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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밤 사경에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막 6:45-52 | 설교자: 심상법

    본문

    마가복음의 내러티브적 주해와 설교

     

    밤 사경에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

    \안심하라 내니 무서워 말라\ 


     

    심상법




    막 6:45-52[56]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타고 앞서 건너 편 벳새다로(혹은 벳새다를 향하여)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채로 메고 나아 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 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광야의 한적한 들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5000명을 풍족히 먹이신(12광주리가 차게 남음) 예수님은 저녁이 되어(6:35) 무리를 보내심과 동시에 제자들을 배에 타게 하시고 그들을 자기보다 앞서 벳새다로 보내시며 자신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셨다. 그 동안 바다에는 짙은 흑암이 찾아오고 제자들이 탄 배는 바다 가운데 풍랑을 만나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홀로 지금 뭍(육지)인 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제자들이 주님 없이 바다 가운데 풍랑을 만난 시간은 흑암의 긴 시간(저물녘에서 밤 사경까지)이었고 이 시간은 건너 편 벳새다를 향하여 가는 제자들에게는 정말로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었다. 예수님은 산에서 제자들의 괴로운 형편을 보시고 드디어 밤 사경(이른 새벽 녘) 즈음에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나아갔지만 제자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여 유령으로 착각하였고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가가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들을 위로한 후에(\안심하라 내니 무서워 말라\) 배에 타시니 바람은 그쳤고 마침내 배는 바다를 건너 저편(게네사렛)으로 갔다. 이 기사 후에 마가는 다음과 같은 요약된 진술로 유대 지역에서의 예수님의 사역을 결론짓고 있다(6:53-56). 즉, 마음이 둔한 제자들과는 달리 게네사렛에는 예수가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 왔고 그들은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 없이 밤의 바다 가운데 항해 길을 가다가 거친 풍랑을 만난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도 마가의 독자들에게는 의미심장한 스토리였고 이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물위로 걸어 찾아오셔서 구원하신 사건은 마가의 독자들이 지금 처한 상황에 넉넉한 위로가 되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건의 장면을 갈등구조에 의해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1. 갈등구조에 의한 장면분석



    본문의 장면을 갈등구조에 의해 분석하여 보면 아래와 같은 도표로 이해할 수 있다:

     






     

    사건의 발단은 예수께서 무리를 보내시면서 제자들을 즉시 재촉하사 배를 태워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향하게(떠나게) 하시고 자신은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심으로 시작된다(S1). 이렇게 시작된 사건은 저녁이 되어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바다 한 가운데 있게 되고 예수님 자신은 뭍에 있게 되었다는 표현을 통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헤어져 있다(분리)는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 사건은 발전(전개)되었다(S2). 결국 갈등은 바다에 바람이 일어나 제자들이 항해를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으로 시작되었고 이러한 갈등은 그들이 지금 괴롭게 노를 젓고 있는 것을 예수께서 보고있다는 표현을 통해서 [밤 사경까지] 아무런 진전 없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S3).

    드디어 예수님은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 오셔서 그들을 지나칠 때 제자들은 바다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하여 소리지름으로써 갈등은 절정에 이른다.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에 대하여 해설자는 그들이 무서웠기 때문이라고 평한다(S4). 이에 예수님은 그들을 곧 말씀으로 안심시키고(\안심하라 내니 무서워 말라\) 배에 오르니(제자들과의 분리가 해결) 바람이 그치게 되었고 제자들의 갈등은 종결되었다(S5: 파국). 결과적으로 제자들은 이 이적사건에 놀랐고 여기에 대한 제자들의 모습은 불신앙이었음을해설자는 평가함으로써(γαρ절) 사건은 종결되었고(S6) 마침내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바다를 건너서 게네사렛에 이르게 된다(S7: 대단원). 그리고 이어지는 서술(53-56절)은 마가복음의 또 다른 요약적인 진술이다.



