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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마가복음의 내러티브적 주해와 설교-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심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막 7:31-37 | 설교자: 심상법

    본문

    마가복음의 내러티브적 주해와 설교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심

    \에바다(열려라)\


     

    심상법




    막 7:31-37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경계하사 아무에게라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계하실수록 저희가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가로되 그가 다 잘 하였도다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앞 단락에서 살펴보았던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적사건(막 7:24-30)은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을 이방 여인이 올바로 깨닫고 응답한 것이다. 이 사건은 마가복음의 선교적 의도를 잘 반영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 이어 이제 마가는 이방의 데가볼리 지역에서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예수께서 고쳐주심으로써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사 35:5-6)한 메시아의 종말론적인 구원사역이 예수님에 의해 이방 속에서도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1. 갈등 구조에 의한 장면 분석과 구조 분석
    본문의 사건(장면)을 갈등구성에 의하여 분석하여 본다면 표 1과 같이 도표화 할 수 있다.





    사건의 발단은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심\(31절)으로써 시작된다(S1).

    이미 예수님의 능력에 대하여 들어왔던 그곳 사람들은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고쳐주시기를 요청함으로써 사건은 갈등국면으로 전개된다(S2).

    그 곳 사람들의 이러한 요청에 과연 예수님은 귀먹고 어눌한 사람에 대하여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하여 독자는 궁금하다. 과연 예수님은 이곳 이방의 갈릴리 호수에서 치유이적을 베풀 것인가? 베푼다면 어떻게?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매우 특이하였다(33절). 사람들이 데리고 온 그 사람을 예수께서 따로 데리고 간 것도 그렇고 자신의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손에 침 뱉아 그의 혀에 댄 것도 그러하다.

    독자는 이 기사를 들으면서 아니 예수께서 무엇을 하시고 계신가? 이전의 이적 기사와는 특이한 예수님의 행동에 독자는 점점 앞으로 일어날 사건에 대해 갈등이 고조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S3). 그리고 이어지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 에바다\(34절)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갈등의 상태를 절정으로 몰고 간다(S4).

    과연 예수님은 왜 탄식하셨으며 \에바다\(열려라)의 선언은 또한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본문은 \그 사람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졌다\고 말함으로써 이 사건이 파국(해결)의 국면으로 접어든다(S5). 그리고 이어지는 은닉에 대한 예수님의 명령은 약간의 갈등을 재현하지만 곧 스토리는 다시 한번 감출 수 없는 예수님(복음)의 모습(능력)을 언급하며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확증함으로써 사건은 끝을 맺는다(S6).

    다시 이 단락을 간단한 구조분석으로 이해한다면 다음과 같다.

     

    <표2> 구조분석

     

    A: 예수께서 이방지역인 갈릴리 호수에 이르르심(31절)

    B: 사람들이 예수께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나와 고쳐주심을 간청함(32절)

    C: 예수께서 그 사람의 귀와 혀를 만지심(33절)

    D: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 \에바다\라고 외침(34절): \열려라\

    C\: 예수님에 의해 그의 귀와 혀가 고쳐 (열려)짐(35절)

    B\: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침묵을 명하지만 그들은 선포함(36-37 a절)

    A\: 예수께서 이방지역에서 메시아의 사역을 성취하심을 사람들이 선포함(37 b절)


     

    위의 교차-병렬적인 구조분석에서 보는 대로 이 단락의 메시지의 중심은 예수께서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 \에바다\(열려라)라고 외친 행동에 집중되며 끝으로 사람들이 놀라움 가운데 외친 말씀(사 35:5-6)은 이 사건의 의미를 보다 잘 깨닫게 해 주는 결어로서 충분하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이적을 베푼 주인공이신 예수님과 함께 본 사건에 주된 참여자로서 역할을 하는 인물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고침 받은 사람이 아니라) 익명의 사람들이란 점이다. 특별히 독자는 여기서 비록 익명이지만 사건의 참여자로서 나온 이 사람들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함으로써 이방선교의 중요한 교훈을 받을 수 있다.

    한 마디로 이 사건을 통해 독자는 이적을 베푸신 예수님이 종말론적인 메시아이심(사 35:5-6)을 간파할 뿐만 아니라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예수께 데리고 나와 고쳐주심을 간청하며 또한 이 놀라운 사건을 전파하는 자들로서 그것도 이 이적 사건이 메시아의 사역임을 알리는 익명의 이들의 모습을 통해 복음 전파자의 모습을 배우게 된다.

