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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고질병과 죽음에서 믿음으로 나아 온 사람들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막 5:21-43 | 설교자: 심상법

    본문

    마가복음의 내러티브적 주해와 설교

     

    고질병과 죽음에서 믿음으로 나아 온 사람들
    (막 5:21-43)
     


     

    심상법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5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5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치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훤화함과 사람들의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 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앞에서 우리가 관찰한 대로 예수님의 사역은 가르치심과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능력으로 계시하신 사역이었다. 그 중에 특별히 예수님의 이적사역(4-5장)은 죽음을 상징하는 난폭한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거라사의 \군대\ 귀신 들린 난폭한 광인을 말씀으로 온전하게 고쳐주심으로써 자신의 신분을 입증하셨다. 그 후 이어지는 이적기사(異蹟記事)는 고질병인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구원하심으로써 바닷가의 비유 이후에 주어진 예수님의 이적사역이 절정에 이르게 된다. 오늘 우리가 다룰 본문의 이적기사(막 5:21-43)는 마가의 독특한 사건구성의 기술인 \샌드위치\ 기법(sandwich technique 혹은 intercalations)으로 묘사되었는데1) 그것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게된 12살 된 딸을 고치러 가는 동안에 일어난 12년 된 혈루증 여인을 고치신 이적 사건이 그 가운데 놓여 있다. 즉 바깥의 스토리는 회당장 야이로(존경받는 청결한 남자)의 죽은 딸을 일으키신 이적사건에 관한 기사(막 5:21-24[A] - 35-43[A\])로 되어 있고, 내부의 스토리는 혈루증 여인(버림받은 불결한 여인)을 고치신 이적 사건(막 5:25-34[B])으로 되어 있다. 이것을 간단하게 보면 아래 구조 분석 <표 1>과 같다.



    A. 회당장 야이로의 죽어 가게 된 딸

    B. 혈루증 여인을 고치심(막 5:25-34) :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A\.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일으키심(막 5:35-43)


    구조분석 <표1>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S1 S2 S3 S4 S5 S6 S7

    (21절) (22-24절) (25-34절) (35-36절) (37-40절) (41-42절) (43절)

    발단 전개 갈등 절정 파국 종결 대단원




    장면분석 <표2>



    결국 마가복음의 이 기사는 두 사건이 함께 잘 어우러져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한층 강화되어 있다. 특히 중간에 있는 혈루증 여인을 고치신 이적기사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는 사건의 중대한 의미론적 배경이 될 뿐 아니라, 이 기사의 중심 메시지(\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를 전달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은 아래의 우리의 주해에서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이제 장면은 바뀌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다시 바다 건너편으로 돌아오셨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여들었고,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바닷가에 계셨다(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저편으로 건너가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21절). 이러한 장면 가운데에 그 곳의 회당장 중 한 사람이 예수께 나아와서 자기 딸이 죽게 되었는데 와서 안수하여 고쳐줄 것을 간청한다.



    A. 바닷가에 오신 예수님과 [제자들과] 모인 큰 무리(5:1)

    B. 예수님과 회당장 야이로 : 딸의 구원을 간청하는 야이로, \내 딸이 죽게 되었다\(22-23절)

    C. 집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예수님(24절)

    D. 가는 도중에서의 혈루증 여인의 치유(25-34절) :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C\. 집을 향하여 가는 도중에서의 낭보(35절) : \당신의 딸이 죽었다\

    B\. 예수님과 회당장 야이로 : 권면하시는 예수님,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36절)

    A\. 집에 오셔서 딸을 고쳐주신 예수님과 [제자들과] 놀란 무리들(37-43절)




    1. 회당장 야이로의 겸손하고 진지한 간청(막 5:22-23)



    \죄의 소원(teshuqa)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mashal).\




    \회당장 중에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22-23절)

    마가복음에 나오는 대부분의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완악한 마음과 오만한 불신앙의 행동(2:1-3:6; 12;28-34; 15:39, 43ff)과는 달리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의 거의 죽어 가는 딸을 위해 직접 예수님께 와서 겸손하게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딸의 구원(치유)을 절실히 간청한다[회당장 중에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직접) 와서 예수를 보고 (큰 무리가 모여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아래 엎드리어(cf. 1:40; 5:6; 7:25) 많이 간구하여 가로되-22-23절]. 한 유대 종교지도자의 이러한 모습은 마가복음에서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1) 회당장 야이로



