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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마가복음의 내러티브적 주해와 설교-사천 명을 먹이신 이적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막 8:1-10 | 설교자: 심상법

    본문

    마가복음의 내러티브적 주해와 설교

     

    사천 명을 먹이신 이적

    (막 8:1-10)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심상법




    <막 8:1-10>

    그 즈음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로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본문이 속한 단락(막 8:1-21)은 5천 명을 먹이신 이방지역에서의 급식이적기사(8:1-9)와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의 요구(10-13), 그리고 제자들의 무지가 드러난 누룩과 떡에 대한 논쟁기사(8:14-21)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단락은 떡(8:1-9, 14-21)과 바다의 항해기사(8:10, 13)가 함께 어우러진 모습으로 제시되면서 그 마지막은 제자들의 무지를 선언함으로 끝난다(\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21절>). \떡\과 \항해\의 주제는 막 4-8장에서 반복하여 언급된 주제이기도 하다.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신 이적(급식이적)기사가 2번 나온다: 5천명을 먹이신 이적(막 6:30-44)과 4천 명을 먹이신 이적(막 8:1-10). \광야에서의 먹이심\의 이들 두 이적사건들이 가지는 하나의 공통된 교훈은 예수님을 통한 \새로운 출애굽\(모세와 엘리야보다 더 크신 예수님, 즉 메시아이심)을 의미할 뿐 아니라 예수는 \하늘로부터 내려 온 참된 떡\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들 두 급식이적 사건들은 마가복음의 문맥 속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 두 급식이적 사건들을 비교한다면 다음과 같다(Harrington 1979:110).



    전자는 유대지역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이방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전자는 다 배불리 먹고 12 바구니(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남겼다고 한다면 후자는 다 배불리 먹고 7 광주리(우주적인 숫자)가 남겼다. 그리고 이들 두 사건 속에 묘사되었던 바구니와 광주리는 용도가 다른 용기였다. 막 6 장의 바구니(\cophinos\)는 유대인들이 음식을 들고 다니는 작은 가지로 만든 것이고, 막 8 장의 광주리(\spyris\)는 일반적으로 큰 광주리(cf. 행 9:25)를 말한다(Harrington 1979:110). 한 마디로 전자의 급식이적기사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넉넉하게 먹이시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면, 후자의 급식이적기사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까지도 넉넉하게 먹이시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까지도 넉넉하게 먹이신단 말인가?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이점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막 6 장에서 8 장으로 넘어가는 전환문맥(막 7 장)의 내용을 통하여 잘 제시되었다.

    즉, 7장 서두에서 마가는 \부정한 손으로 거룩한 떡을 먹을 수 있느냐\ 라는 논증을 끄집어 내면서 여기에 대한 긍정적 답변(\예\)으로 참된 \정결\은 외관상의 혈통이나 의식준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을 통한 내면의 변화에 의하여 이루어진 도덕적 삶이라는 것을 강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방지역의 두 이적사건들을 통하여 이것을 다시 입증하고 있다. 즉 외인[이방인] 이었던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녀의 믿음을 통하여 자신의 딸이 치유되는 놀라운 은혜(배불리 먹게 됨)를 체험하게 되었고, 또 한 때 하나님께 대해 귀머거리 되고 어눌한 이방인이 그곳 사람들의 간구를 통하여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혜를 입어 지금 하나님을 청종할 수 있고 고백[경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두 급식이적기사는 유대사역(선교)과 이방사역(선교)을 잘 대변하고 있다(Wefald 1995).



    본문의 사건(장면)을 갈등 구성에 의하여 분석하여 본다면 그림 <1>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1. 갈등구조에 의한 장면분석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5절)

    질문과 대답





    S1 S2 S3 S4 S5 S6

    (1절a) (1절b-3절) (4절) (5절) (6-7절) (8-10절)

    발단 전개 갈등-> 절정 파국 종결(대단원)



    그림<1>





    사건이 일어난 상황에 대한 해설자의 언급(1절)이 사건발단의 시간적 배경과 함께 등장한다(S1). 즉 사건의 발단은 해설자의 내레이션을 통해 시작된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들에게 먹을 음식이 없는 무리의 불쌍한 형편을 언급하심으로써 사건은 전개되어 갈등으로 나아간다(S2). 무리의 형편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은 독자들에게 갈등을 더욱 고조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특히 4절의 제자들의 답변은 이러한 갈등을 더욱 고조시킨다(S3).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 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4절).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는지\를 물으셨고 이어 제자들은 자신들이 일곱 개의 떡을 가졌음을 대답한다. 주님의 이 물음은 갈등을 절정에 이르게 한다(S4). 드디어 이 답변에 주님은 무리를 땅에 앉게 하시고 떡과 물고기를 각각 축사하시며 그것들을 무리에게 나누어주심으로써 갈등은 파국(해결국면)으로 나아갔다(S5), 결과적으로 무리는 광야에서 배불리 먹게 되었고 떡은 일곱 광주리에 남게 됨으로써 급식이적 사건은 마침내 무리를 돌려보내고 제자들과 함께 그곳을 떠나시는 주님의 모습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S6).



