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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속의 명설교

    십자가의 의의

    페이지 정보

    성경본문: 2:10-15 | 설교자: 윤창덕

    본문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거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받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골로새서 2:10-15)

    이전 어떤 사람이 연필을 자기의 귀에 끼고 “내 연필이 어디 갔느냐”고 찾으니까 옆에 있던 애가 “아버지의 귀에 끼운 것은 연필이 아니고 무엇입니까”하고 말을 하였습니다.
    연필을 자기의 귀에 끼우고도 이를 인식하지 못 해 “내 연필 어디 갔느냐?”고 찾는 것과 같이, 현대 교인들은 십자가를 모표로 달고 양복 깃에 붙이고 시계줄에 차고 다니면서도 십자가에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가지지 못한 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십자가라는 말은 희랍어로 스타우로스라는 글자로 그 뜻은 화형용(火刑用)의 기둥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대에 십자가는 죄인들에게 고통과 부끄러움을 주어 죽이는 가장 수치스러운 사형틀이었습니다.
    역사적 권위가의 말에 의하면 십자가는 모든 사람들이 사형을 받는 형틀 중에 제일 싫어하는 형틀이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죽는 것도 어렵게 죽지만 그보다는 수치스러운 십자가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천년 전에는 수치스러운 죄인의 사형틀인 십자가가 어찌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자랑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로 되었을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는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새로운 의의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새로운 의의는 무엇입니까?

    1.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죄와 생명을 주는 십자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2장 13절을 보면 『또 너희가 이왕에는 범죄함과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자이었더니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 모든 죄를 사하사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고는』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복음으로 인하여 골로새 교우들에게 대 변화를 가져올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 일찍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나 아주 죽었던 자가 지금은 십자가의 공로로 인하여 구원함을 받아 옛 생활에서 나와 신생(新生)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 보여 주는 구절입니다.
    원문을 보면 본문 2장 13절 첫머리에 너희가 하는 “후마쓰” 라는 글자에 강조의 뜻을 보이고 있는데, 즉 너희는 어떠한 너희였는고 하니 범죄와 무할례로 인하여 죽었던 너희들이었는데 하는 말입니다.
    죄라는 말은 희랍어로 “하마르티아”인데 “목표를 잃었다” 또는 “잘못 디디었다”라는 뜻입니다. 고로 범죄라는 말은 하나님의 법도에서 벗어난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요, 무할례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골로새 교우들은 본래 할례를 받지 아니한 이방인으로서 도덕적인 죄악과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 올바른 진리의 길을 걷지 못하고 죽었던 골로새인이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죽음이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교적 의미에 있어서 하나님과 원만한 관계를 맺으므로 가질 수 있는 영적 생명의 전적(全的)결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령적으로 죽은 자는 다시 중생치 않으면 생명적인 존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4절, 요한일서 3장 14절에서 마치 죽은 사람이 아무 힘이 없는 것과 같이 심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영적으로 죽어 죄를 범하는 사람은 도덕적으로 무능력하여 선을 알고도 행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그 사랑과 은혜 중에서 살고자 하는 자는 모든 죄와 죄의 뿌리가 되는 원죄에서 성별시킴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의 길을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13절 하반절에 “이제는 하나님이 우리 모든 죄를 사하사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죄와 생명을 주시는 십자가임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과연 신앙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일치 결합하게 될 때, 하나님의 신생명을 풍부하게 얻게 되는 것이요 여기서 우리가 생명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신생명은 우리들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사유함을 받을 때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죄를 사유하사” 원어의 뜻은 부채를 벗겨 준다는 뜻입니다. 죄는 우리가 진 부채 중에 제일 무서운 부채입니다. 이 무서운 부채를 벗겨 주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자기의 보혈을 십자가 상에 흘려 고귀한 생명의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피의 값으로 우리들의 죄의 부채를 면케 되었으니 이 은혜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은혜의 특권을 받는 것은 의식이나 수양이나 덕행으로 인하여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십자가상에 이루어 놓으신 사죄와 생명의 은사를 믿고 그의 피 공로를 의지하고 하나나님께 돌아올 때 십자가를 통하여 주어지는 새 생명의 은사가 우리들의 죄의 장벽을 뚫고 들어와 우리의 전 심령을 성별시키는 것이요, 새로운 생활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죄와 생명의 선물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어진 최대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하여 놀라운 역할을 하셨기 때문에 수치의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로 변화된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율법을 제하여 버린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2장 14절에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하는 의문에 쓴 율법을 도말하시고 제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히셨느니라”하였습니다.
    이 14절은 우리 인류를 책하고 거시리는 율법이 십자가상에서 제거되었다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대사람들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의문에 쓴 율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으니, 이방 사람들이 받지 못할 특수한 율법을 받은 유대 사람들은 이러한 특권에 대하여 엄수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율법을 완전히 지킨 자가 없어서 유대 사람들에게 구원이 될 줄 알았던 율법은 저들에게 대하여 오히려 저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은 하나님께 율법을 받지 못하였으나 양심의 법을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유대인들과 같이 율법에 대한 책임은 없었으나 양심의 법을 준수하여야 할 책임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전 인류가 다 죄 아래 있게 되어 율법과 양심의 저주 아래 있을 때 우리 주님께서 오시사 십자가상에서 율법과 저주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막아 버리신 것입니다. 이는 율법의 저주를 완전히 없이 하여 버렸다는 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율법만 가지고 인류의 시비를 판단하신다면, 즉 다시 말하면 죄인된 인류에게 죄에 대한 부채의 환보만 율법에 의하여 요구하신다면 누구 한 사람 구원받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의 공로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동시에 우리들의 잘못은 추궁할 의문에 쓴 율법과 저주를 도말하여 버렸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생활을 소망하고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도말하여 버렸을까요.
    이사야 53장 4~5절에서 “저가 과연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 슬픔을 당하였으매 저가 찔림은 우리들의 허물을 인함이요. 저가 상함은 우리들의 죄악을 인함이라. 저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았도다” 하였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율법(律法)과 양심(良心)의 저주 아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율법과 양심의 저주를 도말(塗抹)하시고 제하여 버리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은 단순한 육체적인 괴로움뿐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죄의 전적(全的)인 형벌을 대신하여 받으시는 심각한 고통(苦痛)이 겸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행하므로 살리라”하신 옛 법을 폐하시고 “누구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 롬 10:12-13)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율법을 행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 길을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고통과 수치의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로 변한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승리의 십자가가 되었기 때문에