    그 당시 유대 사회에서 회당장(synagogue ruler)이란 가장 영향력이 있고 존경받는 유대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회당에서 종교적인 일과 의식법을 준수하는데 특별한 책임을 가진 사회-종교적 권력층의 신분이었다(Marshall 1989:94ff). 이러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이 종을 보내지 아니하고 자신이 직접 예수님께 나아와 그것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πολλα) 간구하는 모습은 정말 겸손하고 진실한 신앙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특별히 그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린(πιπτε προs τουs ποδαs αυτου) 이러한 자세는 마가복음에서 더러운 문둥병자(1:40)나 더러운 귀신들린 거라사의 광인(5:6)이나 이방의 수로보니게 여인(7:25)이 취한 자세와 유사한 것으로서 이것은 스스로 자신의 신분을 낮춘 겸손한 행동이었다(Marshall 95). 이러한 자세는 지위고하(地位高下)를 떠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가져야할 참된 신앙의 자세로서 예수님은 자신의 공사역 동안 이러한 모습을 강조하셨다[3:35; 9:35ff; 10:23ff; 10:42-45; 12:13, 38, 41-44(그의 가르침 중에서); 2:15-17; 10:13-16, 17-22(그의 행동 중에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 체면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딸에게 엄연히 다가온 죽음의 문제 앞에 무력하게(겸손하게) 서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본다. 인생은 이와 같이 자신의 권력이나 지위보다 더 큰 세력(병이나 죽음) 앞에 직면하였을 때 무력한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고 스스로 자신을 낮추어 겸손하게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피조물의 참된 자세가 아니겠는가? 이처럼 죽어 가는 자신의 딸로 인하여 회당장은 예수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가지게 되었고 또한 진실하고 간절한 간청을 하게 되었다. 회당장을 통해서 우리는 고난 앞에 서 있는 인생의 참된 구도적 자세를 본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의 세력 앞에 무력하게 서 있는 연약한 한 피조물의 모습과 함께 능력의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동시에 본다. 결국 회당장 야이로의 신앙은 인간적인 것에서의 절망으로부터 왔다. 이처럼 천국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의 것이고 참된 신앙은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 베푸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히 11:6). 여기에 기적의 배경과 이유가 있고 신자의 소망과 축복이 있다.

    이러한 겸허한 간청으로 인해 예수님은 그의 죽어 가는 딸의 구원을 위해 회당장 야이로와 함께 그의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24절). 여기에 큰 무리가 예수를 에워싸 밀며 따라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렇게 급히 나아가는 길에 한 여인이 출현하면서 야이로의 딸의 구원을 향한 예수님의 행보가 지체하게 되었다. 특별히 가는 도중에 발생한 혈루증 여인의 치유사건은 회당장 야이로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딸의 구원(치유)을 지연시키는 방해거리가 되었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죽어 가는 딸의 치유에 대한 사안은 촌각을 다투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딸의 구원의 길에 출현한 혈루증 여인의 치유사건은 오히려 회당장 야이로로 하여금 더 큰 믿음, 굳건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특히 아래의 예수님의 선언은 회당장의 신앙을 더욱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이 선언이 야이로의 간청의 중심되는 말(\내 딸이 구원을 얻어 살게 하소서\)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Marshall 1989:97). 그러므로 우리는 이 혈루증(血漏症) 여인의 치유기사(5:25-34)를 쉽게 지나칠 수가 없다.



    2. 열 두 해를 앓은 혈루증 여인의 믿음과 치유(막 5:25-34) 2)



    가는 도중 일어난 이 치유사건을 소개함에 있어서 마가는 무엇보다도 이 여인의 절망적인 비참한 모습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는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25-26절). 여기에 언급된 혈루증(血漏症)은 종교적으로 불결한 병(cf. 레 15:19-33; 20:18)이었기 때문에 여인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되었고 사회적으로 단절되어 사람과의 접촉이 금지되었다(Selvidge 1984). 그리고 여인은 이 병을 치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의사들을 통해 모든 처방과 진단을 받아 보았지만 괴로움은 많았고 돈은 다 허비하였고 병은 더 악화만 되었다.