     

    2. 사건의 배경(31절)
    갈릴리 주변의 모든 이방지역들(두로, 시돈, 데가볼리, 갈릴리)에 대한 언급은 사건이 이방지역에서 일어났음을 암시한다. 특히 갈릴리 호수는 페니키아와 데가볼리의 이방지역들을 연결하는 중심된 장소인 이방선교의 부름의 장소(\이방의 갈릴리여!\[사 9:1-21])로 간주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유대에만 국한된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의 메시아이시다.

    그를 통해 \흑암에 행하던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진 땅]에 앉은[거하던]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사 9:2, 마 4:16).

    이방지역에서의 예수님의 이와 같은 사역은 우리(교회)의 사역(복음전파)의 규범이 된다. 이곳 이방 지역인 갈릴리에서 일어날 치유이적은 그곳 사람들을 통해 복음이 이방세계에 널리 퍼져나갔음을 보여 준다(36절).

     

    3. 사건 이해
    앞에서 살펴본 대로 본문은 이방지역에 일어난 이적기사이다. 이미 구조분석에서 관찰하였던 대로 본 이적기사의 특이한 점은 제자들이나 치유받은 사람이 아니라 사건의 주인공인 예수님과 익명의 사람들(본문에서는 \그들로\ 묘사됨[32, 36, 37절])이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예수께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데리고 나와 고쳐주시기를 간청하였고(32절), 예수께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신 후에 이들에게 침묵을 명하셨지만 이들은 치유사건을 전파하였다(36절).

    그 결과 사람들은 놀랐고 구약의 말씀(사 35:5-6)을 인용하여 종말론적인 메시아의 사역을 선언하고 있다. 우리가 앞으로 관찰하는 대로 이 이적기사에는 이방 선교의 모티브가 잘 어려져 있다.

     

    1)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주님께 데려와 안수를 간청함(32절)
    데가볼리를 지나 이방지역에 해당하는 갈릴리 호수에 이르자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예수께 데리고 나왔다. 마가복음에서 귀먹고 어눌한 자에 대한 고침의 기사는 두 번 나타나는데 하나는 오늘 우리가 다루는 본문의 기사이며, 또 다른 하나는 막 9:14-29의 귀먹고 벙어리 된 귀신들린 아들을 고친 기사이다. 마가복음에서 \눈\과 \봄\과 함께 \귀\와 \들음\에 대한 언급이 반복하여 나타난다(막 4:12; 8:18).

    이 둘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이적 사역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깨달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별히 두 번씩 반복되어 서술된 소경의 치유 기사(막 8:22-26, 10:46-52)와 귀 먹고 어눌한 사람의 치유 기사(막 7:31-37, 9:14-29)는 종말론적으로 도래하는 메시아의 중심된 사역이다(사 35:5-6).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하나님의 계시와 뜻에 대한 무지와 불신앙의 모습을 나타낸다(cf. 막 7:14).
    귀먹었다는 것은 복음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눌하다, 말을 못한다는 것은 그것을 간청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어쩌면 귀먹고 어눌한 육체적 장애는 눈먼 상태보다도 더 열악한 장애라고 말 할 수 있다. 자신의 육체적 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눈초리를 보고 있기 때문에 정신적인 부담이 더 심할 것이다. 그리고 들을 수 없는 장애는 구전 사회에서는 보다 심각한 장애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들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말로 요청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도움(예수께 데려와 간청함)이 없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참여할 수가 없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이 이 사람을 주님께로 데리고 나왔다.

     

    ● 귀와 들음에 대한 마가의 강조
    이미 우리는 4장의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귀\에 대한 언급과 함께 \들음\에 대한 언급이 매우 강조되었음을 주지하였다(\들으라\[4:3];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으라\[4:9, 23];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4:12]; \말씀을 들을 때에[4x]\[4:15, 16, 18, 20];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4:24]).
    마가복음에서 들음은 피상적인 들음이 아니라 주의 깊고 지속적인 들음 즉, 영적 깨달음을 지닌 들음을 의미한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7:14); \아직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8:17-18);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막 8:21). 마가복음은 제자들이 바로 이러한 상태에 있음을 보여준다(막 8:17-21). 특별히 수난의 예언을 들려주어도 그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베드로(8:31-32)나 변화산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9:7)라는 선언은 그들의 오해와 무지에 대하여 각성을 촉구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산 아래에서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이 들린 아들을 고치신 이적기사(9:14-29)에서도 믿음이 없는 세대가 곧 이러한 모습인 것을 보여주며 주님은 이러한 세대에 오셔서 그를 구원하셨다.

