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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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의 내러티브적 주해와 설교
- 참된 정결(淨潔) -
| 심상법 |
막 7:1-23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에 들어가 뒤로 나감이니라 하심으로 모든 식물을 깨끗하다 하셨느니라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우리가 다룰 단락(막 7:1-23)1)은 막 6-8장의 주제(선교)를 연결해 주는 고리로서의 역할을 한다.
막 6-8장에서 17(18)번2)이나 반복적으로 언급된 \떡\(αρτος)에 관한 기사가 이 단락의 의미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임이 이미 앞의 주해에서 필자는 여러 번 지적하였다. 특별히 두 급식 이적(6:30-44; 8:1-10)사이에 끼여있는 이 논쟁은 막 6장의 5천 명을 먹이신 급식이적이 막 8장의 4천 명을 먹이신 급식이적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논리적 귀결(이유)로서의 기능을 한다(Rhoads 1992:348).
이미 앞에서 필자가 어느 정도 진술한 대로 막 6장의 급식이적은 유대 지역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넉넉히 먹이심(\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둠\)에 대한 기사라고 한다면 막 8장의 급식이적은 이방지역에서 이방의 사람들을 넉넉히 먹이심(\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 곱 광주리를 거둠\)에 대한 기사이다. 그러므로 선교가 주제가 되고 있는 막 6-8장에서 우리가 논의할 단락은 이방선교의 결정적인 단서 즉, 유대선교에서 이방선교로 전환되는 신학적 단서를 제공해 준다.
본 단락의 기사는 일종의 논쟁기사의 연속 편으로 추정된다. 이미 2:1-3:6의 논쟁기사에서와 같이 이 단락 역시도 등장하는 인물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7:1; cf. 3:22)로서 논쟁이 발생한 장소는 불명확하지만 아마도 게네사렛 지역(6:53)으로 추정된다. 본문의 사건을 갈등구성에 의하여 분석하여 본다면 표 1과 같이 도표화 할 수 있다.
1. 갈등구조에 의한 장면분석
본문의 장면(사건)을 갈등구조에 의해 분석하여 보면 다음과 같은 도표로 이해할 수 있다.
사건의 발단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새인들과 몇 서기관들이 게네사렛 땅에 오신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하였다는 것을 언급함으로써 시작된다(S1). 여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몇 사람이 씻지 아니한 손(\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은 것을 봄으로써 사건이 갈등 가운데로 전개된다(S2). 그들이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을 보는 것은 \자연스럽게 보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어긋나는 사건으로서 \이상하게 바라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뒤따르는 이야기 해설자의 설명(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3-5절)이 이러한 사실을 잘 입증하고 있다.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께 제자들의 이러한 행동을 고소하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라고 질문함으로써 갈등이 야기된다(S3).
이렇게 야기된 갈등은 예수님의 책망의 답변(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막 7:8])에 의하여 절정에 이르게 된다(S4). 이러한 예수님의 책망은 고르반의 맹세의 문제를 가지고 입증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예수님의 비유적 답변(14-23절, 특히 17-23절)이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을 수 있는가\라는 그들의 질문으로 일어난 갈등을 종결짓는 해답으로 제시되어짐으로써 발생한 논쟁(갈등)은 독자들에게 일종의 파국 혹은 종결의 의미로 전달된다(Malina 1988:6).
한 마디로 참된 정결은 외관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로서 비록 외관적으로는 불결하다고 할 지라도 회개와 믿음으로 나아온 자라면 정결한 자임을 본문은 확증해 준다. 결국 이 사건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정결은 외관상의 제의적인 정결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도덕적인 정결임을 본문을 통하여 강력히 시사한다.
