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을 잠잠케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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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의 내러티브적 주해와 설교
(막 4:35-41)
| 심상법 |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예수님의 비유(막 4:1-34)의 가르침에 뒤이어서 마가는 곧 네 가지 이적들에 대한 기사를 소개하고 있다. 이 단락(막 4:35-5:43)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서(4:35) 다시 돌아오는(5:21) 여행 과정 동안의 선교사역 중 주로 이적사역을 다룬 기사로서 복음의 중심된 내용(이적/믿음/신분)인 그의 사역의 핵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Kingsbury 1992:102). 이 단락에 묘사된 네 가지 사건들은 인간의 힘으로 \제어할 수 없는\ 것들(광풍; 사나운 귀신; 고질병; 죽음)에 대한 이적기사들로 다음과 같다.
● 바다의 광풍을 잠잠케 하심(막 4:35-41) : 사나운 광풍을 제어한 자연이적
● 거라사의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심(막 5:1-20) : 사나운 귀신을 쫓아냄
● 혈루증 여인을 고치심(막 5:25-34) : 고질병을 고치심
●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심(막 5:21-24, 35-43) : 죽음을 정복하심
결과적으로 예수님의 사역 중에 나타난 이러한 이적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신분의 문제 -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심을 입증함(막 1:1) - 로 귀결될 뿐 아니라(막 4:41), 다음 단락에 나오는 제자들의 선교적인 사도직 수행의 기초(막 6:7-13)를 제공해 주는 기능을 한다.
본문에 묘사된 사건의 스토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비유의 가르침을 마치신 예수님은 이제 날이 저물자 무리를 떠나 제자들을 데리시고 갈릴리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고자 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을 태운 배\가 바다를 지나는 동안 큰 광풍이 일어나 물결이 부딪혀 물이 배에 들어와 가득하게 되었다. 이에 놀란 제자들은 예수님께 나아가니 예수님은 고물에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고 계셨다. 이들은 예수님을 다그쳐 깨운다. 이들의 다그침에 깨어난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더러 일러 \잠잠하라 고요하라\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바다는 잔잔하여졌다. 이 일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고 제자들은 이 놀라운 이적에 심히 두려워 바람과 바다조차도 순종하는 이 분이 누구 신지에 대하여 의문을 갖게된다.
아래의 장면분석(S1은 장면1을 가리킴)에서 보는 대로 사건의 발단은 이미 날이 저물어 \저편으로 가자\는 예수님의 제안과 함께 시작되었다(S1). 여기에 제자들이 무리로부터 떠나 예수를 배에 모시고 \저물녘\(밤의 시간)에 바다를 항해함으로써 사건은 갈등을 향해 전개되어간다(S2). 드디어 바다의 장면은 바뀌어 광풍이 일어나고 물결이 넘쳐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고, 이에 놀란 제자들은 예수님께로 달려갔지만 예수님은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때아닌 광풍의 출현과 함께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의 대조적 모습은 사건을 갈등의 국면으로 몰아간다(S3). 놀람과 두려움에 처한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님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부르짖어 깨움으로써 갈등은 절정에 이른다(S4). 이에 예수님은 깨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라고 명하니 바람은 그치고 바다는 아주 잔잔하여졌다. 갈등은 해소되고 사건은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S5). 여기에 마가는 바다의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해 그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함(\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과 제자들의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의문(\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을 가지는 모습들을 소개함으로써 이 사건의 기술을 종결한다(S6).
\우리의 죽게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S1 S2 S3 S4 S5 S6
(35절) (36절) (37-38a절) (38b-39a절) (39b절) (40-41절)
발단 전개 갈등-(고조)-> 절정 파국 종결---->
장면분석 <표1>
위의 장면을 발설된 말들과 인물들의 행동들에 따라서 구조분석을 해 보면 <표 2>와 같이 기술될 수 있다.