    이러한 절망적 상황에 있는 그녀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믿음(치유의 소망)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예수께로 나아왔다(27절). 그것도 정결법을 어기면서까지 큰 무리가 예수님 주변을 에워싸 미는데도(24, 31절) 예수께로 나아와 그의 옷에 손을 대었다. 종교적, 사회적, 개인적, 정신적인 절망(불결/단절/괴로움/탈진/허무)의 장벽을 깨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만으로도 그녀는 자신의 구원(치유)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정말 두려움 없이 주님께로 나아왔다. 특별히 여기에 언급된 그녀의 상태는 더 이상 소망의 기대를 가질 수 없는 상황임을 성경은 잘 암시하고 있다: 열 두 해(δωδεκα ετη)를…앓는; 많은(πολλα) 의원에게; 많은(πολλων)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παντα) 허비하였고; 아무(μηδεν) 효험도 없었고; [오히려] 더 중하여 졌던 차에(μαλλον ειs το χειρον ελθουσα). 이러한 상황에서 여인은 소문만으로 예수께 나아왔다. 아마 상태가 이쯤 되면 모든 것을 포기(절망)할만 하지만 그녀는 절망 없이 예수께 나아와 고침을 받고자 하였다.



    그녀의 갈망은 어쩌면 땅의 힘과 땅의 치유와는 다른 것에 대한 마지막 갈망이었는지도 모른다. 땅의(육신의, 세상의) 것에 절망한 곳에서 하늘의 것에 대한 희망이 열림을 본다. \세상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한 하늘의 비상문 곧 길이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 홍해의 막다른 국면에서도 하나님을 믿었던 모세와 그를 따르는 백성들에게는 약속의 땅을 향한 길이 준비되었다. 주님 앞에서는 어떠한 절망도, 아니 우리가 앞으로 보는 대로 죽음의 절망까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절망의 상황에서 예수님에 대한 소문만으로 나아온 그녀의 신앙(많은 이적을 직접 본 제자들에 비해서)은 절대적이었다(\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러한 신앙으로 말미암아 이 여인은 구원(치유)을 경험하게 되었고 이에 대해 예수님은 무리 가운데 이 여인을 찾아 제자들과 무리 앞에서 놀라운 선언을 하신다(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절). 물론 이 선언은 치유의 근원이 옷 자체의 마력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의미하기도 한다. 아마도 이 여인의 두려움 없는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놀라운 선언은 절망(죽음)의 낭보(朗報) 앞에 있는 회당장 야이로에게 큰 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외관상으로 쉽게 생각하기에는 딸의 생명이 촌음을 다투는 시점에서[23절의 \εσχατωs εχει\의 표현은 \죽음 직전에 있다\(be at the point of death)는 의미이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 벌어진 이 사건은 딸의 구원에 지체함을 주는 장애물, 즉 방해거리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에서 보는 대로 오히려 이 사건은 회당장 야이로의 신앙을 더욱 돈독하게 하는 일종의 신앙교육시간이었다. 예수님과 함께 집으로 가는 중에(24절의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일어난 놀라운 이 이적과 이 여인의 믿음 그리고 예수님의 선언은 자신의 죽은 딸에 대한 예수님의 구원을 두려움 없이 절대적으로 신뢰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도중에 생긴 엉뚱한(?) 일들 - 소위 남의 일들 - 이 때론 우리 자신의 일에 지체함이나 방해거리처럼 여겨진다 할지라도 사실 이 모든 일들은 우리의 신앙을 진작하는 교육의 장이 됨을 기억해야 한다. 많은 경우에 우리의 신앙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큰 격려가 될 뿐 아니라 또한 다른 사람들의 신앙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신앙에 큰 격려가 된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중에 발생하는 사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일종의 장애물(방해거리)처럼 보여도 그것은 \변장된 축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신앙의 길에는 허다하다.



    이러한 신앙의 놀라운 기적을 그가 목도하지 못했다면 절망의 비보(\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앞에서 그도 마냥 주저앉아 버렸지 않았겠는가? 딸의 죽음을 면해 보려는 그의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에 그의 마음은 초처럼 그 희망이 녹아버릴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마치 딸의 죽음의 비보를 전한 그 사람들처럼 말이다(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35절).



    우리는 여기서 죽음 앞에 소망이 소멸되어 버리는 자연인의 연약함을 본다. 그러나 딸의 죽음의 비보는 결코 절망의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큰 소망(믿음)의 시발점이 되었다. 과연 죽음은 인생의 모든 소망의 종국을 의미하는가? 과연 하나님은 \우리의 죽게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는 분이신가?\(막 4:38). 이것은 소망이 없고 믿음이 없는 자들의 외침이다. 우리의 신앙의 활력은 우리에게 언제나 소망의 창구가 열려있다는 인식에서 나온다. 예수 없이도, 하늘의 것 없이도 만족하고 살 만하다는 생각으로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나비와 같은 삶\이 아니라 땅을 기어다니는 \굼벵이와 같은 삶\인지도 모른다.