2. 장면 이해(1-2절): 배경
사건이 일어난 장소(게네사렛?)나 시간이 명백하게 언급되지 않지만 본문에 언급된 장면 혹은 분위기는 전형적인 논쟁의 상황임을 알려 준다(cf. 2:1-3:6; 11:27-12:40).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예수와 제자들의 행동을 주시함; 장로들의 유전(특히 정결법)에 대한 언급;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음에 대한 논쟁; 고르반에 관한 문제; 불결에 대한 논쟁. 이처럼 장면 전체가 매우 논쟁적이다. 특히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막 7:1의 언급(cf 막 3:22)은 독자들에게 본문에서 곧 발생할 사건이 논쟁적인 사건임을 암시해 준다. 이런 까닭에 많은 학자들은 이 사건을 논쟁기사로 다룬다.
3. 사건이해
이러한 논쟁적 분위기를 통해서 독자는 이 사건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구성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갈등)으로 이어짐을 간파하게 된다. 사실 본문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논쟁은 초대교회(특히 유대교회와 이방교회와의 관계)내의 뜨거운 감자와 같은 화두였다(사도행전과 갈라디아서를 보라). 특히 이방인 독자들에게 정결법에 대한 논의(시행)는 그들이 받은 복음의 본질(내용)과 크리스천의 삶을 이해하는 근본적인 문제였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던진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라는 질문은 본문의 사건을 이해하는 주된 질문이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특히 17-23절)은 크리스천의 율법(특히 정결법) 이해에 대한 규범으로 제시되어졌다. 결론적으로 이 사건은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벌어진 논쟁기사로서, 유대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은 사건의 주된 참여자이다. 다른 논쟁기사에서는 병자들의 치유에 대한 논쟁(2:1-12; 3:1-6) 혹은 어떤 이슈에 대한 질문형식의 논쟁(2:18-22; 11:27-33; 12:13-34)이었다. 그러나 본문의 논쟁기사는 예수의 제자들의 결례를 통하여 일어났다. 이 경우 제자들은 논쟁을 야기 시킨 동인이지만(cf. 막 2:23-28) 본 사건의 논쟁에서는 주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해석적 관심은 자연스럽게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 사이의 논쟁으로 나아간다.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마가복음에 나타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을 살펴보자.
1) 유대 (정치) 종교지도자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마가복음에서 유대 정치, 종교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의 대적자로 제시되고 있다. 마가는 초기 갈릴리 사역에서부터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그들의 적의를 명백히 드러냈다. 이점은 논쟁기사(2:1-3:6)에서 잘 보여졌는데 논쟁기사는 그들이 예수를 죽일 방법을 강구하는 것으로 끝맺는다(3:6). 이들의 살해모의는 바알세불의 논쟁기사(3:22-30)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서기관들(그 당시 율법학자들[신학자들])이 예수를 \바알세불에 지폈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3:22),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3:30)는 소문을 퍼뜨림으로써 예수를 이스라엘 공동체로부터 축출하고자 하였지만 예수님의 논박에 의해 이것은 실패로 끝났다.
이들의 적대감(살해모의)이 예수님의 계속되는 사역들에서는 더 이상 표면적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항상 그 배후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새인들과 몇 명의 서기관들이 예수님 주위로 함께 모였고 거기서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 중 몇 사람이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는 것을 보고 예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느냐\(7:5)고 고소하고 있다. 독자는 여기서 그들이 따르는 장로들의 유전이 무엇인지를 막 7:3-4에서 이야기 해설자의 해설을 통해 알게 된다.
마가복음을 통해서 독자는 이들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장로들의 유전)을 생각하는(cf 막 8:33) 전형적인 \길가\(막 4:4, 15)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임을 알게 된다. 예수님의 판단에 따르면 이들은 \위선자들\(7:6)이다. 이들 위선자들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기를,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7:6-7; cf. 사 29:13) 자들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외관상으로는 철저히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는 것 같지만 마음은 하나님의 생각, 뜻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이다. 한 마디로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는\(7:8) 입술의 예배자들이다. 외관상으로는 이들이 정결 규례들을 잘 지키는 것처럼 보여도 이들의 행동과 삶의 우선 순위는 하나님의 뜻이 먼저가 아니고 사람과 사람의 유전을 우선으로 삼고 있다(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도다-7:9).
