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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마가복음의 내러티브적 주해와 설교-마지막 바다 항해기사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막 8:11-21 | 설교자: 심상법

    본문

    마가복음의 내러티브적 주해와 설교


    마지막 바다 항해기사

    (막 8:11-21)

    바리새인의 \누룩\과 \배 안에 있는 떡\


    심상법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께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에 깊이 탄식하시며 \가라사대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 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 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8:11-21).

    오천 명을 먹이신 급식이적사건(6:30-44) 후에 바다를 건넌 사건(6:45-52)이 나오고 그 뒤에 게네사렛에서 바리새인들과의 논쟁(7:1-23[정결규례])이 나온 것처럼 그 다음 일련의 사건들도 이와 유사한 배열을 가지고 있다. 즉 사천 명을 먹이신 급식이적사건(8:1-10)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이 언급(10절)되어지고 그 뒤에 달마누다 지방에서의 바리새인들의 힐난과 시험(\하늘로 오는 표적\을 구함)에 대한 논쟁기사(11-13절)가 나온다. 이들 일련의 사건들은 예수님의 급식이적(광야)과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바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불신앙과 배척의 모습(땅)을 메아리처럼 제시하면서 마가복음의 중심주제를 강화하고 있다(Malbon 1993). 특히 이어지는 막 8:14-21의 기사는 바리새인의 누룩(불신앙과 배척)에 대한 경고와 어우러지면서 떡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를 폭로하면서 떡에 대한 이슈를 종결짓고 있다. 이것을 요약하여 이해하면 다음과 같다.

    급식이적사건(6:30-44) 급식이적사건(8:1-9)
    바다항해기사(6:45-52) 바다항해기사(8:10)
    바리새인과의 논쟁(7:1-23) 바리새인과의 논쟁(8:11-13)
     
    마지막 바다의 항해기사(8:14-21)
    (누룩과 떡)

    우리가 다룰 막 8:11-21의 기사는 두 사건(8:11-12; 8:13-21)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들 두 사건들은 독립되어 있다기보다는 상호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서 하나는 달마누다 지방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예수를 시험한 논쟁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배 안에서 일어난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문답으로 드러난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에 대한 기사이다. 이들 두 기사는 장면(장소와 인물과 사건)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기사들이지만 주제(누룩과 떡)에 있어서는 상호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특히 떡에 대한 언급과 함께 급식이적에 대한 언급은 이 사건을 보다 더 큰 문맥 안에서 이해하여야 할 필요성을 잘 주지한다. 떡은 막 4-8장의 주제를 잘 반영한 것이며 급식이적에 대한 언급은 바다항해기사와 서로 깊은 연관성을 가짐을 암시한다.

    1.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막 8:11-13)

    해설자(narrator)의 서술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다시 갈릴리 지역인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셨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예수께 나아와 그를 힐난하며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지만 예수는 그들의 의도를 알고서 깊이 탄식하며 그들에게 어떠한 표적도 주시지 않으시고 다시 배를 타고 그곳을 떠나신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많이 보아왔지만(막 1-2장) 철저히 예수(의 신적 권위)를 거절하고 배척하였다. 마가가 보여준 대로, 이들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불신앙과 배척(살해)이었다(3:6, 22-30; 7:1-13). 우리는 여기서 바리새인들의 이러한 불신앙과 거절(배척)의 모습이 담대하게 믿음으로 주님께 나온 이방인들의 신앙적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임을 본다. 이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많은 이적들을 행한 후에도 계속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기를 요청함으로써 불신앙 가운데 하나님을 시험하고 모세를 반역한 모세 시대의 그 완악한 광야의 세대(cf. 민 14:11 22; 신 1:35; 32:5, 20; 시 95:10-11)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점은 예수께서 탄식하며 이들을 \이 세대\(h` genea. au[th)로 두 번이나 지칭함으로써 잘 드러나고 있다(Garland 1996:309).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12절). \이 세대\는 나중에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 예수께서 지적하신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8:38)나 \믿음이 없는 [그] 세대\(9:19)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미 앞에서도 보았듯이 이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많은 이적을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적들을 마귀적이라고 결론짓고(막 3:22) 예수를 죽이기로 결안하였던 자들이다(3:6). 그러므로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구하는 이들의 의도는 예수님에 대한 배척과 불신앙이 그 이면에 깔려있다. 애굽에서 나온 세대가 구원자 모세를 거역한 것 같이, 이 세대(특히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헤롯) 역시도 예수님을 참된 구원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배척하고 있다. 앞 사건에서 주님을 따르는 광야의 무리들에 대하여 예수님이 보이신 \긍휼\과 대조적으로 여기서는 불신앙과 배척의 이 세대(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탄식\이 있다. 이 \깊은 탄식\은 그들의 불신앙과 완고함(cf. 막 3:4)에 대한 분노와 슬픔과 비통함의 표현이다. 과연 우리는 주님에게 \긍휼\의 대상인가 아니면 \탄식\의 대상인가? 종교지도자들의 불신과 배척에 대한 기사에 이어지는 항해 중의 떡에 대한 문답의 사건은 그들의 누룩에 대한 경고와 함께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를 다루고 있다.

