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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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초기 설교
신앙의 위력 (요한 1서 5:4)
오건영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요한1서 5:4)
이에 기록한 4-5절 말씀은 몇 마디 되지 아니하는 간단한 문구이나, 사도 요한의 일생을 통하여 체험한 믿음의 결정이라 아니치 못하겠다. 후배되는 우리들의 믿음의 경험으로도 동의치 아니할 수 없는 귀중한 진리인 것이다.
현세는 과학만능을 주장하나니 과연 그렇다 할 수 있다. 과학이 모든 인간에게 정확한 지식을 주는 것은 사실이나, 과학의 효능은 비유컨대 적적한 광야, 쓸쓸한 밤에 조그만 등불을 가진 것 만한 감이 없지 아니하다. 과학 그것만으로는 인간에게 완전한 휴식과 철저한 위안을 주지 못한다. 고로 과학 이상 종교의 힘에 의지하지 아니하면 실패와 고독을 면할 수 없다. 종교의 힘을 의지하는 때는 믿음이란 것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인가?
믿음의 주체인 인간과 믿음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과 관계함을 믿음이라 한다. 그런고로 진리가 충만하시고 능력이 풍부하신 하나님을 사람이 의지할 때에 비상한 힘을 주신다.
1. 믿음으로부터 얻는 첫째 힘은 사람의 마음의 통일이니
사람은 언제든지 마음의 통일을 얻지 못하여 좌우일치함을 얻지 못한다. 그런즉 좌우일치가 못되게 하는 원수는 곧 정욕이다. 이 정욕이 마음의 도리(혹 선)를 어지럽힌다. 동양의 성인 주자가 말씀하시기를 “인심(人心)이 오직 위태하고, 도심은 오직 미비하다”함이 이를 이름이요, 사도 바울도 말씀하시기를 “이제 내가 한 법을 깨달았으니 곧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할 때에 악이 함께 있도다(롬8:21)”하심이 이를 가리킴이다. 또는 우리들의 믿음의 경험으로 볼지라도 마음을 통일하지 못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고로 인간은 고상한 사상과 주의가 있다 할지라도 실행할 힘이 없을 뿐 아니라 곧 그 방향을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가령 말하자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부모에게 대하여 효도를 다하고, 사회를 위해 힘을 다하고, 또는 죄악이 가득한 함정 속에서 신음하고 고통하는 인간을 위하여 철두철미하게 시종 일관주의를 가지고 완전히 구원하려 하는 큰 뜻을 품게 될 때에도 있고, 어떤 때는 전 세계 인류를 위하여 내 몸을 죽여서라도 구하는 일을 하려는 정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월한 이상과 위대한 목적과 아름다운 주의가 있는 동시에 죄와 정욕이 이를 눌러서 실행할 능력이 약하게 된다. 약할 뿐 아니라 소멸되는 것이다. 어떠한 때에는 길을 가다가 길가에 앉아서 돈 한 푼을 구걸하는 걸인에게까지 동정치 아니하는데 이른다. 그리하여서 인생이 매일 아득바득하며 살아가는 모양을 본다면 국가와 사회와 인류에 대하여 구원을 한다는 것보다 도리어 손해를 준다.
다시 말하면 남을 유익하게 한다는 것보다 남을 해하여 나를 이롭게 하고 남의 생명을 죽여 나의 생을 보충하는 일이 없지 아니하다.
그리하여서 사람의 마음에는 늘 도(道) 정(情)과 선(善)과 악(惡)과 신의 지시와 악마의 반대가 착잡하므로 언제든지 전쟁의 기분이 농후하여 평화가 없고, 용기가 없고, 희망과 향상이 없고, 암흑 중에서 우울하고 참담하게 고민하며 지내는 것 뿐이다. 방루 선생도 “나를 이 괴로운 가운데서 구할 자 누구냐”하고 탄식하였다.
그러나 믿음의 힘이 우리 마음에 와서 부딪치는 때에는 먼저 우리 약한 병을 낫게 하며 주의와 목적을 용감하게 관철할 수 있다. 동양 성인 맹자께서도 “천군이 태연에게 백제종령이라”한 말이 있는데, 천군 곧 마음이 태연하면 백체가 강령하고, 백체가 강령한 즉 건전한 사업을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2. 믿음이 주는 둘째 위력은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힘을 폭발(爆發)케 한다.