하나님의 율법을 가장 많이 연구하고 행한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뜻)과 가장 멀리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성경에 보면, 이웃 사랑의 계명(레 19:18)에 대하여 가장 잘 아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정작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돌보는 일을 외면하였고(\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오히려 유대인들에게는 개같이 여겨진 사마리아인이 이웃사랑의 실천자로 제시된 예수님의 비유(눅 10:29-37)는 이와 같은 아이러니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불행스럽게도 기독교 역사상에는 이와 같은 아이러니가 자주 일어났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듯 하다.
마가복음에서 이들 종교지도자들은 안식일을 가장 잘 지킨다고 하면서 참다운 안식의 의미와 삶(선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매우 동 떨어져 행동하는 아니, 오히려 역행하는 사람들(악을 행하는 것; 죽이는 것)이었다(cf. 막 3:4). 이들은 성령을 힘입어 하나님의 구원을 행하는 사람(예수)을 오히려 더러운 귀신이 들린 사람으로 여긴다(막 3:22).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철저히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는 한 마디로 소경과 같은 사람들이다. 정결법을 잘 지킴(음식을 먹기 위하여 손을 자주 씻는다던가 시장에서 돌아와서 물로 씻는다던가,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는 일을 함)으로써 외관상 정결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 앞에서 불결한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πορρω απεχει) 마음(막 7:6)을 가졌기 때문이다. 정결법에 의하면 하나님(성소)으로부터 (공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불결한 것으로 여긴다. 이들이 불결한 자들이라는 것은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을 통하여 더욱 명백하다.
2) 논쟁의 발단
논쟁의 발단은 예수의 제자들 중 몇 사람이 씻지 아니한 손(부정한 손)으로 음식(떡)을 먹는 데서 일어났다.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의 정결법으로 비추어 볼 때 충분히 문제거리가 될 수 있었다(7:3-5). 유대인은 그들의 모든 (사회적) 삶이 종교적 의식법(정결법)에 의해 통제(시행)되어졌다. 이러한 법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해서 유대사회에는 다양한 규례들(장로들의 유전)이 제정되었고 이것들은 유대인들의 종교적-사회적 삶에 특별한 울타리가 되었다.
● 장로들의 유전
모세의 율법을 수호하고 그것을 적절히 실행하기 위하여 장로들(사람들)이 세칙들을 가지고 만든 일종의 \율법의 울타리\와 같은 기능을 하는 규례들이다. 예를 들면 할라카와 미쉬나가 이에 속한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뜻)을 올바로 시행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집단적 이기심(기득권)을 유지, 확장하기 위한 것인지는 고려할 문제다. 본문에서 주님은 이것의 역기능으로 인하여 \사람의 계명\(7절) 혹은 \사람의 유전\(8절), 더 나아가 \너희[의] 유전\(9, 13절)이라고 불렀다.
그 당시 장로들의 유전은 오늘의 신학(theos[神] + logos[學])의 역할과 유사하다. 하나님의 뜻을 보다 잘 이해하고 시행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체계화한 신학은 하나님의 계시의 울타리와 같다. 그러므로 장로들의 유전처럼 신학은 그 기능이 봉사의 신학이 되어야 하며 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cf. 롬 11:33-36). 그런데 우리의 신학은 어떠한가? 신학의 역기능은 없는가?
● 정결법(3-5절)
유대사회 구조의 울타리 혹은 경계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서 미쉬나의 25%가 이에 속한다. 예수님 시대의 정결법은 성속의 구별(장소, 시간, 사람, 사물, 음식 등)을 통하여 유대사회 내의 인종, 계층, 육체, 성의 차별과 멸시를 조장하고, 권력의 남용을 발생하게 하며, 그리고 기득권을 획득, 유지, 확장하는 수단(다스림의 수단)이 됨으로써 \불결한 사람들\(이방인들, 세리와 창녀, 소경, 문둥병, 앉은뱅이 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실행을 어렵게 하였다. 이러한 규례들에 대한 인위적이고 지나친 강조는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의 참된 정신을 실행하기보다는 위선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정결법을 지킴으로써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세우고 지키는 자들로 자처(착각)하지만 실상은 위선자들이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버리는 자들(8-9, 13절)이다(Salyer 1994:149).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 마음으로는 하나님과 아주 먼 삶을 산다면 과연 이들이 행하는 정결법의 보수와 실행은 누구를 위하고 무엇을 위한 보수이고 누구와 무엇을 위한 실행인가? 이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가장 비근한 예가 바로 예수께서 지적한 고르반의 맹세에 관한 그들의 부모공경의 율법(5계명)의 시행이다.
