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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그는 왜 십자가를 지셨나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마 16:21-24 | 설교자: 김광우

    본문

    21.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게 될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22. 이 말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간했습니다. 23. 그때에 예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2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마태 16:21-24)

    1. 이해 곤란한 패러독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경에 이르렀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들을 대로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크게 감격하셔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하시고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니리”하시고 “너는 땅 위에서 매고 푸는 특권을 가지게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신앙고백을 할 때에 베드로는 하나님의 대언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에 보면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하고 기록하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말씀은 ‘이때로부터’란 말과 ‘비로소 가르치시니’란 말씀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하면 제자들의 ‘예수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확실한 신앙 고백을 들으신 후에야 처음으로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은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기의 사명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서만 완성할 수 있다는 예수님 자신의 본래의 신념이 여기서 처음으로 표현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고로 십자가의 고난은 우연히 부딪쳐서 어쩔 수 없어서 억지로 당한 것이 아니요, 주님께서는 의식적으로 자진하셔서 이 고난을 안으시고 죽음을 선택하신 것으로 믿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경륜이시기 때문에 당신은 이꺼이 이길을 택하여야 된다고 확신을 하셨습니다.
    그 증거로는, 1. 십자가의 죽음 후에는 부활이 반드시 온다고 믿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영원한 생명은 결코 무덤 속에 갇히어 있을 수 없고 반드시 무덤을 깨뜨리고 승리의 부활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하신 것입니다.
    2. 베드로가 간하여 말하기를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하고 진언할 때 예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남의 일은 생각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하고 베드로를 ‘사단의 대언자’ 라고 꾸짖었습니다.
    3,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 그 다음으로는 요한복음 18장의 기사 중에 로마 병정들이 기드론 시내 건너편에서 예수를 찾을 때에 그 병정들 앞에 자진해 나가셔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병정들의 대답이 나사렛 예수라고 하니까, 서슴지 않으시고 “내로라”라고 당신의 신분을 밝히시고 그들에게 의식적으로 붙들리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에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복종의 행위요, 인간 구원을 완성하는 구경적(究竟的) 방법으로 믿으시고 자진하셔서 취하신 것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왜 십자가의 고난을 자취하셨을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 위엄과 권능이 인간의 손에 의하여 여지없이 깨지고 멸시와 조소를 받는 참패의 비극의 표적이 되는 십자가의 고난을 자취하셨다고 하는 데에는 얼른 이해하기 곤란한 문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리 마옵소서. 이것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하였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일이나 유대인들의 대망하는 메시야 왕국을 도래(到來)케 하는 일은 그의 권능과 영광 가운데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데 하필 가장 부끄럽고 처참한 십자가의 고난의 방법을 택하실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이 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확실한 해답과 또 그 해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될 때에 그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사상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이상적 정치적 메시야관을 거부하셨습니다. 당신의 천국은 권능이란 힘에 의하여 건설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애굽과 바벨론 사람들의 생활과 역사 속에서는 이 이상적 왕국관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상적 왕국은 이상적 왕과 같이 올 것인데, 그는 이상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굉장한 능력(힘)을 발휘한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세상의 평화는 싸움에 의거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정치가들은 힘에 의하여 평화를 창조해 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힘이든지 인간의 힘이든지 이 힘에 의한 천국의 건설을 거부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는 도덕주의자들의 천국관을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선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고 힘이 없는 순수한 선은 인간의 도덕적 결단에 의하여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주의자들의 생각과도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유법주의를 비판하시고 율법 지상주의자들인 제사장과 서기관들을 공격하신 것은 그들의 형식주의와 위선적인 생활 때문만은 아닌 것입니다. 니이버의 말과 같이 인간 정신 속에 있는 죄에 묻힌 자기 모순은 도덕적 행위에 의하여 극복될 수 없으며, 모든 도덕적 행위는 아무리 고원하고 순수한 것이라 하더라도 죄에 묻힌 자기 모순을 드러낼 뿐인 까닭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를 지신다는 것은 하나의 큰 비극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심하시고 자진하여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걸어 가셨다고 하는 데에 여기 중대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문제의 초점은 인간의 죄의 처리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교에서는 인간에게 불안과 고통과 죽음의 심판이 있는 것은 「죄」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죄가 인간 생활에서 완전히 처리되지 않고서는 인간에게 평화도 없고 행복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평화와 또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가 깨진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인 것입니다. 