    1) 사천 명을 먹이신 급식이적(막 8:1-10)



    (1) 사건의 배경과 정황



    사건이 일어난 시간을 해설자는 언급(\그 즈음에\)하고 있지만 그 시간은 모호하다. 이 시간적인 언급은 앞 사건과 자연스러운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문맥적 정황(이전의 기사)을 고려한다면 갈릴리 호수 남동쪽 해안에 인접한 이방지역들 중의 하나인 데가볼리 지역(막 7:31 참조)의 광야로 추정된다. 사건의 상황은 이전의 급식이적의 상황과 거의 유사하였다. 그것은 광야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사흘간 지내게 되었는데 그들에게는 먹을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리의 형편을 예수님은 친히1) 아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자신이 이들의 형편(먹을 것이 없음)에 대하여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만일 우리가 이들을 먹이지 않고 그냥 돌려보낸다면 굶어 죽을 지 모른다고 하였다.



    (2) 예수님의 모습



    - \긍휼의 사람\ 예수의 관심(막 8:2-3)



    여기에 언급된 예수님의 긍휼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무리의 모습(cf. 막 6:34)에 대한 영적 필요 때문이 아니라(그래서 그들을 가르치심), 광야에서 사흘동안 먹을 것 없이 지냈던 그들의 상황 때문이었다(Guelich 1989:404). 영적 먹이심(가르치심)과 육적 먹이심(먹이심) 모두가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된 관심인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목자의 관심은 자기를 따르는 양들의 풍성한 삶(abundant life)에 있다.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아마도 여기에 나타난 먹이심은 영적이고 육적인 먹이심 모두를 의미한다. 주님을 따르는 길에 고난은 있지만 부족함은 없다. 제자들에게 말한 예수님의 심정을 다시 한 번 들어보자(2-3절).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 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주님께서는 단지 무리의 영적 상태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육적 상태에 대해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애간장을 태우는 마음)2)을 가지고 있다. 복음서에서 긍휼의 마음은 \메시아의 마음\(마 9:36; 14:14; 15:32; 20:34; 막 1:41; 6:34; 8:2; 9:22; 눅 7:13)을 가리키며 이 마음으로부터 주님은 일하셨다. 긍휼(com[\with\] + passion[\suffering\])의 행동이란 어려운 사람의 형편(고통[suffering])에 깊이 공감(sympathy)하고 그 형편을 민감하게 느끼고(sensitivity) 그들과 연대감(solidarity)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주님의 이러한 마음과 행동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가져야할 마음과 행동이다. 긍휼의 마음이 돌봄의 심장이라는 사실을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는 \남을 도와 준다는 것은 비가 올 때 우산을 씌워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 주면서 그 사람의 아픈 마음과 함께 하는 것\으로 피력하였다.



    아마도 이들 광야의 무리들은 앞의 이적사건들을 통하여 주님께 나아와 광야에서 사흘 간 주님의 가르침에 동참하였을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멀리서부터 온 사람들(\이방인\을 의미)3)이었기 때문에 사흘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더욱 기진(氣盡)하였다. 무리(이방인)의 이러한 육적 형편에 대하여 주님께서 깊은 관심(불쌍히 여기심)을 보이신 것은 매우 흥미롭다. 주님의 이러한 태도는 그 당시 목자들(왕들 혹은 종교지도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다. 양들의 힘든 형편보다는 양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배(이익)만을 채우는 타락한 목자들(겔 34장 참조)과는 달리 주님은 양들(무리)의 이러한 고달픈 형편에 애간장을 태우신다. 주님의 이러한 모습은 광야 백성에 대한 시편 기자의 탄식의 메아리로 여겨진다.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시 107:4-5).

    우리는 여기서 양들의 형편에 대한 목자의 세밀한 배려를 본다. 참된 목자는 그 양들의 형편을 잘 알고 있다.