3) 고르반의 맹세에 따른 부모공경의 위선(9-13절)
모세는 십계명을 통하여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 20:12)고 말하였고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출 21:17)고 하였다. 이들은 부모들에게 당신들이 지금까지 물질적 도움(공경)3)을 받아왔던 것들이 이제 고르반(\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이라고 하면서 더 이상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행동은 입술로서는 하나님을 가장 헌신적으로 예배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하나님을 가장 멀리하는 행동임을 예수님은 지적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들의 행동은 하나님께 대한 아름다운 헌신이 아니라 추한 위선이고, 거룩한 행동이 아니라 불결한 행동이다.
고대사회에서 부모공경의 명령은 물질적인 후원(도움)을 주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고갈된(제한된) 자원의 사회에서 이들이 행한 일은 부모를 굶어 죽게 버려 두는 행동이다. 우리 속담에도 \콩이 한쪽이라도 나누어 먹으면 낫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고갈된 자원 속에 살아가는 공동체의 모습을 잘 반영한 예이다. 그러므로 부모공경의 율법(5계명)과 관련하여 고르반의 맹세에 대한 이들의 종교적 행위는 부모를 죽게 버려 두는 행위, 곧 살인의 행위와 동일하다. 정말 입술로서는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하는 것처럼, 가장 거룩한 예배자처럼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계명)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이 이들 종교지도자들이다. 참된 경건, 참된 정결, 참된 거룩은 어떤 행동(예배)을 말하는가? 제의적 규례의 중심에 이웃사랑의 실천의 계명이 강조되고 있는 레위기의 모습(레 19:17-18)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경건이 어떤 행동(예배)인지를 잘 보여준다.
주님은 그들에게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또 [너희가]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7:13)고 책망하고 있다. \너희가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4) 불결(정결)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적 가르침(막 7:14-23)
고르반의 맹세를 예를 삼아 그들의 위선(불결, 사악함)을 지적하신 예수님은 이제 무리들을 다시 불러서 참된 불결이 무엇인지를 비유적으로 교훈하고 있다. 우리는 이 단락이 막 4장의 비유 교훈과 유사한 형식을 띄고 있음을 본다(Van Iersel 1998:243). 이 불결은 한 마디로 도덕적 악함임을 의미한다.
주의를 촉구(14절):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비유로 주어짐(15-16절): 무리에게
비유에 대한 설명(17-23절): 제자들에게
● 예수님의 비유적 선언(15-16절)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7:15-16).
비유가운데 주어진 예수님의 교훈은 대조적인 두 단어인 \밖에서\(εξωθεν...εισπορευομαι)와 \안으로\(εκ...εκπορευομαι)로 표현되었다. 이들 단어들은 비유의 설명(7:17-23)에서도 4번이나 반복하여 언급된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밖에서, 속에서\의 대조와 \들어감, 나감\의 대조로 표현되었다. 논증의 중심은 \안\과 \밖\의 이슈다. 한 마디로 참된 불결 혹은 참된 정결은 외관의 문제가 아니라 내면의 문제임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다. 문제는 마음이지 배(육체)가 아니다. 이제 논증의 주제는 \불결\(제의적 의미)에서 \악함\(도덕적 의미)으로 전환되고 있다.