    특히 마가복음에서의 \들음\은 단순한 외관상의 들음이 아니라 영적인 올바른 이해, 깨달음과 순종을 포함하는 신앙적 반응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도 사람들은 귀먹고 어눌한 자에게 나타난 육체적 치유에 대하여는 놀라지만, 영적 치유에 대하여는 아무런 깨달음이 없다.
    이사야 선지자는 눈멂과 귀 먹음을 영적인 의미로 자주 표현하였다(사 6:9-10; 29:18; 32:3; 35:5-6; 42:18-20, 43:18; 50-5; cf. 렘 5:21; 6:10; 겔 12:2; 슥 7:11; 행 7:51; 롬 11:8). 참된 귀 먹음은 귀가 있어도 영적으로 듣고 깨닫지 못하는 것(막 4:12; 8:18)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귀먹고 어눌한 자의 모습은 곧 복음에 대하여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는 존재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복음을 바로 들을 수가 없고(귀 먹고), 복음에 대하여 올바로 반응할 수도 없다(어눌함).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성령)의 역사 없이는 그들이 구원의 자리에 나올 수가 없다. 이런 까닭에 그를 주님께로 데리고 나온 사람들의 행동은 오늘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복음전파의 모습이기도 하다.
    특히 이들이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예수께 \데리고 나와(fe,rousin) … 간구하다(parakalou/sin)\라는 표현은 현재 시제의 동사(행동의 반복과 지속성을 의미)로 묘사되었는데 그것은 이 사람의 상태가 얼마나 무력하고 긴박한 것인지를 보여준다(Gundry 1993:383).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후에 우리가 논의할 것이지만 마가복음에서 귀먹은 모습이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것은(막 8:17-21, 특히 19절) 특이하다.
    비록 제자들은 귀를 가지고 있지만 들을 수 없고 기억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곧 영적으로 올바른 깨달음이 없다는 의미이다. 이들에게도 참된 \에바다\의 이적이 필요하다. 이러한 귀먹고 어눌한 모습은 곧 커다란 핍박과 환난가운데 있는 마가의 독자들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한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 아니 우리의 모습이다.

    성경에서 자주 영적으로 귀가 먹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하여 지적하는 것을 본다. 이 점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사단에 의하여(길가처럼), 환난과 핍박으로 인하여(돌밭처럼), 그리고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심으로 인하여(가시떨기처럼) 우리는 귀가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 깊게 듣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듣지 못하는 자가 아닌가?
    사탄의 유혹 속에 그리고 죄와 세상과 재리와 욕심에 빠져있으면 들어야 할 귀가 있어도 지속적으로 올바른 깨달음 가운데 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올바로 말하지 못하는 자(어눌한 자)가 된다. 분봉왕 헤롯이 그러하였고(막 6:14-29), 길에 예수께 나아온 한 사람(부자 청년 관원)이 그러하였고, 베드로가 그러하였다.
    전에는 잠시(어느 정도) 달게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듣지 않고 있다. 귀를 막고 있다. 삼가 듣기를, 지속적으로 듣기를 멈추고 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경고의 말씀에 귀 기울이도록 하자. 아래의 말씀들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된다.

     

    \사람은 무관히 여겨도 하나님은 한번 말씀하시고 다시 말씀하시되 사람이 침상에서 졸며 깊이 잠들 때에나 꿈에나 밤의 이상 중에 사람의 귀를 여시고 인치 듯 교훈하시나니 이는 사람으로 그 꾀를 버리게 하려 하심이며 사람에게 교만을 막으려 하심이라\(욥 33:14-17)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저희의 독은 뱀의 독 같으며 저희는 귀를 막은 귀머거리 독사 같으니 곧 술사가 아무리 공교한 방술을 행할지라도 그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 독사로다\(시 58:3-5).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 듣게 하시도다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열으셨으므로 내가 거역지도 아니하며 뒤로 물러가지도 아니하며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수욕과 침 뱉음을 피하려고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4-6).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읽어서 듣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도 들어야 하는 것이 있다. 지도자와 통치자는 국민과 선지자의 소리를, 경영자는 노동자의 소리를, 선생은 학생의 소리를, 남편과 남자는 아내와 여자의 소리를, 부모는 자녀들의 소리를, 노인은 어린이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정말 들을 귀를 가진 자는 복되다.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을 대적하는 자들이 귀를 막고 달려드는 것을(행 7:57) 본다. 성경은 악인을 \귀를 막는 귀머거리 독사\(시 58:4-5)로 표현한다. 열려진 귀, 듣는 귀가 복된 귀다. 주님은 오셔서 우리의 귀를 여시고 입을 여신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사역이 귀를 여시는 사역(욥 33:14-17)이다. 이러한 \에바다\의 이적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결코 우리의 귀가 열릴 수가 없다. 여기의 귀먹고 어눌한 자가 우리가 아닌가? 사탄은 세상의 가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어둡게 한다(막 4:15; 9:25).