A. 항해를 명한 예수(\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B. 항해하는 제자들
C. 광풍이 일어난 바다와 고물에서 주무시는 예수님
D. 제자들의 외침(\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C\. 깨어나 바다를 향한 예수님의 명령(\잠잠하라 고요하라\)과 잠잠하고 고요한 바다
B\. 책망 받은 제자들(\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A. 예수의 신분에 대한 의문(\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구조분석 <표2>
우리는 장면분석을 통해서 갈등의 절정이 되는 제자들의 외침(\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이 이 단락에서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전체에 지속적으로 반향 되는 메시지로 전달됨을 본다. 마가복음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하나님)는 수난(죽음)을 돌아볼 수 없는 분으로 이해하여 수난이 그(들)에게 다가왔을 때,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하였고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치거나 부인하였고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았다.
마가복음에서 제자들은 수난(죽음)을 무서워하고 수난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는 자들, 깨달음이 없는 자들로 소개된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독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막 1:1)이신 예수님이 바다의 광풍을 잠잠케 하고 바다를 고요하게 한 분, 복음으로 인해 그들의 죽게된 것, 수난과 죽음을 능히 돌아보실 수 있는 분이심을 확신하게 된다.
1. 사건의 배경 : 저물 때 바다에서 광풍을 만난 배
여기 언급된 사건의 시간은 비유가 주어진 같은 날 \저물 때\(οψιαζ γενομενηζ) 였다. 마가복음에서 \저물 때\(οψιαζ γενομενηζ)의 언급은 막 6:47; 14:17; 15:42에 나타나며 이와 유사한 시간은 종말론 강화에서 수난(환난)의 시간의 시작을 묘사한 \저물 때\(οψε)이기도 하다(13: 35). 마가복음, 특히 마가복음 13:35의 종말론 강화에서 언급된 밤의 시간(\저물 때\로 시작하여 \밤 중\과 \닭 울 때\, 그리고 \새벽\까지의 시간)은 대체로 종말 전의 인자(주인)가 돌아올 때까지 지속되는 \시험과 수난(환난)의 시간\을 상징한다(Verhey 1984:76).
막 13:35에 묘사된 \깨어 있어야 할 시간\인 이러한 밤의 시간은 막 14-15장에서는 예수님의 개인 종말 즉, 죽음 전의 수난의 시간을 가리킨다. 이와 관련된 예는 14:17(\저물매\); 14:30(\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곧 밤중]\); 14:41(\[수난의/종말의] 때가 왔도다\); 14:57(\곧 닭이 두 번째 울더라;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15:1(\새벽에\) 등의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 묘사된 \밤\(저물 때)의 시간은 곧 환난(수난)의 시간, 시험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건의 장소적 배경이 되는 바다의 항해와 함께 어우러져 \사람 낚는 어부\(막 1:17)로서 복음전파의 항해에 닥치는 환난과 수난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는 다음에 논의할 \바다\와 \광풍\의 모습 속에 반복된다.
여기에 나오는 \바다\(θαλασσα)의 배경(장소)은 마가복음에서 세 번(막 4:35-41; 6:45-52; 8:13-21)이나 나오는데 특히, 막 6:45-52의 바다항해 기사도 밤의 시간(\저물매\)에 일어난 사건으로 예수님에 의해 보냄을 받아(6:45) 항해를 떠난 제자들에게는 일종의 시험과 환난의 의미를 가진다. 이 두 기사에서 모두 \밤\에 \바다\에서 \폭풍을 동반한 큰 광풍\(λαιλαψμεγαλη ανεμου) 혹은 \거슬리는 바람\(οανεμοζ)에 의해 시달리는 제자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결과적으로 이들 항해기사들에서 보는 대로 제자들은 \믿음이 없이 두려워하는 모습\ 내지는 \깨달음이 없는 모습\ 때문에 책망을 받고 있음을 보게 된다(4:40-41; 6:48-52; 8:17-21; cf. Malbon 1993:214). 성경 특히, 구약에서 바다는 자주 수난 혹은 죽음과 관련된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바다와 함께 자주 묘사되는 풍랑(거친 바다)은 죽음의 세력으로 상징된다. 바다를 통제하고 풍랑을 잠잠케 한 일은 하나님의 능력의 입증으로 제시되어진다(욥 7:12; 시 74:13; 89:8-9; 95:3-4; 사 51:9-10).