    2. 사건의 배경



    사건이 일어난 시간적인 배경은 어두움이 시작되는 저녁(\저물녘\)에서부터 이른 새벽(\밤 사경\[3-6시 사이])까지로, 거의 밤의 전 시간이었다(막 6:35, 47-48). 무리를 먹이신 후에 그들을 보내신 예수께서는 기도하시기 위해 뭍(산)으로 가셨다. 이제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제자들이 홀로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항해하는 이 밤의 시간은 마가복음에서는 의미심장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이 밤(어두움)의 시간은 마가복음의 바다항해기사의 주된 시간적인 배경(막 4:35)이며 예수님 없이 종말을 향하여 가는 종말론적인 시간이기도 하다(막 13:33-36에서 종말의 시간이 밤의 시간으로 묘사됨-\저물 때\, \밤 중\,\닭 울 때\, \새벽\). 그리고 이 밤의 시간은 예수님의 개인 종말로 이해되는 수난의 시간이기도 하다(막 14-15장). 이 밤의 긴 시간 동안에 제자들은 예수님 없이 바다 가운데에서 거친 풍랑을 만나 고립된 채 고통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괴로이 노 젓는 그들을 보신 후에 \밤 사경(새벽 3-6시 사이) 즈음에\ 물위로 걸어 그들에게 오셨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바다\와 \배\의 장소적인 배경은 단순히 지리적이고 역사적인 장소나 사물의 진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혼돈과 파멸의 세상(\바다\)에서 복음전파의 항해 길을 가는 교회(\배\)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제시해 준다(cf. Woodroof 1997). 특히 마가복음(4:1-8:21) 내에서 \바다\(θαλασσα)와 함께 자주 언급된 \배\(πλοιον)<흥미롭게도 배(πλοιον)에 대한 언급은 마가복음 전체 17번(혹은 18번) 중에 15번이 이 단락에 나온다.>는 \교회\로서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점은 우리가 초대교회의 정황을 이해한다면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해석으로 여겨진다(Best 1981:230-234; Woodroof 1997). 특히 바다와 배 사이의 갈등은 바람(풍랑)의 거스림을 통해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났다.



    마가복음의 앞 단락인 막 1:14-3:35에서는 갈릴리와 일반 청중들과의 관계를 다룬 사건들의 기록이 대부분이지만 막 4:1-8:21에서는 주로 제자들과의 관계를 많이 다루고 있다. 그 중에 특히 \바다\와 \배\가 지배적인 모티브로 제시되고 있는 장면들은 항상 제자들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점은 마가복음의 바다항해기사들(4:35-41; 6:45-52; 8:13-21)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경우에 \배\는 단순한 운송수단의 형태로 제시되기보다는 제자도의 교훈을 담고있는 장소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본다(Woodroof 1997:234). 결국 우리는 이 사건의 배경으로 서술되고 있는 밤의 시간과 풍랑의 바다 가운데 항해를 하고 있는 배의 정황은 마가의 청중들이 당하는 환난의 정황임과 동시에 종말을 만난 (초대) 교회의 정황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에 언급(46절)된 \산\(το ορος)의 배경은 신현(theophany)의 모티브를 잘 제시한다. 마치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주 산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것(신 33:2; 합 3:3)처럼, 예수는 산에서 기도 중에 하나님과 함께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3. 등장 인물들



    이 사건에 나오는 주된 등장 인물은 예수님과 제자들이다. 우리는 본문에 언급된 대로 예수와 제자들이 어떻게 사건 속에 등장하여서 사건을 형성하여 가는 지를 살펴봄으로써 본 기사가 갖는 주된 의미를 찾아보아야 한다. 이미 앞에서 필자가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배경과 사건과 관련하여 인물들의 말과 행동을 분석하는 일은 서사적 주해에 매우 중요하다. 먼저 복음서의 중심 인물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보자.



