 단어들이 있다. 마타르는 \비\ 일반, 그리고 \비가 내리다\는 뜻이다. 7절의 내리고, 내리지, 얻고, 얻지는 모두 마타르를 어간으로 하는 동사에서 번역된 것이다. 비를 멈추어의 비는 게쉠(??????)으로서 \퍼 붓는 비,\ 즉 폭우를 말한다. 많은 양의 비가 내려야 농업용 물이나 식수가 풍부하게 되는 것은 자명한 이치다. \이른 비\의 이름은 요레인데 십일월 경에 내리는 비로서 땅을 갈 수 있도록 토양을 부드럽게 만든다. \늦은 비\의 이름은 말코쉬다. 이 비는 삼월 말과 사월 초에 내리는 봄 비다. 삼사월에 말코쉬가 게쉠으로 오지 않으면 어려운 문제가 생긴다. 추수하기 전 석달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되면 오뉴월에 추수되는 보리와 밀이 잘 익지 않게 된다.
비가 일부 지역에만 내리는 것도 큰 문제다. 물이 없는 지역의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다니게 된다. 비가 오지 않아 죽어 가는 아프리카의 가축들이나 비틀거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면 이 한 단어의 위력을 알 것이다. 비가 오는 지역도 물이 부족한 지역 사람들과 물을 나누어 먹어야 하니 모두에게 부족 현상이 일어났다(만족히 마시지 못하였다). 물론 이스라엘은 그 어려움을 겪은 후에도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너희를 쳤으며 팟종이로 너희의 많은 동산과 포도원과 무화과나무와 감람나무를 다 먹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절)
세 번째 재앙은 자연 재해로 인한 흉년이다. 풍재로 번역된 쉬따폰(??????????)은 원래 식물이 \말라 죽는 것\을 뜻한다. 마르는 원인은 사막에서 불어오는 건조하고 뜨거운 동풍(시로코)이다. 그러므로 풍재라고 번역한 것은 정당한 번역으로 볼 수 있다. 쉬따폰은 항상 예라콘(깜부기 재앙)과 함께 쓰인다. 깜부기 재앙으로 번역된 예라콘(??????????)은 예레크, \녹색\과 관계 있다. 곰팡이 때문에 녹색이어야 할 줄기나 잎 끝 부분이 허옇게 되는 병이다. 팟종이로 번역된 가잠(??????)은 \갉아먹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메뚜기나 애벌레의 일종으로 생각된다. 이런 것들이 만연할 때 농사는 실패하고, 많은 희생자를 남긴다. 포도나무와 감람나무는 주전 8세기 국가의 시책으로 대규모 재배된 농작물이다.11) 농작물에 대한 재앙이 엘리트와 농민들 모두에게 큰 시련을 가져다주었겠으나, 아모스 당시 많은 동산과 각종 과실나무들을 소유한 사람들은 4장 1절-3절과 2장 6-8절에서 보듯이 사회 지도자들이었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지 일반 농민들의 고통이 더 컸을 것이니, 지도자들의 불신앙과 부패는 온 백성에게 고통을 안기게 되는 것이 그 당시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내가 너희 중에 염병이 임하게 하기를 애굽에서 한 것처럼 하였으며 칼로 너희 청년들을 죽였으며 너희 말들을 노획하게 하며 너희 진의 악취로 코를 찌르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0절)
네 번째 재앙은 염병(데베르, ??????)이다. 방식은 애굽에서 한 것과 같다. 이 구절은 출애굽기 9장 3-7절에 나오는 애굽의 모든 가축 떼 위에 임한 재앙을 생각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람까지 포함한다. 데베르는 치명적인 전염병이기 때문에 칼과 다름 아니다. 청년들이 살해되고 말이 노획되고 진에 악취가 그득하게 되는 것은 전쟁에서의 패배를 말하는 표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세가지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1) 전쟁의 결과와 같은 염병이다. 2) 염병과 전쟁 둘을 말하고 있다. 3) 전쟁 중 진중에 퍼진 염병이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혹은 지도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애굽의 바로와 비교하면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가가 명백해진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바로에게 각종 재앙을 내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라고 했다. 바로는 목이 곧아 재앙들을 무시해 버렸다. 많은 피해가 났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각종 재앙을 겪었다. 그러나 그들은 목이 곧아 재앙들을 무시해 버렸다. 많은 피해가 났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바로와 다름 아니다. 바로 보다 더 악한 사람들이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했으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동족을 노예로 부리는 자들이다. 바로는 하나님을 몰라서 하나님을 거역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의 부름을 거역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러 나가겠다고 하는 것을 거부했다(출 8:1, 20). 그러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벧엘과 길갈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거부했다. 애굽의 재앙으로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다음은 도시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소돔 고모라의 재앙이 아닌가?