여기 36절의 \예수를 모시고 가는 배\의 모습은 초대교회에서는 주로 교회를 상징하였는데 이것은 사명(\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을 받아 가는 제자들의 모습(4:35-36) 속에서도 그 의미가 잘 반영된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듣는) 독자(교회)는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과 자신들의 모습을 동일시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오늘의 독자들(교회)에게도 마찬가지의 독서 경험일 것이다. 결국 \광풍가운데 있는 배(제자들)\의 모습은 수난과 환난 가운데 있는 마가의 청중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Van Iersel).
2. 등장 인물들과 사건을 중심으로 한 본문 이해
이 사건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중에서 예수와 제자들이 주된 인물들이다. 특히 무리를 떠나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의 모습(36절)은 마가복음에서 특별한 사명 속에 있는 모습(막 1:38)이 아니면 제자도의 교육을 위한 모습(4:10; 5:40; 6:45-46; 8:9-10; 9:28-29)으로 자주 제시되어진다. 이미 천국복음의 \씨뿌리는 자\로 오셔서 씨를 뿌리시는 예수님은 이제 무리를 떠나 제자들을 데리시고 바다를 건너 저편으로 가고자 하신다. 지금 제자들을 데리고 배를 타고 바다로 가는 이유는 물고기를 잡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주님을 따르라\(막 1:17)는 부름에 배와 그물과 아비와 함께한 일꾼들을 내버려두고 주님을 좇았다. 이제 이들은 주님을 따름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1:17). 그들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선 이유는 더 이상 물고기를 잡기 위하여서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해서이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지금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 항해의 부름(명령)을 받고 있다(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35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명령을 따라 순종하여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섰다. 이제 이들이 바다에서 겪는 경험은 단순히 물고기를 낚는 어부로서의 경험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경험이다. 과거에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진 어부로서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경험의 시작인 것이다. 이 경험은 후에 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삶에 큰 도전과 교훈이 될 것이다(여기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을 보라).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바다)저편으로 건너가자\\-35절
우리는 여기에서 사명을 부여하시는 예수님을 본다. 누가 그들을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였는가? 그것은 분명히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셨다. 무엇을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바다 저편으로 가시고자 하셨는가? 그것은 건너편의 사건(막 5:1-20)을 통해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곧,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시는 일이었고,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복음을 전하는 일(5:19-20)이었다.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예수님은 복음전파를 위하여 오셨다(1:38; cf. 막 1:14-15). 사실, 복음전파는 우리의 열심 이전에 하나님의 열심이 먼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천국복음을 전하신 것이다(막 1:14-15). 누가 이 일에 하나님의 열심을 능가할 수 있는가? 그리고 보냄 받은 그의 아들 예수의 열심을 능가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명령에 제자들은 순종하여 예수를 배에 모시고 바다로 나아갔다(36절). 그런데 갑자기 이들의 항해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예수님이 건너가자고 하였고, 예수님이 주도하고 예수님이 배에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항해에 큰 광풍이 일어난 것이었다.
2)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37절
갑자기 \밤\의 바다에는 돌풍과 함께 큰 폭풍우가 몰아쳤고, 이로 인해 물결이 일어나 배에 \이미\ 물이 가득하게 되었다(ωστε ηδη γεμιζεσθαι το πλοιον[37절]). 정말 돌발적인 엄청난 폭풍우(λαιλαψμεγαλη ανεμου)였고 어부인 그들조차도 어떻게 손을 쓸 틈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예수님께서 고물에서 잠을 자고 계시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 지금 강한 돌풍을 동반한 폭풍우가 들이닥쳐 물결이 일어나 배가 이미 물로 가득 차서 파선 직전에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이 고물에서 잠을 자고 있을 수 있는가? 정말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돌풍으로 큰 풍랑이 \일어난\ 바다와 \주무시는\ 예수님 사이에 강한 대조를 본다(Van Iersel & Linmans 1978:32). 여기 \주무시다\로 묘사된 헬라어 동사(καθευδω)는 때로는 \죽어 있다\(막 5:39; cf. 살전 5:10) 혹은, \다른 사람의 구원에 무관심하다\(시 44:23-24)로 번역되기도 한다. 광풍이 일어나 배가 침몰하는 상황에 \주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이러한 환난을 잊은 듯한 모습(무관심)이거나 아니면 죽은(무능한) 모습처럼 보였는지 모른다(cf. 시 44:23-24). 시편 121:3-4에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고 하였는데 \주무시는\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그리고 이러한 모습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과연 예수는 제자들이 당한 이러한 환난에 무관심하거나 무능한 분이신가? 여기에 대한 제자들의 안달과 외침과 탄원은 절절하였다. 외침과 탄원을 통해 갈등은 절정에 이른다.