    1) 예수: 기도, 하감(下鑑), 오심, 구원



    주해를 위해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는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먼저 무리와 제자들을 보내시고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 예수님, 두 번째 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제자들의 상황을 보시고 계신 예수님, 마지막으로 물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셔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그들을 위로하시며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예수님.



    (1) 기도하러 산에 가신 예수님(46절)



    오병이어의 이적을 통해서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유리하는 무리들을 위하여 들판의 잔치를 베푸시고 허기진 무리들을 풍족히 먹이신 예수님은 곧 무리와 제자들을 보내신 후에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물론 마가는 예수님이 어떤 목적과 이유로 산에 기도하러 가셨는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요한 복음의 진술(요 6:14-15)과 마가복음의 의도에 비추어서 우리는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진 무리를 떠나 보내시며 \고난받는 하나님의 아들\(1:1, 11; 8:31; 9:12, 31; 10:32-34, 45)로서 메시아의 길을 가기 위한 다짐과 헌신을 위해서 예수께서는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일상의 기도(막 1:35) 뿐 아니라 사역의 중요한 시기 때마다 특별한 기도의 시간(막 6:46; cf. 눅 6:12-13; 막 14:32)을 가짐을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 보게 된다. 큰일을 치른 후에 무리로부터와 제자들로부터 조차도 떠나 홀로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피정을 떠나시는 모습 속에 우리는 우리의 영성의 고양을 위하여 말씀의 묵상과 연구와 기도와 안식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막 1:35; 6:31; 6:46).

    예수님의 공생애의 삶은 무리의 이기적인 세상적 요구나 사람의 생각에 맞추어서 살기보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이다(cf. 8:33).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인 이 길 즉, 구원의 길, 메시아의 길을 순종하여 똑 바로 걸어가기 위해 예수님은 자신을 부인하는 길을 걸어야 하였다(cf. 8:34). 우리는 여기서 인간 예수의 영성의 원천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이적을 베푼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신 예수의 이 모습은 우리의 영적 삶의 커다란 규범이 된다. 진실로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히 12:2)이시다.



    (2) 기도하시며 그들을 보고 계신 예수님(48절)



    산에서 예수님이 그들의 괴로운 형편을 보시고 계신다는 본문의 언급(제자들이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48절)은 마가의 청중에게나 우리들에게 한없는 위로가 된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고 우리의 형편을 보시고 계신 우리의 주님(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εφοραω>-행 4:29)이시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아니하신다(cf. 요 14:18; 히 13:5). 그는 순종하는 자기 백성들과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기로 약속하신 분이시다(cf. 마 28:20). 비록 우리가 힘든 시험을 당하고 있는 즈음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를 하감(下鑑)하고 계시는 우리의 보혜사이시다(cf. 롬 8:34; 요일 2:1; 히 7:25).



    흔히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소경(시각 장애자)의 눈과 귀머거리(청각장애자)의 귀를 가진 분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과연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님은 그러한 분이신가? 결코 그렇지 않다. 주님은 시편의 시인의 노래처럼 우리의 형편을 보시고 우리의 절규에 귀 기울이시는 분이시다.



    (3) 물위로 걸어오시며 그들을 지나시는 예수님(49절)



    예수께서 물위로 걸어오신 이러한 이적적인 사건은 일종의 신적인 자아계시의 사건으로서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보여준다. 특히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을 이러한 모습으로 제시(욥 9:8, 11; 38:16; 시 77:19)하기도 한다. 여기서 또한 예수께서 그들을 \지나가려고 하였다\는 마가의 언급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현현하셔서 자신을 계시(출 33:19-34:7; 왕상 19:11-12)하신 후에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의도를 보여주는 의미이기도 하다(Fleddermann 1983:391; cf. Garland 1997:262-263; Guelich 1989:350-351).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물위를 걸어 오셨다.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이러한 현현하심(epiphany)은 대체적으로 산에서 나타나는 것과는 달리 \깊은 바다\(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47절)에 나타났는데 이 \깊은 바다\는 구약에서 주로 사람들에게 무서움을 주어 그들의 비전을 완전히 눈멀게 하는 장소로서 무서운 폭풍과 재앙의 장소로 여겨지는 곳이기도 하다(Garland 1997:266).