    3.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심(막 5:35-43)



    1) 죽음의 비보와 예수님의 격려(35-36절)



    혈루증 여인이 고침(구원)을 받고 축복이 선언되는 동안 비운의 전갈이 회당장에게로 왔다. 그것은 \그의 딸이 죽었다\(단순과거로서 죽음의 사실을 강조)는 소식이다. 그리고 그 소식과 함께 그들은 이제는 소망이 없는 죽은 딸에 대한 구원의 기대를 그만두라고 재촉하였다.\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이 절망적 비보와 함께 던져진 그들의 말은 딸의 구원에 대한 야이로의 기대(신앙)를 꺼버리는 소염제가 될 수 있었다(회당장으로서의 자신의 신분에 이은 두 번째의 신앙의 장애요소). 딸의 죽음에 대한 이들의 비보(悲報)와 해석은 야이로로 하여금 예수님과 결별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하였다. 때론 우리의 삶에 이와 같은 비극이 예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게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곁에서 보고 들은 주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신앙(이것이 이 사건에서의 주님의 근본 관심)을 격려한다. 주변의 모든 불신, 절망, 체념을 깨뜨리고 그녀를 구원하기 위해 주님께 나아온 야이로와 함께 그의 딸에게 가고 있는 주님은 결코 그의 딸의 구원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야이로를 격려하신다[두려워 말고 (오직) 믿기만 하라(지속적 믿음을 강조하는 현재 명령법을 유의하라-36절: \Μη φοβου μονον πιστευε\). 더 큰 어려움에도 두려움 없이 지속되는 신앙이 참된 신앙이다.



    2)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점에 있어서 야이로는 딸의 죽음의 상황을 놓고 예수님의 말씀과 주변 사람들의 낭보(朗報) 사이에 선택의 결단이 필요하다. 특별히 35절에서 독자는 예수님의 말(34절)과 아직 그 말씀을 하는 중에 던져진 집에서 온 사람들의 말(35절) 사이에 중요한 선택을 해야한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아직 말씀 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가로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34-35절). 이 경우 우리는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한 말과 집에서 온 사람들이 회당장에게 한 말 사이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과연 어떤 말(소식)이 진리인가? 우리는 누구에게 귀 기울어야 하는가? 내 양은 내 음성을 알고…(요 10:4, 16).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 10:3-5).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권면[\두려워 말고 (오직) 믿기만 하라\]은 갈등하는 회당장의 상황에 두려움 없는 신앙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죽어 가는 딸과 죽은 딸 사이의 차이가 예수님의 구원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차이를 만드는가? 그래도 그녀에게 생명이 붙어있기 때문에 우리의 소망이 유지되고 구원이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구원은 완전한 죽음에서의 구원인가?(cf. 엡 2:1 ff).



    3) 집안으로 들어가서 딸을 일으키신 예수님(37-43절)



    핵심 세 제자들(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집안으로 들어가신 예수님은 그들(헌화하고 우는 자들)을 다 내어 보내신 후에 딸의 부모와 세 제자들을 데리고 딸이 누운 방에 들어가셔서 딸을 일으키신다(40-42절). 여기서 딸의 죽음을 \잔다\고 하시고 그녀를 일으키신 사건은 우리의 죽음이란 잠시 전환기적인 것(이점을 우리는 앞의 광풍기사에서 보았다)으로 결국 그 날에 우리는 잠에서 일어나(εγειρω) 부활의 환희 가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거하게 된다. 불신자에게 죽음은 삶의 절망으로 여겨지지만 그러나 신자에게 죽음은 다음 날의 더 나은 삶의 휴식(안식)을 의미하는 잠과 같이 더 나은 생명으로 가는 관문에 불과하다. 아무도 잠자리에 들면서 죽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는 내일 깬다고 생각하고 잠이 든다. \잠\으로 비유된 죽음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도 절망의 순간에 \또 다른 내일이 있다\ 혹은 \내일 생각하자(Tomorrow is another day)\며 잠자리에 드는 장면은 \잠\이 새로운 내일을 위한 안식(과정)임을 보여준다.



    \달리다굼(Talitha kum)\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이 선언은 믿는 모두에게 주어진 말이기도 하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이르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요 11:25-27)고 하셨다. 나사로와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예수님은 믿는 우리에게도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이시다.



    결국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에야 비로소 그것의 충만한 의미를 알게 되어지는 사건[은닉의 명령[(43절)]으로 제시되어졌다.