    - 이러한 상황에 대해 제자들을 부르신 예수님(막 8:2):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막 6:30-44의 첫 번째 급식이적의 사건과는 달리 이 사건에서는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을 불러 광야의 무리의 형편과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관심(\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을 그들에게 알리셨다. 우리는 여기서 이방인에 대한 주님의 특별하신 관심과 함께 이것을 제자들을 불러 알리시는 주님의 모습을 본다. 이방지역의 광야의 무리들(이방인들)을 먹이심은 과연 누구의 몫인가? 제자들의 몫(막 6:37,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이 아니었는가? 그런데 제자들 중 아무도 무리의 굶주림에 대하여 관심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주님께서 그들의 형편을 잘 알고 계셨고 이들 형편에 애간장을 태우셨다. 이제 주님의 보고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을 살펴보자.



    (3) 제자들의 반응(4절)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이 사건의 놀라운 점은 제자들의 반응(역 질문)에 있다. 제자들의 반응은 광야에서 이 큰 무리를 먹이기란 어느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이적기사에서는 보편적인 모습이지만 마가복음의 독자들에게는 매우 의아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이미 이와 유사한 이적사건을 조금 전에 경험하였는데도 그와 같은 반응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미 앞에서 유사한 급식이적을 경험하였던 제자들이 어떻게 이와 같이 반응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놀랍게도 제자들은 앞의 기사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니 그와 같은 사건을 결코 목격하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다. 앞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의 반응과 비교해 본다면 매우 당혹스러운 반응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제자들은 수많은 무리를 풍족하게 먹인 떡들이 어디서부터(누구로부터) 나온 것인지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특히 이들 두 사건이 일어난 시간적 차이를 감안한다면 이들의 반응은 더욱 당혹스럽다. 지난 번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까맣게 잊어버리고 이와 같이 반응하다니? 요즈음 말로 하면 이 사람들 혹시 \사오정\이 아닐까? 어떻게 이렇게 빨리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어떻게 조금 전에 광야에서 주님께서 오천 명의 무리를 풍족하게 먹이신 것을 본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사천 명의 사람들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을 주님이 가지셨다는 것을 의심하고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마가는 본문에서 \다시\(8:1)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제자들의 이러한 무지가 매우 기이함을 강조한다(Tolbert 1989:102 참조). 그리고 전에는 다섯 개의 떡으로 오천 명을 풍족하게 먹였다면 지금은 일곱 개의 떡으로 사 천 명을 먹이는 일이라면 더 쉬운 일이 아닌가? 그런데 이들 제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너무도 쉽게 망각하고 있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다.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장소만 바뀌어도 제자들이 기억의 사각지대에 살고 있음을 본다. 이것이 마가가 강조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제자들의 모습이었다. 특히 막 8:17-21을 읽어보면 이러한 제자들의 무지의 모습을 더욱 잘 알 수 있다.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은 광야에서의 주님의 먹이심을 알고도 자주 주님에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하고 의심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출 16장과 민 11장)을 보는 것과 같다(Joel 2000:482 이하). 이것은 어디 그들만의 모습인가? 이러한 모습은 또한 우리들의 자화상이 아닌가? 이들은 광야(\이 광야에서 어디서\)와 무리들(\이 [많은] 사람들로\)만 바라볼 뿐 광야의 그 주님(능력과 영광의 원천)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과연 주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 세상 광야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아무튼 제자들의 무지는 마가복음에서 주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만약 독자들이 구약의 광야의 사건을 회상할 수만 있다면(출 16장과 민 11:13을 참조하라), 정말 이 사람들을 배부르게 할 수 있는 근원이 어디서부터인지(\하늘로부터\)를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마가의 독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을 통하여서도 이러한 근원을 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무지하였다. 이점은 종교 지도자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11절에서 그들은 예수님께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구하고 있다.



    광야의 무리를 먹이는 사명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몫이 아닌가? 이미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막 6:37)고 하셨다. 요한복음에도 \내 양을 먹이라\(요 21:17)와 \나를 따르라\(요 21:19)는 사명이 제자들에게 주어지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사명(선교적 <영적, 육적> 먹임)에 대한 깨달음도 없고 능력도 없다.

    이것이 현대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목자되신 주님을 통해 풍성한 삶(돌봄)을 경험한 교회는 광야의 무리를 먹이는 일을 해야 한다. 이러한 모습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례전의 백성\(교회)의 삶이 아닐까?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들이 이러한 사명을 수행하기를 원하신다.