    특히 구약에서 \바다\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 장소다(홍해 바다와 출애굽 기사). 어쩌면 이 사건은 앞으로 예수께서 이루실 구원이 이러한 구원임을 암시하는지 모른다. 이러한 절망의 상황에 처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이제 나타나셔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으로 계시하실 뿐만 아니라 저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신다. 그리고 주님의 \지나시는\ 주님의 모습은 제자들이 주님을 필요로 할 때 주님은 거기에 계시지만 주님은 제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분이 아님을 암시한다.



    (4) 배 위로 오셔서 자신을 (말씀으로) 계시하시고 위로하시며 구원하신 예수님(49-51절)



    드디어 밤 사경 즈음에 물위를 걸어서 괴로이 노 젓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안심하라 내니 무서워 말라\(50절)고 위로하시며 그들이 있는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그들의 항해를 완성하셨다. 예수께서 자신들의 배에 오르게 될 때 비로소 제자들은 거스르는 바람에 괴로이 노 젓는 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었다. 예수님의 이러한 현현하심은 구약의 하나님의 등만 보이시고 지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같은 부분적인 자아 계시와는 달리, 구원자로서 자신을 완전히 계시(현현)하신 모습이기도 하다(Garland 1997:267). 이처럼 주님 없이 사명의 길을 가는 제자들에게 찾아 오셔서 그들의 어려운 형편을 위로하시는 주님은 고통 당하는 백성 가운데 찾아 오셔서 위로하시고 구원하시는 구원자 하나님이시며, 보혜사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성경을 통해 자주 보았다.



    어떤 학자들(이적기사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과격한 역사비평학자들)은 이 기사를 \부활 후 출현기사\로 이해하지만 그렇게 볼 이유가 없다. 오히려 이 기사는 예수님의 지상생애 동안에 일어났던 이적사건이지만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의 청중의 상황, 특히 복음으로 인하여 환난 당하는 청중에게 매우 적절한 교훈을 주는 기사이기 때문에 마가는 이 기사를 선택하여 서술하였는지도 모른다(cf. Best 1981:232). 다른 복음서에서 보는 대로 나중에 주님께서는 밤의 수난의 긴 기간(저물녘에서 새벽까지)이 지난 후 즉, 예수께서 살해되신 후에 제자들만 남아있는 극심한 환난의 시간 동안 무서워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그들의 반응은 처음에는 예수신줄 알지 못하였지만 나중에 그들은 \주시다\라고 고백하였다(cf. 눅 24 장; 요 20-21장).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복음으로 인해 엄청난 환난을 당하는 초대교회(마가의 청중)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세상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은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 \내다\(It is \I\)라는 이러한 주님의 계시를 때때로 힘든 삶의 현장에서 들을 때, 우리는 \주시다\라는 고백과 함께 그 분께 올바른 믿음과 경배를 돌려야 한다. 진정 주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또한 왕이시며 정복자이시다. 그분은 환난과 시험 가운데 처한 우리들에게 피할 길을 주사 우리로 하여금 능히 환난을 감당케 하신다(cf. 고전 10:13).



    놀랍게도 밤이 새고 새벽이 올 때까지 그들을 괴롭히고 거슬렸던 바람도 주님이 배에 타시니 그쳤다(배에 올라 그들에게 [다가]가시니 바람이 그치니라-51절). 주님의 출현과 현존은 제자들의 항해의 방해물이었던 바람을 그치게 하였다. 확실히 주님은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바람을 그치게 하시는 분, 창조주시며 구원자이시다. 거의 온 밤 동안 바다 한 가운데에서 괴롭게 노를 젓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시며 위로하신 후에 그들의 배에 오르신 주님은 바람을 그치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게 하셨다.