바울 선생 말씀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이 여기지 아니하나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하였다. 이 말씀을 바울의 학식과 경험과 그의 깊은 생각과 그의 수양을 배경으로 하여 해석한다면 뜻이 깊은 큰 증거인 것이다.
저는 세계 형편을 모르는 자고 자만한 유대인도 아니요, 시대 문화를 모르고 자기의 숭배하는 종교만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무식한 이도 아니요, 저는 세계도 알았고 헬라문화를 알았고, 로마 정치의 뛰어남도 알고, 철학과 과학과 예술의 위대함도 알았다. 그런고로 복음을 철학 사상에 비쳐 볼지라도 복음적 우주관이 우월하고, 철학적 학리에 비교할지라도 복음적 진리가 확실하고, 현세에 있는 모든 종교와 비준할지라도 고상하고, 세상에 있는 유명하다는 아무 것에 비할지라도 복음의 힘이 절륜됨을 절실히 깨닫는다. 그런고로 그는 담대히 “내가 복음을 부끄러이 여기지 아니하나니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진리의 일구(一句)를 발하였다. 복음은 철학과 같이 단순한 사상체계도 아니요, 인간의 노력으로 조직된 문화와 같은 것도 아니요. 다만 하나님의 힘으로 된 것이다. 그런고로 인간에게 회개와 믿음과 위안과 환희와 용감과 희망과 사랑을 철학과 윤리가 주지 못하고 다만 복음의 힘으로 주는 것이다. 복음이 이 힘을 줌으로 하나님의 힘인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복음을 안다는 것이 만족치 아니하고, 복음을 가졌다 배웠다 들었다 함이 복음의 위대한 능력을 발휘함이 아니요, 다만 복음의 능력을 폭발함에 효력이 생기고 권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즉 복음을 접촉하면 폭발케 하는 것은 무엇이냐. 곧 믿음이다. 복음을 믿음으로 받고, 믿음으로 외우고, 믿음으로 연구하고, 믿음으로 해석할 때에만 위대한 능력이 터져 나와서 사람의 마음에 굳어진 습성을 깨뜨리고 죄악의 뿌리를 멸하여 중생의 은혜를 받고 성결에 이르러 완전한 구원을 얻는 것이다.
비하면 폭발탄 중에 위대한 폭발탄이 장치되었을지라도 뇌관의 작용이 아니면 폭발되지 못하며 그 성능을 나타내지 못한다. 복음도 이와 같이 복음 가운데 탁월한 세력이 있을지라도 폭발탄에 뇌관과 같은 믿음이 없으면 복음에 감추인 능력을 나타낼 수 없다. 다만 믿음으로만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복음의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3. 믿음이 주는 세째 위력은 풍부한 생산력이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대접하는 자는 그 이름을 믿는 자라. 권세를 주셔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느니라” 하였다. 인간의 오성(悟性)이 황란하여 썩지 아니할 하나님의 영광을 변하여 썩을 사랑과 금수와 곤충의 형ㅅ아의 우상으로 대신한 인류를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함은 혈기로 되는 것이 아니요, 정욕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다만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과거와 현재를 통하여 주의 성도의 자격을 가진 자는 곧 믿음의 산물이다. 주 예수는 열 두 사도를 믿음으로 낳으시고, 열두 사도는 그 믿음의 계통으로 개인으로는 스데반 같은 성도와 여러 신자를 낳았으며, 교회로는 예루살렘과 안디옥 등 여러 지방에 수다한 교회를 낳았고, 스데반의 순교 당시에 그 놀라운 믿음이 바울에게 신과 접촉할 동기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바울 선생은 이방 교회를 위시하여 다수의 신자를 낳았다. 또는 미국에 있는 교회를 위시하여 다수의 신자를 낳았다. 또는 미국에 있는 교회를 볼 때에는 청교도의 믿음을 연상치 아니할 수 없고, 아프리카 교회를 볼 때에는 리빙스턴의 용감한 믿음을 추억할 수 있고, 조선에 있는 장로교파의 천여 교회와 삼십여 만의 신도를 볼 때에 경성과 평양과 각처에 있는 교회 사업으로 건설된 교육, 의료 등 모든 기관을 볼 때에 故 원 두우 박사와 마포삼열 박사의 믿음의 산물이라 아니치 못하겠다.