    (4) 주님의 물음과 제자들의 답변(5절):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이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에게 떡이 얼마나 있는지를 물었다(38절).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그 때에 그들은 \일곱이로소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주님은 제자들이 가진 것(떡)으로써 즉, 그들이 가진 것(떡)을 나눔으로써 광야의 무리를 먹이셨다.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오늘도 예수님은 광야의 허기진 무리를 보시면서 우리에게 이와 같이 물으시고 계신다. 광야의 허기진 무리는 우리 주변의 이웃일 수도 있고, 이방인 일 수도 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6:37) 하셨던 주님은 이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라고 물으셨다. 먹이심의 명령은 그들이 가진 것을 나눔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소유를 나눔으로써 우리의 이웃과 이방인을 풍족히 먹이시는 주님의 그 깊은 뜻을 우리는 아직도 제자들처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 급식이적의 참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성경에서의 참된 이적은 한 일의 밀이 땅에 떨어짐으로써 많은 결실을 맺는 것처럼 주님께서 자신을 주심(나눔)으로써 모든 사람이 풍성한 삶을 살게 되는 것(고후 8:9 참조)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주님의 이 물음을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에서 곰씹어 보아야 한다. 나눔(상호 돌봄)만이 우리의 공동체에 참된 풍요를 가져다준다. 급식이적의 시작은 바로 이 나눔에서 일어나고, 나눔을 통해 주님은 이 세상을 먹이신다(요 3:16 참조). 주님의 구속사역은 이것의 밑그림에 해당된다.



    여기에 언급된 일곱의 수를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에게 주어진 모세 오경과 비교하여 7개의 노아의 명령(창 9:4-6)으로 이해하거나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헬라파 집사(행 6:3)로 이해하거나 또는 앞의 5개의 떡과 합쳐서 12개의 진설병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임의적이다(Guelich 1989:405; Juel 2000:488 참조).



    (5) 예수님의 축복하심과 제자들의 나누어줌(6-7절)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 앞에 놓더라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그 앞에 놓게 하시니\



    작은 생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축복하신 일(7절)은 특이하다. 전통적으로 떡에 대한 축사는 있지만 물고기에 대한 축사는 없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것은 헬라적인(이방적인) 배경이라고 본다(Guelich 1989:401). 이전의 급식이적 사건처럼 이 사건 역시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게 할 뿐 아니라 앞으로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성찬(마가의 청중은 이점을 잘 알고 있다)과 종말론적인 만찬을 예시해 준다.



    (6) 그 결과(8-10절)



    결과적으로 이 광야의 급식이적은 이전의 급식이적과 같이 배불리 먹고 풍성하게 남았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여기의 결어는 이방인을 먹이심도 유대인을 먹이심과 같이 넉넉한 먹이심이었고 풍성한 남음이었음을 의미한다. 여기 \배불리 먹었다\는 단어(\evcorta,sqhsan( corta,zw\)는 마가복음에서는 막 6:42; 7:27; 8:4; 8:8에만 나오는 단어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방인들까지도 넉넉하게 먹이셨음(만족하게 하심)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 언급하고 있는 \광주리\라는 헬라어 단어(spuri,j)는 특별히 유대인들이 들고 다니는 작은 바구니와는 구별되는 일반 큰 광주리(행 9:35)를 말하며, 일곱은 충만함과 종말론적인 완성을 의미하는 숫자로서 모든 이방인들을 풍족하게 먹이심을 암시한다(Joel 2000:488-489). 이러한 급식이적 이후에 예수님은 무리를 보내시고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나아간다(10절). 항상 급식이적기사 이후에는 항해기사가 등장한다. 먹이심과 보내심은 제자사역의 두 면으로서 오늘의 교회는 이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2. 설교의 단상



    본 급식이적기사는 이방지역에서 일어난 것으로서 여기에는 이방선교의 의미가 잘 축조되어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들까지도 넉넉하게 먹이시는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적인 먹이심(가르치심)에만 관심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육적인 먹이심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이전의 급식이적기사와는 달리 본 급식이적기사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흘동안 가르침을 받았던 이들 무리의 육적 형편에 애간장을 태우셨다. 과연 오늘의 교회가 \영적 돌봄\(가르치심)에만 전념한 나머지 \육적 돌봄\을 무시한다면 본문에서의 주님의 애간장 태우는 모습을 간과하는 일이 된다. 애간장을 태우는 예수님의 마음은 그들의 형편을 자세히 알고 계심으로 나타났다. 예수님은 그들의 형편(처지)을 잘 아시고 그들의 형편에 민감하게 느끼지만 않고 그들의 형편에 동참하시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나누어 주셔서 그들을 풍족하게 먹이신 분이시다. 광야의 무리에 대한 주님의 애간장을 가진 돌봄을 통해서 우리는 긍휼의 마음이 선교(돌봄)의 심장임을 배운다. 예수님은 애간장을 태우시지만 않고 자신을 주셔서 그들을 \부족함이 없이\ 먹이시는 분이시다. 진정 그 분은 시편 기자가 노래한 그 목자이시다(시 23편).