    2. 누룩에 대한 경고와 떡에 대한 제자들의 무지(막 8:14-21)

    막 8:14-21은 마가복음의 바다항해기사들[sea-voyage narratives](막 4:35-41; 6:45-52; [8:10;] 8:14-21)중의 마지막 기사이다. 이들 바다항해기사들은 내용에 있어서 구조적인 유사점을 가진다: [예수와]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려 함; 호수 가운데 문제가 발생; 제자들의 오해와 불신앙이 지적됨; 그리고 여행이 끝난 후 치유기사가 나옴. 특히 제자들의 오해와 불신앙에 대한 예수님(해설자)의 지적을 살펴보면: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40); \이는 [그들의 무서움과 놀람은]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마음이 둔하여 졌음이러라\(6:52);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8:17). 마지막 항해기사는 앞의 두 항해기사와는 달리 광풍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제자들의 무지와 깨달음이 없는 모습은 여전하다. 망각으로 시작하는 14절의 언급과 17-18절의 혹독한 책망은 이런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항해기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항해하는 중에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계하였다.

    1) 갈등구조에 의한 장면분석

    본 사건을 장면 분석(cf. Countryman 1985:646)을 통해 이해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17절)
    예수님의 질문


    S1 S2 S3 S4 S5 S6
    (14절) (15절) (16절) (17절) (18-20절) (21절)
    발단 전개 갈등-> 절정 파국 종결(대단원)

    사건이 일어난 상황에 대한 해설자의 언급(14절)이 사건의 의미를 암시하고 있다(S1). 여기에 예수께서 느닷없이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에 대하여 경고하심으로서 사건은 급속히 전개되어간다(S2). 이에 대한 제자들의 동문서답 식의 반응(\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은 사건을 갈등국면으로 이끌어 독자들에게는 아이러니를 일으킨다(S3). 이어지는 주님의 수사적 질문은 그들의 반응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에 대하여 극적으로 보여준다(S4). 그리고 연이은 다소 긴 주님의 질문들은 그들의 반응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임을 확증해 준다(S5). 그리고 마지막 주님의 수사적 질문(\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은 17절의 언급을 다시 반복하면서 이 사건의 종결로 제시된다(S6).

    2) 사건에 대한 주해

    - \삼가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15절)
    여기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누룩은 곧 앞 사건들(8:10-13; 6:17-29)과 관련이 되어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그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이었다. 바울 역시도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묵은 누룩,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을 제하라고 경계하였다(고전 5:8). 구약에서 누룩은 부패와 악의 영향력을 상징하는데 특히 유월절과 관련된 급식기사(cf. 출 12:14-20)를 생각하면 누룩은 떡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있다. 외관적으로 보기에는 15절의 말씀이 문맥에 적절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그 주제에 있어서는 관련성을 가지기에 충분하다(Harrington 1979:114).