이와 같이 참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어느 때 어느 곳을 물론하고 그 생산하는 열매가 풍부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무엇을 낳았으며 얼마나 낳았습니까. 물론 믿음의 주체자인 그 인물에 대한 인격대소를 따라 그 장단과 지혜있고 어리석음을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을 것이나 전연 무생산자라 하면 반구제기(反求諸己)할 필요가 있는 줄 생각한다. 그리하여서 내가 가진 믿음이 병적이면 건전한 데로, 나의 믿음이 소박한 데 있으면 정연한 데로, 나의 믿음이 의식적이었으면 신비한 데로, 나의 믿음이 이기적이었으면 신비한 데로, 나의 믿음이 이기적이었으면 애타적으로 방향을 속속히 전환하여 위로 주시는 하나님의 새 힘을 받는 대로 낳고 또 낳아서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풍성하고 찬란하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산물을 하나님께 바치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4. 믿음이 주는 넷째 위력은 권세를 이긴다.
예수 말씀하시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장 25-26절). 인간의 죽음은 가장 확실한 것이라 이전의 사람이 죽지 아니한 이가 없음과 같이 현재 사람도 한번 죽는 것은 명확한 일이요, 미래의 사람도 죽으러 오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의 죽음은 태양의 출몰과 같이 확정적인 것이니 한번 동편으로 솟은 태양은 서편으로 떨어질 것은 의심 없는 사실이다.
이같이 사람도 출생과 동시에 죽음이 따르는 것이다. 사람의 빈궁은 면할 수 있고, 이웃 사람의 학대는 면할 수 있으나 죽음의 압박은 누구나 면치 못한다. 그런고로 왕후장상도 재자인가인도 영웅호걸도 사망 앞에는 머리를 숙이고 항복치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죽음의 내습은 돌발적이요 강제적이다. 그런고로 혈기 왕성하여 전도양양한 청년도 이 독수에는 복종하고, 사회와 국가를 위해 심신을 바친 지사도 삽시간에 유명지경에 격하게 된다.
죽음은 누구나 무서워하지 아니할 수 없는 인간의 강적이다. 그런고로 영웅 진시황도 이를 면하려고 노력하였고, 호걸 한무제도 이를 위하여 구선의 과업을 작하였다. 이와 같이 인간이 다 각각 타고난 죽음을 우연한 일로 생각하여 일생을 무의미하게 지내다가 최후를 고한다면 이런 불행이 다시 없을 것이다.
또는 죽음뿐 아니라 죽음이 오는 동시에 강렬하고 공정한 심판이 있음은 면치 못할 조건이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하였다. 이것이 일생 일대를 통하여 확정적으로 종점에 이르는 프로그램이다. 또는 인간은 죽은 후라도 마지막은 아니니 그리스도께서 심판을 집행하여 판결언도가 있은 뒤에야 영생과 영사가 결정되는 것이다.
죽음을 무서워할 것이 아니요. 재판에 기일을 전전긍긍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기다릴 것이다. 그런데 사후 심판의 재료는 금세에 잇을 동안에 지은 생애, 곧 행위 그것이다. 그런고로 바울은 죽음이나 심판이나 두려워 바 없다고 단언하였다. “사망아 네 이김이 어디 있으며, 사람아 네 사는 것이 어디 있느냐”하였다.
인간의 운명은 사후 심판에 일막을 지낸 뒤에 영원한 생이 개척될 자도 있고, 영원한 죽음이 닥칠 자도 있음을 분명히 안 바울은 죽음을 무서워하는 이보다 어느 의미로는 죽음을 기다렸다고 할 수 있다. “죽는 것도 유익이 된다”(빌 1:21)
5. 결말
예수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겨자씨만 할지라도 산을 옮기겠다”하시고, 어떠한 때에는 제자들을 향하여 지금은 “너희가 믿느냐”하시고, 어떤 때에는 세상을 향하여 “믿지 아니하는 세대여” 하시고, 어떤 때는 병자를 향하여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하셨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믿음을 가지시고 세상을 논평도 하시고, 제자들을 훈계하시고, 병자를 위로하셔서 믿음 만능주의를 나타내셨다. 고로 믿음 아래는 환난, 곤고, 위험, 칼 아무 것이라도 그 세력이 말살되는 것이다. 이러한 보화를 가진 우리는 그것을 잘 이용하여 먼저 병든 자신을 고치고 죄악에 침륜된 사회를 개혁합시다.
장로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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