내가 너희 중의 성읍 무너뜨리기를 하나님 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무너뜨림과 같이 하였으므로 너희가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 같이 되었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1절)
다섯 번째 재앙은 도시들의 파괴다. 성읍이 무너진 것은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는가? 두가지 가능성이 있다. 1) 주전 722년 샬만에셀 5세에 의한 사마리아 멸망을 말한다.12) 아모스서에 나오는 벧엘과 관련된 신탁들이 요시아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학자들에게는 11절은 그들의 학설을 위한 한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문제는 722년 멸망 이후 어떻게 돌아오는가? 하는 것이다. 722년 후에는 돌아올 기회마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회개에로의 요청이 아니라 궁극적인 심판이다. 볼프는 사마리아 멸망후 남은 자들로서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본다.13) 그러나 그들이 얼마나 요시아의 종교 개혁에 문제가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신명기 사가가 그들의 회개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너희 중의 성읍 역시 북왕국의 완전한 멸망으로 보는 견해에 대한 반증이 될 수 있다. 히브리어 바켐은 \너희 중에서 얼마\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몇 성읍들만 겪은 사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 조각이라는 표현 역시 3장 12절에 나오는 사자 입에서 나온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3장 12절이 선지자 아모스의 설교라고 받아들이면서, 4장 11절은 요시아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는 결론은 성급한 것으로 보인다. 2) 지진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무너뜨림의 히브리 단어 하팤(??????)은 \뒤집어 버리다\는 뜻을 가진다. 그렇다면 아모스가 2장 13절과 함께 지진을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아모스의 예언이 지진 이년 전에 선포되었다는 것이다(암 1:1).
11절과 연관된 분명한 역사적 사건을 제시하는 것은 현재로는 어렵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확실하다. 절이 더 할수록 하나님의 징계의 도는 깊어간다. 그러나 여전히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는다. 애굽의 바로보다 지독하고 소돔 고모라 사람들보다 덜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하여 돌아갈 기회를 잃었으나 이스라엘은 대규모 파괴가 일어난 후 생존해도 하나님께도 돌아가지 않는다.
3) 심판의 날
이스라엘을 고치고자 애굽 재앙을 내리고, 소돔과 고모라 처럼 벌하였으나 그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남은 것은 창조하신 분의 능력을 맛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팔은 들리고 하나님의 엄지손가락은 위에서 아래로 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 대저 산들을 지으며 바람을 창조하며 자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아침을 어둡게 하며 땅의 높은 데를 밟는 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니라(12-13절).
아모스는 자신의 설교에서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스라엘이 반역의 도를 더 해갈수록, 하나님은 그들을 고치고자 더욱 수고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기근으로, 가뭄으로, 재앙으로, 염병으로, 침공으로 이스라엘을 깨닫게 하려 하나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돌아오지 않는 이스라엘을 만나러 친히 나서신다. 둘려서 고치려 하였으나 이제 직접 심판의 매를 드신다. 그러나 그 매는 보통의 매가 아니다. 창조주로서의 힘과 권위를 가진 분의 매다. 기근과 역병과 전쟁의 매와 비교가 되지 않는 매다. 돌아오지 않으면 남는 것은 심판 뿐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친히 하나님을 뵈어야 한다. 결산하기 위해. 청산하기 위해. 모든 것이 청산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고 명령받는다. 준비와 만남은 출애굽기 19장에서도 나온다. 계약을 맺기 위해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데 백성들이 하나님을 만나기에 적합하도록 몸과 마음을 준비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새로운 계약을 맺자는 뜻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올 마음도 없다. 앞으로도 가망이 없다. 그렇다면 계약파기나 아니면 계약 위반에 대한 책임 추궁을 위해 만나야 한다. 이스라엘이 예비할 것은 계약파기다.
파기는 거두어 감을 뜻한다. 산들을 지으신 분은 산들은 무너뜨릴 것이며, 생명을 창조한 분은 생명을 거두어갈 것이며, 뜻을 사람에게 보이며 교제를 허락한 분은 교제를 끊을 것이며, 창조의 빛은 꺼지고(어쩌면, 순례절의 아침은 어둡게 되고), 높은 곳(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있는 벧엘, 혹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발 아래 짓밟힌다.