    이 기사를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단순히 바다로부터 제자들을 구원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가야할 항해를 끝마치게 하심을 본다(Best 1981:232).



    이 사건에 묘사된 주님의 이러한 모습들(기도하시는 주님, 제자들을 형편을 보시는 주님, 물위로 걸어오시는 자신을 계시하신 주님, 배에 타 그들을 구원하시고 항해를 완성하게 하신 주님)은 독자들에게 한없는 격려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환난 중에서도 담대한 신앙으로 나아가게 해 준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인 제자들의 모습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들의 무기력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게 함으로써 회개의 자리에 이르도록 한다.



    2) 제자들



    이미 앞에서 우리가 논의한 것처럼 이 \바다항해기사\는 제자들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사건이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특히 주님으로부터 떠나 역경을 만나 괴롭게 노를 젓고 있는 제자들의 관점에서 이 기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독자반응해석의 한 방법). 특히 예수께서 제자들을 즉시 배에 태워 자기 앞서 건너 편 벳새다로 그들을 떠나게 하셨다는 저자의 언급(45절)은 마가복음에서는 오직 한 번 나오는 일로 이것은 제자들의 항해가 예수 없이 잠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을 암시한다. 결국 이 일로 인해 되어진 사건을 볼 때 독자들에게 제자들과 예수는 떨어져서는 안 되는 관계임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즉, 주님께서 그들에게 왔을 때(결합, 연합) 바람은 그치고 항해는 완성되었다.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제자들의 항해의 상황(47-48절): 거스리는 바람에 괴롭게 노 젓는 제자들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의 상황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을 떠나 밤의 시간(저물매-47절, 밤 사경 즈음에-48절)에 있었고 둘째는 바람이 그들을 거스리는 상황(48절)이었고, 이 두 번 째 상황은 결과적으로 괴로운 밤의 시간을 더 길게 만들었다. 즉, 저물 때 시작된 항해가 거스리는 바람에 의해서 별 진전 없이 바다 가운데에 고착되어 밤 사경까지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힘든 정황때문에 제자들은 예수님이 물위에 걸어 그들에게 나아오심 조차도 유령의 출현으로 이해하였고 이로 인해 그들의 무서움과 놀람은 극도에 이르렀다.



    한 마디로 제자들이 처한 상황은 밤의 시간이었고, 예수님이 타지 않는 배는 거친 바람으로 인하여 항해에 별 진전 없이 바다 가운데 온 밤을 지새우는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제자들의 노 젓는 일은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태양이 동 터는 새벽을 앞두고 캄캄한 밤 동안(적어도 8시간 동안) 바람에 시달리는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열 둘을 태운 조그만 배\)은 예수님 없이 중간기 동안(승천에서 재림까지)에 이 땅에 남겨진 우리들(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특별히 그 당시의 마가의 청중은 이와 유사한 상황가운데 놓여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주님이 그들을 바다를 건너가도록 보내셨는데도 거센 바람은 있음을 본다.



    (2) 유령으로 이해하는 제자들(49절)



    예수께서 제자들을 찾아서 물위로 걸어왔는데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으로 이해하였다(49절). 우리도 제자들처럼 상황이 이 정도가 되면 예수님의 오심과 현존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할까? 예수님이 없는 배에 거친 바람에 의해서 거의 온 밤을 지새면서 항해가 전혀 진전이 없이 바다 한 가운데서 괴롭게 노만 젓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의 심지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마음이 다 물처럼 녹아있지 않았을까? 아마도 종말을 만난 우리의 상황이 이(다 졸며 잘 새-마 25:5)와 같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밤 사경\의 상황이다. 한 마디로 \홍수 전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상황이기도 하다(마 24:38).