    4. 설교의 단상



    본문에서 우리는 유대사회의 존경받는 청결한 남자인 야이로나 버림받은 불결한 여인인 혈루증 여인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대상임을 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오직 회개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는 누구나 이 큰 구원을 맛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성별(性別)을 막론하고 겸손히 믿음으로 예수님께로 나오기만 하면 이 구원은 주어집니다. 우리는 이 기사를 통해서 외관적인 정결과 불결을 떠나서 인간을 공평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문제의 정도가 어떠하든 그것이 치유될 수 없는 고질병이든 아니면 죽음이든 간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은 이 모든 것을 관통하여 생명으로 이끕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어떠한 상황에 처한 자라도)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우리는 여기서 두려움 없는 담대한 믿음, 지속적 믿음의 중요성을 교훈 받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도 여기에는 훌륭한 모범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사회의 매우 영향력이 있고 존경받는 사회-종교적 권력층의 한 사람으로서 종을 시키지 아니하고 예수님께 직접 나아와 겸손히 그의 발아래 엎드리어 많이 간구한 모습은 우리에게 놀라운 신앙의 족적(足跡)을 남깁니다. 그리고 딸의 죽음의 비보와 사람들의 세상적 권면에도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었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모습은 혈루증 여인에게 또한 극명하게 나타났습니다. 불결한 병으로 사람들과의 접촉이 금지된 이 여인은 많은 의원들에 의해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조차도 모두 허비하였을 뿐 아니라 병은 더 악화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큰 무리가 예수님을 에워싼 상황에서도(24, 31절) 예수님께 나아와 그의 옷에 손을 댄 것은 정말 두려움이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모진 불행에 쉽게 자기를 망가뜨리는 사람이 있는 가 하면 또한 그 심한 불행에도 절망하지 않고 신앙으로 일어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진 시련은 인간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드물게도 그것은 인간을 승화시키기도 합니다\. 여기에 신앙은 이 모든 것을 산출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최근 \나무야 나무야\와 \더불어 숲\의 서간문을 써 장안에 화재가 된 성공회 신학교의 신영복 교수는 이 드문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20년간의 옥중의 \시련을 통해서 그 자신을 증오하거나 착각에 파묻히게 하는 교조적 황폐화 대신 그 자신을 간단없이 단련\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신앙의 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남아공 대통령 만델라도 이러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 우리의 신앙에 더 큰 족적을 남긴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은 곧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분은 자신의 불행을 딛고 일어난 분이 아니고, 인류를 위한 대속적 불행(수난/죽음)을 지시고 일어나신(부활하신) 분이십니다. 이 주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들에게 \두려워 말고 오직 믿기만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주님이 우리의 믿음의 주요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미주>

    하나의 스토리가 또 다른 스토리 가운데 위치한 형태로 마치 샌드위치 같다고 하여 \샌드위치 기법\이라고 부르는데 이 문학적 기법은 각 스토리가 다른 스토리의 특징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함께 문학적 통일성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마가복음에는 이러한 기법이 자주 사용되어졌다(Shepherd 1993; Edwards 1989; Wright 1985).(본문으로...)
    물론 우리는 이 기사를 하나의 \독립된 일화\로 취급하여 설교할 수 있다.(본문으로...)
    <참고문헌>

    Beavis, M A 1988. Women as models of faith in Mark. BTB 18:3-9.

    Derrett, J D M 1982. Mark\s Technique: The Haemorrhaging Woman and Jairus\ Daughter Bib 63:474-505.

    Edwards, J R 1989. Markan Sandwiches: The Significance of Interpolations in Markan Narratives. NovT 31:193-216.

    Garland, D E 1996. Mark.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Hedrick, C W 1993. Miracle Stories as Literary Compositions: The Case of Jairus\s Daughter. Perspectives in Religious Studies 20:217-233.

    Marshall, C D 1989. Faith as a Theme in Mark\s Narrativ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Robbins, V K 1987. The Woman who Touched Jesus\ Garment: Socio-rhetorical Analysis of the Synoptic Accounts. NTS 33/4:502-515.

    Selvidge, M J S 1984. Mark 5:25-34 and Leviticus 15:19-20: A Reaction to Restrictive Purity Regulations. JBL 103:619-623.

    Shepherd, T 1993. Markan Sandwich Stories: Narration, Definition, and Function. Berrien Springs: Andrews University Press.

    Wright, G A 1985. Markan Intercalations: A Study in the Plot of the Gospel. Ann Arbor: UMI Dissertation Information Servi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