3. 나가는 말
1) 정결한 삶, 겸손한 마음
아모스 시대의 사람들은 열심 있고 헌신적인 종교 행위를 했다. 순례절을 지키고, 제사를 드리고, 십일조와 헌물을 바쳤다. 어쩌면 재난 시에는 환난을 피하게 해 달하는 특별 기도회를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먼 행위에 불과하다. 십일조 드리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또 귀한 일인가? 없는 형편에서 구별해서 드린다면 그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의무적인 제사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감사로 인하여 드리고, 헌신의 자발적인 마음으로 드리는 제물이 어찌 귀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헌신은 사라지고, 오직 이름만 남은 감사 헌물, 헌신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 깨닫는다. 큰 제물, 큰 제사, 큰 사람, 큰 간증, 큰 성공, 큰 목회, 큰 교회. 진실한 예물, 진실한 예배, 진실한 사람, 진실한 삶, 진실한 섬김, 진실한 목회, 진리가 넘치는 교회. 어느 쪽이 아모스 시대에 각광받던 단어들인가? 오늘날 한국 신앙인들 사이에서 추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어느 쪽인가?
삶을 보시는 하나님이신데, 그 감사 제물이 탐욕과 억압과 착취와 배금의 치열한 싸움에서 얻은 열매라면, 그것으로 하나님을 달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이의 감사 헌물을 받으시고, 자신의 이익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사람의 예배와 제물을 받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어찌 아모스의 새로운 사상이겠는가? 구약 성경 전반을 흐르는 예언 전통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과 그 제물\을 받으셨다. 제물만 받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에게는 뇌물이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선한 삶을 원하신다. 탐욕자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사람은 반역을 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 정치 지도자들, 경제인들은 달라야 할텐데. 교회와 종교지도자들의 역할이 크다.
신명기에서 누누이 강조되는 \한 분 하나님 사랑하고 살기\, \이웃 생각하기\는 모든 신앙인, 시내산 아래 서 있던 사람들부터 오늘날까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살펴 보아야 할 자기 확인이다. 부족한 사람들은 용서를, 약한 사람들은 주의 능력을, 실패한 사람들은 새로운 결단을, 교만한 사람들은 낮아짐을, 이로써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감사와 결단과 사명으로 불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받으시기를 원한다. 정결한 삶, 경건한 삶, 바른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할 때이다.
2) 회개가 넘치는 마음, 회개가 강조되는 교회
바르게 살아도 통회하는 마음을 가져야 바른 신앙이다. 이스라엘은 \구원사\란 단어에 익숙해 있다. 가정에서 성소에서 신앙고백처럼 암송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행동이다. 유리하는 아람 사람이었던 조상을 선택하시고, 애굽 종살이에서 구원해 주시고,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이다(신 26:5-9). 그러나 아모스는 청중들이 익숙한 신학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겪어 온 많은 어려움이, 혹은 근래에 국가적으로 겪고 있는 많은 어려움이, 하나님의 행동으로서 이스라엘의 죄악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의 주관자로서 은혜로 구원의 역사를 이끌어 가는 동시에, 그 백성들이 죄악을 깨닫도록 징벌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한국 역사도 구원의 역사다. 그러나 우리의 악을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신가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잘되고 있고, 은혜 가운데 있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아모스서를 잘못 읽고 교훈을 무시하는 것이다.
벧엘의 성소에 모여든 엘리트들은 과거의 선택과 은혜만 강조하는 신학과 신앙에 안심하고 있었을 것이나, 이것은 착각이다. 아모스는 실상을 말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이 이끄시는 구원의 역사가 아니라 징벌의 역사라는 것이다. 아모스의 신학은 은혜를 부정하는 반신학이 아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흠을 내는 부정의 신학도 아니다. 자기만족의 신앙인들에게 잊혀진 바른 신학이다. 오늘 우리가 잘하고 있는 것이 확실한가?
그렇지 않다면 깨닫게 하기 위해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은혜의 역사 뿐 매의 역사가 인식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큰 일이다. 악을 범하며 사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해야할 것은 복을 비는 기도가 아니다. 무슨 복인가? 회개가 필요하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지 않았다. 우리는 돌아가는 운동을 해야 한다. 온 민족에게 뜨겁고 뜨거운 회개의 계절이 오면 참 좋겠다.
한일장신대 교수
1) R. B. Coote, 53.
2) Ibid., 54.
3) Ibid., 57.
4) Mays,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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