    예수님이 바다를 밟고 그들에게 오셔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나의 \유령\으로 알았다면 이제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구름을 밟고\) 다시 오셔도 우리는 그 분을 마치 \유령\(우주인?)처럼 생각하지 않을까? 특히 밤의 긴 시간 동안 바람이 그들을 거스리는 바다에서 괴롭게 노 젓는 제자들에게 이와 같은 예수의 출현이 유령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는 마가의 언급(49절)은 독자들에게 큰 충격처럼 여겨질 지 모르지만 사실 깊이 스스로를 성찰해 보면 독자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3) 아직도 마음이 둔하여 깨닫지 못하고 놀라기만 하는 제자들(52절)



    예수님께서 배에 타시니 바람이 그쳤고 이 일로 제자들은 매우 놀랐는데 이러한 제자들의 놀람의 모습을 마가는 한 마디로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52절)고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앞의 기사에서 본 것처럼 예수께서 권세 있는 가르침으로 귀신을 쫓아내시며 문둥병자와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말씀으로 풍랑을 잠잠케 하시며 거라사의 귀신을 쫓아내시며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들판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품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눈과 귀는 아직도 시각장애와 청각장애 상태 가운데 있음을 본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제자들처럼 우리는 눈이 있어도 바로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바로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닌가(막 4:12)? 그토록 많은 말씀을 듣고 그토록 많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마음이 둔하고 미련하다. 마치 광야의 그 백성들처럼…. 아직도 우리는 돌밭의 사람들과 같고 가시떨기 밭의 사람들과 같다.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어도 여전히 우리들의 모습은 지금의 제자들의 모습과 매우 유사함을 본다. 단순히 놀람의 초보적인 신앙(?)에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고백함으로써 그 주님을 따르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4. 나가면서



    결론적으로 독자는 이 기사를 들으면서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그것도 재촉하여 배를 타고 떠나게 하셨는데 이처럼 큰 역경과 실패(바다 한 가운데서 괴롭게 노 저음)가 생기다니 도대체 이러한 역경과 실패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앞으로 예수 없이 되어지는 교회의 복음전파의 항해의 모습을 미리 예시해 주는 것은 아닌지. 즉 예수 없이 떠난 그들의 항해는 고난과 역경의 긴 시간임을 암시하며 또한 이러한 고난의 항해는 예수께서 보시고 계신다는 위로와 함께 이 기사를 대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는 고난 당하는 교회를 버려 두지 않으시고 놀라운 능력 가운데 찾아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항해(사명)를 완성케 하신다.

    바울의 고백(확신)처럼 우리도 이 기사를 대하면서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한다\(빌 1:6). 아마도 바울의 이 확신은 유라굴로의 광풍 속에서 그가 배웠던 경험이었는지도 모른다(행 27장). 특히 제자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주님이 물위를 걸어 찾아왔을 때 제자들은 무서움으로 인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으로 여긴 점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을 때 가지는 믿음 없음의 한 모습(연약함)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아무튼 이 기사를 통해 독자는 다음과 같은 많은 점들을 깊이 생각하게 된다.

    무리(와 제자들)를 보내고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예수님, 예수님의 명령대로 배를 탔는데 긴 밤의 시간과 바람(역경)을 맞은 제자들, 바다 가운데서 거스리는 바람으로 괴로이 노 젓는 제자들을 보시는 예수님, 바다를 밟으시고 걸어오신 예수님, 무서움과 놀람으로 인하여 초자연적으로 찾아오신 주님을 유령으로 생각하는 제자들, 바람을 그치게 하시고 제자들의 항해를 완성하신 예수님.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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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rland, D E 1996. Mark.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Guelich, R A 1989. Mark 1-8:26, WBC 34a. Dallas: Word Books.

    Gundary, R H 1993. Mark: A Commentary on His Apology for the Cross. Grand Rapids: Eerdmans.

    Woodroof, Tim 1997. The Church as Boat in Mark: Building a Seaworthy Church. Restoration Quarterly 39/4:231-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