    마지막 바다의 항해기사에서 제자들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이 돌발적인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던져주는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선교의 사명을 받아 선교의 길을 가고 있는 우리 교회가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주님이 지적하신 누룩인가? 제자들이 의논한 떡(의 부족)에 대한 문제인가? 항해 길을 가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하지만 놀랍게도 제자들은 \떡이 없음\으로 의논(논쟁/걱정)한다. 15-16절을 읽어보면 제자들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막 8:15-16). 누룩에 대한 예수님의 경계는 아랑 곳 하지 않고 떡만 걱정하는 제자들. 그러니 이어지는 주님의 지독한 책망(17-21절)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리라.

    -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16절)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예수님의 경계에 대한 제자들의 \우리에게 떡이 없다\는 반응(논의)은 특이하다. 어쩌면 이 반응은 특이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본성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반응이 아닐까? 두 번의 급식이적사건에 있어서도 제자들은 떡이 없음과 부족(막 6:35-37; 8:4)을 염려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조금만 깊이 상고한다면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무지하고 어리석은 반응이 아닐 수 없다(cf. 6:52). 이들 제자들은 주님의 놀라우신 급식이적을 보았던 사람들이다. 두 번이나 예수께서 광야에서 배고픈 무리들을 먹이신 이적을 보았음에도 이들은 \우리에게 떡이 없다\고 논쟁하고 있다. 급식이적을 베푸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배에 타고 있는데도 그들은 \떡이 없다\고 논쟁하고 있다. 복음전파의 사명의 길에서의 문제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부족)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의 능력)을 바라보는 일이다. 이 점이 바로 예수께서 제자들을 혹독하게 책망하신 일이다. 선교의 길에 우리의 문제는 영원히 썩지 아니할 \그 풍성한 생명의 떡\(예수 그리스도=복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썩어 없어질 \세상의 떡\을 염려하는 일(cf. 요 6:27)이 아닐까?

    오늘도 복음전파의 사명의 길에 교회가 마음에 경계를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제자들이 의논한 떡(의 부족함의) 문제일까? 아니면 누룩(부패나 불신앙과 불순종)의 문제일까? 오늘날 교회는 떡만 있으면 복음전파의 사명의 길을 잘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떡(물질/성도의 수) 걱정에 빠져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룩(불신앙과 불순종)이 문제라고 말씀하신다. \삼가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 사실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두 번의 반복된 광야의 급식이적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떡이 없음을 의논하고 있다. 여기 그들이 떡이 없다고 한 논의는 누룩에 대한 예수님의 경계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 것으로 \누룩\을 조심하려면 \떡\이 있어야 하는데 떡이 없다는 것이었다. 복음전파의 길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제자들은 \떡\이라고 생각하였고 주님은 \누룩\이라고 하였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누룩인가? 떡인가? 물질(돈)만 있으면, 교회 건물만 있으면 복음전파는 잘 될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될 것이다. 누룩은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러한가? 이러한 이해는 제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마가의 청중의 문제였으며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 14절의 \배에 떡 한 개밖에 저희에게 없더라\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히 떡 한 개를 의미하는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마태(마 16:5)와는 달리 마가는 이것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일까? 떡 가져오기를 잊었는데(14절), 가진 떡도 없는데(16-17절), 과연 마가는 어떤 떡 (하나)을 말하는가? 떡이 없음(no bread)에 대한 언급(16-17절에 두 번)과 배 안에 있는 떡 한 개(one loaf)의 언급의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떡에 대하여 누룩을 넣지 말아야 한다는 말인가? 해설자(narrator)는 여기서 \배 안의 떡 한 개\[곧 예수]를 언급함으로써(8:14) 예수님(의 이적과 교훈)에 대한 그들의 불신과 완악함을 경계하고 있다.