3)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38절
이것은 마치 환난(수난) 속에서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영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고 우리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시 44:23-24)라고 말하는 시편기자가 하나님께 탄원하는 모습과 유사하다.
과연 예수님은 죽음을, 환난을, 수난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무관심한 분, 아니면 돌아볼 수 없는 무능한 분이신가? 그의 일시간의 \주무심\(죽으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가복음에서 이 질문은 제자들이 지속적으로 가진 의문이었고 또한 마가의 청중들이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가진 의문이었으며, 그리고 오늘날 교회가 세상 혹은 환난 가운데서 가지는 의문이기도 하다. 환난과 수난 가운데서 주무시는(?) 예수님, 수난의 삼키운 바(희생물)가 되신 예수님은 무능한 분이신가? 마가복음은 여기에 대해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고 대답한다. 그의 \주무심\(죽으심)은 의도된 것(막 8:31; 9:12; 9:31; 10:32-34)이었고 이것은 오히려 우리를 위한 것 곧, 대속적 구원(막 10:45)이라고 역설한다. 결국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의도된 \주무심\, 신뢰의 \주무심\으로 간주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안식(신뢰) 가운데 잠을 잘 수가 있다(cf. 시 3:5; 4:8). 사실 이점은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마가의 청중과 우리들에게 큰 도전과 위로가 된다.
여기 38절의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의 제자들의 외침은 이 복음서를 읽는(듣는) 독자들의 가슴에 지속적으로 울려 주는 메아리가 되어 복음서의 종결까지 나아간다. 과연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우리의 죽게된 것 즉, 수난과 환난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는 혹은 돌아볼 수 없는 분이신가? 이점에 있어 제자들은 눈먼 자의 모습이었다. 수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제자들의 모습은 바로 마가의 청중들의 모습이고 또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인생은 시련을 만나면 쉽게 동요하며 안달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은 시련이 와도 큰 평안과 안전 가운데 있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풍랑이 일어날 때 예수님의 모습(\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과 제자들의 두려워하고 당황하는 모습이 너무도 대조적임을 본다. 이 두 행동은 신뢰와 두려움으로 나타난 불신앙의 대조적 모습이다. 풍랑 중에도 예수님이 평안하고 안락하게 주무시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심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의미한다(cf. 잠 3:23-24; 시 3:5; 4:8; 욥 11:18-19).
이 외침 속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하고 고요할 것을 명하신다.
4) \깨어…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39절
여기 \깨어\의 표현은 헬라어로 \διεγειρω\로 기술되었다. 이 표현은 앞 구절(38절)에서는 \εγειρω\(깨우며)로 호환되었는데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는 주로 병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치유를 선언하거나 일으키실 때 기술된 말씀으로 주어졌을 뿐 아니라 치유(구원)된 상황을 묘사할 때 표현된 것으로 나타나며(1:31; 2:9, 11-12; 3:3; 9:29; 10:49), 또한 죽음에서 일어남(부활하심)으로 표현되기도 한다(6:14, 16; 12:26; 14:28; 16:6, 14).