평화의 회복 또는 평화의 유지는 죄의 문제가 처리될 때에만 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죄가 처리되는 것이냐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처음으로 천국 복음을 선포하실 때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우니라”고 하셨습니다. 죄는 회개를 통하여서만 처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회개의 눈물을 보시고는 그 죄를 용서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면 죄는 처리되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지면 평화가 조성되는 것입니다. 니이버는 말하기를 “회개를 통하지 않고 힘에 의해 평화를 창조한 자들은 순수한 평화를 창조했다고 망상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예수의 천국관을 바로 이해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자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인간의 죄의 용서를 하나님께 청하는 인간 회개의 대표적 영원의 표상(表象)이 되는 것입니다. 털끝만큼도 죄가 없으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인간의 죄의 책임을 스스로 걸머지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달게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용서를 청하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의 모습을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시는 예수에게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 앞에 선 인간이 자기의 죄 때문에 예수께서 저 죽음을 당하신 것을 깨닫고 자기의 죄를 회개할 때에 그곳에 천국은 도래(到來)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이 소식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영광의 아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는 죄를 정복하기 위하여 힘(권능)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쓰셨습니다. 죄를 힘으로 정복하지 않고 사랑에 의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한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기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죄는 인간의 자각에 의한 참된 회개에 의하여서만 정복이 되는 것이요, 힘에 의하여서 정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비극적인 십자가의 죽음을 자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조건 없이 쏟으시는 아가페의 사랑을 표증(表證)하시기 위한 까닭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비극적인 십자가의 도를 통하여 이 세계 안으로 돌입(突入)해 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요 기적입니다. 이 신비는 지식으로 이해가 되는 것이 아니요, 믿음으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3.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본받아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자취하실 각오를 가지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지마는 잡히시기 전에 겟세마네 등산에서 기도 하실 때에 “내 아버지시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래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셨습니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라고 애원하신 말씀을 보아서는 예수께서 몹시 야해지시고 죽음을 두려워하신 듯이 보여집니다. 그러나 여기에 죽음의 인간성을 솔직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 반면에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을 성취하시기 위하여서는 당신이 십자가의 고난을 달게 받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사명감을 무서운 죽음을 앞에 놓고서도 잊지 않으시고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신 데에 예수님의 위대하심이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참된 모습(神性)이 여기에 보여집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크게 배우고 본받는 바가 있어야 참된 주님의 제자로서의 본분을 다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집니다. 나는 그 모습이 부럽습니다. 참으로 본받고 싶습니다. 그 솔직하시고 담대하신 모습, 사명감에 타는 일편단심 때문에 청춘의 싱싱한 생명을 아낌없이 십자가상에 매어 달리려 내던지셨다는 그 크신 용기와 결단력 앞에는 도리어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의 인간성을 무시하거나 또는 가볍게 생각하여 그의 신성에 편중(偏重)하는 생각을 아주 위험시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도의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무시해 버릴 우려가 있는 까닭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무섭고 아프고 괴롭고 쓰라린 것이지만, 사랑과 책임․정신 때문에 꼭 받으셔야 된다고 자취하신 여기에 십자가의 생명과 가치가 빛나는 것입니다. 인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가 되신 증거는 십자가의 고난을 자진해서 받으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우는 것은, 가치(價値)는 고난을 동반한다는 것과 사명 완수는 죽음을 각오할 때에만 있을 수 있는 일이란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누가복음 32장 64절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신 말씀과 요한복음 19장 30절에 “다 이루었다”고 하신 최후의 말씀을 간단히 더듬어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과 생활은 전부가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요 또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철두철미한 신앙적 태도는 인간의 영원한 표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모습을 바라보는 백부장과 구경꾼들은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눅 23:47),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라고 감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최후로 남기신 말씀 중에 영원히 살아서 우리의 마음을 감격시키는 또 하나의 말씀은 “다 이루었도다”하신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인자 예수에게 있어서는 비극적 불행이었습니다. 인생의 절반도 못 사시고 비극적인 죽음으로 인생의 막을 닫는 참패의 역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여한(餘恨)이 없는 만족한 말씀으로 “다 이루었다”하시고 운명하시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의 생의 완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이 되신 것입니다.
    평화를 찾아서 이 세계는 고민하고 있습니다. 힘에 의한 평화의 창조 운동은 더 큰 문제와 고민 속으로 인간을 이끌어 넣을 뿐입니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20년의 세월을 허비하면서도 아직도 제대로 된 살림을 못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회개의 희생적 봉사의 생활을 목적으로 하는 십자가의 정신이 세계와 이 나라의 지도자들의 정신 속에 잉태되어 있지 아니한 까닭입니다.

    감리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