    - \배 안에 저희와 함께 있는 떡 하나\(막 8:14)
    사실 앞의 사건들을 통해 주님은 제자들에게 상징적 \누룩\(불신앙)에 대한 경계를 말함으로써 그들이 상징적 \떡\(예수)을 잘 이해하도록 요구하고 있다(M nek 1964).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문자적 누룩\을 삼가야 할 \문자적 떡\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었다(cf. 마 16:11-12). 즉, 예수님이 \누룩\에 대해 말하니 그들은 \떡\을 생각하고 그것의 부족을 의논하였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였을 때 그들이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 \떡이 없다\라고 걱정한 것은 단순히 열 세 사람에게 떡 한 개밖에 없음 즉, 떡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Tolbert 1989:102). 이 경우 제자들은 누룩에 대한 경계적인 관심보다는 떡의 부족에 대한 관심이 더 큰 것이었음을 본다. 떡의 부족에 대한 제자들의 걱정은 지금까지의 급식이적사건의 핵심된 문제이기도 하다. 교회가 사명의 길을 걸어갈 때 문제는 떡의 부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누룩의 문제가 더 큰 문제가 아닐까? 떡의 부족과 떡이 없는 것을 고민하는 교회는 믿음이 없는 교회이다(cf. 마 16:8). 예수님의 지적처럼, 교회는 교회가 가야 할 복음전파의 사명의 길에 더럽고 괴악한 \누룩\이 없는지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떡의 부족(없음)보다는 누룩의 존재가 복음전파의 길을 더 황폐하게 만든다. 불신과 불순종은 사명의 길에 가장 큰 적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의 무지와 오해를 책망하신다. 지금까지 너희들이 여러 번 급식이적사건을 보아왔다면 어떻게 떡이 없음으로 걱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나아 갈 것을 촉구함과 동시에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경계하고 있다.

    두 번에 걸친 바다항해사건과 급식이적사건을 통하여 그들은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면서도 떡이 없음을 걱정하고 있다. 17-21절을 통해 볼 때 제자들은 바다의 항해사건과 급식이적을 통하여 어떤 교훈도 배우지 못했다. 이들 제자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 소경들이요 귀먹고 어눌한 자들이었다. 사실 \에바다\의 축복(7:34)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기사에서 저자는 반복하여 분명히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 \떡이 없다\ 라고 한 것은 떡 한 개밖에 없기 때문에 떡이 부족해서 걱정했다기보다는 누룩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에 그들이 누룩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우리가 누룩을 조심하려면 떡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 떡이 없기(\you have no bread\) 때문에 걱정한 것이라고 한다면, 14절의 해설자의 \배에 저희와 함께 한 떡 한 개(one loaf in the boat with them)\ 라는 해설자의 언급은 보다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의논은 \떡이 없음\(no bread)이 아니라 \떡 하나 밖에 없음\(one loaf)이 되어야 할 것이다. 마태와 달리 마가가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은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진 것으로서 이것은 마치 해설자가 독자들에게 떡 없음에 대한 제자들의 걱정의 근본 문제를 지적한 것은 아닌지? 즉, 제자들은 \그들과 함께 배 안에 있는 떡 하나\(즉 예수)가 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떡이 없다고 의논(논쟁)한 것은 얼마 전 두 급식이적에서 보여진 그들의 믿음 없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14절의 이 표현은 본 사건의 참된 문제가 무엇인지를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일종의 해설자의 해설(방백)로 여겨진다. 즉, 해설자는 제자들이 \그들과 함께 배에 있는 떡 하나\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떡이 없음을 의논(걱정/논쟁)하고 있는 그들의 어리석음과 불신앙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것이 제자들의 누룩 혹은 그 누룩에 대한 감염이기도 하다. 이 누룩이 있는 한 복음전파의 사명을 완성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마가는 독자들에게 \배[교회] 안에 있는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기억하고 떡의 부재나 부족을 염려하지 말고 복음전파의 사명의 길을 믿음으로 나아갈 것을 권면 하고 있다. 이 점은 이미 우리가 광풍기사(4:35-41)에서도 보아왔던 점이 아닌가? 광풍기사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배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광풍으로 인해 걱정하고 염려하였다. \배 안에 저희와 함께 하신 예수\를 보지/믿지 못하고 광풍만을 보고 걱정하는 제자들의 모습이나 배 안에 예수가 없음으로 어려움을 당한 다음 주님이 물위로 걸어오실 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과 \배 안에 저희와 함께 있는 떡 하나\를 보지/믿지 못하고 \떡이 없다\고 논쟁(염려)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모두 다 믿음 없는 제자들의 모습(막 4:40)이다. 복음전파의 사명의 (항해)길을 가는 사람은 사탄의 유혹과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현혹되거나 함몰되어 말씀 듣기를, 예수 바라보기를 포기하지 말고 옥토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을 지속적으로 듣거나 예수를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참된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시라면, 우리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의 광풍이 불어도 주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복음전파의 사명의 길에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불신앙의 누룩이 아닌가? \삼가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 주님의 이 경고는 오고 가는 세대에서 교회가 마음에 새겨야 할 선지자적 경고임이 분명하다(Newman 1997).