    골로새서 2장 15절에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저희를 세상에 보이시고 십자가로 승전가를 부르셨느니라”하였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의 십자가상의 승리를 가리키신 말씀입니다.
    정사와 권세는 에베소서 6장 12절에 보면 악마의 권세를 의미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사유하시고 생명을 주시며 율법의 저주를 도말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신인간의 대적(對敵)이 되는 악마를 분쇄하여 승리를 보이신 것입니다. 마치 승전한 장군이 개선가를 부르며 돌아오게 될 때 전쟁에서 빼앗은 물건을 말에 싣고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많은 군중 앞에 승리를 보이는 것과 같이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악마에게 승리를 얻어 저를 포로로 하여 개선의 행렬을 보이면서 천사와 사람들 앞에 크게 부끄러움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에덴 동산을 가시덤불로 화하게 한 후에도 끊임없이 인류를 유혹하여 사멸의 심연(深淵)으로 빠지게 하며 그리스도의 성업까지 파괴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첫 아담과 정반대로 자기의 성업 시초에 거친 광야에서 사탄에게 재삼 시험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축하였으며, 마지막으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무서운 사탄의 시련과 유혹이 있었으나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도 이루어지이다”하는 맡김의 기도로 시험과 유혹을 이기시고 십자가를 향하여 나가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탄은 실패로 돌아가고, 예수는 인류 구원의 대업을 완수하시고 십자가 상에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하셨고, 또 “다 이루었다”하시고 자기의 사명을 다 하신 후 운명하신 것입니다. 과연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인류의 대적인 사탄을 이기신 승리의 개가를 부르시고 인류를 그 세력에서 완전히 해방시킨 것입니다.
    그리하여 첫째 아담 이래 모든 인류를 괴롭게 하는 사탄의 머리는 십자가상에서 완전히 분쇄되고 창세기 3장 15절에 있는 예언 “여인의 후손이 네 머리를 상하리라”하신 말씀이 그대로 유감없이 실현 성취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속의 선악의 투쟁에서 원하는 선은 행하여지지 않고, 원치 않는 악만 행하게 될 때 탄식하기를 “오호라 나는 괴로운 자로다. 누가 나를 이 괴로운 지경에서 구원하랴” 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의 성신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게 하였을 때 그는 승리의 개가를 부른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여자는 약하나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우리 인생은 약하지만 승리의 십자가의 사랑에 연결되게 될 때 강한 자가 되는 것이요.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입니다. 그런고로 2천년 전의 부끄러움의 십자가는 오늘의 자랑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몸에 지니고 다니며 또 여러 가지 모양의 기호로 사용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사죄와 생명을 주며 율법의 저주를 도말하시고 우리들의 생활에 참다운 승리를 가져온 십자가임을 명확히 인식하며 또 신앙 체험을 통하여 십자가가 우리들에게 새로운 생활을 가져와야 될 것입니다.
    또 일반 사회에서도 구호의 기호로 사용하고 있는 십자가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구원의 십자가가 되어 이 땅이 십자가를 중심으로 한 천국으로 화하여야 되겠습니다. 여기에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닌 의의와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감리교 목사