     

    ●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주님께 데리고 와 간구함: 선교 모티브가 나타남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혀가 있어도 말하고 간청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수두룩하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들을 주님께 데리고 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마치 그 곳의 사람들처럼 주님께 고쳐주시기를 간구해야 한다.

     

    3) 예수님의 이상한 고침(33-34절)
    귀먹고 어눌한 사람에 대한 예수님의 치유행동은 특이하였다(cf. 막 8:23).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자신의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아람어로 \에바다\(열려라)라고 명령하셨다. 여기에 보여진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들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서 손가락을 양 귀에 넣은 것은 그것이 열려야 함을 의미하며 손에 침을 뱉어 그의 혀에 대심은 굳어진 혀가 풀려짐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며 탄식하심은 일종의 기도의 모습(cf. 6:41)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귀먹고 벙어리가 된 장애자인 그 사람에게는 마치 수화와 같은 의사소통의 기능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을 통하여 예수님은 그가 치유 과정에 있음을 깨닫도록 애썼다. 특히 무리를 떠나 이 사람을 따로 데리고 나간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철저히 자신의 인기보다도 고침 받아야 할 사람에 대한 배려와 치유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점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만 연연하여 이적적인 쇼를 베풀고자 애쓰는 소위 오늘날 신앙의 치유자들의 모습과는 매우 대조적인 모습이다.

     

    4)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풀려 분명히 말함(35절)
    그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놀라운 이적(귀가 열리고 혀가 풀림)은 어두움의 세력 가운데 있는 죄인들이 가져야 할 종말론적인 구원임을 의미한다. 이사야(35:5-6)와 에스겔(24:27)이 말한 종말론적인 구원(재창조[창조의 회복]의 사역)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금 이방인들 가운데 성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 4:11에 의하면, 이러한 치유는 신적인 능력에 의해 되어지는 것으로 이 사건은 예수가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이적에 크게 놀라며, \그가 다 잘 하였도다(cf. 창 1:31). 귀머거리도 듣게 하고 벙어리도 말하게 한다\(37절)라고 외침으로써 예수님에 의한 종말론적인 메시아의 구원사역이 이방의 땅에 일어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그 날에 네 입이 열려서 도피한 자에게 말하고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이와 같이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겔 24:27).

     

    5) 감출 수 없는 예수님의 사역(36절)
    예수님의 사역(복음)은 감출 수 없다. 우리에게 은혜로 찾아오신 복음은 모든 인류가 들어야 할 메시지이다. 놀라운 은혜로우신 이적을 경험한 그들은 경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전파하였다. 복음의 은혜로우신 축복은 나 혼자만 간직할 축복이 아니다. 나눌수록 커지는 축복이다. 인간의 것들은 나눌수록 적어지고 감출수록 썩어 없어지는 것이지만 하늘나라의 것은 나누고 퍼 줄수록 커지는 것이다.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본 것처럼 나눌수록 풍족히 먹는 것이 기독교의 축복이다. 움켜잡아야 될 것이라면 그것은 썩어 없어지는 것들이다. 우리에게 예수 믿는 보람이 없기 때문에 주신 축복을 움켜쥐려고만 함으로써 우리는 초라한 삶을 산다. 사랑과 은혜와 축복은 나누어줄수록 커지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애, 목자가 양들을 위해 자신을 주심으로 풍성히 먹이셨던 모습으로 보여 준 한 알의 밀 알의 교훈이 그것이고 바울의 \주는 자가 복되도다\(행 20:35)고 한 말씀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와 같은 풍성한 삶을 경험하길 원하는가?

     

    4. 설교의 단상
    과연 귀가 있어도 듣지(깨닫지) 못하고 혀가 있어도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자가 누구인가?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러하다(소경이고 귀머거리)고 말하고 있다(막 8:18). 마가복음의 저자는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을 부각시키면서 지금 고난과 핍박 속에 있는 마가의 청중 역시도 예수의 바른 신분과 가르침을 깨닫지 못하고 무서움 가운데서 복음을 전파하지 못하는 그러한 모습이 아닐까 라고 넌즈시 책망하고 있다. 어쩌면 오늘의 우리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아닌가? 귀가 뚫리고(깨달음) 혀의 맺힌 것이 풀려 명확하게 말하고 복음을 전파할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에바다\의 이적은 오늘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 간구해야 할 이적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 때문에 예루살렘과 갈릴리로부터의 적대감과 반대로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전파하지 못하도록 경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구원에 대해 \더욱 널리 전파하는\ 데가볼리 지역의 이름 모를 사람들은 이 단락을 통하여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들이다. 이들은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주님께로 데리고 나와서 고쳐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우리 역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