    특히, 본 사건에서는 제자들보다는 예수님이 매우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시고 계신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님과는 대조적으로 제자들은 철저히 무지몽매한 자들이었다. 무리의 형편에 대하여도 잘 알지 못하였고, 이미 앞에서 유사한 이적을 보았음에도 그들은 전혀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억조차 못하고 있다. 광야에 계신 영광스러운 능력의 주님을 보지 못하고 광야만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광야 어디에서\)은 그 때 그 광야의 그 백성의 축소판이다.



    이전의 급식이적 사건에서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라는 명령과 함께 여기에서 주님께서 물으신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의 물음을 통한 이적적 먹이심의 모습은 이 세상에서 교회의 신앙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잘 일깨워준다. 광야의 무리에게 우리의 가진 것을 나눔이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다. 돌봄의 이적적 사역 즉 우리의 이웃과 이방인들을 먹이는 이적적 사역의 핵심은 우리의 소유를 나눔에서 시작된다. 돌봄의 사역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소유를 나눔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소비가 미덕(?)인 자본주의 물질사회에서 주님이 물으신 이 질문(\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가슴깊이 담아 두어야 할 말씀이다. 나눔의 삶은 다른 사람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자신까지도 풍요롭게 한다. \성장과 성숙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나눔의 삶을 살라. 나누어야 성장할 수 있고 나누어야 성숙할 수 있다\고 노동시인 박노해는 노래한다.



    나뉘어야 자라는 새싹들



    그렇습니다 나누어야 성장합니다

    커지려면 나누어야 합니다

    새싹도 나무도 나뉘어야 자라납니다

    사람 몸도 세포도 나뉘어야 성장합니다

    커진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은 자기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의 본성입니다

    커 나가는 조직은 정보와 지식, 비전과 자유와 책임을 잘 나누어

    함께 공유하는 것만큼 멈춤 없는 성장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나눔과 성장, 사람만이 희망이다(65쪽)에서



    그리고 \길\에서 기진(氣盡)하지 않도록 음식을 먹여서 보내시는 주님의 배려는 우리의 사명의 길에도 마찬가지의 배려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를 사명의 길로 보내실 때도 주님은 우리를 기진(氣盡)하도록 버려 두시지 않으신다. 이러한 주님을 바라보고 우리는 이방선교에 매진하여야 한다. 주님은 이방의 백성들까지도 넉넉하게 먹이시는 분이시다.



    본지 편집인, 총신대 신대원 신약학 교수



    1) 이전의 급식이적 사건과는 달리 이 사건에서는 무리의 허기진 문제를 발견한 것이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셨다(2절).

    2) 여기 \불쌍히 여긴다\(splagcni,zomai)는 말씀은 한글개역성경에는 자주 긍휼(compassion) 혹은 긍휼의 마음(요일 3:17), 마음(고후 6:2; 몬 17, 20; 골 3:12), 심장(빌 1:8)으로 번역되었다. 이 말은 우리말로 \애간장을 태운다\ 로 표현될 수 있다.

    3) Van Iersel(1997:256, n.117)은 이 언급을 이방인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론하면서 그 근거를 성경과 랍비 문헌들을 가지고 제시한다.





    <참고문헌>

    Guelich, R A 1989. Mark 1-8:26. WBC 34a. Dallas: Word Books.

    Herrington, W 1979. Mark. Wilmington: Michael Glazier.

    Juel, M 2000. Mark 1-8:26. Vol 1. New York: Doubleday.

    Tolbert, M A 1989. Sowing the Gospel: Mark\s World in Literary-Historical Perspective. Minneapolis: Fortress.

    Van Iersel, B M F 1998. Mark: A Reader-Response Commentary. Sheffield: Sheffield Press. (JSNTSS 164.)

    Wefald, E K 1995. The Separate Gentile Mission in Mark: A Narrative Explanation of Markan Geography, The Two Feeding Accounts and Exorcisms. JSNT 6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