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고(人間苦) 와 십자가(十字架)의 도(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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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초기설교
인간고(人間苦) 와 십자가(十字架)의 도(道) (마 11:28-30)
백병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11:28-30)
1. 십자가의 도는 도덕이 아니오 철학이 아니다
어떤 종교와 같이 현황한 신화나 심오한 철리로 된 것이나 미묘한 문학이 아니다. 십자가의 도가 신학도 아니오, 철학도 아니오, 문학도 아니면 그 무엇인가? 묻노니 기독교 성경 가운데도 아가ㆍ애가ㆍ시편 등 아름다운 문학이 있고, 잠언ㆍ전도사ㆍ욥기와 신약의 서신과 같은 인생철학이 있고, 구약의 선지사의 정의를 부르짖은 높은 도덕과 신약의 산상수훈 같은 뛰어난 교훈이 있고, 로마서같은 훌륭한 신약이 있는데 기독교의 중심문제인 십자가의 도가 도덕이 아니오, 문학이 아니오, 철학이 아니라 함은 무슨 까닭인가. 과연 인간이 가진 도덕 가운데 성서 이상이 없을 것이며, 성서 이상의 좋은 문학이 없을 것이며, 성서 이상의 깊은 인생철학이 없을 것이다. 그러하나 십자가의 도는 그 근본의 의가 이것들이 아니다.
십자가의 도는 주 예수의 죽음에 나타난 직접 행동이다. 비겨 말하자면 어떤 적국이 내 나라를 침략코자 할 때 조약문을 말하고 국제공법을 말하여 앉아서 담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실제로 곧 직접 행동으로써 그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날카로운 무기를 손에 들고 적군과 싸워서 붉은 피를 흘려 나라를 구한 용장의 행동이다.
십자가의 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일하실 때에 도덕으로나 문학으로나 철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 세상에 몸소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싸워 이기신 실령적 직접 행동이란 말이다. 그런즉 이제 주 예수의 실제적 직접행동이 인간고(人間苦)를 해결함에 어떠한 관계를 가졌는가?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내게로 오라 하심은 인생의 쓰라린 고통을 깊이 동정하신 것이거니와 인간의 현실을 철저히 맛본다면 누구나 동감일 것이니 예수께서만 인간고를 보신 것이 아니라, 모든 성현의 관찰들도 마찬가지로 이것을 보았던 것이다. 그런고로 것들은 인간고를 본 동시에 또한 해결책까지 강구하여 보았다.
가령 말하자면 일면에 선이 있고 그 반면에 악이 있음을 본 유교에서는 악에 빠진 인간을 구함에는 개과천선(改過遷善)에 있고 개과천선의 길은 교(敎)와 치(治)에 있다 하였다. 그런고로 가르치기 위하여 예문 철학을 지었고 다스리기 위하여 정치제도가 있다. 그러나 예법이 능히 인간의 죄고를 해결은 고사하고 더 큰 고민을 줄 뿐이었다.
불교도 또한 인간의 죄고를 인정하였고 이를 구원할 방책에 대하여는 인간의 죄고는 정욕에 있고 정욕의 유발체는 육신이라 하여 죄고의 해탈은 고행극기에 있다 하였나니 이는 육고로써 죄고를 극복한다는 의미나 대개 사람의 범죄의 사단이 육에만 있지 않고 마음으로 하는 자이니까, 마음으로 짓는 일을 고행으로 극복하기는 심히 어려운 일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씨도 또한 인간고를 절실히 느꼈다. 그리하여 그 방책의 결론으로 자살문제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후인의 비판을 면치 못하였나니 일렀으매 쇼펜하우어씨의 인간고에 대한 해결론은 마치 무지한 아버지가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학질에 다량의 금계랍을 먹여 죽인 후에 말하기를 『내 아들이 죽기는 하였지만 학질이 떨어졌으니 시원하다』함과 같다 하였다. 그렇다, 인간 만사가 살고자 하니까 이것 저것 하지, 인간의 마지막이 죽음이라 하면 다시 무슨 문제가 있으랴?
그러면 인간고를 해결하자면 먼저 인간고가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다. 이제 인간고를 알기 쉽게 분석한다면 하나는 자연고(紫煙苦) 또 하나 인위적고(人爲的苦) 이다.
대개 자연고란 것은 석가가 말한 바와 같이 생로병사요, 인위적 고란 것은 사람의 악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으로 오는 인간고 곧 생로병사에 대하여는 석가시대에 있어서는 문제였지만 오늘날과 같이 기정적 자연법칙으로 시인하는 시대에 와서는 하등 문제삼을 가치가 없다.