● 비유에 대한 설명(17-23절)
비유(15-16절)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은 \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간\ 후에 제자들에게 주어졌다. 집안에서 제자들에게 주어진 교훈은 복음서에서는 제자도의 교훈에 해당한다(cf. 막 4:34; 9:28). 상황(장소)의 전환(\바깥에서 안으로\)에 대한 언급은 수사학적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강조는 전통의 외부적, 제의적 울타리를 어기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적, 도덕적으로 깨트리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를 암시한다. 정결법(\장로들의 유전\)을 지키기 위하여 도덕법(십계명)을 어기는 것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도덕법은 그 내면인 마음(생각)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계명) 밖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 자들인가? 그들의 눈(정결법, 장로들의 유전])에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바깥에 있는 자들\ 즉 외인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도덕법, 하나님의 계명에 따른 견해)에는 그들이 \바깥에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 혹은 \참람한 자\로 규명하고 그들의 제도권(경제) 밖으로 밀어내려고 하였다(제거 작업 은 죽일 음모를 꾸미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바깥에 있는 자들\이다.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퍼하며 이를 갈 자들이 곧 그들이다. 문자적으로도 \집안에\ 있는 자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었고(17절) \집 바깥에\ 있는 자들은 그들이었다.
참된 정결과 불결은 외관적(밖)이라기보다는 내면적(안)이며 \의식적\(정결법)이라기보다는 \도덕적\(도덕법)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의식법[정결법]은 폐지되고 도덕법[십계명]은 유지되었다. 21-22절에 나오는 악덕의 목록들이 십 계명의 [5]6-10계명을 언급하고 있음은 매우 흥미로운 관찰이다(고르반의 문제와 관련된 부모공경,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증거, 탐심). 이 목록은 무엇보다도 도덕적 정결의 유지는 마음(\악한 생각\)으로부터 나옴을 보여준다(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참된 정결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경건은 헛된 경건이고, 위선적 경건이다. 신 6장4절의 율법 준수는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함(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의 불결(죄)은 다 속(마음)에서 나온다.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23절).
참된 예배는 입술의 예배가 아니라 마음의 예배이며, 손과 그릇을 씻는 제의적인 행동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인 행동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성전에서 제물을 드리는 행위에 대하여 복음서가 침묵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정결)의 선언은 언제나 마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회개와 믿음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의 속죄와 죄 사함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이 성결한 삶의 필수적인 것이며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하며 이것에 기초하여 거룩한 윤리적 삶의 실행이 있어야 한다. 롬 12:1-2의 산 제물로 드려진 삶 곧 마음을 새롭게 하는 삶이 수반되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정결\이란 외관적, 의식적 정결이 아니라 내면적, 도덕적 정결임을 예수께서 설파하고 있음을 본다. 이 점이 우리가 주의 깊게 듣고 깨달아야 할 주님의 말씀이다(14절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와 18절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의 강조를 유의하라).
4. 나가면서
이 단락은 독자들에게 \참된 정결(경건과 거룩)\이 무엇이며, 하나님 나라의 내인들(너희)과 외인들(저희)은 누구냐는 질문으로 종결된다. 한 마디로 참된 정결(불결)은 마음(내면)과 관련된 것이며 또한 (윤리적인) 삶과 관련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막 2:1-3:6)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율법(식탁교제, 금식, 안식일)에 대한 해석과 준행에 있어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종교지도자들(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이에 커다란 긴장과 차이가 있음을 보았다. 본문의 사건은 \참된 정결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옛 정결 체계(정결법에 중점을 둔 제의적 정결)에서 새로운 정결 체계(이웃 사랑의 실천에 중점을 둔 도덕적 정결)로의 구속사적인 의미의 확장과 전이를 통해 이방인들(부정한 사람들)에 미친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비와 사랑의 사역과 구원에 대한 서론(막 7:24-37의 이방인들[수로보니게 여인의 딸과 귀먹고 어눌한 자]의 고치심과 사천 명을 먹이심)이 되고(cf. Gundry 1993:348) 동시에 기독교의 참된 정결은 내면의 변화에 기인한 도덕적, 윤리적 삶임을 일깨워준다(Neyrey 1986; Salyer 1994). 불결은 외부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 즉 마음과 그에 따른 행동으로부터 온다.