잠시동안 \주무시는\ 예수님은 이제 \깨어 나셔서\(일어 나셔서) 흉흉한 바다를 향해 잠잠하고 고요할 것을 명하자 \바람이 그치고(바다가) 아주 고요하여졌다\. 39절의 바람을 \꾸짖으시며\(επιτιμαω)의 표현은 마가복음에서 여러 번 언급되고 있는데 예수님이 구원사역에 방해되는 귀신, 바람, 베드로와 같은 모든 요소들에 대하여 꾸짖으실 때 이 표현을 쓰시는 것을 볼 수 있다(막 1:25; 3:12; 4:39; 8:30, 32-33; 9:25). 이것은 \…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심\의 의미(cf. 눅 4:39)이다. 결국 바다는 잠잠하고 고요하여 졌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깨어나심\과 바다의 \잠잠함\ 사이의 극한 대조를 본다.
특히 \잠잠하라 고요하라\는 명령은 창세기의 창조기사에 나오는 하나님의 절대적 명령(…있어라[Let there be…])을 회상케 해 준다. 자연계까지도 예수님의 말씀에 복종하심을 본다. 이 경우 예수님은 구속의 주로서 교회의 머리가 되실 뿐 아니라 창조주로서 온 우주의 머리가 되신 분으로 제시되어진다. 역사와 자연계와 초자연계까지도 그에게 복종하신다. 이 분이 우리의 구주이시고 목자이시다.
사실 이 이적기사는 막 6:45-52의 이적기사와 함께 제자들을 위하여 베풀어진 이적기사이다(Marshall 1989:213). 그러나 제자들의 경우 한 밤이 칠흙같이 어두운 것처럼 이들의 깨달음도 그러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책망은 이들에게 주어진 책망일까? 이 책망은 마가복음 내내 이어지고 있는 주제 중 하나이다(6:52; 8:17-21; 8:33; 9:19; 9:33; 9:39; 10:10:38; 14:27, 30; 14:37-38).
5)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절
주로 갈릴리의 어부들인 제자들이 놀라운 이적을 베푸시는 능력의 주님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의 광풍에서 불신앙 때문에 생긴 두려움으로 떨었다. 아마 이 책망은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그들의 복음전파의 삶에 큰 경종으로 남았을 것이다. 주님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여 간 길(여정), 주님을 모시고 가는 길에도 죽음으로 이끄는 광풍 즉, 수난과 환난은 있다. 이것은 세례 요한의 삶에서도 명확하게 입증되며(막 1:14; 6:14-29), 또한 예수님의 삶에서도 명확하게 드러난다(8:31; 9:12; 9:31; 10:33-34). 이것은 제자들이라고 예외 일 수는 없다(막 13:9-13).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는 예수님의 책망은 제자들의 미래의 사역에 커다란 교훈이 된다. 뿐만 아니라 마가의 청중들에게도 커다란 경종이 된다. 결국 마가복음에서 이들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41절에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가 누구신지\에 대한 명확한 깨달음과 믿음이 없다는 점이다. 과연 바람과 바다조차도 순종하는 이 분은 누구신가?
6)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41절
여기 마가의 중심된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막 8:27-29에서 제시된 것처럼 \예수는 과연 누구신가\(Who is Jesus?)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이것은 희미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밝히 알아야 하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정말 능력의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한다면, \수난의 길을 가는 수난받는 받은 메시야\로 이해한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환난이 와도 수난이 와도 우리는 커다란 신뢰가운데 안식할 수 있는가? 그리고 수난의 길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며 안연히 나아갈 수 있는가? 우리는 아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던져지는 수난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막 8:34-38).
3.설교의 단상
특별히 이 사건은 곧 죽음을 직면한 인생들에게 믿음을 촉구하며 오직 예수에 의해 죽음의 세력이 물러감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우리의 사역과 인생 행보에 닥치는 어려움과 환난을 믿음으로 극복해갈 것을 보여준다.