    - 깨달음이 없는 무지한 제자들(막 8:17-21):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러한 누룩의 경고를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고 그들과 같은 전철을 밟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주님의 제자들이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라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책망과 탄식은 어쩌면 오늘 우리의 교회에 대한 책망과 탄식을 의미하는 지 모른다. 과연 오늘의 교회는 성령(하나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잘 순종하고 있는가? 그리고 이어지는 두 급식이적에 대한 주님의 질문에 그들은 정확한 답변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열 둘이니이다\, \일곱이니이다\), 그들은 급식이적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있다. \떡이 없다\고 논쟁하는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께서 하신 질문에는 정확하게(?) 답변하고 있는 지 참 아이러니컬하다. 이것이 제자들의 신앙의 현주소이고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이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사실에 대한 지식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신앙과 순종의 삶이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 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 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외관상으로 제자들은 주님의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하였다. 점수로 말하면 A학점의 답변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F학점을 선언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성경에 대하여 많은 지식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에 있어서는 참된 깨달음이 없는 불신앙의 삶을 산다. 지식적인 앎만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깨달음 즉 믿음과 순종의 삶이 없다면 그것은 깨달음이 없는 것 즉, 모르는 것이 된다: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제자들의 깨달음과 믿음은 바다의 항해 중에서와 광야에서 그 진위가 가려졌다. 바다에서 광풍을 만나고 광야에서 배고픈 어려운 사람들을 만나보니 그들의 믿음이 얼마나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지를 보게 된다. 성경의 지식만 쌓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실천적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광풍의 항해\를 만나도 \광야의 길\을 걸어도 말이다. 언어적 관념의 껍질에서 벗어나서 삶의 자리에서 믿음의 심지가 굳은 그런 신자 말이다. 실천의 장이 없는 관념적 배움과 가르침의 허구가 바로 이러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것에 하나가 되는 삶\(엡 4:13)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믿음의 모습이 아닌가?



    3. 설교의 단상

    이들 호수의 항해기사들을 통해서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베푸시는 놀라운 광야의 이적들을 경험하였지만 (환난과 시험 \어두움과 풍랑과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대적과 시험\이 있는) 바다에서는 항상 그것의 진정한 의미를 쉽게 망각하고 있다. 결국 제자들은 앞에서 보았던 이적들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함으로써 환난이 왔을 때, 그들은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마가가 환난을 당하는 마가의 청중을 향해 경고하는 메시지이다. 우리 역시도 떡 걱정인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에 함몰되면 마음이 둔하여져 깨달음을 갖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기억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기 쉽다. 헤롯이 그러하였고, 길에서 주님께로 나온 한 사람이 그러하였고, 바리새인들이 그러하였고, 제자들 또한 그러하였다. 그들은 주님에 대하여 들었고 주님의 역사하심을 보았지만 삶의 자리에서 사탄의 시험이 있고 환난이 찾아오고 염려와 유혹과 욕심이 찾아왔을 때 영적 소경이 되고 귀머거리가 되고 어눌한 자가 된다(\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보라). 여기엔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다. 복음전파의 항해 길을 가는 우리들(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누룩\(불신앙과 부패)에 대한 경고와 \배 안에 있는 그 떡\(생명의 떡이신 예수)에 대한 신뢰이다. 이 세상에서 썩어 없어질 떡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고 \생명의 떡\이신 그 분을 바라보며 그 분을 신뢰하며 사명의 길을 달려가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면서 떡(의 부족) 걱정을 하는 우리의 모습은 배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항해 길을 가면서 떡이 없음을 의논하는 제자들의 모습의 반영이다. 광풍 속에서도 주님을 신뢰하며, 어둠 속에서도 주님의 현존을 바로 인식하며, 광야의 길을 걸어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알고 불안과 불평을 버리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옥토가 되자.

    본지 편집인, 총신대 신대원 신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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