과연 누가 하나님 나라의 사람인가? 정결(경건과 거룩)에 대한 올바른 성찰(회개와 믿음)과 실행이 없는 자는 하나님을 잘 섬기노라 말하여도 하나님 나라의 외인들이다. 정결과 불결을 외관(인종과 혈통)으로 판단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 마음의 예배보다는 입술의 예배를 드리며, 이웃 사랑의 실천보다는 제의적 실행에 바쁜 이들. 이들은 예수님 시대에 종교적 중심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는 종교적 중심에 있는 그들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불결한 자들이고,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이라는 예수님의 지적(막 7:6-7)은 정말 우리들에게 의미심장한 경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을 잘 섬긴다는 우리는 또한 어떤 사람인가 하는 점이다. 우리 역시도 \이와 같은 일을 많이 행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자. 최근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이라는 명상록(1999년)을 낸 김수환 전 추기경의 말(14쪽)은 종교인으로서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는데 도움을 준다.
나는 아무리 따져 보아도 가난하지 않습니다. 가난하지 않으니까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모릅니다. 그들의 아픔을 모릅니다.…이런 나의 반성은 우리 교회도 같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우리들, 특히 성직자들은 가난하지 않습니다. 본시 대부분은 가난한 집안들의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된 이후에 가난을 차차 잊게 되었습니다. 가난하지 않은 데서 그들 속에 들어가 있지 않으니, 가난한 사람들의 처지를 모르고 그들의 고통에 대하여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픔이 없으니 사랑도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그들의 존재와 고통을 머리로서는 인식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그들을 받아들일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테레사 수녀).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며 우리는 흰 눈이 내리는 즈믄 해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움을 힘입어 참된 정결(이웃 사랑)을 실행하는 새사람의 삶을 살아 보자.
<참고문헌>
Garland, D E 1996. Mark.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Guelich, R A 1989. Mark 1-8:26, WBC 34a. Dallas: Word Books.
Gundry, R H 1993. Mark: A Commentary on His Apology for the Cross. Grand Rapids: Eerdmans.
Lane, W L 1974. The Gospel of Mark. Grand Rapids: Eerdmans. (NICNT.)
Malina, B J 1988. A Conflict Approach to Mark 7. Forum 4/3:3-30.
------ 1993. The New Testament World: Insights from Cultural Anthropology. Revised Edition.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Neyrey, J 1986. The Idea of Purity in Mark\s Gospel. Semeia 35:91-128.
Rhoads, D 1992. Jesus and the Syrophoenician Women in Mark: A Narrative-Critical Study. JAAR 62/2:343-375.
Salyer, G 1994. Rhetoric, Purity, and Play Aspects of Mark 7:1-23. Semeia 64:139-169.
Van Iersel, B M F 1998. Mark: A Reader-Response Commentary. Sheffield: Sheffield Press. (JSNTSS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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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단락을 두 가지 다른 분리된 주제를 가진 두 일화들(7:1-13과 7:14-23)로 볼 것인지 아니면 불결에 대한 한 문제를 다룬 일화로 다루어야 될 것인지에 대하여는 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다(Guelich 1989:360-361). 그러나 필자의 서사적 주해방법은 우리가 정경으로 여기는 최종적 본문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그 출발점으로 삼기 때문에 하나의 단락(Lane 1974:244; Malina 1988:3ff; Salyer 1994:144f)으로 간주한다.
2) 떡(αρτος)에 관한 단어가 마가복음 전체에 21번 언급되고 있는데 그 중에 급식이적과 관련된 이 단락(6-8장)에서 17번이나 언급되었다고 하는 점은 매우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여기서 공경이란 고갈된 자원을 가진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1세기 지중해 연안의 고갈된 자원에 대해서는 Malina의 책(1993) 90-116쪽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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