36절에서 보는 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여도 우리의 삶에는 인생의 밤(35절)과 광풍과 침수(37절)가 찾아 온다. 환난의 밤, 배교의 밤, 수난의 밤과 광풍은 믿는 우리, 사명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도 닥쳐 온다.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가 없다. 마 7:24-27에서 보는 대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나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나 둘 다 비와 바람과 창수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달랐다.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집의 무너짐을 경험하였다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은 비와 바람과 창수에도 무너짐이 없는 안전한 삶을 가졌다. 이것은 예수님의 삶에도 마찬가지이며 바울의 삶에도 그러하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복음 전파의 위임을 받은 사도 바울의 여정에도 밤(옥중의 밤)이 있었고, 풍랑(유라굴로 광풍)이 있었고, 어려움(우겨쌈을 당함)이 있었다. 특히 바울이 로마로 가야하는 사명(행 23:11)의 항해길에 만난 유라굴로의 광풍(행 27장)은 어쩌면 오늘의 본문과 유사한 정황인지도 모른다. 사명의 길에 닥친 유라굴로의 광풍 속에서 죄수 바울은 제자들과는 달리 이러한 환난의 상황을 두려워하거나 불평하지 아니하고 이 광풍 가운데서도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서 주위의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하며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광풍 후에 도달한 한 섬에서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하고 섬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사명의 길에도 수난과 환난과 광풍은 있고 수난과 환난 속에도 이적은 있다는 점이다. 사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수난(환난)은 일시적인 것이지 영원한 것들이 될 수 없다. 칡흙같이 캄캄한 밤에 별이 더 영롱하게 빛나듯 오히려 밤(수난)이 있기에 별(신앙)은 더 빛나게 된다.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분과 동행함으로써 우리는 인생의 폭풍과 어두움의 밤을 지난다. \저편으로 가자\고 하신 분이 우리를 안식의 항구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여기에 수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이 있다. 수난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가 누구 신지를 보다 명료하게 알게 해 주는 훈련장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수난(의 의미)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수난은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제자들은 그(수난/환난) 속에 믿음의 뿌리가 없었기 때문에 환난이 왔을 때 곧 넘어지는 돌밭의 사람들이었다(막 4:16-19).
그렇다면 지금 이러한 말씀을 듣는 우리는 어떠한가? 제자들처럼 우리도 돌밭의 사람들인가 아니면 예수님처럼 옥토와 같이 수난에도 순종(신뢰)하며 안연히 사는 자들인가? 예수님처럼 하나님에 대해 믿음의 심지가 깊은 사람은 환난이 와도 안연히 거한다. 참된 평안을 경험한다. 이런 사람은 잠 3:23-24의 말씀처럼 살아갈 수 있다.
\네 길을 안연히 행하겠고 네 발이 거치지 아니하겠으며 네가 누울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하겠고 네가 누운즉 네 잠이 달리로다.\
앞의 비유에서 언급한 것처럼 \씨 뿌리는 자\(또는 우리)가 잘 때 조차도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활동하신다(막 4:26-29). 결국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고 성령이 강림하신 후에야 비로소 수난(죽음)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게 되었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려움 없이 믿음의 길, 사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 본문을 통해 우리가 과연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볼 수 있다. 바다와 바람도 순종하고 귀신도 두렵고 떠는 분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은, 그리고 그분을 믿는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평안인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과 핍박이 올 때 우리는 두려움 가운데 안달하는 믿음이 없는 행동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신뢰와 믿음으로 인한 평안과 담대함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세례 요한과 헤롯 왕의 차이(막6:14-29)가 바로 위와 같은 차이이고, 베드로와 예수님의 차이(막 14:17-72)가 위와 같은 차이이다. 주의 주되심을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인정한다면 과연 오늘의 환난과 수난을 만난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가?
두려움인가? 아니면 신앙인가? 이것이 마가복음이 던지는 핵심된 질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 즉, 제자도의 삶은 막 1:1의 복음의 선언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신앙인가? 아니면 16:8의 여인들처럼 두려움에 처한 모습인가? 우리의 모습은 과연 어디에 가까운가? 이것을 깊이 숙고해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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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shall, C D 1989. Faith as a Theme in Mark\s Narrativ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Van Iersel, B M F & Linmans, A J M 1978. The Storm on the Lake: Mk iv 35-41 and Mt viii 18-27 in the light of Form Criticism, \Redaktionsgeschichte\ and Structural Analysis, in Baarda, T, Klijn, A F J & Van Unnik, W C(eds). Miscellanea Neotestamentica, 17-48. Leiden: BrillVerhey, A 1984. The Great Reversal: Ethics and the New Testament. Grand Rapids: Eerdm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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