그러나 인위적고에 대하여는 문제를 중대시하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런가, 대개 인위적고란 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오는 고와 자기에게서 나는 고 이 두 가지인데 전자는 사회고요, 후자는 개인고이다. 그런즉 사회고는 생존경쟁의 악수단으로 오는 시기와 비평과 압제와 희욕과 쟁투에서 생기고 개인고는 각자의 타락과 향사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런고로 현대인류는 사회고에 크게 신음하고 있는 동시에 개인으로도 누구나 타락과 향상의 승강대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다. 고로 일가를 탕진함에도 고가 있겠지만 일가를 창업함에도 고가 있고 자기의 명예와 도덕을 떨어뜨림에도 고가 있겠지만 자기의 명예와 도덕을 발전시킴에도 고가 있다. 이로써 보건대 소위 인간고란 것은 불가면성(不可免性)을 갖고 있지 않은가?
그런즉 이 불가면성의 인간고를 그리스도교로서는 어떻게 해결하는가?
그리스도교는 인간을 인간고에서 구하는 길이 곧 십자가의 도에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최고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으로 구원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고를 고로써 해결한다는 의미인즉 이는 일대 모순이 아닌가? 이는 이를테면 이열치열과 같고 이냉치냉(以冷治冷)과 같다.
그러나 세상에는 불가사의한 사실이 많고 많다. 이제 나의 생활 경험 중에서 이고치고(以苦治苦)의 실례를 간증하겠다.
내가 어렸을 때에 명절이 오는 것을 제일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명절이 오게 되면은 어머니에게 청하는 것이 몇 가지 있었다. 내가 14세까지 머리를 깍지 않았던 까닭에 첫째로 좋은 댕기요, 다음은 좋은 의복이었다. 급기야 명절이 되어 어머니가 내게 주시는 선물은 검은 공단댕기와 보잘것없는 무명옷이었다. 처음 줄 때에는 멋모르고 입고 나섰지만 이웃집 아이들의 옷과 비교하여보니 저들은 좋은 빨간 영초댕기, 명주 바지 저고리, 물색도 산듯하지만 맵시있게 지어 입혔다. 저들의 옷을 볼수록 내 엇은 초라하였다. 나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곧 집에 뛰어 들어가서 어머니를 붙들고 야단을 쳤다. 내 어머니는 좋은 말씀으로 대체 사람의 자식이 어렸을 때에는 아무런 의복을 입어도 좋고 후일에 장성하여 출세할 때에 좋은 옷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일러 주시나 그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에는 나는 댕기를 풀어 던지고, 옷을 벗어버리고 야단을 쳤다. 그때의 나의 고통은 상당히 힘하였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오늘 날 의복으로 오는 고통은 내 속에 그림자도 없다.
그러면 의복으로 생긴 고통은 어느 때에 없어졌는가? 요컨대 사람에게 열등한 욕망으로 인하여 생기는 고통은 고상한 욕망으로 인하여 고통이 생기는 순간에 없어져 버린다. 그런고로 나에게 유치한 고통은 지금보다 더 큰 고통이 내 속에 있으니 없어졌음을 확실히 믿는다.
그런고로 나는 십자가의 도로써 능히 인간고를 없이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개 인간고란 것은 자연고나 인위고가 전부 죄악으로 인하여 된 자이기 때문에 이는 타락의 고통, 열등한 욕망으로 오는 고통, 모든 헛된 고통, 값 없는 고통, 열매 없는 고통, 죽음의 고통인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통은 가장 큰 고통이요, 가장 고상한 고통이요, 가장 거룩한 고통이다. 가장 높은 의(義)의 고통이요, 깊은 사랑이 가득한 고통이다.
이렇듯이 최대 최선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임할 때에 소위 인간고란 것은 이야말로 홍로(紅爐)에 점설(點雪)일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사람들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하신 것은 십자가 고난으로써 인간고를 해결할 것을 약속 하심이다.
아! 고통에 우는 인생들아, 고통을 면하려거든 더 큰 고통을 져야 할 것이요, 또한 고를 면치 못할진대 가치 없는 고용을 버리고 최선의 십자가 고난을 질 것이다. 이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 아닐까?
예수께서는 세고에 우는 인간을 구원키 위하여 또한 죄고를 정복하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직접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최대최선의 고통을 인간에 주셔서 인간고를 해체한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다. 그런고로 죄고를 해제하려는 자, 사망에서 생명을 얻으려 하는 자는 반드시 십자가 도를 믿을지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되나니라”(고전 1:18)
장로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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